등산 전문기자들이 직접 다녀온 둘레길 33
원주 싸리재는 단종이 귀양 가던 길이다. 한양에서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한다. 슬픔의 고갯길 ‘싸리재’는 원주시 신림면 치악산 명성수양관에서 시작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싸리재옛길’이란 간판이 크게 붙어 있다. 옛길식당, 싸리치농원 등도 이정표로 같이 있다. 산굽이를 돌 때마다 싸리나무가 지천으로 널려 싸리치(재)마을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싸리재는 한때 차들이 다녀서 그런지 시원스레 걷기에도 좋다. 몇 년 전 폭우가 쏟아져 움푹 파인 길이 많았으나 마사토와 황토로 복토해 깔끔하게 정비했다고 양한모 원주시 문화해설사가 전했다. 길 양옆으로는 계곡과 산이어서 크게 자란 나무들이 적당한 그늘을 드리워 가로수 역할을 대신했다.
싸리나무 많았다고 해서 싸리재
싸리치마을 사람들은 이 길로 채밀, 싸리비, 땔감 등을 지고 한양과 영월로 넘나들며 소금, 생선 등을 사가지고 돌아왔던 애환서린 곳이다. 길에서의 애환은 당대는 모르지만 시대가 흐른 뒤에는 누구나 보고 느낄 수 있다. 마치 단종이 지나간 길을 지금의 사람들이 애달픈 눈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단종이 눈물을 삼키며 유배지로 가던 그 길을 지금 걷고 있다. 열여섯 살밖에 안 된 어린 단종은 관리 3명과 군졸 50여 명의 삼엄한 호송을 받으며, 한양의 광나루를 건너 여주→원주 부론→귀래→신림(싸리재)→주천을 거쳐 유배지 청령포에 이르렀다.
싸리재는 단종에게는 눈물의 고갯길이고, 서민에게는 삶의 애환이 깃든 생활의 길이다. 단종은 이 길을 걸으며 숙부인 수양대군을 얼마나 원망했을 것이며, 또 아버지 문종과 할아버지 세종의 부재를 얼마나 안타까워했을까. 길을 걷는 동안 마치 단종의 애통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길가엔 야생화가 만발해 있고, 올라갈수록 싸리나무도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노란색의 자잘한 꽃이 활짝 핀 금마타리, 꽃 모양이 나비를 닮은 땅비싸리, 꽃향기가 좋은 사위질빵, 뿌리나 꽃에서 노루오줌 같은 냄새가 난다고 해서 이름 붙은 노루오줌 등이 처음 온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계곡엔 가끔 사람소리도 들렸다. 길을 안내한 양한모 해설사는 “이 계곡엔 원체 물이 맑아 1급수에만 있는 버들치와 메기 등이 살고 있다”고 했다. 이어 양 해설사는 “홍수로 계곡물이 넘쳐도 고기들이 그대로 살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하고 물었다.
“이곳에 있는 물고기는 떠내려가고 위에 있는 물고기들이 내려와 사는 자연의 순환이치로 그런 것 아닙니까?”
“그게 아니고, 계곡에는 많은 수초들이 자라고 있죠. 그 수초와 바위 틈새에 있는 그들만의 공간으로 숨어 들어가 살기 때문에 폭우가 쏟아져도 휩쓸려 내려가는 것을 피할 수 있어요. 그것이 그들만의 생존본능입니다.”
길은 구불구불 이어졌다. 마침 쉴 때를 아는 듯 조성한 의자가 나왔다. 의자 뒤로는 마치 작은 폭포같이 바위 위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양 해설사는 “여기가 말 그대로 실금폭포”라고 가리켰다. 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양 해설사는 “마사토로 복토한 길이라 맨발로도 걷기 좋은 길”이라고 자랑했다. 훌쩍 자란 낙엽송이 그늘을 드리워 여름에도 걸을 만했다. 마침 새끼 뱀 한 마리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지난밤에 내린 비로 젖은 몸을 말리려 나온 듯했다.
30분 정도 더 걸려 싸리재 정상에 도착했다. GPS고도로는 596m였다. 웬만한 산 높이였다. 길옆으로는 나무가 많긴 했지만 낭떠러지였다. 이 길로 옛날에, 아니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차가 다녔다니 믿기질 않았다.
정상에 비석이 하나 있다. ‘싸리치’라는 제목의 시가 새겨져 있다. ‘산굽이 돌아돌아 골짜기마다 / 싸리나무가 지천이어 / 싸리치라네 // (중략) // 단종의 애환 구름으로 떠돌고 / 김삿갓의 발길이 / 전설처럼 녹아 있는 / 영마루--- // (후략)’
정상에는 공간이 넓고 정자가 있어 주변을 둘러보며 쉬어가기 안성맞춤이다. 분명 영월 유배지로 가던 단종도 여기서 쉬었으리라. 싸리치에서 단종과 세조, 숙부와 조카, 조선왕조실록의 평가 등 만감이 교차했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다양한 평가가 있다. 역사적 사실은 분명 세조는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고, 단종은 그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전설은 단종은 사약을 마시지 않고 스스로 목에 매 자살한 것으로 묘사한다. 어찌된 일일까? 또 있다. 영월과 평창은 서로 인접한 마을인데도, 영월에서는 단종을 감싸 도는 반면, 평창에서는 세조를 감싸고 돈다. 무속에서는 단종을 산신으로 모시면서 신격화하는 반면, 불교에서는 세조를 감싼다.
역사적 사실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문학적 진실은 또 어떻게,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나. 전설과 무속, 종교는 어디까지 사실에 근거하고 있을까? 단종의 유배길인 싸리재를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길은 역시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교통 승용차로는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로 가다 중앙고속도로로 바꿔 타자마자 나오는 남원주IC 다음 신림IC로 나오면 된다. 신림IC에서 주천 방향으로 2㎞도 채 못 가 신림삼거리에 명성수양관이 나온다.
고속버스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모두 원주행 버스가 있다. 운행간격은 20분 내외 간격으로 수시로 있으며, 일반고속은 6,800원, 우등고속은 1만 원이다. 운행시간은 1시간30분 정도 소요. 원주고속버스터미널이나 바로 옆에 있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24번이나 25번 시내버스를 타면 신림면으로 간다. 택시를 타면 보통 2만 원 남짓 나온다고 한다. 개인택시 문의는 018-281-1817 또는 011-378-3979.
●맛집(지역번호 033) 신림삼거리 명성수양관 주변엔 음식점들이 많다. 시골밥상농가토속식당(762-8894 또는 011-9796-5759)은 산나물과 올갱이를 맛있게 한다. 싸리재 끝지점에서 고판화박물관이 있는 창촌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도 맛집들이 많다. 가든 풀잎향기 두메식당(766-2944 또는 010-8896-6466)은 청국장과 버섯전골 등 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반찬들을 즐길 수 있다. 조금 더 내려가 감악산 등산로로 들어가는 분기점에는 한우담소식당(765-8701~2)이 있어 소고기를 직접 사서 식당에서 먹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