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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아함십보법경(長阿合十報法經) 해제
이것은 『장아함경』 제2분의 10 중 상권의 별역인데, 후한(後漢) 시대 안식국(安息國) 삼장인 안세고(安世高)가 번역한 것이다. 법수 중심으로 경이 이룩되었는데, 즉 1에서 10까지 해당되는 법수를 열 가지씩 열거하여 1백의 법수가 등장하며, 그 법수를 억념ㆍ정진ㆍ수행하면 해탈지를 얻는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제1법은 일체인은 먹는 데 있으며, 제2법은 어리석음과 애집을 버려야 하며, 제3법은 세 가지 근본 악을 제거하지 아니하면 안 되며. 제4법은 4제(諦)를 여실히 알아야 하며, 제5법은 색(色)ㆍ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다섯 감각기관을 알아야 하며, 제6법은 6내입(六內入)을 알고서 6애(六愛)를 버려야 하며, 제7법은 7각지(覺支)를 행하고서 칠유를 알 것. 제8법은 8세간법을 알고 8법멸을 하고서 8법을 알 것, 제9법은 9희(喜)를 행하여 9신지처(神止處)를 알 것, 제10법은 10종직(種直)을 지어서 열 가지 내외색입(內外色入)을 요달하여 알 것 등을 예거하여 놓은 일종의 법수경인 듯한 인상을 주며, 이를 십보경이라고도 한다.
장아함십보법경(長阿含十報法經)1) 상권
후한(後漢) 안식국삼장(安息國三藏) 안세고(安世高) 한역
이와 같이 들었다.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셨다.
이 때 현자(賢子) 사리왈(舍利曰:舍利弗)이 여러 비구에게 설법을 듣도록 청하였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으며, 슬기로움도 있고 교묘함도 있으며, 청정(淸淨)과 번뇌의 제멸(除滅)을 완전히 갖추어 구경(究竟)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을 설하리니, 잘 들으시오.
그것은 하나에서 시작해 하나씩 증가하여 열에 이르는 법이니, 잘 듣고 마음을 기울여 마음에 새기고 진리의 말씀[如言]을 잘 들으시오.”
여러 비구들은 현자 사리왈에게 청하였다.
“듣고 싶습니다.”
사리왈이 곧 말하였다.
“하나에서 시작해 하나씩 증가하여 열에 이르는 법이 있으니, 이 모두는 무위(無爲)를 성취하게 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며 모든 번뇌를 없애는 것입니다.
그 첫째의 한 가지 법은 수행자가 구경의 무위(無爲)를 이루기 위하여 행(行)을 오로지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의 한 가지 법은 마음이 몸을 떠나지 않도록 사유(思惟)하는 것입니다
셋째의 한 가지 법은 알아야 할 세간(世間)의 거침과 미세함입니다.
넷째의 한 가지 법은 버려야 할 교만입니다.
다섯째의 한 가지 법은 마음에 새겨야 할 근본적인 관찰[本觀]2)입니다.
여섯째의 한 가지 법은 근본적인 관찰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일곱째의 한 가지 법은 들어가기 어려운 중지하지 않는 선정[不中止定]입니다.
여덟째의 한 가지 법은 마음[意]을 그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홉째의 한 가지 법은 모든 사람들이 음식[食]에 의지해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열째의 한 가지 법은 마음에 의심이 없도록 증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열 가지 법입니다. 이것은 그르지 않고 이것은 다르지 않으며, 진실[諦]하고 여여[如]하며, 미혹되지 않고 전도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실하게 지혜로운 마음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그리고 첫째의 두 가지 법은 수행자가 구경의 무위를 얻기 위해선 마땅히 뜻을 지니고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의 두 가지 법은 더욱 열심히 수행해야 할 지(止)와 관(觀)입니다.
셋째의 두 가지 법은 마땅히 알아야 할 명(名)과 자(字)3)입니다.
넷째의 두 가지 법은 버려야 할 어리석음과 세간의 애착입니다.
다섯째의 두 가지 법은 마땅히 없애야 할 남부끄러움 없음[不愧]과 제 부끄러움 없음[不 ]입니다.
여섯째의 두 가지 법은 결정하기 어려운 두 가지 법인 부당함과 타당함입니다.
일곱째의 두 가지 법은 마땅히 알아야 할 타당함과 부당함입니다.
여덟째의 두 가지 법은 구해야 할 진힐(盡黠)과 불부생힐(不復生黠)4) 입니다.
아홉째의 두 가지 법은 사람이 본래 어떤 인연으로 세간에서 고통을 받는가를 알아야 하고, 또한 어떤 인연으로 세간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열째의 두 가지 법은 응당 스스로 증득해야 할 지혜와 해탈입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20가지 법입니다. 이것은 그르지 않고 이것은 다르지 않으며, 증득함도 있고 여 여하며, 미혹되지 않고 전도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실하게5)지혜로운 마음으로 관찰한 것 입니다.
그리고 첫째의 세 가지 법은 수행자가 구경의 무위를 얻기 위하여 지혜로운 이를 섬기고, 법과 경을 들으며, 또 마땅히 근본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둘째의 세 가지 법은 마땅히 사유해야 할 희망함[欲]과 생각[念]이 있는 선정, 희망함은 없고 생 각만 있는 선정, 희망함도 없고 또 생각도 없는 선정입니다.
셋째의 세 가지 법은 알아야 할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입니다.
넷째의 세 가지 법은 버려야 할 욕애(欲愛)ㆍ색애(色愛)ㆍ무색애(無色愛)입니다.
다섯째의 세 가지 법은 버려야 할 근본적인 세 가지 악(惡)인 탐욕[貪欲惡]ㆍ성냄[瞋恚惡]ㆍ어리 석음[愚癡惡]입니다.
여섯째의 세 가지 법은 증장시켜야 할 탐욕이 없는 선근(善根)ㆍ성냄이 없는 선근ㆍ어리석음이 없는 선근입니다.
일곱째의 세 가지 법은 증득하기 어려운 상(相)이니, 곧 선정의 상[定相]ㆍ선정에 머무는 상[定 止相]ㆍ선정에서 일어나는 상[定起相]입니다.
여덟째의 세 가지 법은 수행해야 할 3활향(活向:解脫門)인 공(空)삼매ㆍ무원(無願)삼매ㆍ무상(無相)삼매입니다.
아홉째의 세 가지 법은 알아야 할 3통(痛:受)인 괴로운 느낌[苦痛]6)
ㆍ 즐거운 느낌[樂痛]ㆍ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不樂不苦痛]입니다.
열째의 세 가지 법은 스스로 증득해야 할 다시 더 배울 것 없는 지혜, 즉 전생을 아는 지혜ㆍ어디에 태어날지를 아는 지혜ㆍ더 이상 제거할 것이 없는 지혜입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30가지 법입니다. 이것은 그르지 않고 다르지 않으며, 진실하고 여여하며, 미혹되지 않고 전도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실하게 지혜로운 마음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그리고 첫째의 네 가지 법은 수행자가 구경의 무위를 이루고, 천상과 인간에 태어나게 하는 4륜(輪)이니, 곧 마지막 함이 없는 것으로서 좋은 고을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에게 의지하며, 스스로 바른 원(願)을 내고, 전생의 선근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의 네 가지 법은 더욱 열심히 닦아야 할 4의지(意止:念處)입니다. 즉 자신의 몸을 관찰하고 남의 몸을 관찰하며 자신과 남의 몸을 관찰하되,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하고 마음을 집중하여 세간의 어리석음과 고뇌를 벗어납니다. 통양(痛痒:受)과 마음[意]과 법(法)에 대해서도 몸을 관찰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합니다.
셋째의 네 가지 법은 알아야 할 네 가지 음식[飯], 즉 단반( 飯:段食)ㆍ낙반(樂飯:觸食)ㆍ염반(念飯:思食)ㆍ식반(識飯:識食)입니다.
넷째의 네 가지 법은 버려야 할 네 가지 결박[ ], 즉 애욕의 결박ㆍ마음으로 옳다고 여기는 결박ㆍ계율과 원(願)의 결박ㆍ몸을 받는 결박입니다.
다섯째의 네 가지 법은 줄여야 할 네 가지 과실[失], 즉 계(戒)의 과실ㆍ마음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의 과실ㆍ행동의 과실ㆍ업(業)의 과실입니다.
여섯째의 네 가지 법은 증장시켜야 할 네 가지 성취, 즉 계의 성취ㆍ마음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의 성취ㆍ행동의 성취ㆍ업의 성취입니다.
일곱째의 네 가지 법은 알기 어려운 4제(諦)이니, 곧 고제(苦諦)ㆍ습제(習諦:集諦)ㆍ진제(盡諦:滅諦)ㆍ수멸고제(受滅苦諦:道諦)입니다.
여덟째의 네 가지 법은 지켜야 할 네 가지 지혜[黠]이니, 곧 괴로움에 대한 지혜[苦黠]ㆍ괴로움의 쌓임에 대한 지혜[習黠]ㆍ괴로움의 사라짐에 대한 지혜[盡黠]ㆍ사라짐에 이르는 방법에 대한 지혜[道黠]입니다.
아홉째의 네 가지 법은 알아야 할 네 가지 인식[識]이니, 곧 약간의 인식[少識]ㆍ많은 인식[多識]ㆍ한량없고 소유하지도 사용하지도 않는 인식ㆍ많은 것을 알고 한량없는 것을 알며 소유하지도 사용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아는 지혜로운 인식입니다.
