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의 추억「사진 자료」
정구복 교수님이 청양문화원에서 발행하는 연간지《칠갑문화》 원고청탁으로 최근에 쓰신 옥고 <청정 청양에 보리를 심자>를 읽고, 동향인의 한 사람으로서 옛 시골 풍경을 떠올렸습니다. 보리 농사짓던 옛 시골 생활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칠갑문화》지면이 아니더라도 인터넷 카페에 올려주신 정 교수님 옥고에 <보리밭 이미지 사진>이 들어가면 시각적으로 더 보기 좋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과거 저의 글 자료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보리밭 이미지 사진>을 찾기 위해서이지요. 그러다가 제가 소장하고 있는 <보리밭> 관련 글과 함께 <청양의 보리밭 이미지 사진>도 찾았습니다. <참고 자료>로 덧붙입니다.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내 고향 시골 논밭에서 왜 보리가 사라졌을까 원인을 분석해야 <보리를 심자>라는 제안에 설득력과 긍정적인 요소를 발굴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과거 보리 농사를 직접 지어본 제가 판단하기에는 순전히 <경제성>이라고 봅니다. 보리농사는 품(일손)이 많이 드는 반면 소득이 적습니다. 농촌 고령화 추세로 일손도 부족한데다가 농가 소득 증대 측면에서 보탬이 안 되기 때문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하여 메론, 표고버섯을 재배하거나 고소득 특산물인 구기자, 고추 등 특용 작물 재배로 눈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보리를 심어 관광 자원화하는 자연 친화적인 농촌발전 방안이 먼 미래의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농가소득과 연결이돼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보리를 심어 청정 청양의 상징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보자는 획기적인 꿈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농가에 대한 재정적 지원 등 <특수 정책적 차원>에서 관계 당국과 학계의 심도 있는 연구가 뒷받침돼야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의 다음과 같은 농촌 풍경 <역사 자료>는 출향인들이 갖고 있는 애틋한 향수와 애향심을 한번쯤 되새겨 보고 현지 농민들에게는 건강식품 <보리>라는 곡식에 대한 <현대적 유용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윤승원]
[자료1]
▲ 2012년 청양군 / 청양문화원에서 공모한 '청양의 옛 모습' 사진 공모전 입상작품집
- 출향인 윤승원의 출품작 '시골처녀들의 보리밭매기' 풍경 수록[29쪽]
배경설명
잊을 수 없는 보릿고개 시절 내 누님과 친구들 모습
누님의 처녀시절 사진, 고향의 '역사적 가치'로 인정 받다
<청양의 옛모습>사진공모에서 입선한 '시골처녀들의 보리밭 매기' 풍경
■ 누님께 드리는 편지
누님, 까마득히 오래 된 일이라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그 어려웠던 시절, 시골에서 보리밭 매던 시절 말입니다. 왜 갑자기 고생스러웠던 옛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느냐고요?
다름이 아니라 누님이 친구들과 보리밭 매던 그 시절의 사진이 저의 앨범에 있어요. 디지털카메라가 발달한 요즘과는 달리 사진촬영이 쉽지 않았던 시절에 찍은 사진이라 제가 유독 귀하게 여기면서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지요.
마침 청양군에서 <청양의 옛사진>을 공모한다기에 이 사진을 출품했지요. 청양군에서는 참으로 뜻있는 문화사업을 펼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해 5월부터 6개월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청양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과 역사자료를 공모했는데, 옛 사진부문 849점, 역사자료 부문 304점 등 총 1153점이 출품됐다고 하네요.
청양군에서는 이 자료에 대한 심사를 전문가에게 의뢰해 이 중 옛 사진 106개, 역사자료 30개 등 모두 136개 작품을 선정했다고 연초에 발표했어요.
이 중에서 제가 출품한《시골처녀들의 보리밭 매기》제목의 사진도 입선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됐으니, 그 의미와 가치가 더욱 커지게 됐어요.
이런 뜻있는 고향의 문화사업에 출향인의 한 사람으로서 우연히 참여하여 입선작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누님이 살아오신 삶이 고향에서 '역사적인 가치'로 인정 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이 동생도 자료를 제공한 보람이 느껴지는군요.
청양군에서 이런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하고 역사적인 가치를 부여하여 귀하게 전승하려는 뜻이 무엇일까요? 비록 색 바랜 흑백 사진이지만 이 한 장의 사진에는 수많은 우여곡절과 애틋한 삶의 이야기가 숨어 있는 까닭이 아닌가 싶어요.
