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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깃발 되신 주
출애굽기 17:8~16
요절:“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출애굽기 17:15)
찬송가 358장(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 광야에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약탈하며 살던 아말렉 족속들이 나타나 공격해와서 전쟁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말렉 족속들은 오랫동안 약탈을 생계로 산 사막의 여우들이었기에 그들과 맞서 싸우기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정말 힘들고 두려움이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격해오는 그들로부터 노인들과 부녀자들과 가축들을 지켜가기 위하여 이스라엘도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장정들을 이끌고 나가 싸우라고 말하고 모세는 아론과 훌과 함께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산 위에 올라가서 내려다 보면서 하나님께 손을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광야의 평지에서 아말렉 군대와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전투를 벌였는데, 기이한 것은 모세가 산 위에서 기도하며 손을 올리면 이스라엘이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팔에 힘이 들고 피곤하여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놀랍습니다. 싸움은 장정들이 하지만 정작 전쟁의 승패는 산 위의 모세가 기도하면 이기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지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도 인간인지라 너무 피곤하니까 손이 저절로 천천히 내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함께 갔던 아론과 훌이 달려가서 모세가 앉을 만한 큰 돌을 굴려 가져와서 모세로 그 위에 앉아서 전쟁터를 바라보게 하고, 아론과 훌은 서서 한 사람은 이쪽에서, 또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해가 지기까지 손이 내려오지 않았고 결국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장정들이 아말렉 군대를 쳐서 무찌르고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는 우리 인생 여정에서 삶의 승패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으며, 승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에는 늘 생각하지도 못한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외부적인 시련이 닥쳐오기도 하고 내부적인 역경도 맞닥뜨리기도 합니다. 물질의 문제, 건강의 문제, 인간 관계의 문제,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사건 사고 등이 우리 삶에 다가옵니다. 또한 우리는 자기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가족의 문제 혹은 친척 혹은 우리의 친구, 동료의 문제들에 연류되어서 긴장과 갈등과 분투의 늪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말하자면 평온하게 지내다가 갑작스럽게 짧건 길건 간의 전투와 전쟁에 휘말리게 되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겪을 때에 우리는 자기의 힘과 능력과 지혜로 해결하고자 하지만 해결이 매끄럽게 안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모세가 행한 일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장정들은 애굽에서 진흙으로 벽돌이나 만들던 사람들인데 사막의 백전노장 아말렉 군인들과 전투할 때 이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어 아말렉을 이기고 앞으로 나아가며 모세가 기도의 손을 내리면 적군들이 기세를 올려 이스라엘 장정들을 밀어붙이게 되었으니, 우리 인생의 모든 싸움에서도 우리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으면 우리도 능히 모든 싸움을 이겨 나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모세처럼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인생의 싸움을 위하여 주님 앞에 나와 기도의 손을 올립시다. 그 기도의 손을 올리는 것이 때로 지치고 힘들어 내리기도 하지만 그 곁에서 돕는 기도의 중보자들이 기도로 힘을 모아서 기도해줄 때에 팔에 힘이 생겨서 다시 손을 올리게 되어 기도함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 기도의 손을 올리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지상에서 우리도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힘써 기도합시다. 또한 격렬하고 끈질긴 싸움을 하면서 연약하여 지쳐 있는 믿음의 형제 자매를 위하여 기도와 위로와 격려로써 그들의 힘없는 손을 다시 붙잡아 일으켜 주며 함께 기도해주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와 우리 자녀들과 믿음의 교우들이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강한 능력을 힘입어서 인생의 수많은 싸움에서 너끈히 이기고 전진해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이제 아말렉과의 싸움이 다 끝이 났을 때에 모세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승리한 여호수아와 돌아온 이스라엘 장정들과 온 백성과 함께 그곳 리비딤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라고 하였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되어 기쁨으로 하나님과 함께 광야로 행진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한낱 약탈의 대상으로 삼아 공격해온 아말렉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거룩한 분노감으로 충만하시어 아말렉을 끝내는 그들을 다 쳐서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도 싸워야 할 영적 싸움이 있음을 이 말씀을 통하여 암시해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아말렉과의 싸움은 사사 시대를 지나 사울 왕과 다윗 왕 때에도 있었고 그 이후 왕조 시대와 심지어 페르시아 시대에 아하수에로 왕 때 유대인 모르드개를 죽이고 유대인들을 다 죽이려고 했던 국무총리 하만은 바로 아말렉 왕 아각의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보건대 아말렉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본성적으로 미워하며 진멸하려고 했고 이스라엘 역시 그들을 진멸의 대상으로 삼아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 지상의 순례 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마귀의 간교한 술책과 격동으로 인하여 늘 마귀에게 속한 자들의 공격과 시험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세상에 깃들게 된 저주와 이 세상의 불완전성을 인하여 이런 저런 시련과 역경이 하나님 백성들에게도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의 순례 길에서 평화의 때도 만나기도 하지만 우리를 대적하는 전쟁이 항상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영적인 갑옷을 벗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 나라 가서야 우리가 어린 양의 신부 예복으로 갈아입고 천사들이 준비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전투복인 갑주를 벗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우리의 싸움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는 우리 모두 영적인 갑주를 벗지 말고 항상 깨어 영적으로 지켜보면서 늘 기도의 손을 올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함께 살펴볼 볼 것은 그 때 세웠던 제단의 이름입니다. 