열째의 네 가지 법은 스스로 증득해야 할 것이니, 첫 번째는 법신(法身)을 알아야 하고, 두 번째는 법의 뜻을 알아야 하며, 세 번째는 법안(法眼)을 알아야 하고, 네 번째는 법의 지혜[法慧]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40가지 법입니다. 이것은 그르지 않고 이것은 다르지 않으며, 진실하고 여여하며, 미혹되지 않고 전도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실하게 지혜로운 마음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그리고 첫째의 다섯 가지 법은 수행자가 구경의 무위를 얻기 위해 닦는 5단의(斷意)이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도를 수행하는 제자는 도에 대한 믿음이 있고 선근이 있어 인욕선인(忍辱仙人)처럼 누구도 그를 파괴할 수 없으니, 하늘이나 악마나 범천, 또는 그 밖의 세간이겠습니까? 또 숨기는 것도 없고 꾸미는 것도 없이 참되고 바르며, 몸으로 행할 일이 있으면 뜻을 도에 두고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몸도 또한 병이 없도록 편안하고 쾌적하게 하며, 마땅히 지켜야 할 바대로 충실하게 수행하며, 몸을 크게 춥게 하지도 않고 크게 덥게 하지도 않으며, 성내지 않고 때 맞추어 생활하여 먹은 음식을 잘 소화시키고 몸을 편안하고 조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정진하는 행을 일으키고 또 정진의 방편을 살펴서 훌륭한 법을 확고히 증득하고 뜻으로는 방편을 버리지 않으며, 차라리 살ㆍ힘줄ㆍ뼈와 온몸이 없어질지언정 정진을 중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증득해야 할 행(行)은 지혜를 써서 기멸(起滅:生滅)에서 벗어나는 길을 증득하는 것이요, 반드시 싫어하지 않아야 할 행은 곧장 괴로움을 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 가지 단의(斷意)입니다.
둘째의 다섯 가지 법은 더욱 열심히 닦아야 할 덕(德)인 다섯 가지 정(定)입니다. 도를 닦는 제자는 자기 몸을 스스로 지켜 기쁨을 얻고 (그 기쁨에) 몸을 담궈 적시며, 스스로 즐거움을 지켜 기쁨에 도달하지 못하는 곳이 온몸 어디에도 없게 합니다. 비유하면 지혜로 목욕하는 자와 지혜로 목욕하는 제자와 같습니다. 제자는 나무통이나 가마솥 같은 그릇에 조두(澡豆:세탁제)를 물에 풉니다. 그리고 물에 풀고 섞어 조두가 때에 붙게 하면 때를 충분히 적시기 때문에 안팎으로 때에 붙어서 다시는 흩어지지 않습니다. 도를 수행하는 이도 그와 같아서 그 몸을 스스로 지키고 사랑하여 즐거움을 내고, 적시고 화합하여 서로 가까이하고 서로 붙게 하면 스스로 즐거움을 지키기 때문에 즐거움이 붙지 않는 곳이 온몸 어디에도 없게 됩니다. 도를 닦는 제자들이여, 이것이 다섯 가지 정의 첫 번째 행입니다.
또 도를 지닌 제자는 그 몸이 이미 즐거워져서 몸이 적시어지면 기쁨을 확고히 해 도달하지 못하는 곳이 온몸 어디에도 없게 합니다. 비유컨대 언덕의 샘물 못과 같습니다. 샘물은 위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동쪽에서 온 것도 아니며, 또 서쪽에서 온 것도 아니고 북쪽에서 온 것도 아닙니다. 오직 샘에서 풍부하게 솟아나는 물, 촉촉히 솟아나 샘을 가득 채우는 물이 샘을 적셔, 시원한 물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어느 한 곳도 없게 하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 제자들의 행도 그와 같아서 이 몸의 확고한 즐거움으로 몸을 적셔 확고한 즐거움이 미치지 않는 곳 없이 온몸에 두루하게 합니다. 도를 닦는 제자들이여, 이것이 다섯 가지 정의 두 번째 행입니다.
또 도를 지닌 제자는 그 몸이 사랑함에도 집착하지 않고 즐거움에도 집착 하지 않으며 서로 연해서 서로 핍박하는 모양에 이르러 온몸이 두루 즐거워하지 않는 데에 도달합니다. 비유컨대 연꽃이 물 속에서 생겨 물 속에서 자라 뿌리ㆍ줄기ㆍ잎에 이르기까지 모두 차가운 물에 두루 적시어짐과 같습니다. 도를 닦는 제자도 그와 같아서 그 몸을 사랑함과 즐거워함 없음으로 적셔 사랑함과 즐거워함 없음이 온몸에 두루하게 합니다. 도를 닦는 제자들이여, 이것이 다섯 가지 정의 세 번째 행입니다.
또 도를 지닌 제자는 그 몸이 뜻을 청정히 하고 없애 버리고 나서 행을 배우고 행을 이루어, 뜻을 청정히 하고 뜻을 없앰이 도달하지 못하는 곳이 온몸 어디에도 없게 합니다. 비유컨대 네 종성과 네 종성의 아들을 여덟 길[丈]이나 아홉 길 되는 흰 모포로 머리부터 발까지 온몸을 싸면 흰 모포나 깨끗한 모포에 싸이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도를 닦는 제자도 그와 같아서 그 몸이 뜻을 청정히 하고 뜻을 없애고 나서, 행함이 있으면 이미 뜻이 청정해지고 뜻이 없어지지 않은 곳이 온몸 어디에도 없게 합니다. 도를 닦는 제자들이여, 이것이 다섯 가지 정의 네 번째 행입니다.
또 도를 지닌 제자는 몸[身]을 감수(感受)하여 진리를 관찰하고 나서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지속하며 충분히 감수합니다. 비유컨대 선 사람이 앉은 사람을 관찰하고 앉은 사람이 누운 사람을 관찰하는 것과 같습니다. 도를 닦는 제자의 행도 그와 같아서 행(行)과 상(相)과 사유(思惟)를 감수하여 충분히 감수하고, 충분히 감수함으로써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실행하며 충분히 감수합니다. 도를 닦는 제자들이여, 다섯 가지 정의 다섯 번째 행입니다.
셋째의 다섯 가지 법은 마땅히 알아야 할 다섯 가지 종(種:蘊)이니, 첫 번째는 물질의 종[色受種:色取蘊], 두 번째는 느낌의 종[痛受種:受取蘊], 세 번째는 생각의 종[想受種:想取蘊], 네 번째는 지어감의 종[行受種:行取蘊], 다섯 번째는 의식의 종[識受種:識取蘊]입니다.
넷째의 다섯 가지 법은 마땅히 버려야 할 5개(蓋)이니, 첫 번째는 애욕의 덮개, 두 번째는 성냄의 덮개, 세 번째는 수면의 덮개, 네 번째는 희롱과 즐김의 덮개, 다섯 번째는 후회와 의심의 덮개입니다.
다섯째의 다섯 가지 법은 마땅히 줄여야 할 다섯 가지 마음의 못[釘]입니다. 만일 배우는 이가 도(道)를 믿지 않고 의심하여 (자신을) 낮추지 않고 (도를) 옳다고 하지 않으며 (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것은 마음의 첫 번째 못을 뽑아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도의 가르침[道法]과 교훈[敎誡:戒]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며, 또 만일 배우는 자가 도의 무리[道散:僧]에 있으면서 명예가 있는 자, 지혜로운 자, 같이 배우는 자들에게 나쁜 말을 하고 흩고 괴롭힐 생각만 한다면 (이것은 마음의 못을 뽑아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도와 명망이 있는 자, 지혜로운 자, 같이 배우는 자가 있을 때 그에게 나쁜 말을 하고 흩고 괴롭힐 생각만 한다면 이것은 다섯 번째 마음의 못을 뽑아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여섯째 다섯 가지 법은 마땅히 증장시켜야 할 5근(根)이니, 첫 번째는 믿음의 뿌리[信根], 두 번째는 정진의 뿌리[精進根], 세 번째는 뜻의 뿌리[意根], 네 번째는 정의 뿌리[定根], 다섯 번째는 지혜의 뿌리[慧根]입니다.
일곱째 다섯 가지 법은 해탈을 얻게 하는 다섯 가지 행으로, 이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도를 닦는 제자라면 도를 열심히 배워 애욕(愛欲)을 생각하지 않으며, 마음이 애욕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이 애욕을 좋게 여기지도 않으며, 마음이 애욕을 그치려 하지 않고, 마음이 애욕을 넘어서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 (애욕의) 마음을 오그라트리고 그 마음을 싫어하며, 그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그 마음을 사용하지 않으며, 그 마음의 더러움을 제거하여 나쁘지 않게 합니다. 비유컨대 닭의 털이나 힘줄이 불에 들어가면 곧 오그라들고 쭈그러져서 다시 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도를 본 제자가 마음을 굳건히 하여 애욕을 생각하지 않아 곧 애욕을 부리지 않고 곧 애욕을 좋게 여기지도 않으면, 마음은 애욕에 떨어지지 않고 마음은 곧 오그라듭니다. 마음이 곧 오그라들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문득 도를 생각하는 것도 벗어나게 됩니다. 애욕의 행위에서 이미 벗어난 뒤에는 (애욕의) 마음이 생기건 (애욕을 버리려는) 마음이 굳건하건 마음이 바로 마음이 아니어서 그 마음에서 벗어나고 그 마음에서 해탈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애욕의) 마음을 오그라트리려 하지도 않고, 그 (애욕의) 마음을 싫어하지도 않으며, 그 (애욕의) 마음을 일으키더라도 장애될 것이 없고 사용할 것이 없어 그 마음은 편안하나니, 이는 마음으로 행하고 열심히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시 애욕의 인연으로부터 근심과 괴로움의 번뇌가 생기더라도, 생각[念]한 뒤에 그것을 해탈하고 쉬며 집착하지 않고 벗어나 다시는 그런 인연으로 감수[痛痒]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애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성냄[瞋恚]과 성냄 아님ㆍ침해[侵]와 침해 아님ㆍ물질[色]과 물질 아닌 것에 있어서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도를 닦는 제자가 마음을 굳건히 해 다시는 몸[身]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마음을 굳건히 해 몸을 생각하지 않은 뒤에는 곧 몸을 탐내지 않고, 몸을 좋게 여기지 않고, 몸에 머무르지 않게되며, 마음이 애욕에 떨어지지 않게 되고 문득 마음 일으키는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도를 닦는 제자들이여, 마치 닭의 털이나 힘줄이 불에 들어가면 곧 오그라들고 쭈그러져서 다시는 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도를 닦는 제자도 그와 같아서 이미 견해가 굳건해지면 다시는 몸을 생각하지 않으며, 마음이 몸을 좋게 여기지도 않고, 마음이 몸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마음이 넘어서려 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은 그 마음을 오그라트리고 그 마음을 싫어하여 일으키지 않습니다. 스스로 일어나는 것을 지키고 나쁜 짓을 그치며, 나쁜 것에 대해서는 무위(無爲)를 생각하고, 몸을 제도하려 하고 몸을 벗어나기를 생각하며, 하건 하지 않건 권도(勸道)를 생각하고 옳은 것을 생각하며, 그치려고 생각하고 건너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 마음을 오그라트리려 하지도 않고 그 마음을 싫어하지도 않지만 그 마음은 생각을 펴더라도 장애될 것이 없고 사용할 것이 없어 그 마음은 안온하나니, 이는 행으로부터 잘 행했기 때문이니라.
