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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2. 새 언약의 사역자들_4) 주의형상/질그릇의 보화
2015년 11월 15일 말씀
(고후3:12~4:7)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7) 주의 형상으로 화함
개선장군이신 그리스도께 포로 됨으로 시작 된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향기로, 그 향을 뿌리는 자로, 그 자신을 알리는 편지로, 그리고 주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로 사역함으로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러 주의 형상으로 화하게 된다.
주의 형상의 화한다는 말이다. 개선장군 되신 그리스도에게 포로가 되어서 시작된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향기로 그 향기를 뿌리는 자로, 그 자신을 알리는 편지로 그리고 주의 영광을 비춰내는 거울로 사역함으로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러 주의 형상으로 화하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누구든지 사역자로 부름받은 사람은 그냥 부름받은 것이 아니고 사실은 포로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승리의 영광을 보고 내가 그 영광 앞에 포로가 된 것이다. 그래서 포로가 되지 않고는 그분을 따를 수 없다. 제대로 포로가 되지 않으면 나갔다 들어갔다, 도망갔다 들어왔다 그렇게 된다. 삼국지에서 말하는 여포처럼 붙잡혀 왔다가 도망쳐 왔다가를 반복하는 사람과 같이 된다. 제대로 붙잡히면 도망갈 수 없다.
그러니까 완전하게 붙잡힌 사람이 포로가 되는 것이다. 붙잡혔다는 사실이 향기가 된다. 붙잡혀서 향기를 새로 뿜어내는 것이 아니고 붙잡힌 바 된 그것이 향기가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전부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른 길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향기가 나야할 것에 향기가 안 나고 더러운 냄새가 나는 것인데 사로잡히게 되면 그때 사람 이 사람답게 된다. 그러니까 향기가 되는 것이다. 또 이 사람이 향을 뿌리는 사람이 되고 편지가 되고 빛을 반사하는 거울처럼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러 가다보면 주의 형상으로 화해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지주의나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수양을 거듭하면 우리는 신처럼 된다. 신과 같은 경지에 올라간다는 말과는 정반대의 말이다. 내가 그 분에게 사로잡혔는데 그것이 이상하게 향기가 된다는 것이다. 잡힐수록 포로가 될수록 더욱더 그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역설적인 그런 것이다. 이런 소망이 있기 때문에 담대히 말한다고 했다. 주의 형상으로 화해갈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는 담대함이 생긴다는 것이다.
인간을 주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지으신 것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주의 영을 인격적으로 나타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되려고 자신의 위임을 이탈하여 속이는 자의 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인간을 주의 형상을 따라서 모양대로 지은 것은 생명나무를 먹고 주의 영을 인격적으로 나타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말은 모양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모양으로 나타내는 것이 인격(人格)이다. 그러니까 모양이 없어서 보이지 않는 분을 누군가가 인격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그분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냥 귀신에 불과하다. 인격으로 나타내야 참 하나님이 된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4) 이것은 한 사람의 인격으로 하나님을 온전하게 드러냈다는 뜻이다. 독생자라는 말은 그런 뜻이다.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같이 되려고 자신의 위임을 이탈했다. 맡은 위임을 이탈해서 속이는 자의 영을 타내게 되었다. 내가 누구를 따르든지 따르는 자의 영을 나타내게 되어있다. 사람은 자기가 숭배하고 자기가 존경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자의 무엇을 자꾸 드러낸다. 심지어는 버릇도 따라간다. 아이들 때는 더 그렇다. 아이들은 영어 선생님이 좋으면 영어를 잘하게 되고 수학선생님이 좋으면 수학을 하게 되는데, 선생님이 싫으면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하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를 따르냐가 아주 중요한 문제다.
예수께서는 아담이 버린 이 위임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영을 인격적으로 나타내심으로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새 언약은 이분을 증거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담이 버린 위임을 회복해서 하나님의 영을 인격으로 나타내신 분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위임을 회복해서 하나님의 영을 인격으로 나타냈으니까, 보이지 않는 분을 아버지라고 하고 보이는 분을 아들이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아버지, 근원이라고 하고 그가 나타내신 바가 되면 그를 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르다. 생리적으로는 그렇다. 내 생명은 감춰져 있지만 아들을 낳으면 내 생리 안에 있는 내 생명이 드러난 것이다. 똑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등이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는 사람인데 보이지 않는 신을 인격으로 나타냈다. 그러니까 나를 본 것은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본 것이다. 보이지 않는 그분을 어떻게 보겠냐는 것이다.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나. 내속에 들어있는 마음은 보이지 않는데 내 마음이 내 인격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누가 내 마음을 알겠냐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개떡처럼 드러내놓고 다른 사람이 찰떡처럼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오만데 가 봐도 자기를 찰떡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왜 사람이 나를 몰라주나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피차 답답한 일이다. 서로가 답답한 일이다. 사람들이 나를 모른다고 해서 답답하다는 것인데 사실은 모르는 것이 아니고 다 나타나서 보고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사람들이 나를 모른다고 생각한다. 남이 나를 모르는 것이 아니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다. 남이 나를 더 잘알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쉽다. 나는 내 얼굴을 못 본다. 거울이 있으니까 보는 것이지 만일 거울이 없다면 평생을 가도 내 얼굴은 못 본다. 남이 나를 보는 것이다. 옷 입고 나오는 것도 남이 보라고 나오는 것이지 나 혼자 같으면 이렇게 입고 나올 필요가 없다. 남이 보니까 이렇게 입고 나오는 것이다. 나같은 경우는 교회 올 때만 양복을 입고나온다. 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안 맞고 해서 못 입는 것이지 옷이 닳아져서 못 입는 경우는 없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이런 사람이 된 것이다. 아담을 그런 사람이 되도록 지었는데 아담이 자기 직임을 위임을 이탈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담을 봐서 아담의 아버지를 보면 볼 수가 없다. 아담의 아버지를 봐서는 하나님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담을 봐서는 하나님을 모른다. 세상에 누구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없다. 왜 없는가? 안 보이니까 모르는 것이다. 또 나타내는 사람이 있어야 아는데 나타내는 사람이 없으니까 모르는 것이다. 내 마음을 나타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내가 말하는 것을 보고 행복한 것을 보고 내 마음이 어떤가를 아는 것이다.
새 언약이라는 것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봤다.”고 하는 이 사람을 전하는 것이다. 내용으로 하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똑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나타낸 이 사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나도 그렇게 되어야만 증거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그렇게 되지 않고는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를 본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구약하고는 다르다. 구약은 하나님이 하늘에 있다고 해도 되고 호렙산에 있다고 해도 되고 그래도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아니니까 나와 같지 않으니까 그렇다. 그냥 객관적으로 이런 분이라고 내가 본대로 증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홍해바다를 가르더라, 이렇게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새 언약은 그런 것이 아니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봤다고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분 안에 있지 않다면 새 언약의 사역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인 것 같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쉬운 일이기도 하고 그렇다. 아주 불가능하기도 하고 아주 쉽기도 하고 그렇다.
옛 언약은 하기는 쉬울 것 같다. 기록된 대로 전하면 되니까. 성경에 기록된 대로 말하면 되니까 쉽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로가 장님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신약과 구약은 이런 차이가 있다.
