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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호숫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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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소식 스크랩 연민과 질투라는 양극단을 떠나, 빈자(貧者)와 부자(富者)를 대하는 태도
Wondam:원담 추천 0 조회 173 17.05.14 21:3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연민과 질투라는 양극단을 떠나, 빈자(貧者)와 부자(富者)를 대하는 태도

 

 

니까야강독모임에 새로운 인물이 선 보였습니다. 올해 대학4학년인 학생이 참가한 것입니다. 학교불교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사람입니다. 나이 든 사람만 있는 모임에서 20대 젊은이가 출현함에 따라 활력이 넘쳤습니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고령화 되는 추세에 있어서 젊은 피가 수혈되면 그 집단은 생동감이 넘쳐 납니다. 모처럼 20대와 함께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젊은 피가 수혈되면

 

모임에 참가한 20대 대학생은 이미 초기경전을 읽고 있습니다. 이날 가지고 온 디가니까야와 율장대품을 보니 형형색색의 스티커가 가득 붙어 있었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열어 보니 글씨나 칠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스티커에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스티커색깔로 중요도를 구분해 놓은 것 같습니다.

 

사부니까야를 포함하여 쿳다까니까야 일부경전을 갖추어 놓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모든 경전은 거의 다 사 놓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빠알리성전협회번역본과 초기불전연구원번역본을 모두 갖추어 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전을 읽으면서 하나의 원칙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경전에 낙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경전에 필기하지 않습니다. 성스런 경전에 글씨를 쓴다는 것이 왠지 불경스런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찾아 보아야 할 곳은 스티커처리합니다. 스티커에 글씨를 써 놓아 구분합니다. 경전에 글씨 쓰지 않지만 단 한가지 펜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노랑형광메모리입니다. 오로지 노랑색 하나입니다. 중요한 부위를 노랑면칠합니다. 중요도가 크면 더 진하고 더 면적도 넓어 집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노랑색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점차 고령화 되는 모임에 젊은사람이 들어 온다는 것은 확실히 활력소가 됩니다. 처음 모임에 나온 대학생은 영역본니까야도 읽고 있다고 합니다. 빅쿠보디역 맞지마니까야와 앙굿따라니까야를 읽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글로 읽는 것도 쉽지 않은데 영역본을 읽는다고 하니 확실히 앞서 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좀처럼 볼 수 없습니다. 더구나 20대 대학생이 니까야에 스티커 처리해 가면서까지 읽고 영역을 읽어서 섭렵하는 것을 보고 한국불교에 희망을 갖게 합니다.

 

스리랑카 동진출가이야기

 

도현스님은 스리랑카에 순례다녀왔다고 했습니다. 강독모임날 당일 새벽에 귀국했는데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저녁모임에 참석한 것입니다. 스리랑카 웨삭(Vesak)참여를 목적으로 한 순례이었다고 합니다. 스님은 스리랑카 동진출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도현스님에 따르면 스리랑카에서 나이 어린 아이들 수 백명이 집단으로 출가한 장면을 보았다고 합니다. 열살 이하로 보이는 아이들이 붉은 가사를 입고 예불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동진출가한 아이들이 타의가 아니라 자발적 출가라는 사실입니다. 일곱살 먹은 한아이는 부모를 졸라서 출가하게 해 달라고 떼를 썼다고 합니다. 어느 아이는 세살 때 출가하기를 원했다고도 하는데 믿겨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월초파일이 되면 동자승을 볼 수 있습니다. 신심 깊은 불자집안의 아이들이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으면 마치 출가한 스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부모나 조부모에 의한 타의이기 쉽습니다. 한국에서 동진출가는 자율적이 아니라 절에 맡겨지는 타율적인 것이었습니다. 집안형편이 어렵거나 어떤 말할 수 없는 이유로 절에 맡겨졌을 때 오래 가지 않습니다. 사춘기가 되고 성인이 되면 대부분 세속으로 돌아갑니다. 끝까지 절에 남아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리랑카의 경우 일곱살 되는 아이가 부모에게 떼 쓰다시피 하여 출가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재가단체모임에서 단체로 봉암사토론회에 참석한바 있습니다. 전세버스를 대절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전세버스에서 송위지교수는 자신은 죽어서 스리랑카에 태어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송위지교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스리랑카에서 7년동안 유학한 바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스리랑카에 태어나기를 발원한 것은 한국에 부처님 원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 합니다. 죽어서 스리랑카 중산층 가정에 태어나 아홉살이나 열살 때 동진출가 하여 스무살에 비구계를 받고 한국으로 건너 와서전법하는 것이 꿈이라 합니다.