만일 몸의 인연으로부터 죄와 괴로움과 근심이 생기더라도, 죄와 괴로움과 근심이 인연으로 생긴 뒤에 이로부터 벗어나고 그쳐 집착하지 않고 넘어서며, 다시는 이런 인연으로부터 감수[痛]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도를 닦는 제자는 이와 같이 몸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여덟째의 다섯 가지 법은 도를 일으키는 다섯 가지 지혜로운 선정입니다. '도덕을 갖춘 자는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받들어 따르는 것도 없다'고 하면, 이는 첫 번째 지혜가 안에서 저절로 생긴 것입니다. '이 정(定)은 보통 사람은 이루지 못하고 지혜로운 자만 될 수 있다'고 하면, 이것은 두 번째 지혜가 안에서 생긴 것입니다. '이 정은 한결같아야 이루어지고 이에 의지해 도의 행을 얻는다'고 하면, 이것은 세 번째 지혜가 안에서 생긴 것입니다. '이 정은 기쁜 견해에 이르게 하고 느낌도 또한 좋다'고 하면 이것은 네 번째 지혜가 안에서 생긴 것입니다. '그 정(定)으로부터 마음대로 앉고 마음대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이 정이다'고 하면, 이것은 다섯 번째 지혜가 안에서 생긴 것입니다.
아홉째의 다섯 가지 법은 마땅히 알아야 할 다섯 가지 해탈입니다. 만일 학자가, 도인이 경을 말하면 도인에게 듣고, 또 지혜로운 사람이 말하면 그 지혜로운 사람에게서 들으며, 또는 같은 도반에게서 듣고는 그 들은 대로 법과 이치와 행을 알고, 법을 이해하고는 곧 이치를 알며, 이치를 알고는 곧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고 나서는 곧 기뻐하며, 기뻐하고는 몸이 즐겁고, 즐겁고 나서는 곧 마음이 안정되며, 마음이 안정되고 나서는 사실대로 알고 사실대로 보며, 사실대로 알고 보고 나서는 곧 물리치고 쓰지 않으며, 쓰지 않고는 곧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는 곧 해탈을 얻는다면, 이것이 수행자의 첫 번째 해탈입니다.
이미 머무름을 얻은 어떤 수행자는 바른 뜻[正意]을 얻지 못했다가 곧 바른 뜻을 얻고, 선정의 마음[定意]을 얻지 못했다고 선정의 마음을 얻으며, 결박을 풀지 못했다가 결박을 풀고, 함이 없음[無爲]을 얻지 못했다가 곧 함이 없음을 이룹니다. 혹 때로 부처님께서 경을 연설하시지 않고, 지혜로운 이와 같은 도반들이 또한 경을 연설하지 않더라도 그는 들은 대로 받은 대로 곧 외우고 읽나니, 이것이 수행자의 두 번째 해탈입니다.
또한 혹 때로 부처님께서 경을 연설하시지 않고 지혜로운 자들과 도반들도 경을 연설하지 않으면 다만 들은 법대로 받은 법대로 배우는 이들에게 갖추어 말해 주나니, 이것이 수행자의 세 번째 해탈입니다.
혹 때로 부처님께서 경을 연설하시지 않더라도 배우는 이는 다만 듣고 받은 법대로 혼자 어느 곳에서 생각하여, 법을 듣고 받은 그대로 갖추어 외우고 읽으며 곧 그 이치를 이해하고 그 법을 이해하나니, 이것이 수행자의 네 번째 해탈입니다.
혹은 들은 대로 하지 않고 받은 대로도 하지 않으며, 또한 생각하지도 않고 다만 행에 따라 한결같은 정(定)의 모양을 취하여 충분히 느끼고[受] 충분히 생각하며[念] 충분히 행하기도 합니다. 그는 정의 모양을 받아들여 충분히 느끼고 충분히 생각하며 충분히 행하고 나서는 익숙해짐에 따라 곧 법다워지고, 곧 이치대로 이해하며, 곧 법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치대로 이해하고 법대로 이해하고 나서는 곧 생(生)을 옳게 여기고, 생을 옳게 여기고 나서는 곧 생(生)을 가엾이 여기며, 생을 가엾이 여기고 나서는 곧 몸이 즐거워지고 몸으로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즐겁고 나서는 곧 그치고 곧 사실대로 알고 사실대로 보며 곧 뉘우칩니다. 뉘우치고 나서는 곧 욕심내지 않고, 욕심내지 않은 뒤에는 곧 해탈을 얻습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다섯 번째 해탈입니다.
만일 도를 닦는 수행자가 이 그침[止]을 얻고 이 행(行)을 얻는다면, 그는 그 마음이 그침을 얻지 못했으면 곧 그치게 되고, 마음이 안정되지 못했으면 곧 안정되게 되며, 결박이 없어지지 못했으면 곧 없어지게 되고, 세상을 벗어나 무위의 도를 얻지 못했으면 곧 세상을 벗어나 무위의 도를 얻게 됩니다.
열째의 다섯 가지 법은 스스로 증득하여 아는 것이니, 첫 번째는 불학(不學:無學)7)의 음(陰)이요, 두 번째는 불학의 계(戒)요, 세 번째는 불학의 정(定)이요, 네 번째는 불학의 혜(慧)요, 다섯 번째는 불학의 세상을 벗어난 해탈(解脫)8)입니다.
이것이 배우는 이의 쉰 가지 법입니다. 이것은 그른 것이 아니며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며, 진실하고 여여하며, 미혹되지 않고 전도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실하게 지혜로운 마음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그리고 첫째의 여섯 가지 법은 마지막 함이 없음인 것으로서 특수하고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몸의 행동[身行]을 고르게 하여 부처님이나 지혜로운 이나 같은 도반과 같이 머무는 것, 이 법은 특수하고 중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랑과 존경이 생겨나게 되고, 마음으로 옳게 여겨 사랑과 존경이 생겨나게 되면 남들과 모여 있을 적에 다투거나 시비하지 않게 되고, 언제든지 정을 행하고 인욕을 닦게 됩니다. 또 입으로 하는 말[口言]과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心行]을 고르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계율을 범하지 말고 파하지 말며 느슨하게 지니거나 숨기지도 말고 잃어버리지도 말아야 하니, 이는 도가 있는 자들이 갖추어야 할 행입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도 계를 행하는 이들이고 나도 계를 지키는 자이니 마땅히 지혜로운 이, 같은 도반들과 같이 하여야 합니다. 싫어하는 것을 벗어나기를 구하는 자들은 바로 고통을 없앱니다. 이런 무리처럼 나도 또한 이와 같은 무리이니 지혜로운 이, 같은 도반들과 같이 하여야 합니다. 이 법은 특수하고 중하게 여겨야 할 것입다. 또 만일 법에 따라 얻은 이익이 있으면 그 얻은 것은 모두 발우에 있는데, 이와 같은 이익을 당연히 같은 도반들과 함께 하고 혼자만 가지거나 숨기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 법은 특수하고 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니, 이로부터 사랑과 존경과 옳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사랑과 존경과 옳게 여기는 마음이 생겨 실천하고 나면 합하고 모이더라도 다투거나 시비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을 행하며 이로부터 인욕을 얻게 됩니다.
둘째의 여섯 가지 법은 보호하여야 할 6공거(共居)입니다. 눈으로 색(色)을 보더라도 기뻐하지 않고 또 싫어하지도 않으며 다만 관찰하여 마음대로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귀ㆍ코ㆍ입ㆍ몸도 또한 마찬가지이며, 의식으로 법을 알더라도 또한 기뻐하지 않고 성내지도 않으며 다만 관찰하고 그쳐 마음으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의 여섯 가지 법은 알아야 할 6내입(內入)이니, 눈[眼內入]과 귀ㆍ코ㆍ입ㆍ몸ㆍ의식[意內入]입니다.
넷째의 여섯 가지 법은 버려야 할 여섯 가지 애착이니, 눈의 애착과 귀ㆍ코ㆍ입ㆍ몸ㆍ의식의 애착입니다.
다섯째의 여섯 가지 법은 줄여야 할 여섯 가지 공경하지 않음이니, 첫 번째는 부처님을 공경하지 아니함이요, 두 번째는 법을 공경하지 아니함이요, 세 번째는 같은 도반을 공경하지 아니함이요, 네 번째는 계를 공경하지 아니함이요, 다섯 번째는 나쁜 말을 함이요, 여섯 번째는 악지식(惡知識)입니다.
여섯째의 여섯 가지 법은 증장시켜야 할 여섯 가지 공경함이니, 첫 번째는 부처님을 공경함이요, 두 번째는 법을 공경함이요, 세 번째는 같은 도반을 공경함이요, 네 번째는 계를 공경함이요, 다섯 번째는 좋은 말을 함이요, 여섯 번째는 선지식(善知識)입니다.
일곱째의 여섯 가지 법은 세상을 벗어났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여섯 가지 행(行)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평등한 마음과 선정의 마음을 벌써 행하였고 이미 소유하였다'고 하면서 또 '그러나 나의 마음 속 성냄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면, 곧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여야 합니다.
'그런 말을 마라. 왜냐 하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평등한 마음과 선정의 마음을 이미 행하고 이미 일으키고 이미 소유했다면 어찌 성냄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건 있을 수 없다. 왜냐 하면 평등한 마음과 선정의 마음이 있으면 성냄을 없애기 때문이다.'