이분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모든 인간의 목표가 되는 사람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 된 존재다. 그러나 아담의 이 탈로 인하여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사람들 중에 특별한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고 그의 사역은 이탈한 인간을 구속하여 원래의 위치로 회복시키고 창조의 목표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을 때 이 사람을 목적으로 지었다. 모든 인간의 목표가 되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했을 때 “그 모양대로”라는 말을 그리스도라고 해석한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었다는 말이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존재라는 것이다.
주물 공장에 가면 금형이라는 것이 있다. 쇳물을 끓여서 부어서 솥단지도 만들고 냄비도 만들고 하는데 금형으로 모양대로 물건이 만들어진다. 그 모양 안에서 그릇이 나온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지어졌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목표로 해서 지었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 되게 하려고 사람을 지었다. 아브라함을 왜 불렀는가? 그런 사람이 되게 하려고 부른 것이다. 왜 야곱을 연단했는가? 그런 사람이 되게 하려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와서 보면 ‘모든 것이 다 아~ 그 사람이 되게 하려고 나를 이렇게 이렇게 했구나. 그 동안의 모든 과정은 이래서 생긴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면 자기를 알게 되는 것이다. 아~ 뭣 때문인지 몰랐는데 그때는 왜 그 고생을 했는지 몰랐고 나는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도 그때는 몰랐는데 와서 보니까 ‘아~ 이 사람이 되게 하려고 나를 그렇게 했구나. 이 사람이 되는 과정에 그런 과정이 있었구나.’하고 알게 된다.
칼을 만드는 것을 보면 쇠를 달구었다가 식혔다가 두들겼다가 몇 번을 한다. 그것도 물에 넣는 방법이 다 다르다. 물에 담금질하고 두드리고 하는데 그것은 쇠안에 있는 기포를 다 빼내고 강도를 높이는 것이다. 그래야 쇠가 단단해진다. 또 그것을 담금질할 때 물에 넣는가, 소금물에 넣는가, 기름에 넣는가에 따라서 쇠의 성질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서 물에 담궜는지, 소금물에 담궜는지, 기름에 담궜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몰랐다. 와서 보니까 아~~ 이것 때문에 그랬구나 하고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은 물에 담궜는데 왜 나는 기름에 담궜을까를 몰랐다. 이제 와서 보니까 그래야만 내가 인간이 되니까 그랬구나 하고 알게 된다.
나도 하나님과 관계가 안 되었으면 다뤄졌는지 안 다뤄졌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인생은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고 재수 없어서 그냥 가는 것이니까 했을 것이다. 그런데 뒤로 와서 보니까 그때 그렇게 안 했으면 내가 여기 못 왔겠구나. 내가 여기 온 것은 그때 그래서 온 것이구나 하게 되니까 하나도 놓칠 것이 없게 되었다. 불필요한 것이 없게 되고 재수 없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다 필요한 것이었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그런 말이다.
그는 아담의 이탈로 인해서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사람 중에서 특별한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고 그 사역은 이탈한 인간을 구속해서 원래의 위치로 회복시키고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왜 특별한 사람을 불렀을까? 왜 모세를 불렀으며, 왜 다윗을 불렀을까? 그것은 모든 사람을 그렇게 하려고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사람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을 고르게 된 것이다. 예수님도 특별한 사람이 아닌데 이런 이유 때문에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뭔가? 간단하다. 이탈한 사람을 원위치로 회복해서 하나님이 원래 만들려고 한 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
우리를 천당에 데리러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만들려고 오신 것이다. 그러니까 천당 갈 생각을 하지 말고 사람 될 생각을 해야 한다. 천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알고 보면 그것이 천국이다.
그는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이 가지신 모든 선한 것을 아버지께 맡기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인간의 모든 것을 끝내신 것이다.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도록 모든 것을 일소시키시고 새 사람의 첫 열매로서 부활하여 우리에게 다시 오신 것이다.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지신 모든 선한 것을 아버지께 맡기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모든 선한 것이라는 말은 우리가 가인과 아벨로 시작되는 종교적인 세계, 선악의 세계에서 가인은 거기서 벌을 받고 어디론지 유랑하는 자가 되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반면에 아벨은 죽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아들 둘을 낳았는데 하나는 가인이고 하나는 아벨이다. 그런데 가인은 우리가 봐도 악한 자다. 그래서 거기서 끝이 난다. 좌우간 어디로 사라진다. 그리고 아벨은 거기서 죽었는데 이것은 인류의 역사가 이렇게 한 단원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말한다. 가인은 어디론지 사라져서 없어지고 아벨이 남는다. 우리가 생각할 때 가인이 죽었으니까 잘 됐네, 아벨만 살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뒤로 가면 도로 가인과 아벨이 나온다. 그러니까 아벨이 죽지 않는 이상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결과가 끝나지 않는다. 악은 끝난다고 해도 선은 안 끝난다. 모든 사람은 생각할 때 악은 끝나야 하고 선은 남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악과 선은 한 나무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이다. 그러니까 나무는 하나다. 나무는 하나인데 과일이 다르게 열렸다는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 둘이 다 끝나지 않으면 안 끝난 것이다. 한 쪽이 남아 있는 것이니까.
예수님은 누구를 대표해서 왔는가? 가인을 대표해서 온 것이 아니고 아벨을 대표해서 온 것이다. 아벨이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제단 밑에서 신원하고 있었는가? 계시록에 보면 제단 밑에서 신원하고 있다고 한다. 신원한다는 말은 ‘우리의 억울함을 해결해 주시옵소서.’ 라는 말이다. ‘나는 억울합니다. 나는 가인에게 죽은 것이 억울합니다.’ 세상의 모든 선한 사람들이 거기서 하소연을 하고 있다는 그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마저도 끝이 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있으면 천국이 안 된다. 천국 한 쪽에서 만날 울고 앉아서 통곡을 하고 있으면 천국이 되겠는가? 안 된다. 다 끝나야 된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서 모든 선한 것을 아버지께 맡겼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그것은 선한 것이 죽었다는 말이다. 악한 것이 죽은 것이 아니고 선한 것이 끝났다. 인간 최상의 것이 죽었다.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려고 했던 것은 악한 자가 되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선한 자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끝나야 끝나지 않겠는가? 우리는 악만 끝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세상에서는 악만 끝나면 된다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악을 없애고 있다.
이번에도 프랑스에서 테러가 일어나서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창세 때부터 지금까지 끝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선은 남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선도 끝나야 된다. 그렇다고 악은 남아야 된다는 것도 아니고 악은 이미 사라졌다. 창세기에서 이미 심판을 받았다.