 

생이지지자 (生而知之者)

 

어렸을 때 출가한다는 것은 이전생에 많은 공덕을 지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전생에 수행한 과보로 세 가지 원인을 조건으로 태어났을 때 이미 지혜를 갖추고 태어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일종의 생이지지자 (生而知之者)라 볼 수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지혜가 있기 때문에 조건만 맞으면 제자리로 찾아 가는 것으로 봅니다. 이는 청정도론 제1장 제1절에 소개 되어 있는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S1.23)라는 게송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전생에 무탐, 무진, 무치의 수행을 한 자가 태어났을 때 지혜를 타고난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 한 것입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일곱살에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미 지혜가 갖추어진 자에게 있어서 노년까지 긴 시간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일곱살 정도만 되어도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일까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생후 겨우 칠 년 만에

구족계를 나는 받았고,

세 가지 명지를 성취하였으니

여법한 훌륭한 가르침이여!(Thag.479, 전재성님역)

 

 

전재성박사는 현대판 현장 법사

 

이날 강독모임에서 전재성박사는 조선일보에 실린 인터뷰기사를 보여 주었습니다. 종이신문의 내용은 인터넷판으로 본 것과 내용이 동일합니다. 큰 지면에 전재성박사의 일생에 대하여 간략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조선일보 사회면에 최보식이 만난 사람이라 하여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 우주를 지탱하는 것이 우주를 지탱하는 기둥”(2017-05-01, 조선일보) 이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전재성박사(조선일보)

 

 

기사에서 최보식기자는 전재성(64)씨는 현대판 현장 법사.”라 했습니다. 중국에 삼장법사 현장이 있다면 한국에는 삼장법사에 버금 가는 전재성박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판 삼장법사라 했는데, 여기서 삼장은 율장, 경장, 논장을 말합니다. 그런데 전재성박사는 아직 논장을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율장은 율장대품을 포함하여 네 권을 모두 완역했고, 경장은 사부니까야와 쿳다까니까야 일부경전을 완역했습니다. 그렇게 번역한 경전이 25년 동안 50권가량 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판 삼장법사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 운동권이었는데

 

전재성박사의 조선일보 인터뷰기사를 보면 니까야강독시간에 했던 말입니다. 특히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은 우주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라든가 우주가 무너지고 있다는 무상관을 하면 자비가 생겨난다는 등의 이야기는 익숙합니다. 그런데 인터뷰기사가 나가고 난 다음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습니다. 가장 먼저 인터뷰기사로 인하여 혹시 이득과 명성과 칭송을 추구한다는 말을 듣지 않을까 염려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업적을 세상에 알리는 것 같은 오해를 받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또 한가지는 많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다 실리지 않고 일부 내용은 잘못 표현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 시절 운동권관련 내용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기사에 따르면 전재성박사의 학생시절 운동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신시절 학생운동에 가담한 것에 대하여 내적으로는 불행했다.”든가, “내가 몸담은 사회운동이 진리이냐에 대해 확신을 못 가졌다라는 내용입니다. 짤막한 이 구절만 읽은 독자들은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에 대하여 냉소적인 시각을 가졌을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전재성박사는 학생운동으로 인하여 감옥에 다녀 오고 그 후 경찰의 감시대상이 되어 힘겹게 20대를 살았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학생운동과 민중불교운동에 투신 했음에도 이런 사실이 기사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아 몇 일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안절부절 했다고 합니다.

 

무명을 베어서 명지를 피를

 

5 12일 강독모임은 마하자야망갈라가타를 독송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빠알리어로 낭송되는 음악을 들으면서 예경지송에 실려 있는 빠알리원문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날 강독은 앙굿따라니까야 마음을 올바로 놓이면 열반을 얻을 수 있다.’라는 짤막한 경을 낭송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벼이삭이나 보리이삭이 올바로 놓였다면, 손이나 발이 스치면 손이나 발을 베어서 피가 흐르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삭이 올바로 놓인 까닭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들에게 마음이 올바로 놓이면, 무명을 베어서 명지를 흐르게 하여 열반을 실현시킬 수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올바로 놓인 까닭이다.”(A1.42)

 

 

벼이삭이 세워져 있다면 베여서 피가 날 수 있습니다. 날카로운 풀에 베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올곧게 하면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명을 베어서 명지를 피를 흘리게 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두 가지 정견이 있는데

 

강독모임에서는 마음을 올바로 놓는다에 대하여 토론했습니다. 어떻게 해야마음을 올바로 놓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토론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정견(正見)으로 설명했습니다.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함을 말합니다. 그런 바른 견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출세간적 정견이고 또하는 세간적 정견입니다.