두 번째, 만일 어떤 수행자가 '나는 자비한 마음과 선정의 마음을 이미 짓고 행하고 지녔지만 죽이려는 뜻만은 없애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에게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런 말을 마라. 왜냐 하면 자비한 마음과 선정의 마음을 이미 행하고 이미 짓고 이미 지녔다면 어찌 죽이려는 뜻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건 있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자비한 마음과 선정의 마음이 있으면 죽이려는 뜻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 어떤 학자가 '나는 기뻐하는 마음과 평등한 선정의 마음을 이미 행하고 이미 지었고 이미 지녔지만 뜻만은 그치지 못하고 옳지도 못하다'고 한다면 그에게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런 말을 마라. 왜냐 하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평등한 마음과 선정의 마음이 있어서 이미 행하고 이미 증가하였고 이미 지녔다면 어찌 안정되지 못하고 옳지 못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일은 없나니, 왜냐 하면 평등한 마음과 선정의 마음은 옳지 못함과 불안정을 없애기 때문이다.'
네 번째, 어떤 학자가 '나는 관찰과 선정의 마음을 이미 행하고 이미 짓고 이미 지녔지만 애욕과 성냄만은 제거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에게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런 말을 마라. 왜냐 하면 이미 관찰과 선정의 마음이 있다면 곧 애욕과 성냄은 없어지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만일 수행자가 '나는 의심이 없지만 다만 마음대로 못한다'고 한다면, 그에게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런 말을 마라. 왜냐 하면 법을 알면 의심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어떤 수행자가 '이미 선정의 마음을 얻어 이미 만족했으나 마음만은 생각과 의식에 머무른다'고 한다면, 그에게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런 말을 마라. 그건 있을 수 없다. 또 (선정의 마음을 얻어 생각하는 바가 없이 이미 만족했는데 또 마음이 생각과 의식을 행한다)는 그런 생각도 말 것이니, 그건 있을 수 없다. 왜냐 하면 마음이 이미 해탈한 이는 다시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덟째의 여섯 가지 법은 마땅히 가져야 할 여섯 가지 생각[念]이니, 첫 번째는 부처님을 생각함이요, 두 번째는 법을 생각함이요, 세 번째는 같은 도반을 생각함이요, 네 번째는 계를 생각함이요, 다섯 번째는 보시를 생각함이요, 여섯 번째는 하늘을 생각함입니다.
아홉째의 여섯 가지 법은 마땅히 알아야 할 여섯 가지 한량없음[無量]이니, 첫 번째는 보는 것이 한량없음이요, 두 번째는 듣는 것이 한량없음이요,세 번째는 이익이 한량없음이요, 네 번째는 계행이 한량없음이요, 다섯 번째는 일이 한량없음이요, 여섯 번째는 생각이 한량없음입니다.
열째의 여섯 가지 법은 증득하면 저절로 알게 되는 여섯 가지 앎[知]이니, 첫 번째는 신통[神足]이요, 두 번째는 모든 것을 들음[徹聽]이요, 세 번째는 사람의 마음을 앎이요, 네 번째는 과거 어디에서 왔는지 그 유래를 앎이요, 다섯 번째는 어느 곳에 가 태어날 것인지를 앎이요, 여섯 번째는 번뇌가 다함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60가지 법입니다. 이것은 그른 것이 아니고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며, 진실하고 여여하며, 미혹되지 않고 전도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실하게 지혜로운 마음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그리고 첫째의 일곱 가지 법은 수행자를 구경의 무위에 이르게 하는 일곱 가지 보배이니, 첫 번째는 믿음의 보배요, 두 번째는 계의 보배요, 세 번째는 남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는 보배요, 네 번째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보배요, 다섯 번째는 학식의 보배요, 여섯 번째는 보시함의 보배요, 일곱 번째는 지혜의 보배입니다.
둘째의 일곱 가지 법은 행하여야 할 일곱 가지의 각의(覺意:覺分, 覺支)니, 첫 번째는 생각하는 각의[意覺意:念覺支]요, 두 번째는 법을 분별하는 각의[分別法覺意:擇法覺支]요, 세 번째는 정진하는 각의[精進覺意]요, 네 번째는 기뻐하는 각의[可覺意:喜覺支]요, 다섯 번째는 제거하는 각의[猗覺意:除覺支]요, 여섯 번째는 선정의 각의[定覺意]요, 일곱 번째는 보호하는 각의[護覺意:捨覺支]입니다.
셋째의 일곱 가지 법은 마땅히 알아야 할 일곱 가지 세계[有]이니, 첫 번째는 좋지 못한 세계(지옥)요, 두 번째는 축생의 세계요, 세 번째는 아귀의 세계요, 네 번째는 인간의 세계요, 다섯 번째는 천신의 세계요, 여섯 번째는 행(行:業)의 세계요, 일곱 번째는 중유(中有:中陰)의 세계입니다.
넷째의 일곱 가지 법은 버려야 할 일곱 가지 결박[結]이니, 첫 번째는 애욕의 결박이요, 두 번째는 옮지 못함의 결박이요, 세 번째는 즐거움의 결박이요, 네 번째는 스스로 교만함의 결박이요, 다섯 번째는 삿됨의 결박이요, 여섯 번째는 어리석음의 결박이요, 일곱 번째는 의심의 결박입니다.
다섯째의 일곱 가지 법은 없애야 할 나쁜 사람의 일곱 가지 법이니, 첫 번째는 믿지 않음이요, 두 번째는 남에게 부끄러워함이 없음이요, 세 번째는 스스로 부끄러워함이 없음이요, 네 번째는 정진하지 아니함이요, 다섯 번째는 잊는 것이요, 여섯 번째는 선정[定]이 없음이요, 일곱 번째는 지혜가 없음입니다.
여섯째의 일곱 가지 법은 지혜를 증장시키는 슬기로운 이의 일곱 가지 법이니, 첫 번째는 믿음이요, 두 번째는 남에게 부끄러워함이요, 세 번째는 스스로 부끄러워함이요, 네 번째는 정진할 마음을 냄이요, 다섯 번째는 뜻을 지킴이요, 여섯 번째는 선정이요, 일곱 번째는 지혜입니다.
일곱째의 일곱 가지 법은 느껴 알기 어려운 일곱 가지 식이 머무르는 곳[識止處]입니다. 형상이 있는 몸에 서로 다른 몸과 다른 모양이 있는 곳, 이를테면 인간 혹은 천상과 같은 곳이니, 이것이 첫 번째 식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형상이 있는 몇 가지 종류의 몸에 같은 생각을 하는 곳, 이를테면 하늘 위의 하늘로서 범천이라 이름하는 높은 세계와 같은 곳이니, 이것이 두 번째 식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형상이 있는 세계에 있고 같은 몸에 같은 생각을 하는 곳, 이를테면 자명천(自明天)과 같은 곳이니, 이것이 세 번째 식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형상이 없는 세계에서 수행하는 이가 일체의 형상을 벗어나 성내는 생각을 없애고 한량이 없는 행(行)으로 머무는 곳, 이를테면 공천(空天)과 같은 곳이니, 이것이 네 번째 식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형상이 없는 세계에서 수행하는 이가 일체 공으로부터 벗어나 한량이 없는 식(識)을 지으며 머무는 곳, 이를테면 식천(識天)과 같은 곳이니, 이것이 다섯 번째 식이 머무르는 곳입니다.9)
형상이 있지 않은 세계에서 수행하는 이가 생각이 있지 않고 또한 생각을 여읜 것도 아닌 것, 이를테면 무상천(無想天)과 같은 곳이니, 이것이 일곱 번째 식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여덟째의 일곱 가지 법은 확고한 마음이 생기도록 실천해야 할 것이니, 첫 번째는 바른 견해, 두 번째는 바른 생각, 세 번째는 바른 말, 네 번째는 바른 법, 다섯 번째는 바른 업, 여섯 번째는 바른 방편, 일곱 번째는 바른 마음입니다.
아홉째의 일곱 가지 법은 마땅히 알아야 할 일곱 가지의 현재 은혜입니다.
'첫 번째, 도를 수행하는 이가 부처님에게 뜻을 두어 도의 근본을 믿고 들어가 머무르면 사문ㆍ바라문ㆍ하늘ㆍ악마ㆍ범천 그외 세간의 수행자들이 그를 파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계를 지니는 이로서 계율을 지키고 계를 보호하여 나가건 들어가건 언제나 죽을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여 계를 지니며 계를 배우는 것입니다.
세 번째, 좋은 선지식과 좋은 도반이 있고 스스로 잘 귀의함이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 함께하는 사람 없이 혼자 있더라도 행동과 몸과 뜻을 다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정진하는 행을 유지하고 굳게 정진하며 도법(道法)과 방편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차라리 몸과 살과 힘줄과 뼈와 사지가 무너질지언정 응당 행해야 할 것에는 정진하리라'고 마음먹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우러러보는 이, 굳게 행하는 이, 방편을 버리지 않는 이는 도법의 행을 응당 얻어야 할 것이니, 얻지 못했으면 정진을 중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지키는 행과 훌륭한 마음을 지속하는 행을 스스로 오래도록 실천하고, 오래도록 말하며, 오래도록 마음에 잊지 않는 것입니다. 또 일곱 번째는 지혜를 생각하는 행으로 나고 멸하는 것을 알고 지혜로운 마음을 얻는 것이니, 이것이 일곱 가지 현재 은혜입니다.
열째의 일곱 가지 법은 마땅히 증득해야 할 것들이니, 첫 번째는 법이 있음이요, 두 번째는 이해가 있음이요, 세 번째는 때를 앎이요, 네 번째는 만족할 줄을 앎이요, 다섯 번째는 자기 몸을 앎이요, 여섯 번째는 대중을 앎이요, 일곱 번째는 사람의 전과 후를 앎입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70가지 법입니다. 이는 그른 것이 아니고, 이는 다른 것이 아니며, 진실하고 여여하며, 미혹되지 않고 전도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실하게 지혜로운 마음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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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십상경(十上經)』에는 오로관(惡露觀), 즉 육체에서 똥ㆍ오줌ㆍ침ㆍ고름ㆍ가래 등 더러운 것들이 끊임없이 흘러 나온다고 관찰하는 법으로 되어 있다. 팔리본에는 이 부분이 yoniso manasikra(이치에 맞는 의식 작용), 즉 정사유(正思惟)로 되어 있다.