자기가 죽으심으로 인간의 마지막을 끝내 주셨다. 마지막 살아 있는 것을 끝낸 것이다. 인간은 이 선한 것 때문에 자기가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너는 정녕 죽으리라.’ 했다. 했는데도 ‘내가 언제 죽어?’ 그뿐인가? ‘이렇게 선을 계속 키우면 되는 것인데 왜 죽는다고 하는가?’ 이렇게 생각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네가 정녕 죽으리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려면 예수님 같은 분이 죽어야 한다. 우리는 죽어도 소용이 없다. 우리는 죽을 이유도 있고 해서 죽어봤자 소용이 없는 데 죽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 죽어야 한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죽을 이유가 없는 사람, 진짜로 선하고 진짜로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영원히 살아야 할 사람이다. 죽으면 안 될 사람이다. 우리 인간의 상식으로는 십자가에 매달아 놓아도 안 죽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이런 사람이 죽는다면 허무하다.
구약의 총체적인 사상을 묶어 놓은 것이 시편이다. 시편에 흐르는 사상은 ‘이런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고 이런 사람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고 되어 있다. 의인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 이것이 구약 전체를 요약해 놓은 사상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었다. 그러니까 ‘의인도 죽는다.’ 이렇게 되어 있으면 되는 데 ‘의인은 절대로 안 죽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었다. 끝냈다. 끝났다. 인간은 끝났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끝났다.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려고 모든 것을 일소시키셨다. 하나님이 새 창조를 하려면 전의 것은 다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지 한 쪽은 없어지고 다른 한 쪽은 놓아두고서는 새 창조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마지막 남은 것을 끝내고 아버지께 맡기신 것이다. ‘아버지가 알아서 하십시오.’ 그 말이다. ‘이제 다 끝났으니까 아버지가 알아서 하십시오.’ 그 말이다. ‘하나님 어찌하여 날 버리셨습니까?’ 해도 대답이 없었다. 이 말은 완전히 끝났다는 뜻이다. 우리는 거기서 무슨 말이 있을 줄로 알았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면 하는 소리가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너를 살려 줄게.’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지 않는가? 완전히 끝났다. 이렇게 완전히 끝난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부활했는데 이것은 새 사람의 첫 열매라고 한다. 하나님이 덜 죽은 사람을 살려 놓은 것이 아니고 완전히 끝나고 새로 지은 사람이란 말이다. 이것을 새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활로 우리에게 다시 오신 것이다.
그런데 말을 잘못 들으면 이러기가 쉽다. ‘내가 죽어야 되는 데 안 죽어진다.’ 우리 교회 안에도 그런 고민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 ‘죽어야 되는 데 안 죽는다. 목사님은 만날 죽는다는 이야기만 하시는 데 나는 안 죽으니까 이거 어떻게 하면 되느냐?’ 고 말이다. ‘교회 가기가 괴롭다.’ 이런 사람도 있다. ‘오늘 가면 틀림없이 십자가를 이야기 할 것인데...’ 그러면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 된다. 즐거움이 되는 것이 아니고 괴로운 것이 된다.
그렇게 듣지 말고 바꿔서 들으라. 하나님이 끝내셨다는 그 말이다. 예수님이 끝내셨다는 말이지 나보고 끝내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이 끝내 버렸다. 그러면 예수만 생각하고 하나님과 예수 관계에서 예수님은 끝내 버렸다. 더 이상 바라볼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모든 것을 버렸다. 인간의 모든 것을 끝냈다. 인간의 모든 것을 끝냈다고 하면 나도 인간이 아닌가? 인간의 모든 것을 끝냈다면 나도 거기에 포함된다.
무엇 때문에 그 말을 하는가 하면 ‘지금 성질이 죽어야 되는데 아 하나도 안 죽는다. 전보다 나아졌지만 그래도 안 죽는다.’ 이런 생각을 하기가 쉽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해도 안 된다. 그러니까 성질나거든 마음대로 해 보라. 안 되면 앞산에 올라가서 소리를 지르든지 가슴을 치든지 마음대로 한 번 해 봐라. 죽은 것은 예수님이 죽었지 내가 죽은 것이 아니니까 나보고 죽으라고 한 말이 아니다.
나보고 죽으라는 말은 율법이다. 율법은 다른 게 아니다. 나보고 ‘네가 죽어라.’ 이것이 율법이다. 절에 가면 ‘네가 죽으라.’ 이 말이다. ‘네가 모든 껍데기를 벗고 벗어라.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네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라.’ 이 말이다. 이것은 죽으라는 말이다. 나는 여러분 보고 ‘모든 것을 다 던져 버리고 깨달아라.’고 안 해 봤다. 왜 안 했느냐 하면 내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잘 해서 그런 게 아니고 나도 못하는 것을 남보고 어떻게 하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못한 것이다. 그런데 절에 가면 입문부터 그렇게 말한다. 다 버려야 한다. 오죽하면 가족까지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겠는가? 그래서 뭔가를 얻으려고, 그리고 빈 인간이 되려고 한다. ‘공’ 이렇게 한다, 버리라고. 그러고 보면 그럴 것 같다. ‘비워버린다면 빈 병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도 안 들겠는가? 아주 시적이다. 빈 병. ‘빈 병’ 이라는 시를 한 번 써 보라.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여기에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 서구 사회에서 불교는 매력이 있다. 왜냐하면 하도 많이 자유로워하며 오다 보니까 복잡해졌다. 그래서 ‘공’자가 제일 좋다. 빌 공자가 말이다. 뉴 에이지(New Age) 운동 그런 것들이 여기에서 왔다. 그래서 새로운 인간이 되려고 한다.
우리는 지금 내가 죽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죽지 않았다. 예수님이 죽었다. 어떤 사람으로 죽었는가? 내가 바라던 사람으로 죽었다. 내가 그렇게 되길 원했던 사람으로 죽었다. 가장 선한 사람으로 죽었다. 그것도 가장 선하다는 말이 중국의 선이나 미국의 선이나 이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선했느냐 악했느냐 그 말이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명령 앞에 온전하게 순종을 했느냐 안 했느냐 그 말이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 완전하게 순종한 사람으로 죽었다. 우리는 순종하지 않은 것이 죽는 것만 봤다. 우리는 순종하지 않아서 망하는 것만 봤다.
그런데 완전하게 순종하는 사람으로 죽었다. 그래서 그 분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 사람을 안 살렸을까?’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할 때는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은 내가 죽어야 할 것 같으니까 그런 것인데 이 사람이 죽은 게 아니고 내가 살려 주고 싶은 사람이 죽었단 말이다. 내 안에서 도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아이 참 이게 죽어야 되는 데 안 죽는 고’ 이 사람이 죽은 게 아니고 ‘이것만은 살려야지.’ 하는 것이 죽었다. 그러니까 내가 죽은 게 아니다. 예수님이 죽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확실히 죽었다는 것만 알면 된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 같이 되고 싶은 그 사람이다. 알고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 죽었다. 그러니까 ‘죽었다, 예수가 죽었다.’ 이것을 집에 가서 계속 외워보라. ‘예수가 죽었다.’ ‘아 예수가 죽었다,’ 내가 죽어야 되는 데 그렇게 하지 말고 ‘예수가 죽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라. ‘예수가 죽었다. 내 대신 죽었다.’ 그렇게 말을 한다. 그런데 ‘내 대신 죽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 어떻게 내 대신 죽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 대신’은 떼어 놓고 ‘예수가 죽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던 사람이 죽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던 그 사람이 죽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던 그 사람이 죽었다. 흠과 티가 없었던 그 사람이 죽었다.’ 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나도 그렇다. 내 속을 하나 둘씩 점검해 보면 또 안 죽었단 말이다. 그것을 죽이려고 하면 또 나는 예수를 못 믿는다. 그것을 죽이고 오려면 예수를 못 믿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생각을 안 하고 ‘예수가 죽었다.’만 생각해야 된다. ‘아! 예수가 죽었다, 예수가 죽었다.’ 그러면 뭐가 터진다. ‘예수가 죽었다.’