15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제단 이름이 ‘여호와 닛시’인데 그 뜻은 ‘여호와는 나의 기’입니다. 즉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깃발이요 하나님 백성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깃발은 무엇입니까? 깃발은 과거에나 지금까지도 사용되곤 하는 전쟁터의 중요한 의사 전달 수단입니다. 깃발은 소속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 군대는 우리 나라 태극기를 가지고 매달면 그곳은 우리 군대가 점령했다는 뜻입니다. 6.25 때에 인천 상륙 작전 후에 공세에 나선 우리나라와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했을 때에도 태극기를 크게 걸고 이승만 대통령이 그곳에 가서 평양 시민들의 화환을 받기도 했습니다. 깃발은 이처럼 힘과 주권의 상징이며 승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힘입어서 이번 싸움을 싸워 승리하였기 때문에 모세는 그 제단 이름을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승리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들의 승리의 원천이요 주의 백성들이 싸워야 할 싸움의 이유와 동기가 되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종살이할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애굽 왕 바로의 손아귀에서 이끌어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표현할 때에 “내 군대”라고 하시곤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7:4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기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2:41 이하에서도 유월절 명절에 대한 규례를 지키라고 명하시면서 이르기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사백 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와 양을 기르는 목자들이요 애굽 땅에서는 노예처럼 일만 하던 하류층 시민들이었으니 군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자기의 군대라는 놀라운 명칭을 붙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만방에 알리는 일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한 영적 싸움에서 하나님의 병사들로 소집된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최고 사령관이자 왕이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고 그 일에 실무 책임자로 일하는 사람은 그 당시에는 바로 모세와 아론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을 받아 현장에서 싸우는 현장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온 뒤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각 지파별로 군대처럼 조직되어서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들이 세워졌으며, 각 지파별로 지파장들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지파별로 광야 행진할 때와 광야의 행진 도중에 싸우게 되는 전쟁터에서 각 지파별 깃발 아래 주둔하고 행군하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민수기 1:52 말씀과 민수기 2:2 말씀에 보면 이르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막사를 치되 그 진영별로 각각 그 진영과 군기 곁에 칠 것이나”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자기의 진영의 군기와 자기의 조상의 가문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
이 내용들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지파별로 군기가 있고 각 부대별로 나름의 깃발이 있어서 그 곁에 진을 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조상 야곱의 예언을 따라 유다 지파의 깃발에는 동물의 왕 사자 모양이 깃발에 그려져 있을지라도 모릅니다. 요셉 지파의 깃발에는 담장을 넘은 포도나무 가지와 포도송이가 새겨져 있을지 모릅니다. 잇사갈 지파는 나귀, 납달리는 사슴, 베냐민은 사나운 이리의 모습이 그려져 있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깃발들을 중심으로 그들은 모이고 전투에 임하고 흩어졌다가 또 다시 그 군기 아래 모여 행군하고 진영을 베풀어 함께 머물곤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깃발은 이처럼 항상 높이 세워져 있으며 그 소속원들은 그 깃발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깃발은 자긍심이요 소속감을 불러 일으키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할 때에 절대로 이 깃발을 적군에게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깃발이 꺾이거나 적에게 탈취당했다면 그것은 곧 패배했다는 증거입니다. 깃발을 잃어버린 부대원은 사기가 꺾이게 되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패잔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바로 이러한 자긍심의 상징이요 소속감의 중심이 되는 깃발이 되는 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며 우리 구주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여호와의 종이 바로 만민의 기호와 깃발이 되신다는 구약 성경의 예언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 오시기 7백년 전에 유다 왕국에서 사역하였던 선지자 이사야는 예언하여 이르기를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이사야 11:10~12)
라고 하였습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싹은 이새의 아들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실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만민의 기치 곧 만민을 향해 부르는 높은 깃대 위에 펄럭이는 깃발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때가 되면 세상의 사방에서 택한 백성들을 이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이도록 부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모든 세상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높이 들리워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계시다가 끝나면 안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보고 움직이는 깃발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친히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의 눈에 보일 수 있도록 세상에 나타나셔야 했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사람들 위에 높이 들리워져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요한복음 3:14,15 말씀에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에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공회의원 니고데모와 밤중에 대화하실 때에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예고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출애굽 후 광야 교회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하도 원망하였습니다. 