3) 『십상경』에서는 명(名:nma)과 색(色:rpa)이라고 하였다.
4) 점(點)자로 되어 있는데, 팔리본에 a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힐(黠)의 오자로 생각된다. 또 이역본인 장아함 『십상경』에도 이 부분이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로 한역된 것으로 보아 힐(黠)자가 옳을 것으로 생각된다.
5) 고려대장경에 지(知)자로 되어 있는 것을 송ㆍ원ㆍ명 3본에 의거하여 여(如)자로 바꿔 번역하였다. 반복되는 앞뒤의 문장과 대조해 보아도 여(如)자가 옳다.
7) 아라한(阿羅漢)을 지칭한다.
8) 『십상경』에서는 아라한의 5분법신인 무학의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을 거론하였다.
9) 번째 식지처(識止處)에 대한 설명이 빠졌다. 문맥으로 보아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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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아함십보법경 하권
후한 안식국삼장 안세고 한역
첫째의 여덟 가지 법은 수행자의 근본의 행법[本行]을 증장시키고, 지혜를 얻지 못했으면 (곧 지혜를 얻게 하는) 여덟 가지 법의 인연입니다.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 번째, 수행자가 배운 교훈과 계율에 의지하고 또 지혜로운 이와 도반에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의 행법이고 지혜를 얻지 못했으면 곧 지혜를 얻게 하나니, 이것이 첫 번째 법의 인연입니다.
이미 부처님과 그 밖의 지혜로운 이와 도반에게 의지하였으면 때때로 미묘한 법과 경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근본의 행법을 증장시키고 근본 지혜를 얻지 못했으면 곧 근본 지혜를 얻게 하나니, 이것이 두 번째 법의 인연입니다.
이미 법을 들었으면 몸을 버리고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이 근본 행법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지혜를 얻지 못했으면 곧 지혜를 얻으리니, 이것이 세 번째 법의 인연입니다.
이미 법을 들었으면 정진해야 합니다. 이로부터 근본 행법을 증장시키고 지혜를 얻지 못했으면 곧 지혜를 얻으리니, 이것이 네 번째 법의 인연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데 온 힘을 다하고, 오래오래 짓고 오랫동안 좋아하며, 생각하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면 이는 증장된 수행이니, 지혜를 얻지 못했으면 곧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 법의 인연입니다.
들은 말과 배운 법대로 실천하면 이는 증장된 수행이니, 지혜를 얻지 못했으면 곧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 법의 인연입니다.
법을 좋아하고 행하기를 좋아하며 자주 경을 연설하면 이는 증장된 수행이니, 지혜를 얻지 못했으면 곧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일곱 번째 법의 인연입니다.
5온의 늘고 줆을 알고 그 변화를 보아야 합니다. 즉, '이것은 색(色)이다. 이것은 색의 쌓임[色習]이다. 이로부터 색은 사라진다'고 알아야 하고, 통양(痛痒:受)ㆍ사상(思想:想)ㆍ생사(生死:行)ㆍ식(識)도 마찬가지며, '이것은 식(識)이다. 이로부터 식은 사라진다'고 알아야 합니다. 이는 근본 행법을 증장시키고 지혜를 얻지 못했으면 곧 지혜를 얻게 하나니, 이것이 여덟 번째 법의 인연입니다.
둘째의 여덟 가지 법은 도를 얻은 이가 실천해야 할 여덟 가지 도이니, 첫 번째는 정직한 소견이요, 두 번째는 정직한 생각이요, 세 번째는 정직한 말이요, 네 번째는 정직한 법이요, 다섯 번째는 정직한 업이요, 여섯 번째는 정직한 방편이요, 일곱 번째는 정직한 마음이요, 여덟 번째는 정직한 선정입니다.
셋째의 여덟 가지 법은 마땅히 알아야 할 세간의 여덟 가지 법이니, 첫 번째는 이로운 것이요, 두 번째는 이롭지 않은 것이요, 세 번째는 이름나는 것이요, 네 번째는 이름나지 않는 것이요, 다섯 번째는 논의함이요, 여섯 번째는 칭찬이요, 일곱 번째는 즐거운 것이요, 여덟 번째는 즐겁지 않은 것입니다.
넷째의 여덟 가지 법은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첫 번째는 정직하지 못한 소견이요, 두 번째는 정직하지 못한 생각이요, 세 번째는 정직하지 못한 말이요, 네 번째는 정직하지 못한 법이요, 다섯 번째는 정직하지 못한 업이요, 여섯 번째는 정직하지 못한 방편이요, 일곱 번째는 정직하지 못한 마음이요, 여덟 번째는 정직하지 못한 선정입니다.
다섯째의 여덟 가지 법은 줄여야 할 것들로, 흐리멍덩하여 도에 정진하지 않는 여덟 가지입니다. 어떤 수행자는 군이나 현에 있거나 마을 또는 딴 곳에 있으면서 전례에 따라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군이나 현에 들어가 음식을 구하되 속으로 '많이 얻어서 마음껏 먹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녀 본 결과 마음껏 먹을 만큼 많이 얻을 수 없게 되면 곧 '오늘은 마음껏 먹을 만큼 많이 얻지 못했으니 몸이 파리하여 앉을 수 없다. 당연히 누워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곧 누워서 다시는 세상 벗어나는 방편을 구하지 않고, 얻어야 할 것을 얻지 않으며, 이해하여야 할 것을 이해하지 않고,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흐리멍덩하여 도에 정진하지 않는 종류입니다.
어떤 수행자는 군이나 현에 있거나 마을 또는 딴 곳에 있으면서 전례에 따라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군이나 현에 들어가 음식을 구하되 속으로 '많이 얻어서 마음껏 먹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이 얻어서 마음껏 먹게 되면 스스로 '나는 아침에 많이 얻어 많이 먹게 되었구나'고 생각하고, 곧 '아침에 많이 얻어서 마음껏 먹었으니 나는 몸이 무거워 다니지도 앉지도 못하겠다. 나는 누워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곧 누워서 세상 벗어나는 방편을 구하지 않고, 응당 얻어야 할 것을 얻지 않으며, 응당 이해해야 할 것을 이해하지 않고, 응당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흐리멍덩하는 종류입니다.
혹 어떤 때 수행자는 나가서 도를 행해야 할 때에 곧 '나는 마땅히 나가서 도를 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나는 나가서 도를 행할 수 없고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다. 나는 누워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다시는 세상 벗어나는 방편을 구하지 않고, 얻어야 할 것을 얻지 않으며, 이해해야 할 것을 이해하지 않고,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세 번째 흐리멍덩하는 종류입니다.
혹 어떤 때 수행자는 낮에 도를 행해야 할 때에 '아침부터 도를 행하였으니 몸이 야윌까 염려되어 앉지도 다니지도 못하겠다. 나는 누워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곧 누워서 세상 벗어나는 방편을 구하지 않고, 얻어야 할 것을 얻지 않으며, 이해해야 할 것을 이해하지 않고, 스스로 알아 증득해야 할 것을 스스로 알아 증득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네 번째 흐리멍덩하는 종류입니다.
혹 어떤 때 수행자는 응당 수행하기를 좋아해야 할 것인데도 '나는 응당 수행하기를 좋아해야겠지만 나는 수행할 수도 없고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다. 나는 잠깐 누워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세상 벗어나는 방편을 구하지 않고, 따라야 할 것을 따르지 않으며, 응당 이해해야 할 것을 이해하지 않고, 스스로 알아 증득해야 할 것을 스스로 알아 증득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 흐리멍덩한 종류입니다.
혹 어떤 때 수행자는 '나는 아침부터 도를 행하여 이미 몸이 피곤해 앉아 있을 수 없다. 나는 누워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곧 누워서 세상 벗어나는 방편을 구하지 않고, 얻어야 할 것을 얻지 않으며, 이해해야 할 것을 이해하지 않고, 스스로 알아 증득해야 할 것을 스스로 알아 증득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 흐리멍덩하는 종류입니다.
혹 어떤 때 수행자는 병이 들면 '나는 이미 병으로 고통받고 있고 몸이 야위어 다니지도 앉지도 못하겠다. 나는 누워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곧 누워서 세상 벗어나는 방편을 구하지 않고, 얻어야 할 것을 얻지 않으며, 이해해야 할 것을 이해하지 않고, 스스로 알아 증득해야 할 것을 스스로 알아 증득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일곱 번째 흐리멍덩하는 종류입니다.
혹 어떤 때 수행자는 마침 병에서 일어나게 되면 오래지 않아 곧 '나는 이제 겨우 병석에서 일어났다. 몸이 야위어 다니거나 앉을 수 없으니 나는 누워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곧 누워서 세상 벗어나는 방편을 구하지 않고, 얻어야 할 것을 얻지 않으며, 이해해야 할 것을 이해하지 않고, 스스로 알아 증득해야 할 것을 스스로 알아 증득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여덟 번째 흐리멍덩하는 종류입니다.
여섯째의 여덟 가지 법은 도를 증가하는 여덟 가지 정진하는 방편의 도입니다. 어떤 때 수행자는 군이나 현 또는 마을이나 딴 곳에 있으면서 전례에 따라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군이나 현에 들어가 음식을 구하면서 속으로 '마땅히 많이 얻어서 먹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이 얻지 못하여 많이 먹지 못하게 되더라도 스스로 '나는 아침에 많이 얻어 먹지는 못했으나 몸이 가뿐하여 다니고 앉을 수 있다. 나는 방편을 지어 얻지 못한 것을 얻도록 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도록 하고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을 스스로 알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정진하는 방편입니다.
혹 어떤 때 수행자는 군이나 현에 있거나 마을 또는 딴 곳에 있으면서 전례에 따라 이른 아침에 일어나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군이나 현에 들어가 음식을 구하면서 속으로 '마땅히 많이 얻어 먹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곧 많이 얻어 먹고는 '아침에 많이 얻어 먹어서 몸에 힘이 있고 앞으로 나아가며 앉고 다닐 수 있다. 나는 방편을 구하여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며,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을 스스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정진하는 방편입니다.