신기한 일이다. 예수가 죽은 줄로 알면 정말로 놀라운 일이 생긴다. 내 모든 일이 끝난다. 예수가 죽은 줄로 알면 내 모든 일이 끝난다. 내가 죽으려는 그것도 끝난다.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부활시켰다. 그러면 누가 부활했는가? 예수가 부활했다. 내가 부활한 게 아니고 예수가 부활했다. 그런데 나는 죽기도 내가 죽고 부활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리 죽는다고 죽어도 부활이 안 된다. 우리는 그냥 맛을 좀 보는 것이다. ‘내가 어떤 곳에서 죽은 자로 섰더니 뭔가 좀 다르더라.’ 이렇게 맛 볼 수는 있다. 그런데 완전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죽고 부활했다. 죽으면 다시 산다. 이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고 부활했으니까.
이 사람이 “우리 형상을 따라서....”로 시작한 사람으로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형상을 비춰내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먼저 하나님 같이 되려 하는 모든 인류를 자신의 죽음으로 구속하여 원위치로 회복시키고 부활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 영광을 비춰내셨다.
이렇게 죽은 이 사람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했던 그 사람이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사람’, 그러면 쉽지 않은가?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사람’이다. 우리 같은 사람이라야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인간이니까 그렇지 않은가? 내가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내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유치원 학생이다. 유치원 학생은 아직 그것을 모른다. 자기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을 모른다. 할 수 없다, 인생을 내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을 모른다. 유치원 가기 전까지는 모른다.
유치원을 가게 되면 좀 알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 보다 힘이 센 놈이 생기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데 안 된다. 범진이가 어린이 집에 갔다가 쫓겨났다. 힘이 얼마나 좋은지 하루 종일 떠들고 싶은 데 어린이 집에서 그게 되겠는가? 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와서 할 수 없이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고 있는데 요즘에는 많이 좋아졌다. 뭔가를 좀 알아가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이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못하는구나.’ 이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뭐든지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어린아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따라 자기의 모양대로 만든 사람은 어떤 사람을 목표로 지어졌는가 하면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사람을 목표로 만들어 놓았다.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사람을 만들어 놓았다. 만들어 놓기를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혼자서는 아기를 못 낳도록 만들어 놓았다. 맞지 않은가? 혼자서는 아기를 못 낳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까 혼자 아기를 낳을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인생고다. 혼자 아기를 낳으려고 생각하니까. 밥을 안 먹으면 아예 못 살도록 만들어 놓았다. 모든 것에 이렇게 제한을 해 놓았다. 밥을 안 먹고는 못 살도록, 숨을 안 쉬고는 못 살도록... 전부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까 인간을 한 마디로 함축하면 무엇인가? ‘자기 마음대로 못한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이것만 알아도 도를 반 이상 튼 것이다. 반 이상 다 튼 것이니까 절에 갈 필요도 없고 노자를 찾아갈 필요도 없다. ‘아! 인생은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구나.’ 그렇다.
야생마를 잡아다 길을 들이는 데 보니까 이놈을 잡아다 놓으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계속해서 힘을 썼다. 그런데 노련한 조련사들이 그놈들과 부지런하게 투쟁을 해서 결국 항복을 시킨다. 그래서 한 번 항복을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순종을 하는 것이다. 인생도 야생마나 똑 같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데 하다 보니까 걸려서 안 되는 것이다. 포기하고 또 포기하고, 포기하고 또 포기하고 하다가 나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도 내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다.
인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자기 마음대로 못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지 왜 자기 마음대로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을까?’ 이게 아닌가? 그런데 ‘생명나무 열매를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니까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뭔가 저절로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너는 나와 관계가 끊어질 것이다.’ 이 말이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켜낸 사람’, 이것을 위해서 사람을 지어 놓았다.
이 사람은 먼저 하나님 같이 되려는 모든 인류를 자신의 죽음으로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죽으신 것 밖에는 없다. 모든 인간 앞에 죽으신 것 밖에는 없다. 그런데 왜 죽었는가 하면 다 자기 같이 되게 하려고, 다 자기 안으로 끌어 들이려고, 원위치로 끌어 들이려고 그랬다.
그리고 부활했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지켜냈다. 형상으로서 영광을 지켜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지켜내는, 형상을 지켜내는 하나님을 지켜내는 형상,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했던 ‘우리의 형상’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하나님을 지켜내기 위해서 있다. 그러니까 지켜내는 형상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까지 하나님을 지켜내기 위해서 죽으셨다. 그래서 죽음 안으로 모든 인류를 불러들였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이렇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했을 때도 ‘야! 너희도 나처럼 해 봐.’ 했을 것이다. 그런데 못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을 때 ‘너희도 잘 믿으면 이렇게 돼.’ 이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 못하더라도 다 똑 같이 가만히 있어도 되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일이다. ‘너희는 다 자거라. 육신이 약하도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다 자거라.’ 그러고 십자가로 갔다. 그것은 너희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 그러니까 내가 대신 죽을 테니까 너희들은 그냥 여기 있어라. 그런 얘기나 똑같다. 대신 죽을 테니까, 나 혼자 죽으면 다 된다. 그래서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 혼자 죽어서 다 이루신 것이다. 더 이상의 사람이 없으니까 혼자 죽었는데 모든 것이 다 죽었다.
우리는 이 사람 안에서 구속을 받고 그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을 비춰내는 사역자들이 되었는데 이 사역은 옛 언약 아래 있었던 사역과 다르다. 모세의 얼굴에 있는 빛은 장차 없어질 영광이었으나 새 언약 아래서의 사역은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사역으로서 마침내는 주의 형상으로 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 안에서 구속을 받고 그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을 비춰내는 사역자들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내가 이 사람에게 포함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그 분이 죽음으로 해서 내 소망이 다 끊어져 버렸다. 내가 이렇게 될 수 있다고 하는 모든 소망이 다 끊어져 버렸다.
내가 잘 되면, 성공하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이 될 것 아니겠는가. 내가 만일 사업 말고 인생으로서 성공한다면 나는 죽은 나사로도 살리는 사람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할 모든 가능성이 다 끝나버렸다. 나는 아무리 돼도 예수처럼 될 수 없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어버렸다. 그러니까 그런 가능성을 가진 인간은 모두 다 함께 죽은 것이다. 다 함께 죽었다. 그 분만 죽은 것이 아니고 나도 같이 죽은 것이다.