길이 험하다고, 먹을 것이 없다고, 맨날 먹는 것이 하찮은 만나뿐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 불평을 쏟아내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오래 참으시던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들에게 광야의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뱀은 사막에 사는 심각한 독 뱀으로서 사람이 물리면 불에 데인 듯 통증이 심하고 고통 중에 죽게 되는 뱀이었는데, 그 동안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인하여 뱀들이 이스라엘 진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원망 불평하니까 불뱀들이 스르르 기어들어와서 천막 안으로 와서 사람들을 꽉 물어버리는 것입니다. 천막 밖으로 나와 있으면 어디선가 숨어 있다 나타나 꽉 물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린 사람은 온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고 심장이 팡팡 뛰고 신경이 마비되어 그만 숨이 막혀져 죽고 마는 것입니다. 원망 불평을 쏟아내더니 그렇게 안전하고 평안하던 여행 중에 불뱀이 나타나 진영에 죽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 생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불편한 점도 있고 힘든 일도 있고 속상한 일도 생기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원망 불평하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에 원망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거들랑 과연 그것이 원망 불평할 일인지 되짚어 생각해보면 거의 다가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요 도리어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일들이 많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더 심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는데, 이 정도로 그친 것도 감사하고, 한꺼번에 닥치면 감당 못했을 터인데, 감당할 정로로만 시험이 닥친 것도 감사할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서 겪으면 감당하기 어려울 터인데, 그래도 한 살이라도 어릴 때에 시련을 회복할 기력과 마음의 힘이 있을 때 고난이 닥친 것도 감사하다고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좀 더 생각하고 좀 더 생각해보면 감사할 수 있고 견딜 수 있게 되어서 원망 불평을 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평생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여 원망 불평을 멀리합시다. 그리하여 원망 불평 대신에 감사함을 늘 더하는 자가 됩시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시편 50:23 말씀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12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고 하신 말씀도 같은 원리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는 자는 더 주실 것이지만 받았는데도 없는 것만 찾고 원망 불평하면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삶 속에서 늘 감사하는 마음이 풍성하고 우리 입술에서도 감사하는 고백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도 자주 합시다. 그리할 때에 분명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더해주시는 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뱀에 물려 죽어가게 될 때에야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급한 마음으로 모세에게 달려와서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들의 간청을 듣고서 하나님께 모세가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주신 답변은 이것이었습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이 말씀이 이상하지요? 불뱀을 놋으로 만들어서 장대 위에 매달아놓고 그것을 보면 낫는다니 말도 안되는 말씀이었지만, 모세는 순종함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놋으로 불뱀 모양을 만들어서 식혀서 장대에 매달아서 이스라엘 진영 위에 높이 세워놓고 사람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뱀에 물린 자들은 이 장대 위에 매달린 놋뱀을 보라 그리하면 하나님 말씀에 죽지 않고 살리라고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선포하자 어떤 사람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장막 속에서 끙끙 앓으면서도 나와 보지 않았지만 자기들의 원망 불평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아픈 몸을 이끌고 장막 밖으로 나와 장대에 높이 매달린 놋뱀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고 이상하게도 자기 몸에 펄펄 끓던 열이 내리고 쿵쾅대던 심장이 가라앉고 마비된 신경들이 안정을 찾고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순종하여 믿음으로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그것으로 죽아가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일부는 그 놋뱀을 신기한 부적처럼 생각하고 우상처럼 생각하여 늘 대단하게 생각하여 그것을 숭배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약속의 땅에 놋뱀을 가지고 들어갔는데, 그것을 음란하게 우상처럼 숭배하며 그 앞에서 분향하는 악습이 이어졌기 때문에 나중에 약 칠백년이 지나 히스기야 왕 때에 종교 개혁이 일어났을 때에 히스기야 왕이 과감하게 모세가 만들었던 그 놋뱀을 깨뜨려 부수고 그것을 ‘느후스단’이라고 불렀습니다. ‘느후스단’이란 놋조각이라는 뜻입니다. 