 

한국의 유명선사가 정견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 선사는 내가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이 정견이라 했습니다. 내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내가 부처인 것을 확인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본래불(本來佛)’인 것을 알아 가는 과정이 수행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은 이와 다른 것입니다. 상윳따니까야 분별의 경(S45.8)’에서 정견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Katam? ca bhikkhave, samm?di??hi? Ya? kho bhikkhave, dukkhe ???a? dukkhasamudaye ???a? dukkhanirodhe ???a? dukkhanirodhag?miniy? pa?ipad?ya ???a?, aya? vuccati bhikkhave, samm?di??hi.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1)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2) 괴로움의 발생에 대하여 알고,

3)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

4)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알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견해라고 한다.”(S45.8, 전재성님역)

 

 

팔정도에서 정견(samm?di??hi)은 사성제를 아는 것입니다. 선사들이 말하는 본래불을 아는 것과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부처님이 정견으로서 사성제를 강조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견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갖가지 사상이 난무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육사외도을 들 수 있습니다. 대게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적 견해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수 많은 견해가 난무할 때 외도의 스승은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외도의 사견을 모두 논파했습니다.

 

부처님이 정견으로서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했을 때 이는 연기법을 말합니다. 사상제가 고와 고의 멸이라는 이지연기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연기법을 아는 것이 정견입니다. 이는 사성제와 팔정도로 설명됩니다. 그런데 사성제와 팔정도, 십이연기의 가르침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출세간적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출세간적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출세간적 정견은 번뇌를 소멸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길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세간을 살아 가는 사람들은 요원한 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간을 사는 재가자들에게도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이라 합니다.

 

업자성정견을 세간적 정견이라 합니다. 그래서 정견에는 사성제를 아는 출세간적 정견과 업과 업의 과보를 아는 세간적 정견, 이렇게 두 가지 정견이 있다고 말합니다.

 

정견이 바로 서야

 

정견이 바로 서야한다고 합니다. 출발하는 길이 다르면 당연히 목적지도 다를 것것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단멸론적 견해를 가진 자라면 보시도 없고 내생도 없을 것입니다. 그 결과 즐기는 삶, 막행막식하는 삶을 살게 될지 모릅니다. 선사들의 말처럼 내가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 즉 본래불이 정견이라면 이뭐꼬수행을 하며 참나를 찾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성제를 정견으로 했을 때 수행방법은 팔정도가 되고 목적지는 열반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출세간적 정견입니다.

 

세간적 정견은 업과 업의 법칙을 아는 것입니다. 업의 법칙은 다름 아닌 연기법에 따른 것입니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칙을 알면 다른 견해, 즉 영원주의나 허무주의는 사견이 됩니다. 그런데 세간적 정견인 업의 법칙은 번뇌를 소멸하는 출세간적 정견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출세간적 정견은 번뇌를 소멸하는  팔정도수행에 대한 바른 견해이지만, 세간적 정견은 번뇌를 지니지만 팔정도수행을 통하여 공덕행을 하는 바른 견해로 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견해에 대하여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에서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는 어떤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나는 올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가 있고,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가 있다.”(M117, 전재성님역)

 

 

두 가지 정견이 있는데 하나는 번뇌가 있지만 공덕행을 하는 정견이 있고, 또 하나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정견이 있음을 말합니다. 전자는 업자성이 정견이라는 세간적 정견이고, 후자는 사성제를 아는 것이 정견이라는 출세간적 정견을 말합니다.

 

세간을 살아 가는 자들에게는 세간적 정견이라 일컬어지는 업자성정견이 요청됩니다. 그것은 보시를 하면 과보가 따른다는 등의 공덕행으로 요약됩니다. 일반적으로 보시하고 지계하면 생천(生天)한다고 말합니다. 비록 세세생생 윤회하는 삶을 살지만 가급적 선업공덕을 짓고자 하는 삶을 말합니다.

 

불행하고 가난한 자를 대하는 마음가짐

 

니까야강독에서 어떻게 해야 마음을 올바로 놓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토론했습니다. 전재성박사는 대학시절 학생운동한 것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그때 당시 정의로운 것은 가난한 자, 소외자, 약자를 돕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순이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프롤레탈리아 혁명이 일어나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결국 공산주의는 흔적도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반드시 가난한자나 약자에게 동정을 보내고 그들만을 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님일 말합니다. 동시에 부자와 권력있는 자를 증오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불교적 해법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그 해법을 초기경전에서 찾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Ya? bhikkhave, passeyy?tha duggata? durupeta?, ni??hamettha gantabba?: 'amhehipi evar?pa? paccanubh?ta? imin? d?ghena addhun?ti'.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S15.11)

 

 

사람들은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불쌍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불행한 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불쾌하게 느낄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쯧쯧혀끝을 차며 불쌍한 시선을 보냈을 때 기분 나쁘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는 둘 다 자만에 따른 것입니다. 주는 자는 우월감이라는 자만과 받는 자는 열등감이라는 자만을 갖기 때문입니다.