혹 어떤 때 수행자는 나가야 할 때를 당해서 '나는 마땅히 나가야 하는데 몸이 나갈 수도 없고 또한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다. 나는 이제 가르침에 따라 방편을 구하고 스스로 도를 수행하는 방편을 지어 얻지 못한 것을 얻도록 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도록 하며,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을 스스로 알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 번째 정진하는 방편입니다.
혹 어떤 때 수행자는 도를 행하고 나서는 '나는 도를 행한 이래로 스스로 도를 행하지 못하였고 가르침을 받들어 섬기지 못하였다. 나는 내가 범한 것들을 밝히고 방편을 써서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며,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을 스스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네 번째 정진하는 방편입니다.
혹 어떤 때 수행자는 마땅히 행해야 할 때에 '나는 수행을 하며 가르침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는 앞서 방편을 구하며 앞서 방편을 행하여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며,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을 스스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정진하는 방편입니다.
혹 어떤 때 수행자는 온 힘을 다해 수행하고 나서는 '나는 이미 온 힘을 다해 수행했지만 더 수행할 수도, 가르침을 이룰 수도 없다. 나는 범한 것을 막을 수 있으니 곧 방편을 구하여 범한 것을 막고, 얻지 못한 것을 얻으며,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고,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을 스스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정진하는 방편입니다.
혹 어떤 때 수행자는 몸에 병이 들어 고통이 극심하면 곧 '나는 병이 들어 고통이 심하니 언젠가는 이 병으로 죽으리라. 나는 잠깐 동안에 방편의 행을 구하여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며,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을 스스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정진하는 방편입니다.
혹 어떤 때 수행자는 마침 병에서 일어나게 되면 오래지 않아 곧 '몸이 이제 겨우 병석에서 일어났는데 병이 다시 올까 두렵다. 이제 나는 앞서 방편의 행을 구하리라'고 생각하고는 곧 앞서 방편의 행을 구하여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며,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을 스스로 압니다. 이것이 여덟 번째 정진하는 방편입니다.
일곱째 여덟 가지 법은 받기 어려운 여덟 가지 해탈입니다. 혹 어떤 때 수행자는 안으로 색(色)을 생각하고 밖으로 색을 관찰하여 색에 있는 몇 가지 예쁨과 추함을 자유로이 알고 자유로이 보며, 뜻과 생각에도 역시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이것이 첫 번째 해탈입니다.
혹 어떤 때 도를 수행하는 자는 안으로 물질을 생각하고 밖으로 물질을 봅니다. 이것이 두 번째 해탈입니다.
혹 어떤 때 수행자는 청정히 해탈한 것을 몸으로 느낍니다. 이것이 세 번째의 해탈입니다.
모든 색(色)을 벗어나 성냄을 없애고 어떤 생각도 생각하지 않으며 바라는 것 없이 공(空)을 받아들이고 공을 행하면 이것은 네 번째의 해탈입니다.
모든 공을 벗어나 바라는 것 없이 식(識)을 받아들이고, 모든 식을 벗어나 인식하는 바 없이 유불용(有不用:無所有)을 받아들이면 이것이 다섯 번째 해탈입니다.
모든 무소유(無所有), 즉 불용(不用)을 벗어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無有想亦非無有想]을 받아들이면 이것이 여섯 번째 해탈입니다.
모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행을 벗어나면 이것이 일곱 번째 해탈입니다.
지각[想]과 사고[思]가 멸한 것을 몸으로 느끼면 이것이 여덟 번째 해탈입니다.
여덟째의 여덟 가지 법은 여덟 가지 대인(大人)의 생각입니다.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 번째, 도법(道法)을 생각한다는 것은 욕심이 적은 것이요, 욕심 많은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도법을 닦는다는 것은 만족할 줄 아는 것이니, 만족을 모르면 도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 도법을 닦는다는 것은 받아 수행하는 것이니, 받아 수행하지 않으면 도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네 번째, 도법을 닦는다는 것은 정진하는 것이니, 정진하지 않으면 도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섯 번째, 도법을 닦는다는 것은 뜻을 지키는 것이니, 뜻을 지키지 않으면 도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섯 번째, 도법을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니,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면 도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일곱 번째, 도법을 닦는다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니, 지혜롭지 않으면 도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덟 번째, 도법을 닦는다는 것은 가정의 즐거움을 없애는 것입니다. 가정이 없으면 즐거움이 없지만 함께 어울려 살게 되면 가정의 즐거움이 있게 됩니다. 함께 어울려 살게 되면 도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여덟 가지 대인의 생각입니다.
아홉 번째, 여덟 가지 법은 마땅히 알아야 할 여덟 가지 법입니다.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안으로 색(色)을 생각하고 밖으로 색을 보아 색에 있는 몇 가지 단정함과 단정하지 않음을 자재롭게 알고 또 자재롭게 보며 뜻으로 생각하면 이것이 첫 번째 자재함입니다.
안으로 색을 생각하고 밖으로 색을 보아 색에 있는 한량없는 여러 가지 면들을 자재롭게 알고 자재롭게 보면, 이와 같은 생각은 두 번째 자재함입니다.
안으로 색에 대한 생각이 없고 밖으로 색을 보아 색에 있는 몇 가지 단정함과 단정하지 않음을 자재롭게 알고 자재롭게 보면, 이와 같은 생각은 세 번째 자재함입니다.
안으로 색을 생각하지 않고 밖으로 색을 보아 색에 있는 한량 없는 단정함과 단정하지 않음을 자재롭게 알고 자재롭게 보면, 이와 같은 생각은 네 번째 자재함입니다.
다음은 안으로 색에 대한 생각을 하고 밖으로 파란 빛깔에 파란 것이 분명하며 파랗게 보이는 파란 색, 마치 파란 빛깔에 파란 것이 분명하며 파랗게 보이는 욱(郁)이라는 꽃의 파랑과 같은 그런 색을 봅니다. 이와 같이 안으로 색에 대한 생각을 하고 밖으로 파란 빛깔에 파란 것이 분명하고 파랗게 보이는 파란 색을 보면, 이와 같은 생각은 다섯 번째 자재함입니다.
다음은 안으로 색에 대한 생각을 하고 밖으로 노란 빛깔에 노란 것이 분명하며 노랗게 보이는 노란 색, 마치 노란 빛깔에 노란 것이 분명하며 노랗게 보이는 가니(加尼)꽃이나 아주 밝은 빛깔의 옷의 노랑과 같은 그런 색을 봅니다. 이와 같이 안으로 색에 대한 생각을 하고 밖으로 노란 빛깔에 노란 것이 분명하며 노랗게 보이는 노란 색을 보면, 이와 같은 생각은 여섯 번째 자재함입니다.
다음은 안으로 색에 대한 생각을 하고 밖으로 붉은 빛깔에 붉은 것이 분명하며 붉게 보이는 붉은 색, 마치 붉은 빛깔에 붉은 것이 분명하며 붉게 보이는 붉은 빛깔의 꽃[絳色華]이나 아주 붉은 빛깔의 옷의 빨강과 같은 그런 색을 봅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안으로 색에 대한 생각을 하고 밖으로 붉은 빛깔에 붉은 것이 분명하며 붉게 보이는 빨간 색을 보며, 이와 같이 색에 있는 것을 자재롭게 알고 자재롭게 봅니다. 이와 같은 생각이 일곱 번째 자재함입니다.
다음은 안으로 색에 대한 생각을 하고 밖으로 하얀 빛깔에 흰 것이 분명하며 하얗게 보이는 하얀 색, 마치 하얀 빛깔에 흰 것이 분명하며 하얗게 보이는 샛별이나 흰 옷의 하양과 같은 그런 색을 봅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안으로 색에 대한 생각을 하고 밖으로 하얀 빛깔에 흰 것이 분명하며 하얗게 보이는 하얀 색을 보며, 이와 같이 색에 있는 것을 자재롭게 알고 자재롭게 봅니다. 이와 같은 생각이 있으면 이는 여덟 번째 자재함입니다.
열째의 여덟 가지 법은 때때로 알고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인, 집착 없는 수행자의 여덟 가지 힘입니다. 집착 없는 수행자는 애욕을 마치 불과 같이 봅니다. 이와 같이 보아 알고 이와 같이 분명히 보아서 애욕과 애욕에 대한 생각을 떠나 보내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다시는 집착하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않는 이것이 첫 번째 힘입니다.
4의지(意止)의 행을 이미 구족하여 집착하는 바 없는 이것이 두 번째 힘입니다.
4의단(意斷)의 행을 이미 구족한 이것이 세 번째 힘입니다.
4선족(禪足:如意足)의 행을 이미 구족한 이것이 네 번째 힘입니다.
5근(根)의 행을 이미 구족한 이것이 다섯 번째 힘입니다.
5력(力)의 행을 이미 구족한 이것이 여섯 번째 힘입니다.
7각의(覺意)의 행을 이미 구족한 이것이 일곱 번째 힘입니다.
8행(行)의 행을 이미 구족한 이것이 여덟 번째 힘입니다.
이것이 수행자는 80가지 법입니다. 이것은 그르지 않고 이것은 다르지 않으며, 진실하고 여여하며, 미혹되지 않고 전도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실하게 지혜로운 마음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그리고 첫째의 아홉 가지 법은 수행자가 흔히 행하는 아홉 가지 마음의 기쁨입니다. 무엇이 아홉 가지인가? 첫 번째는 법을 듣는 기쁨이요, 두 번째는 생각하는 기쁨이요, 세 번째는 기뻐하는 기쁨이요, 네 번째는 즐거워하는 기쁨이요, 다섯 번째는 받아 믿는 기쁨이요, 여섯 번째는 편안한 기쁨이요, 일곱 번째는 선정의 기쁨이요, 여덟 번째는 그치는 기쁨이요, 아홉 번째는 떠나는 기쁨입니다.