이번에 수능 시험을 봤다. 80점 밑으로는 대학에 못 간다고 끊어버렸다면 80점 이하는 다 떨어진 것이다. 81점부터 올라가고 80점 못된 사람은 다 떨어진 것이다. 한 사람이 떨어지면 다 떨어지는 것이다. 다 같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만 떨어지면 그 이하는 다 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그 이하의 사람들은 다 그 안에 함께 죽은 것이다. 끝난 것이다. 다 끝나 버렸다. 점수를 70점 맞고 나 합격했는지 안했는지 봐달라고 하면 귀찮다고 할 것이다. 광고해놓은 것을 봐라. 80점 이하는 다 불합격이다. 그러니까 이런 70점은 복잡하니까 가지고 오지도 말라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가서 나 얼마나 죽었는지 봐 주세요 하면 볼 필요 없다고 한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비로소 원위치를 찾는다.
세상의 어느 성인을 찾아가도 다 자기를 비우라고 한다. 자기 욕심껏 하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네 맘대로 된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네 맘대로 안 되니까 다 비우라고 하는데 내가 그것을 비우려고 하면 못 비운다. 비워도 비워도 또 있고 그래서 나는 그것을 못하겠으니까 포기했다.
그런데 예수 안에 가니까 이것이 하고 못하고 그런 문제가 못되고 내가 비운다고 비워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채운다고 채워지는 것도 아니고 만날 해도 헛일을 했다. 이 사람이 죽은 것을 보니까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 내가 그것을 하려고 했던 희망이 없다. 그래서 우리를, 나를 원점으로 돌이켜 줬다. 원점으로 돌이켜 주니까 너무너무 편하다. 마음이 편안하다.
욕심이 없어지려고 해서 일부러 없앤 것이 아니고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니까 안 될 일이니까 욕심이 저절로 없어져 버린다. 안 되는 것만 확실히 알면 더 이상 욕심을 가질 수 없다. 그러니까 나는 거기서 구속을 받았다. 나는 거기서 원위치로 돌아갔다. 여기서 이제 이런 분이 다시 영광을 받으신 것을 보고 우리가 이 분을, 그러니까 죽고 다시 사신 분을, 그 분을 사역하게 되었다.
이 사역은 옛 언약 아래 있었던 사역과는 다른 것이다. 모세의 얼굴에 있는 빛은 장차 없어질 영광이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사역은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사역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죽었고 새로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주의 형상으로 화해 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고 다시 사신 분의 영광을 거울처럼 반사한다고 했는데 거울은 반사하는 것이고 자기는 아니지만 이것은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말이고 우리 자신으로 품어낸다, 비춰낸다는 것이다. 내가 내 삶에서 죽은 자의 삶을 표현해낸다는 것이다.
끝난 사람을 표현해낸다. 표현해내는 그것이 영광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자꾸 표현해내다보면 그 형상으로 회해간다는 것이다. 거울은 아무리 비춰봐도 비추다 보면 끝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거울이 아니고 비유로 한 말이다. 거울처럼 반사한다는 뜻이지 우리가 거울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을 통해서 죽고 다시 사신 이를 내가 증거 하게 되면 나는 점점 영광에서 영광으로 화해간다. 주의 형상으로 화해간다.
이것은 사람이 노력을 해서 신이 된다는 말과는 아주 다른 말이다. 노력을 하면 신처럼 된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죽고 다시 사신 분의 영광을 봤다. 분명히 죽었는데 영광을 받았다. 죽었는데 진실하다는 이것을 본 사람은 그것을 내가 증거 할 수밖에 없다. 그것밖에는 증거 할 일이 없다. 그런데 그것이 세상에 나가면 영광스럽다는 것이다. 이 영광을 계속 품어내다 보면, 계속 증거하다 보면 나도 그런 형상으로 화 해간다. 화 해간다는 말이 형성되어 간다는 말이다.
의문의 사역은 자신의 생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으로 하는 것이다. 지식은 더하면 더 할수록 자신이 먼저 심판을 받고 또 남을 심판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도 정죄아래 놓이게 되고 남도 정죄 아래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의문의 사역은 자신의 생명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듣고 지식으로 하는 것이니까 지식은 더하면 더할수록 자신이 먼저 심판을 받고 또 남을 판단하게 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율법을 가르치면, 내다 못할 것을 가르치면 첫째는 자기가 판단을 받는다. 자기도 못하면서 그래서 설교하는 사람의 제일 고민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도 못하면서 남을 가르친다는 이것이 괴로운 것이다. 전혀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하겠지만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도 못하는데 라는 생각이 속에 있어서 그것이 제일 괴로운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남을 또 판단하게 된다. 그러니까 나도 못살고 남도 못살게 만든다. 나도 죽고 남도 죽는다.
우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내가 또 판단을 받는다. 내가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내가 다시 또 판단을 받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이 갈수록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네 번 일생동안 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자기는 자기 스스로에게 심판을 받게 되고 또 다른 사람도 심판과 정죄 아래로 끌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사역은 하면 할수록 자신의 생명이 성숙하고 주님과 하나 되서 동행함으로써 주의 형상으로 화한다. 이것은 내가 생명으로 하는 것이니까, 내 생명 안에서 적을지라도 죽고 다시 산 것을 죽고 다시 사신 이를 전하는 것이니까 표현하는 것이니까 처음에는 별것이 아닌 것 같은데 시간이 갈수록 이것이 더 분명해진다. 시간이 갈수록 자기 생명의 성숙이 일어난다.
나도 처음에 이런 사역을 할 때 지금처럼 성숙하지 않았다. 여러분이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그때 말하고 지금 말하고 내용은 다 같은 말인데 좀 성숙하냐, 미숙하냐 그 차이이다. 여러분이 그 구별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책을 읽어보면 좀 그렇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다 치우고 다시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제까지 했던 거 다 치우고 다시 썼으면 좋겠다. 그런데 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나 석가모니나 공자나 책을 안 썼는가 생각한다. 책을 쓸 겨를이 없다.
생명은 자란다. 자꾸 자꾸 성숙해가기 때문에 어제 모르던 것을 오늘 또 알아가고 어제 못하던 것을 오늘 하게 되고 율법은 점점 해도 만날 똑같다. 똑같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생명의 사역은 하면 할수록 자신의 생명이 성숙하고 주님과 하나 되어 동행함으로 주의 형상으로 화하는 것이다. 육신의 생명도 오래 함께하면 닮아 가는데 하물며 영의 생명이랴!
그러나 생명은 성숙해간다. 주님과 하나 되고 동행하게 된다. 그래서 주의 형상으로 화하는 것이다. 육신의 생명도 오래 함께 하면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부부간에도 닮아간다는 말이 있고 친구도 오래 사귄 친구는 닮아간다. 하물며 영의 생명은 어떻겠는가!
주님은 새 사람의 첫 열매로 부활하셨고 새 언약의 사역자로서 하나님을 인격으로 비춰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하신 우리의 영원한 본이시다. 그러므로 그와 동행하는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와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것이다(고후3:18).
주님은 새 사람의 첫 열매로 부활하셨고 새 언약의 사역자로서 하나님을 인격으로 비춰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신 우리의 영원한 본이다. 첫 열매로 부활했다. 그러면 우리의 목표가 어디냐? 이 사람이 우리의 목표이다. 인격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신 분, 비춰내신 분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하신 우리의 영원한 본이다. 그러므로 그와 동행하는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비춰냄으로써 그와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러 간다.