모세 때에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수단으로 잠시 사용하셨지만 그 놋뱀 자체가 병을 고쳤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다만 그 믿음의 외적 수단으로 잠시 사용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이 병을 고쳐주는 것처럼 착각하여 우상으로 삼아 그 앞에 분향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나 물건이 잠시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쓰신 물건이나 사람을 우상처럼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시어 쓰임받은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 자체를 우상화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한 때 쓰임받았던 사람들 중에 자기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는 심리를 이용하여 스스로 높아지고 타락함으로 결국은 비참한 자리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감옥 갔다가 나와 암으로 죽은 서울의 어떤 교회의 지도자나 사이비와 이단으로 지목되었던 귀신론을 펼쳤던 침례교의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을 고치는 자가 하나님이신 것을 기억하고 그 수단이 되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어떤 기관을 높이고 그것을 우상화하는 유혹에서 항상 조심하여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광야의 놋뱀의 치유 사건이 보여주려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때로부터 1400년 후에 세상에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사역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의 죄와 형벌로 인하여 그렇게 뜨거운 불 속에 달궈졌다가 나와 나무에 매달려 죽게 된 그 놋뱀은 인간의 모든 죄와 그 죄의 형벌의 값을 짊어지시고 나무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려 죽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과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구원을 보여주는 예표적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것인가 문제로 고민하면서 예수님께 밤중에 찾아와서 물었던 니고데모에게 이르시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광야에서 죽어가는 자들이 높이 세워진 놋뱀을 바라볼 때 바라본 자들이 다 살아났듯이, 하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 높이 들려 나무 십자가 위에 매달려 처참하게 피 흘려 죽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하시고 그를 믿는 마음으로 보는 자마다 다 죽음에서 건져지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동양과 서양과 동서남북 사방이 열려 있고 해양과 육로가 다 통하는 로마 제국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티베리우스 황제 때에 예루살렘 성읍의 서문 밖 언덕인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에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그렇게 처참하게 죽으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 위에 높이 세워진 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에 그의 십자가 위에 매달린 죄 패는 세 나라 말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9:19 말씀에 이르기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어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만국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로 다 표현되어 예수님의 죽음을 만천하 사람들이 보고 들으라고 그렇게 세 가지 언어로 써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어느 민족이든지,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이렇게 높이 세워진 십자가 위에 우리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그렇게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이사야서 11장 10절 말씀에서 이르기를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싹이신 다윗의 후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기치 곧 만민의 깃발로 온 세상 가운데 드높이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펄럭이는 깃발이 되신 것입니다. 놋뱀을 보는 자마다 죽어가는 자가 살아난 것처럼 어느 민족 그 누구라도 믿음으로 십자가에 높이 매달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기만 하면 죽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고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놋뱀처럼 죽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그 고통이 얼마나 큰 지를 잘 아시기에 그토록 굳은 결심을 하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잡히시기 전날 밤에도 그렇게 피 땀 흘려 기도하셨고 마침내 높이 들린 놋뱀처럼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물과 피를 다 쏟고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은 만민들이 이제 어디서나 바라보게 된 높이 들리운 깃발로서 누구라도 그 깃발 아래 달려오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모든 저주가 속량되고 병이 고침받고 죽음을 이기게 되고 영생 천국을 상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은 궁극적으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내포하는 복된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로 인하여 완전한 승리를 가져오신 하나님의 복된 이름이 바로 여호와 닛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 이름에 담긴 대로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하나님의 호칭처럼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깃발로 삼아 그를 의지하고 그의 펄럭이는 깃발 아래 모이고 진을 치고 그의 깃발을 갖고 적군들과 싸워 적진에 이 십자가의 깃발을 꽂아 십자가의 깃발이 펄럭이게 해야 하겠습니다. 이 지극히 복된 생명의 군대에 부름받은 것을 기억하면서 이 깃발 아래 하나가 되어 주의 이름을 위하여 힘써 싸워가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십자가의 깃발이 꽂히지 않은 불신앙과 미신과 구원받지 못하는 우상 중교 아래 있는 동포들과 다른 민족 이방 족속들에게 나아가 여호와 닛시 승리자 되신 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담대히 전파합시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여서 앞으로 전진하라는 우리의 사령관 되신 주님을 위하여 우리도 힘을 다하여 싸워 나갑시다. 적군이 아무리 아말렉 같이 능수능란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고 계시니, 우리가 그를 힘입어 함께 기도하면서 싸울진대 오늘날의 아말렉 군대도 얼마든지 능히 물리칠 줄 믿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 모두가 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깃발 아래 우리 소속감을 분명히 가지고 우리의 군대 사령관이신 주님의 모든 명령에 죽기까지 순종하여 싸워가기로 작정합시다. 그리할 때에 과거 출애굽 이스라엘 군대가 광야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고 수많은 적군들과 맞서 싸우며 여리고 성곽과 같은 장애를 만날지라도 끝내 이기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땅들을 정복하게 해주실 것이며 풍부한 전리품들을 이 땅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누리게 해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