그럼 제가 이 사진을 출품하면서 나름대로 덧붙인 '당시의 농촌풍경'을 보시면서 옛 시절을 회상해 보실까요. 갑자기 돌아가신 부모님도 그리워지고, 누님과 다정했던 옛 친구들이며, 정겨웠던 시골 동네 풍경도 아련한 추억처럼 그려지네요.
누님, 건강하세요. 그리고 오래 오래 행복한 삶 누리셔야 해요. 고생스러웠던 세월을 꿋꿋하고 성실하게 살아오셨으니까요.
- 2012년 새해, 동생 昇遠 올림-
■ 앨범에서 떼어내어 출품한 '내 고향 1960년대 농촌 풍경'
▲ '청양의 옛 모습을 찾는다'는 청양군 소식지(2011년 7월호)공모기사
[사진 설명]
시골 처녀들의 보리밭 매기
출품자 : 윤승원(청양군 장평면 중추리 가래울 출신)
=====================================================
1960년대 보릿고개시절, 청양군 장평면 중추리 내 고향 ‘가래울 마을’은 보리농사를 유난히 많이 지었다.
논에 보리를 파종하면 농민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독새풀’이었다. 잡초의 일종인 ‘뚝새풀’(우리 고장에선 ‘독새풀’이라고 불렀다)’은 제 때 뽑아 주지 않으면 보리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처럼 제초제도 없어 호미로 일일이 뽑아주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 사진은 현재 칠순을 바라보는 누님이 1960년대 ‘시골처녀들과 보리밭 매는 풍경’이다. 일손이 모자랐던 시절에 16~18세 꽃다운 처녀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밭고랑에 나란히 앉아 호미로 독새풀을 매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농번기에 일꾼 얻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이렇게 많은 처녀들이 보리밭 일손을 도운 것은 당시 누님이 ‘양재학원’에 다닌 덕분이었다.
누님의 양재학원 친구들은 우정이 각별했다. 단순히 <품앗이 노력봉사>로 그치지 않았다. 친형제 못지 않은 우정으로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사이였다.
이 사진에서 특히 인상적으로 보이는 점을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봄볕에 얼굴이 그을릴 것을 염려한 처녀들 모두가 수건을 머리에 쓰고 있다는 점,
▲둘째, 건너편에 보이는 초가집과 함께 학교운동장 주변에 심어 놓은 측백나무와 프라타너스 나무가 옛 추억을 고스란히 되살리고 있다는 점,
▲셋째, 상(喪)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두 노인이 두건과 행전을 치고 보리밭 둑을 느리게 걸어가는 모습을 ‘절묘하게 포착’한 것도 ‘풍경사진 구도’로서는 흔치 않은 귀한 장면이어서 깊은 인상을 준다.
어머니는 당시 이들 처녀들에게 ‘새참’으로 국수를 푸짐하게 대접했는데, 처녀들의 <우정어린 일손 돕기> 감동이 얼마나 컸는지, 생시에 두고두고 이 장면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모습이 참으로 장관(壯觀)이었지, 처녀들이 밭고랑에 나란히 앉아 일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대견하여 동네 어르신들도 지나가다가 ‘장정 일꾼이 열흘 일할 것을 한 나절에 해치웠네!’하면서 칭송이 자자했어!”
어머니가 생시에 이런 말씀하시는 것이 내 귀엔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이 사진이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
2012. 1. 5. 윤승원
[자료2]
대한민국 정책포털 / 국정브리핑 게재 글 (2007.06.16.)
어느 가정집 앞 보리밭을 지나며
글. 사진 윤승원
시골에서 흔히 보게 되는 보리밭이 아닙니다. 5대 도시 중 하나로 꼽히는 대전광역시 대덕구의 한 가정 집 앞 남새밭에서 본 보리밭입니다. 도심의 한 가정에서 왜 이런 보리밭을 가꾸고 있는지, 나그네는 남새밭 주인의 깊은 속내를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짐작되는 게 있습니다.
상추나 쑥갓 등 밥상에 올려도 좋은 푸성귀를 남새밭에 심지 않고 하필이면 보리를 화초처럼 심어 가꾸는 분의 속 마음을 저는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밥상에 올라갈 온갖 푸성귀 제쳐두고 왜 <보리밭>일까
과거 궁핍했던 시절의 가슴 아린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나그네는 보리밭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쉽게 옮기기가 어렵습니다.
아마도 저처럼 50대 중반의 나이는 넘어 선 분일 겁니다. 물론 시골 농군의 아들이 분명할 터 이구요. 어디 그 뿐인가요. 보리농사가 얼마나 힘이 드는 농사인지, 직접 경험해 본 분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시골에서 보리 농사를 지어 본 저로서는 이 보리밭을 발견하는 순간, 발걸음을 좀처럼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반가워서 한 동안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주인의 허락 없이 저도 모르게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말았습니다.
