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학산(鶴山) 금광평(金光坪)<4>
<6> 이승복(李承福) 기념관
이승복 기념관(생가/귀틀집) / 이승복이 다니던 학교 / 이승복 진영(眞影) / 이승복 기념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평창군 용평면 운두령(雲頭嶺) 속사(束沙)국민학교 계방(桂芳)분교 2학년이던 이승복(李承福) 어린이는 가족이 부모와 3남 1녀 여섯이었다. 어느날, 한밤중에 갑자기 무장공비(武裝共匪)들이 들어와 밥을 내놓으라고 하자 어머니가 쌀이 없고 강냉이뿐이라고 하니 강냉이를 쪄 오라고 한다.
공비 중 한 명이 찐 강냉이 먹으면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북한 선전을 한다.
한참 얼르고 달랜 후 ‘남조선이 좋으냐, 북조선이 좋으냐’ 물었다고 한다. 형과 여동생은 무서워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승복이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놈이 덤벼들어 두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어 입을 찢고는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서 죽인다.
가까스로 아버지와 장남은 도망쳐 목숨을 건졌지만 아들 둘, 딸, 엄마는 모두 무참히 살해당하고 만다.
사건 후, 집 뒤꼍에 버려진 승복이의 시체를 살펴보았더니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승복이 1959년생이었다니 지금(2023년) 살아있다면 65세 정도겠다.
<7> 내가 금광평에서 겪은 6.25 동란(動亂)
내 어린 시절 금광평에서 고스란히 보내야 했던 가슴 아픈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 6.25를 잠시 되짚어보면,
북괴의 남침 소식을 듣고 마을이 술렁거리다 피난을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며칠 후 우리 집도 짐 보따리를 싸서 이고 지고, 4살이던 나는 누나 등에 업혀 마을을 떠났는데 강릉 시내에 거의 왔을 때 되돌아오는 사람들을 만났다.
깜짝 놀란 아버지께서 왜 되돌아오느냐고 물었더니 인민군이 벌써 강릉을 지나 옥계(玉溪) 근처까지 내려갔다고 하니 인민군 뒤를 따라가 봤자 무슨 소용이겠냐고 하더란다. 할 수 없이 우리 가족도 되돌아설 수밖에 없었고 나는 6.25전쟁(한국동란) 3년 내내 금광평에서 신기한 경험들을 고스란히 겪어야만 했다.
20대 초반이던 우리 누님 둘은 저녁마다 북괴가 강제로 소집하는 교양반(敎養班)에 가서 북한찬양 노래인 ‘아침 은빛나라 이 강산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등을 배워 흥얼거리던 기억이 난다.
당시 동네 젊은이들은 북괴군이 무기운반을 위하여 강제동원하였다. 40대이던 우리 아버지는 동원될지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자 멀쩡한 허리에다 뜸을 떠서 벌겋게 만든 후 허리에 띠를 두르고 누워계셨다.
곧바로 북괴의 동원요원이 와서 아버지 허리의 띠를 풀고 드려다 본 후 그냥 가버려 화를 면했다.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괴는 북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한다.
금광리 살던 30대 한 분은 북괴군 무기와 탄약을 지고 산길을 따라가다가 어느 산속에서 감시가 소홀한 틈을 노려 지고가던 무기와 탄약을 살그머니 나무 밑에 벗어놓고 골짜기 아래로 굴러내려 도주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로 가야 남쪽으로, 고향으로 가는지 오리무중이라.... 바위 밑에 가랑잎을 덮고 숨어있다가 밤이 되면 하늘의 별을 보고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왔다고 한다.
그렇게 20여 일, 밥 한 끼도 먹지 못하고 고향마을로 돌아오는데 성공은 하였지만 피골(皮骨)이 상접한 몰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결국, 폐결핵까지 겹쳐 2~3년 후 사망한 아픈 기억도 있다.
국군의 반격이 시작될 때였으니 1951년으로 내가 5살이었을까, 동해안에서 도주하는 북괴군을 공격하느라 밤이면 함포(艦砲)소리와 야광탄(夜光彈)으로 하늘이 휘영청 밝아지지를 않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언젠가 너무 포격소리가 심하니 금광평에서 약간 언덕 위에 있던 우리 집은 위험을 느끼고 가족이 언덕아래 남씨네 과수원 창고로 피하자고 나는 아버지 등에 엎혀 뛰어내려가던 기억이 난다. 하늘은 야광탄으로 훤히 밝고 대관령 방향으로 셀 수도 없이 날아가는 빠알간 포탄이 보이던 기억도 있다.
음력 설날, 전쟁 중인데도 우리 집은 종갓집이다보니 떡을 하고 제사도 지냈는데 포소리, 총소리가 너무 심해 안방보다 낮은 부엌에 자리를 깔고 가족이 모여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깥에서 철커덕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아버지께서 문틈으로 내다보시더니 갑자기 문을 활짝 열고 이리들 오시라고 소리를 지르신다. 그랬더니 우리 국군 분대원 7~8명이 부엌 앞 좁은 마당으로 몰려오자 아버지께서 어머니보고 떡을 내오라고 한다. 어머니는 함지 채 떡을 들고 나가자 아버지께서 얼마나 배가 고프겠냐, 빨리 먹으라고 한다. 텁수룩한 수염에 씻지않아 땟국물이 주르르 흐르는 얼굴, 추워 불을 쬐다 그랬는지 옷자락이 불탄 사람도 있고.... 시커먼 장갑을 낀 손으로 하얀 절편(가래떡)을 집어 입에 넣더니 정신없이 먹는다.
아버지께서 떡을 가져가라고 하자 분대장인지, ‘한 개씩만 집으라’ 하자 시커먼 손으로 한 개씩 집더니 가슴에 있는 주머니에다 집어넣는다. 그러는 중에도 한 사람은 보초를 서느라 계속 바깥만 둘러본다.
이튿날, 언덕 아래 살던 고모네 큰형수가 ‘어제저녁 문틈으로 내다봤더니 빨갱이들이 어디서 뺏었는지 떡을 먹으며 가더라’고 하자 어머니가 ‘아니야, 국군이야. 우리가 불러서 떡을 줬어.’ 하자 당시 고모부 큰형님이 군에 입대 중이었던 터라 형수는 아이구, 우리 신랑도 얼마나 배고플텐데... 그런 줄 알았더라면 떡을 함지째 몽땅 갖다 줄 걸... 하며 애통해 했다고 한다. 그 형님은 포항전투에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