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시 남곡동 가포말 북쪽 뒤산에 있는 효자문(孝子門)으로 세워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전이다. 고이대(高二大)는 아버지가 병이 나서 거동도 못하게 되자 약을 구하러 사방으로 뛰어다녔으며 병환(病患)에 차도(差度)가 없고 점점 더 심해지자 직접 아버지의 변을 맛보며 병세(病勢)를 판단할 정도로 효자(孝子)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어머니마저도 세상을 뜨자 산소에서 효도(孝道)를 다하지 못한 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몸부림치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라서 울었다고 한다. 이처럼 그이 효성(孝誠)이 방방곡곡(坊坊曲曲)에 알려지면서 그에게 통훈대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의 벼슬이 내려지고 또한 효자문(孝子門)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의 아들 고득천(高得天)도 가문(家門)에서 내려오는 효심(孝心)을 닮아 부모님을 지극히 모셨다. 아버지가 병석(病席)에 눕게 되자 약을 구하러 사방으로 뛰었고 숨을 거두기 직전 몹시 신음하니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입에 넣어드려 며칠 동안 연명(延命)하게 하니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 집안에 부자(夫子)가 저렇게 효자(孝子)일 수 있냐고 극찬(極讚)하였다. 그리고 나라에서 알게 되어 그에게도 정문(旌門)을 내리는 은전을 베풀며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로 높이 칭찬하였다.
또한 고이대의 셋째 아들 승천(升天)의 아들 필문(弼文)도 학덕(學德)이 높고 효심(孝心)이 지극해서 부모(父母)를 섬기는 마음이 지극하니 대대로 효자가 많이 나오는 집안이라 세효(世孝)의 명문이라 하였으며 여기 정려도 세효정려(世孝旌閭)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