태교가운데 그런 것이 있던데 임신했을 때 아주 예쁜 얼굴이나 사진을 가져다 놓고 늘 보면 아기가 그렇게 생긴다고 한다.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흉악범을 가져다 놓고 보는 것보다는 낫겠다. 흉악범 얼굴만 매일 보고 살아봐라. 태교가 어찌되겠는가. 그런데 아주 좋은 사람의 얼굴을 갖다놓고 매일 보면 아마 영향이 있을 것이다. 정신적인 영향이 육체를 치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계속 비춰내면 그의 형상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일이다. 직업도 오래 직업에 종사를 하면 그 직업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표현이 된다. 초등학교 선생님을 오래 하면 안다.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늘 그래야하기 때문이다. 버스 안내원이 그랬다고 한다. 날마다 오라이 오라이 하다가 다 아니까 그만하겠다. 직업적인 것도 내 몸에 베인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나온다. 하물며 우리가 죽고 다시 사신 이를 지식으로가 아니고 내 생명으로 평생을 품어낸다면, 비춰낸다면 어떻게 안 닮겠는가. 담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평생을 엿 장사만 했다면 그것이 몸에 베이지 않겠는가. 평생을 버스 안내원만 했다면 몸에 안배겠는가. 배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맹모삼천지교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가 좋은 것을 본받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되기가 제일 쉬운 존재이다. 다른 동물들은 그것이 안 되는데 인간은 본받기가 쉬운 존재이다. 흉내 잘 내는 사람이 영리한 사람이다. 머리가 좋아야 흉내를 낸다. 짐승 세계로 갈수록 흉내를 잘 못 낸다. 원숭이에게 보여주면 흉내를 낼 것이다. 그런데 그 밑으로 개에게 해주면 흉내를 못 낸다. 차근차근 내려갈수록 흉내를 못 낸다. 흉내 잘 내는 아이들이 머리가 좋은 애들이다. 금방금방 본다. 사실 모든 지식은 흉내 내는 것이다. 말도 하는 대로 흉내 내는 것이 말이다. 흉내 잘 내는 사람이 영리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공부를 잘 한다.
강○○ 형제가 흉내를 잘 내기 때문에 강○○ 형제를 보고 ‘야 너 아무래도 천재기가 있다.’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시험만 보면 합격하더라. 흉내를 잘 낸다. 그 딸도 흉내를 잘 낸다. 어렸을 때 우리 이웃에 살았는데 전화를 받는데 가짜로 받는데 영락없이 전화를 한다. 한참을 뭐라고 하는데 알고 보면 가짜 전화다. 특이하다 싶은 것이 잘 가르치면 크게 될 테니 잘 가르쳐라.
우리가 주의 형상을 닮아, 나는 그 책이 제목이 너무 좋아서 샀던 것이다.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꿀 줄 어찌 알았겠는가. 참 놀라운 일이다.
8) 보화를 담은 질그릇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에게 포로 된 자들로 부터 시작 되었다. 그들은 포로 됨으로 개선장군의 향기기가 되었고 그 향을 날리는 사람들이 되었으며 소식을 전하는 편지가 되었고 그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었는데 이는 다 사역자 자신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주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보화를 담은 질그릇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포로된 자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시작이 포로 됨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랑의 포로, 그리스도에게 포로, 포로가 되어도 행복한 포로가 있다. 포로가 되면 비참한 포로가 있는가 하면 행복한 포로가 있다. 그리스도에게 포로된 것은 행복한 포로이다. 그들은 포로됨으로 개선장군의 향기가 되고, 향을 날리는 사람이 되고 소식을 전하는 편지가 되고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었다.
이는 다 사역자 자신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여기서 못을 박아놓았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나로 말미암아. 우리로 된 것이 아니다. 정말이고 참말이다. 보화를 담은 질그릇과 같다. 우리는 단지 질그릇이었는데 보화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지금 하늘로 올라가다가 잠깐 멈춰야 한다. 주의 형상으로 화해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막 가는데 그러나 우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주로 말미암은 것이다.
질그릇은 천한 것으로서 서민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세상에스는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것을 들어서 세상에서 귀하다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질그릇은 서민들이 사용하는 천한 것이고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들어서 세상에서 귀하다는 것을 부끄럽게 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흙으로 지어졌고, 노아는 네피림의 세계에서 구원의 방주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아브람은 바벨의 세대에서 부름 받았고, 모세는 팔십 세의 양치기로서 이스라엘의 목자로 선택 되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흙으로 지었고, 노아는 네피림의 세계에서 구원의 방주를 지으라는 지시를 받았고 아브람은 바벨의 세계에서 부름을 받았다. 모세는 80세의 양치기일 때 이스라엘의 목자로 선택이 되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상하게 일을 하셨다.
새 언약의 사역자들 역시 갈릴리 어부들 중에서 선택 되었고 예수를 극렬히 핍박하던 사람 중에서 사로잡은 것이다.
새 언약의 사역자들도 역시 갈릴리의 어부들 중에서 선택되었다. 예수를 극렬히 핍박하던 사울을 잡아다가 사역자가 되게 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분인가? 이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이런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분이 우리 하나님이기 때문에 소망이 있고 담대함이 있다(4:7).
하나님은 왜 이런 분인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이런 분이라는 것이다. 이런 분이 우리를 구원했다는 말이다, 고대광실에 계신분이 나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고 어부들이나 오히려 핍박하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사로잡아서 사역자로 삼은 이런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소망이 있고 담대한 것이다. 점수가 높아서 선택을 받았다면 나는 죽어도 못할 일인데 질그릇 같은 것을 들어다 썼으니까 나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학교에서 1등을 하는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은 못 따라간다. 다 할 것 같지만 못 한다. 이상하게 2등은 항상 2등이다. 1등과 2등의 차이는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시험만 보면 1등은 항상 1등이고 2등은 항상 2등이다. 그렇게 아이들의 차이가 있다. 그러면 그것은 아무리 도전해도 1등이 안 되는 것이기에 2등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는 것을 보니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1등만 뽑아서 썼다면 나는 영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어디에도 쓸데가 없는 것 같아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하나님 나를 어디에 쓰려고 나를 지었습니까? 아무데도 일할 곳도 없고 쓸모가 없습니다.’그 말이 스물여섯에 나왔다. ‘하나님 왜 나를 지어놓았습니까? 내가 보니 아무데도 쓸데가 없고 오라는데도 가라는데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나를 지어놓았습니까?’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높은데서 어떻게 그 말을 알아들으셨는지 ‘그래? 그러면 너 나오너라.’이래서 나간 것이다. 내가 만일에 좀 잘나갔더라면 물론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고 또 오라고 해도 안 갔을 것이다. 꼭 맞는 시기에 하나님께서 맞추어 오신 것 같다.
새 언약의 사역자가 되기에 무엇이 부족한가? 포로(捕虜) 됨이 자격이라면 향기가 되고 편지가 되고 거울이 된다면 무엇이 더 필요한가?.....