보릿고개, 가슴이 아려오는 그 말
저 보리밭에서 저는 허리 굽은 아버지를 발견했습니다. 머리에 수건을 눌러 쓴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도 보았습니다. 손에 호미를 든 누나의 모습도 거기 활동사진 처럼 되살아 나고 있었습니다. 지게를 지고 저 만큼 걸어오는 밀대 모자 쓴 형님도 발견했습니다.
당시 시골에서 이 만큼 크기의 보리를 가꾸려면 퇴비도 듬뿍 내야 하고, 독새풀도 고생스럽게 뽑아야 합니다. 호미 들고 고랑에 앉아 잡초를 뽑고 있노라면 옷깃에 파고드는 찬바람은 또한 얼마나 차갑고 시려웠던가요.
보리는 가꾸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누렇게 익으면 타작을 해야 합니다. 보리 타작할 때, 그 깔끄러운 꺼스랭이가 몸 속에라도 들어가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요. 기계 타작을 한다고 해도 일을 끝낸 뒤에 가래를 뱉으면 목에서 깜부기 보다도 더 시커먼 게 튀어 나오던 것을 기억하는지요?
보리 농사는 경작하여 수확하는 일련의 과정도 힘이 들지만, 먹는 일 또한 부드럽고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허리 굽은 아버지, 머리에 수건 쓴 어머니...모두 거기 있었다
결국 주인의 허락 없이 저도 모르게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말았습니다.
'보릿고개'라는 말도 잊어서는 안 될, 가슴이 아려오는 말입니다. 채 익기도 전에 저렇게 파란 풋 보리를 낫으로 베다가 솥에 쪄서 멍석에 말려 먹어야 했던 그 궁핍했던 시절이 '보릿고개'가 아닙니까?
저도 유소년시절 그런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었습니다. 소쿠리에 '꼽살미'라는 이름의 꽁보리밥을 부엌 시렁 위에 매달아 놓으면 학교에서 돌아와 큰 사발에 물을 말아 풋고추 찍어 먹었던 '기막힌 맛'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오늘 날에는 이런 것을 일컬어 '웰빙식'이라고 하던가요?
저도 성장하여 <보리밭>이라는 노래가 좋아 즐겨 불렀습니다. 곡도 좋지만 가사도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보리밭은 낭만이 아닙니다. 사랑과 그리움도 아닙니다. 생존을 위한 노고만 있었을 뿐입니다.
이제 시대가 정말 좋아졌습니다. 풍요롭게 잘 살게 되었습니다. 도심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저 보리밭은 제게 있어서 그 어떤 화려하고 아름다운 화초 이상의 의미를 줍니다.
┃국정넷포터 윤승원(ysw2350@hanmail.net)
■ 필자 <윤승원>님은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보람을 느끼는 현직 경찰관입니다. 틈틈이 글을 써 오면서 1990년 등단이후 <삶을 가슴으로 느끼며> <덕담만 하고 살 수 있다면> <우리동네 교장선생님> <부자유친> <아들아, 대한민국 아들아> 등 수필집을 펴낸 바 있습니다. 2001년 경찰문화대전에서 금상을 수상했습니다. 평범하지만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국정브리핑 등록일 : 2007.05.16
첫댓글 윤선생의 보리밭매는 사진과 보리가 익어가는 풍경사진은 아주 일품입니다. 제 글에 인용해 실으면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원고를 수정하고 그때에 다시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淸淨 靑陽을 상징하는 <보리 심기>를 제안하신 정 박사님의 『칠갑문화』 옥고가 군정 당국자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읽혀져 ‘현실화’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콩밭 매는 아낙네~> ‘칠갑산’ 대중가요가 또 하나의 상징 곡 <보리밭 물결 일렁이는, 칠갑산골 청 보리 논밭 풍경~>가사로 새롭게 탄생하여
만인에게 불리어지게 되는 날을 성급하게 그려봅니다. 감사합니다.
윤선생이 청정한 보리밭 가꾸기에대한 멋진 노래를 작사하실 기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꿈이 곧 이루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엊그제 지교헌교수에게 선생의 책, "달에서 왔니, 별에서 왔니' 한권을 보내드렸습니다. 지교수님이 장천선생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한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부끄러운 가족 사진첩이라 집안 형님 같으신 정 교수님처럼 격의 없이 제게 애정을 주시는 분에게만 드렸는데, 존함을 언급하기조차도 어려운 지체 높으신 수필문학계의 큰 어르신께 졸저를 보내드렸다니 실로 낯이 붉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