 

우월감이나 열등감이나 모두 자만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여  동등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Samoti att?namanupaneyya Hino na ma??etha visasi v?pi” (Sn4.5)라 했습니다.  주는 자나 받는 자나 자만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불행하고 가난한 자가 있다면 어떤 마음 가짐을 취해야 할까요?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공익광고를 보면

 

요즘 TV 공익광고를 보면 굶주린 아프리카 아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각종 후원단체에서 경쟁적으로 방송하는 광고를 보면 최대한 동정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와 엄마의 비참한 모습을 연속적으로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공감이 갔지만 너무 자주 보여 주다 보니 이제 혐오스러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공익광고가 공익을 목적으로 한다고는 하지만 이미 상업화 된 듯한 느낌입니다. 그것도 남의 불행을 보여 줌으로 인하여 후원금을 유도하는 것이 역겨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반드시 동정이나 연민의 마음만 내는 것은 아닙니다. 주는 자나 받는 자나 자만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가장 공평한 마음이 바로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행복하고 부유한 자를 대하는 태도

 

한량 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갖가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불행하고 가난한 삶도 있었을 것이고 행복하고 부유한 삶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보고 있는 불행하고 가난한 자를 대했을 때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르침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중립적인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중립적은 마음은 반드시 불행하고 가난한 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또한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Ya? bhikkhave, passeyy?tha sukhita? sajjita?, ni??hamettha gantabba? “amhehipi evar?pa? paccanubh?ta? imin? d?ghena addhun?”ti.

 

수행승들이여,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 (S15.12)

 

 

행복하고 부유한 자에 대해서도 불행하고 가난한 자에게 대하는 것과 똑같이 대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말이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함을 말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공정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게 부자를 시기와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부동산투기 등 불법과 탈법으로 재산이 형성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기 힘든 세태를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는데 이런 태도는 불선업(不善業)’을 짓는 원인이 됩니다.

 

가르침에 따르면, 부자를 대하는 태도는 가난한 자를 대하는 태도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큰 집에 살고, 나보다 더 좋은 차를 다닌다고 하여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한량 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나도 저와 같은 적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자에게도 자비심을

 

전재성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부자도 괴롭다.”고 했습니다. 돈을 벌기도 힘들지만 돈을 유지하기도 힘들기도 말합니다. 돈을 벌고 돈을 지켜 내는 과정이 매우 힘겨움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보다 부유한 자의 고통이 더 크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부자들을 백안시하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불선업만 짓게 됩니다. 가장 공평한 것은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난 겨울 1월과 2월 을지로 노숙자봉사를 했습니다. 지금은 회향하여 활동하지 않는 작은손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먹을 것을 주는 등 음식봉사를 했습니다. 을지로 굴다리에서 약 백명 가량 긴 줄이 형성되었습니다. 첫날에는 노숙자들과 눈도 맞추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미안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우월감이라는 자만으로 주는 인상을 줄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 가짐은 한마디로 한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편합니다. 동정심이나 연민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한량 없는 윤회과정에서 나도 노숙자였던 때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을 대할 때 역시 노숙자 대하듯이 해야 할 것입니다. 부자들을 시기와 질투, 편견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한량 없는 윤회과정에서 나도 저와 같은 때가 있었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 보다 부자를 대할 때 연민의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부자들처럼 괴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소유함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것입니다. 또한 부자들은 많은 것을 가졌기 때문에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위태위태한 삶을 살아 가는 자들이 부자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본다면 가난한 자 보다 부자가 더 괴로운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부자에게도 자비심을 가지자.”라고 말했습니다.

 

연민과 질투라는 양극단을 떠나

 

사람들은 가난한 자에게는 연민을 갖고 부자들을 질투합니다. 이는 양극단입니다.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설했습니다. 부처님은 불행하고 가난한 자나 행복하고 부유한 자에게 공통적으로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가장 중립적인 말입니다. 어쩌면 연민과 질투라는 양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자나 부자나 모두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자라 하여 불행하고, 부자라 하여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소유함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괴로움이 더 많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소욕지족(小慾知足)’입니다. 주어진 조건에서 만족하는 삶입니다.

 

 

Appiccho ceva santu??ho,

pavivitto vase muni;

Asa?sa??ho gaha??hehi,

an?g?rehi c?bhaya?.

 

소욕일 뿐만 아니라 만족하는

성자는 멀리 여읨을 닦으니,

집 있는 자나 집 없는 자나

양자와도 뒤섞여 지내지 않는다.”(Thag.581)

 

 

 

2017-05-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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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7.05.14 21:37

    첫댓글 연꾳님, 감사합니다. 마음의 호숫가로 모시고 갑니다.

  • 작성자 17.05.14 21:39

    전재성박사는 저의 서울대 불교학생회 시절 존경하며 따랐던 선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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