새 언약의 사역자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옛 언약의 사역자가 되려면 모든 것을 갖추어야 된다. 모세가 비록 80세였지만 애굽에서 40년 동안 궁중의 학술을 배웠고 미디안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면서 목자로서의 훈련을 받은 사람이다. 다윗도 여덟 번째 아들이기는 해도 용감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냥 아무나 들어서 임금노릇을 하게 하겠는가? 구약시대에는 특별한 사람이 부름을 받았으니 우리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내가 예레미야가 되겠는가? 내가 에스겔이 되겠는가? 나는 눈물이 안 나와서라도 예레미야는 못된다. 맨 날 울어야 하는데 눈물이 어디서 그렇게 많이 나오겠는가? 우리 한성이 형제 밖에는 할 사람이 없다. 그래서 특별한 사람들을 뽑은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예 소망이 없다.
그러나 새 언약의 사역자를 뽑은 것을 보니 나도 갈릴리의 어부 중에는 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는‘아, 나는 극렬히 예수를 반대했는데,’이런 사람도 있을 것인데 사도 바울을 본다면 ‘내가 사도 바울보다는 핍박을 덜 했지 않나?’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
질그릇은 자기를 자랑할 것이 없다. 오로지 보화만을 자랑한다. 보화를 자랑하는 것이 자기의 유일한 기쁨이며 자랑이다. 보화가 없으면 자신은 질그릇일 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은 보화에 달려있다. 보화는 자신의 생명이고 부활이고 영생이다. 영광이고 자랑이고 능력이다. 인생의 비극은 그릇이 나빠서가 아니다 보화가 없어서인 것이다.
질그릇은 자기를 자랑할 것이 없다. 오로지 보화만을 자랑한다. 보화가 귀해져야 자기가 귀해지지 자기가 귀해 봤자니까 죽으나 사나 보화만을 자랑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잘 되는 것이다. 질그릇이니까 보화를 자랑하는 것이 자기의 유일한 기쁨이고 그것이 자랑이다. 보화가 없으면 자기는 질그릇 밖에 안되니 누가 알아주겠는가? 자신의 모든 것은 보화에 달려있다. 보화는 자신의 생명이고 부활이고 영생이고 모든 좋은 것이다. 영광이고 자랑이고 능력이다. 이 보화가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그리스도가 내 모든 것의 모든 것이라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인생의 비극은 그릇이 나빠서가 아니라 보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왜 이렇게 지어놓았을까? 우리부모는 왜 돈이 없어서 이렇게 했을까? 나는 왜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했을까? 나는 왜 게을러서 공부를 못했을까? 오만 것이 다 있다. 그런데 그것이 나빠서가 아니라 보화가 없어서 문제다. 환경이 나빠서도 아니고 이것이 나빠서도 아니고 저것이 나빠서가 아니라 보화가 없어서 보화만 있었더라면 그것이 더욱 빛 날을 것이다. 질그릇에 보화가 있으니까 질그릇이 얼마나 빛나는가? 금 그릇에 보화가 달려있으면 금 그릇은 자가가 덕 볼일이 별로 없다. 보화로서 덕 볼 것이 별로 없다. 금이 더 좋은 것이니까!
나는 어제 저녁에 이것을 생각하는데 너무너무 감사했다. 밖에 나와서 바람 좀 쐬려고 앉아있는데 이 생각이 났다. ‘야! 질그릇의 보배’다. 질그릇의 보배다. 그래서 내가 주님 밖에 자랑할 것이 없구나! 그런데 주님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너무너무 감사하다. 내 시시한 것 자랑해 봤자 무엇 하겠는가!
사탄은 인생을 속여 비극 속에 빠뜨려 놓고 이 비극은 그릇이 나빠서라고, 인생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죽은 후에밖에는 해결이 없다고, 또 속임으로써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고 인생을 절망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은 인생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비극 속에 빠뜨려 놓고 이 비극은 그릇이 나빠서 그렇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잘못했다. 그 말이다. 인생이니 어쩔 수 없다. 포기해라 이것밖에 안 된다. 죽은 후에 밖에는 길이 없다. 천당에나 갈려고 생각해라 이렇게 밖에 안 된다. 이렇게 또 속임으로써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고 인생을 절망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흑인들의 연가를 들어보면 다 슬픈 노래들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종이고 우리는 재수 없어서 이렇게 됐다. 하지만 저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우리도 한 몫하게 된다. 전부 이런 노래들이다. 그래서 너무너무 구슬프다. 신금을 울리는 노래들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속임수다. 그렇게 해서 딴 길로 가게 만들어 천당으로 실어 보내 버린다.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옛날 종북세력 이런 사람들을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을 모아서 이북으로 보내 주면 어떻겠는가? 좋으면 그리 가면 안 되겠는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곳으로 보내주면 그 사람이 좋아하겠는가? 아니다. 물론 받아드리지도 않겠지만 그 사람들은 가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한번 뒤집고 싶을 것이지 지금 북한이 좋아서 가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남한을 뒤집어서 자기들이 한 번 해보고 싶다 이것이지 북한으로 가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나도 그 생각을 해 봤다. 공모를 해서 신청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시험 보지 말고 온 사람들을 전부 보내주면 얼마나 놓겠나!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안 간다. 절대로 안 간다. 왜냐하면 거기지금 갈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지금 여기를 뒤바꿔 보자는 것이다. 다른 길로 빼 버리면 천당으로 빼 버리고 여기저기로 다 빼 버리면 하나님은 멍청하게 돼 가지고 인생 지어놓고 허탈할 것 아니겠는가. 이것이 사탄의 수작이다. 죽은 후 밖에는 해결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 간교한 계략을 훼파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인생에게는 소망을 주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이다. 사람은 원래부터 보화를 담기 위한 질그릇으로 지어졌다. 질그릇은 사단에게는 쓸모가 없지만 하나님께는 유용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간교한 계략을 훼파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인생에게는 소망을 주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이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땅에서는 듣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사람은 원래부터 보화를 담기 위한 질그릇으로 지어졌다. 질그릇은 사단에게는 쓸모가 없지만 하나님께는 유용한 것이었다.
물건은 그 용도에 따라서 값이 달라진다. 장갑은 손에 끼워야하고 양말은 발에 신어야 한다. 무엇은 좋은 것이고 무엇은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담을 그릇으로 지음 받았다.
물건은 그 용도에 따라서 값이 달라진다.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서 값이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좋으냐 나쁘냐가 아니다. 장갑은 손에 끼면 좋은 것이고, 양말은 발에 신어야 좋은 것이다. 양말은 좋은 것이다. 장갑은 좋은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없다. 장갑이 좋으냐? 양말이 좋으냐? 할 수 없다. 어디 끼우느냐에 달려있다.
마찬가지로 내 인생도 어디 끼우느냐에 달려있다. 내 인생을 어디 쓰느냐에 알려있다. 쓰이지 않고 그냥 내 인생의 가치가 있냐 없냐, 네가 왜 내 가 가치를 안 알아 주냐, 이러고 있으면 되겠는가. 쓰이면 가치가 나오는 것이다. 무엇은 좋은 것이고 무엇은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담을 그릇으로 지어 졌으면 최고로 지어진 것이다.