둘째의 아홉 가지 법은 정진하여 청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무엇이 아홉 가지인가? 첫 번째는 정진하는 해탈로 청정함을 이룸이요, 두 번째는 마음의 해탈로 청정함을 이룸이요, 세 번째는 소견으로부터 해탈하여 청정함을 이룸이요, 네 번째는 의심으로부터 해탈하여 청정함을 이룸이요, 다섯 번째는 도를 닦는 것으로 청정함을 이룸이요, 여섯 번째는 지혜로운 견해로 청정함을 이룸이요, 일곱 번째는 지혜로운 견해로 애욕을 끊는 해탈로 청정함을 이룸이요, 여덟 번째는 종자를 끊음이요, 아홉 번째는 세상을 벗어남입니다.
셋째의 아홉 가지 법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정신이 머무르는 아홉 곳입니다. 무엇이 아홉 곳인가? 색상(色象)과 정신이 머무르는 곳으로서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몸에 여러 가지 생각이 있는 곳이 있으니, 마치 인간세계라 불리는 곳과 한 종류의 하늘과 같은 곳입니다.
이곳이 첫 번째 정신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색상과 정신이 머무르는 곳으로서 여러 가지 몸에 똑같은 생각이 있는 곳이 있으니, 마치 의식과 수명이 극치에 이른 범천(梵天)이라고 하는 하늘과 같은 곳입니다. 이곳이 두 번째 정신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색상과 정신이 머무르는 곳으로서 하나의 몸에 여러 가지 생각이 있는 곳이 있으니, 마치 낙명(樂明)이라고 하는 하늘과 같은 곳입니다. 이곳이 세 번째 정신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색상과 정신이 머무르는 곳으로서 하나의 몸에 하나의 생각이 있는 곳이 있으니, 마치 변정(遍淨)이라고 하는 하늘과 같은 곳입니다. 이곳이 네 번째 정신이 머무는 곳입니다.
색상과 정신이 머무르는 곳으로서 생각을 느끼지 않고 생각을 바꾸지 않는 곳이 있으니, 마치 생각이 없는 하늘[無有想天]과 같은 곳입니다. 이곳이 다섯 번째 정신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색상이 없이 정신이 머무르는 곳으로서, 모든 색상을 벗어나고 성냄을 없앴으나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고, 여러 가지 몸에 한량없는 허공을 수용하는 곳이 있으니, 마치 공혜(空慧)라고 하는 하늘과 같은 곳입니다. 이곳이 여섯 번째 정신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색상이 없이 정신이 머무르는 곳으로서, 모든 허공을 다 벗어나 한량없는 식(識)의 지혜만이 행하고 마음이 그치는 곳이 있으니, 마치 식혜행(識慧行)이라고 하는 하늘과 같은 곳입니다. 이곳이 일곱 번째 정신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색상이 없이 정신만 머무르는 곳으로서, 식에서 생긴 모든 지혜를 다 벗어나 무소유(無所有)의 지혜를 수용해 벗어나는 곳이 있으니, 마치 무소념혜(無所念慧)라고 하는 하늘과 같은 곳입니다. 이곳이 여덟 번째 정신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색상이 없이 정신만 머무르는 곳으로서, 바람이 없는 데서 생긴 모든 지혜를 다 벗어나 생각함도 없고 또한 생각함을 떠날 수도 없는 것을 수용해 마침내 그치는 곳이 있으니, 마치 생각함도 없고 또한 생각함을 떠날 수도 없는 하늘[無有思想亦不離思想天]과 같은 곳입니다. 이곳이 아홉 번째 정신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넷째의 아홉 가지 법은 마땅히 뽑아버려야 할 아홉 가지 결박입니다. 무엇이 아홉 가지인가? 애욕이 첫 번째 결박이요, 성냄이 두 번째 결박이요, 교만이 세 번째 결박이요, 어리석음이 네 번째 결박이요, 삿된 견해가 다섯 번째 결박이요, 의심이 여섯 번째 결박이요, 탐내는 것이 일곱 번째 결박이요, 질투가 여덟 번째 결박이요, 인색한 것이 아홉 번째 결박입니다.
다섯째의 아홉 가지 법은 마땅히 없애야 할 아홉 가지 고뇌의 근본입니다. 무엇이 아홉 가지인가? 어떤 수행자는 욕심을 부리고 나쁜 짓을 하며 불안하게 하고 침해하며, 또 다른 나쁜 짓을 생각합니다. 만일 수행자가 이것을 늘 생각하면 이것으로부터 고뇌가 생기니, 이것이 첫 번째 고뇌입니다.
어떤 수행자는 이미 나쁜 짓을 저질렀고 나쁜 짓을 하고는 불안해 하며 침해하고 나서는 또 다른 나쁜 짓도 저질렀습니다. 만일 수행자가 이것을 늘 생각하면 이것으로부터 고뇌가 생기니, 이것이 두 번째 고뇌입니다.
어떤 수행자는 뒤에 또 다시 나쁜 짓을 저지르려 하고 나쁜 짓을 저질러 불안하게 하려고 하며 침해하려 하고 또 다른 나쁜 짓을 저지르려 합니다. 만일 수행자가 이것을 늘 생각하면 이것으로부터 고뇌가 생기니, 이것이 세 번째 고뇌입니다.
어떤 수행자에게는 친한 이 가운데 수행자에게 욕심을 부리는 그런 이도 있습니다. 그 친한 이는 나쁜 욕심을 부리고, 나쁜 욕심을 부려 불안하게 하며, 침해를 가하려고 하고 다른 나쁜 짓도 하려고 합니다. 만일 수행자가 이것을 늘 생각한다면 이것으로부터 고뇌가 생기니, 이것이 네 번째 고뇌입니다.
어떤 수행자에게는 이미 나쁜 짓을 하였고, 이미 불안하게 하였으며, 이미 침해하였고, 이미 다른 나쁜 짓도 한 적이 있는 그런 친한 이도 있습니다. 만일 수행자가 이것을 늘 생각한다면 이것으로부터 고뇌가 생기니, 이것이 다섯 번째 고뇌입니다.
어떤 수행자에는 뒤에 수행자에게 다시 탐욕을 부리려는 친한 이도 있습니다. 친한 이는 나쁜 짓으로 불안하게 하려 하고, 침해하려 하며, 다른 나쁜 짓을 저지르려 합니다. 만일 수행자가 이것을 늘 생각한다면 이것으로부터 고뇌가 생기니, 이것이 여섯 번째 고뇌입니다.
어떤 수행자에게는 두렵고 서로 편치 않은 사이인데도 도우려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두렵고 편치 않은 사이인데도 편안함을 주려 하고, 침해를 풀어주려 하며, 다른 나쁜 짓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만일 수행자가 늘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면 이것으로부터 고뇌가 생기니, 이것이 일곱 번째 고뇌입니다.
어떤 수행자에게는 두렵고 편치 않은 사이인데도 수행자를 도우려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서로 편치 않은 사이인데도 편안함을 주었고, 이미 침해를 풀어주었으며, 또 다른 나쁜 짓도 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만일 수행자가 이것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면 이것으로부터 고뇌가 생기니, 이것이 여덟 번째 고뇌입니다.
어떤 수행자에게는 두렵고 서로 편치 않은 사이인데도 수행자를 위해 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두렵고 서로 편치 않은 사이인데도 이미 돕고 이미 편안케 하였으며 침해와 다른 나쁜 짓도 풀어 주었습니다. 수행자가 늘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이것은 편치 않은 관계에 있는 저 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으로부터 고뇌가 생기니, 이것이 아홉 번째 고뇌입니다.
여섯째의 아홉 가지 법은 마땅히 사유하여 없애야 할 아홉 가지 마음의 고뇌입니다. 무엇이 아홉 가지인가? 때로 수행자는 '이 사람은 나를 망치고 나를 다른 이의 소유가 되게 하며 나에게 안락이 없게 하고 나를 편치 못하게 하는, 그런 나쁜 짓을 이미 나에게 했다'고 하며 이러한 나쁜 고뇌의 마음을 가집니다. 만일 수행자가 이것을 늘 생각한다면 이것이 그 첫 번째입니다.
때로 수행자는 '이 사람은 나를 망치고 나를 남의 소유가 되게 하며 나에게 안락이 없게 하고 나를 편치 못하게 하는, 그런 나쁜 짓을 현재 나에게 하고 있다'고 하며 나쁜 고뇌의 마음을 가집니다. 만일 수행자가 이것을 늘 생각한다면 이것이 그 두 번째입니다.
때로 수행자는 '이 사람은 나를 망치고 나를 남의 소유가 되게 하며 나에게 안락이 없게 하고 나를 편치 못하게 하는, 그런 나쁜 짓을 마침내 나에게 할 것이다'고 하며 나쁜 고뇌의 마음을 가집니다. 만일 수행자가 이것을 늘 생각한다면 이것이 그 세 번째입니다.
때로 수행자는 어떤 때 '나는 친한 이를 망치고 그를 남의 소유가 되게 하며 안락이 없게 하고 편치 못하게 하는, 그런 나쁜 짓을 이미 하였다'고 생각하며 나쁜 고뇌의 마음을 가집니다. 만일 수행자가 이것을 늘 생각한다면 이것이 그 네 번째입니다.
때로 수행자는 어떤 때 '나는 친한 이를 망치고 그를 남의 소유가 되게 하며 안락이 없게 하고 편치 못하게 하는, 그런 나쁜 짓을 현재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나쁜 고뇌의 마음을 가집니다. 만일 수행자가 이것을 늘 생각한다면 이것이 그 다섯 번째입니다.
때로 수행자는 어떤 때 '나는 친한 이를 망치고 남의 소유가 되게 하며 안락이 없게 하고 편치 못하게 하는, 그런 나쁜 짓을 마침내 저지를 것이다'고 생각하며 나쁜 고뇌의 마음을 가집니다. 만일 수행자가 이것을 늘 생각한다면 이것이 그 여섯 번째입니다.
때로 수행자는 '나는 서로 편치 않은 자에게는 나는 나쁜 생각을 하고 편안하지 못하게 하며 불길하게 되기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원수를 이롭게 하고 편안하게 하며 즐겁게 하고 편케 하는, 그런 짓을 이미 하였다'고 생각하며 이런 고뇌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만일 수행자가 이것을 늘 생각한다면 이것이 그 일곱 번째입니다.