이것은 최고의 은혜다. 그런대 사단은 아담에게 하나님 같이 되라고 유혹했던 것이다.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담기 위한 그릇(형상)이 맞춤인 것이다.
이것이 최고의 은혜다. 생각할수록 은혜다. 내가 하나님을 담을 그릇이다. 내가 질그릇 일수록 보화는 더욱 빛난다. 보화가 빛나면 빛날수록 이 질그릇은 가치가 있다. 이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어제 저녁에 우리 동네 가스가 좀 나와서 집 안에 앉아 있으려고 하는데 못 앉아 있어서 밖에 나와 앉아있었는데 한 없이 이 은혜가 생각나서 앉아있고 싶었다. 너무너무 큰 은혜고‘아 그렇구나! 내가 질그릇이니까 이렇구나! 이 질그릇에 보화가 왔다니!’그래서 나는 보화만을 자랑할 수밖에 없다. 다른 것은 자랑할게 없으니까 그것이 나의 유일한 기쁨이고 유일한 자랑이고 그렇다. 보화가 없으면 나는 그냥 그릇이다. 질그릇이다.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의 모든 것은 보화에 다려있다.
보화는 자신의 생명이고 부활이고 영생이다. 영광이고 자랑이고 능력이다. 무엇이 또 있는가? 더 좋은 것이 또 있는가? 없다. 부족함이 없다. 새 언약의 사역자는 부족함이 없다. 새 언약의 사역자는 부족함이 없다.
포로 됨이 자격이라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포로 되면 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편지가 되고 거울이 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런데 보화가 없어서 문제다. 이 보화를 모르면 보화인지 보화가 아닌지 모르니까 여기다가 무엇인가를 또 붙여 보려고 생각하고 또 붙여 보려고 생각한다. 부족하다고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어 놓을 때 심히 좋다고 지어 놓았는데 무엇인가를 더 보태보려다가 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는 부족한 것이 없다. 우리가 평생을 자랑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해서 거기다가 무엇인가를 더 붙여보려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옛날에 나도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리스도도 좋고 거기에 뭘 더 붙여서 장식을 하면 좋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했을 때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젊었을 때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전혀 붙일 필요가 없다. 붙이면 오히려 결함이 된다. 그냥 그대로가 완전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데 그것 이상 뭣이 더 다른 것이 있냐는 것이다. 다른 길이 없다. 길은 많지만 더 좋은 길이 없다.
“질그릇에 보화”라는데 이것보다 더 좋으 것이 어디 있나. 이 보다 더 큰 복음이 어디 있고, 이거 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나! 질그릇에 보화라는데. 그냥 읽어도 이런 책이 없다. 세상에 이렇게 감사하게 하는 책이 없다. 진짜로 없다. 우리는 복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가 조금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마라. 그리스도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평생을 가도 만족이 없다. 이것저것 찾아 돌아다니다가 거렁뱅이처럼 살다가 죽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우리의 보화다.
내가 질그릇일수록 더 보화다. 내가 형상, 껍데기란 말이다. 이미지, 껍데기일수록 더 좋다. 왜냐하면 알맹이가 들어오니까 그렇다. 하나님이 없으면 이런 세계가 없다. 세상은 전부 남자와 여자로 지었다. “사람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창1:27)했다. 그냥 사람을 지었다고 하면 다 알 텐데, 누가 모른다고 꼭 그런 소리를 썼는지. 사람을 짓는데 남자와 여자로 짓지 무엇으로 짓겠냐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것을 일부러 기록했다. 그러니까 둘이 합해서 하나 된다는 것은 너무 복된 것이다. 그런데 혼자 뭐가 되려고 했다. 혼자 하나님같이 된다고 생각했다. 혼자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고 둘이 무엇이 되는 게 얼마나 좋은가! 혼자 도 터서 산골짜기 앉아 있으면 무엇 하겠나. 술을 마시더라도 둘이 마시는 게 좋지. 혼자 도 텄다고 앉아있으면 어디에 쓸모 있겠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까지도 배필이 필요하다. ‘난 너가 없으면 안 되겠다. 나는 영이기 때문에 형상인 네가 없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축복이다. 그런데 내가 뭐라고 나 혼자 잘났다고 하겠나. 내 혼자 뭐가 되겠나. 혼자는 아무것도 안되고 아무 쓸모없다.
질그릇이 혼자 있으면 뭐 하겠나. 보화가 있어야 그릇이 된다. 곰탕이라도 담아야 가치가 있는 거지. 혼자 닦아서 반짝 반짝 빛나게 하면 어디에 소용이 있겠나. 요즘 질그릇 살 때 반짝 반짝 빛난 것을 사면 안 된다. 왜냐하면 다 납을 칠해서 그렇다. 그것을 사지 말고 얼떡얼떡 한 것을 사라. 그게 좋은 것이다. 납이 안 들어간 것, 매끌매끌하게 하려면 납이 들어가야 된다. 납이 들어간 질그릇은 중금속을 끓어 먹는 것과 같다. 반질반질한 그릇이 있으면 당장에 갖다 버리고 얼떡얼떡 한 것을 사라. 내용만 좋으면 된다. 곰탕만 맛있으면 된다. 아무리 금 그릇이라도 거기다가 맛없는 거 넣어놓으면 안 된다. 누가 그릇 보고 식당가는 사람 있는가. 내용보고 간다. 그릇은 좋은데 음식은 맛없다면 이집은 뚝배기인데 음식은 버릴 것이 없네, 그러면 장사가 된다.
인생은 질그릇의 보화다. 내 인생은 질그릇의 보화다. 난 내 인생이 확실히 질그릇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질그릇일수록 더욱 좋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질그릇일수록 더욱 좋다. 왜냐면 질그릇이니까 자기 할 일 없으니까 오직 그리스도만 전한다. 자기 자랑할 것이 없으니까 주님만 자랑한다. 그러니까 보화는 질그릇을 더 좋아한다.
금 그릇을 써 보니까 말도 잘 안 듣고, 지 자랑만 하니까 쓸모가 없다. 그런데 어디서 뚝배기 하나 구해놓았더니 할 일 없으니까, 맨날 주님만 자랑하고 보화만 자랑하고 있으니까 얼마나 좋겠나. 한번 생각해보라. 그러니까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 뭐가 부족한가. 난 자격이 없다고 하는데 왜 자격이 없냐는 것이다. 자격 없을수록 좋다는데 뭐가 문젠가. 점수가 낮을수록 더 좋다는데 뭐가 문제가 되겠나.
자랑해보라. 자랑해보면 인생이 자랑이 된다. 자랑스러운 인생이 된다. 내가 지금 이 나이에 뭐가 자랑거리가 있겠나.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집에 오면 산소통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런데 은혜를 생각하면 너무너무 충만해진다. 아무도 없는데서 울면 미쳤다고 할 것이고, 여러 사람 있는데서 울면 감동받을 것이고, 여러분이 박수도 쳐주고 이 얼마나 좋은가! 여러분이 이런 일에 박수 쳐 줄 일도 없지 않는가. 그것도 역사적인 일이고, 내가 질그릇을 자랑해도 박수 받은 일도 역사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