때로 수행자는 '나는 서로 편치 않은 자에게는 나는 나쁜 생각을 하고 편안하지 못하게 하며 불길하게 되기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원수를 이롭게 하고 편안하게 하며 즐겁게 하고 편케 하는, 그런 짓을 현재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고뇌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수행자가 이것을 늘 생각한다면 이것이 그 여덟 번째입니다.
때로 수행자가 '나는 서로 편치 않은 자에게는 나는 나쁜 생각을 하고 편안하지 못하게 하며 불길하게 되기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원수를 이롭게 하고 편안하게 하며 즐겁게 하고 편케 하는, 그런 짓을 하려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고뇌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수행자가 이것을 늘 생각한다면 이것이 그 아홉 번째입니다.
일곱째의 아홉 가지 법은 받기 어려운 아홉 가지 의지하여 머무름[依住]입니다. 무엇이 아홉 가지인가? 수행자가 믿음을 얻어 의지하여 머무르고 나쁜 것을 능히 버리고 좋은 것을 받으면 이것이 첫 번째 의지하여 머무름입니다.
만일 수행자가 마음을 수행에 두고 수행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버리면 이것이 두 번째 의지하여 머무름입니다.
만일 수행자가 정진을 일으켜 정진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버리면 이것이 세 번째 의지하여 머무름입니다.
만일 수행자가 조용한 곳에서 스스로 지키고 지키지 않는 것을 버리면 이것이 네 번째 의지하여 머무름입니다.
만일 수행자가 감당할 수 있는 것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이와 같이 의지하여 머무른 뒤에 바르게 생각하고 헤아리면 이것이 다섯 번째 의지하여 머무름입니다.
만일 수행자가 한 법을 버리면 이것이 여섯 번째 의지하여 머무름입니다.
한 법을 버리고 나서 곧 한 법을 깨달으면 이것이 일곱 번째 의지하여 머무름입니다.
한 법을 깨닫고 나서 곧 한 법을 받으면 이것이 여덟 번째 의지하여 머무름입니다.
한 법을 받고 나서 한 법을 행하면 이것이 아홉 번째 의지하여 머무름입니다.
여덟째의 아홉 가지 법은 일으켜야 할 9차제정(次第定)입니다. 무엇이 아홉 가지인가? 마음이 그치는 초선(初禪)이 첫 번째 정이요, 초선으로부터 2선(禪)의 끝까지가 두 번째 정이요, 2선으로부터 3선의 끝까지가 세 번째 정이요, 3선으로부터 4선의 끝까지가 네 번째 정이요, 4선으로부터 공의 정[空定]까지가 다섯 번째 정이요, 공에서 벗어나 식(識)까지가 여섯 번째 정이요, 식에서부터 벗어나 욕심이 없는 데[無有欲]까지가 일곱 번째 정이요, 욕심 없는 데에서 벗어나 생각이 없는 데[無有思想]까지가 여덟 번째 정이요, 생각이 없는 데서 벗어나 멸도(滅度)하는 데까지가 아홉 번째 정입니다.
아홉째 아홉 가지 법은 마땅히 알아야 할 아홉 가지 적당치 않은 때입니다. 이 때는 사람이 수행할 수도 없고 수행이 이룩될 수도 없습니다. 무엇이 아홉 가지인가? 첫 번째는 사람이 혹 지옥에 있어서 죄를 다 끝내지 못하였을 때에는 응당 도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혹 축생에 있어서 죄를 다 끝내지 못했을 때에는 응당 도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혹 아귀에 있어서 죄를 다 끝내지 못했을 때에는 응당 도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혹 장수천(長壽天)에 있어서 복이 다하지 못했을 때에는 응당 도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혹 법과 이치를 알지 못하는 곳에 있어서 말해주는 이가 없고 받아듣지 못했을 때에는 응당 도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혹 귀가 먹어서 들을 수 없고 받을 수 없으면 응당 도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혹 벙어리가 되어 받아 지닐 수 없고 외우고 말할 수 없으면 응당 도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여덟 번째는 혹 들었더라도 받아들이지 못하면 응당 도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아홉 번째는 혹 총명하지 못하여 경을 말해주어도 마음이 열리지 못하면 응당 도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열째의 아홉 가지 법은 멸함이 없는 것을 스스로 증득하여 아는 것입니다. 무엇이 아홉 가지인가? 첫 번째는 이름[名]과 물질[色]이 없어짐이요, 두 번째는 여섯 감관[六入]이 없어짐이요, 세 번째는 닿임[更受:觸]이 없어짐이요, 네 번째는 느낌[痛:受]이 없어짐이요, 다섯 번째는 애욕이 없어짐이요, 여섯 번째는 집착[受:取]이 없어짐이요, 일곱 번째는 존재[有]가 없어짐이요, 여덟 번째는 태어남이 없어짐이요, 아홉 번째는 늙고 죽음이 없어짐입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90가지 법입니다. 이것은 그르지 않고 이것은 다르지 않으며, 진실하고 여여하며, 미혹되지 않고 전도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실하게 지혜로운 마음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그리고 첫째의 열 가지 법은 도를 불어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능히 수호하는 법이고 구제하는 법입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 번째는 만일 여래로부터 배운 도가 있는 제자가 믿음에 따라 근본이 성립된다면 사문ㆍ바라문ㆍ하늘ㆍ악마ㆍ범천이나 다른 세간(世間)의 어느 누구도 그를 파괴하지 못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계행을 청정히 하여 계율을 지키고 가야할 곳을 잘 알아서 죄를 보는 대로 두려워하며 배운 가르침대로 보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지혜로운 자와 알고 지내고 지혜로운 자를 따르며 지혜로운 자를 서로 찾아가야 합니다.
네 번째는 혼자 앉아서 사유하고, 행동함에는 둘을 제어해야 하나니 몸을 제어하고 마음을 제어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정진하는 행을 지녀 넉넉한 힘을 가지고 온 힘을 쏟아 행하며 방편인 깨끗한 법을 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여섯 번째는 마음을 최고의 상태로 잘 지켜 마음으로 미묘하게 오래전에 일어난 일과 말해진 것을 능히 기억하고 그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일곱 번째는 지혜로운 행을 닦아 나고 멸하는 지혜[生滅慧]로부터 도를 얻은 자는 모든 의심을 없애고 괴로움을 무너뜨려 없애는 일만 해야 합니다.
여덟 번째는 좋은 말을 받아 지니고 좋은 법의 말대로 따라 행해야 합니다.
아홉 번째는 법 듣기를 좋아하고 법의 행 듣기를 좋아하며 자주 설법하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열 번째는 같이 배우는 이를 위하여 함께 일하고 정진할 수 있어야 하며 몸소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열 가지 구제하는 법이니, 이 뒤부터 믿음과 계율과 지혜로 단속하고 혼자 앉아서 사유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지혜로운 마음으로 정진하고, 좋은 말씀을 받아 경을 연설하며, 몸과 하는 일을 꼭 같게 하여 그치지 않으면 이것을 구제함이라 합니다.
둘째 열 가지 법은 실천해야 할 열 가지 바른 행입니다. 무엇이 바른 행인가? 첫 번째는 바른 소견이니, 곧 삿된 소견을 없앨 수 있고, 또 삿된 소견을 인연하여 생긴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나쁜 행을 즉시 녹여 없앨 수 있으며, 또한 바른 소견을 인연하여 나타난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좋은 법을 따라 행하고 갖추어 행하게 합니다.
두 번째는 바른 사유이니 삿된 사유를 녹여 없애고, 또 삿된 사유를 인연하여 생긴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나쁜 행을 즉시 녹여 없앨 수 있으며, 또한 바른 사유를 인연하여 나타난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좋은 법을 따라 행하고 갖추어 행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바른 말이니 삿된 말을 녹여 없애고, 또한 삿된 말을 인연하여 생긴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나쁜 행을 즉시 녹여 없앨 수 있으며, 또한 바른 말을 인연하여 나타난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좋은 법을 따라 행하고 갖추어 행하게 합니다.
네 번째는 바른 행동이니 삿된 행동을 녹여 없애고, 또 삿된 행동을 인연하여 생긴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나쁜 행을 즉시 녹여 없앨 수 있으며, 또한 바른 행동을 인연하여 나타난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좋은 법을 따라 행하고 갖추어 행하게 합니다.
다섯 번째는 바른 업이니 삿된 업을 녹여 없애고, 또 삿된 업을 인연하여 생긴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나쁜 행을 즉시 녹여 없앨 수 있으며, 또한 바른 업을 인연하여 나타난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좋은 법을 따라 행하고 갖추어 행하게 합니다.
여섯 번째는 바른 방편이니 삿된 방편을 녹여 없애고, 또 삿된 방편을 인연하여 생긴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나쁜 행을 즉시 녹여 없앨 수 있으며, 또한 바른 방편을 인연하여 나타난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좋은 법을 따라 행하고 갖추어 행하게 합니다.
일곱 번째는 바른 기억이니 삿된 기억을 녹여 없애고, 또 삿된 기억을 인연하여 생긴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나쁜 행을 즉시 녹여 없앨 수 있으며, 또한 바른 기억을 인연하여 나타난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좋은 법을 따라 행하고 갖추어 행하게 합니다.
여덟 번째는 바른 선정이니 삿된 선정을 녹여 없애고, 또 삿된 선정을 인연하여 생긴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나쁜 행을 즉시 녹여 없앨 수 있으며, 또한 바른 선정을 인연하여 나타난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좋은 법을 따라 행하고 갖추어 행하게 합니다.
아홉 번째는 바른 해탈이니 삿된 해탈을 녹여 없애고, 또 삿된 해탈을 인연하여 생긴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나쁜 행을 즉시 녹여 없앨 수 있으며, 또한 바른 해탈을 인연하여 나타난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좋은 법을 따라 행하고 갖추어 행하게 합니다.
열 번째는 바른 지혜니 삿된 지혜를 녹여 없애고, 또 삿된 지혜를 인연하여 생긴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나쁜 행을 즉시 녹여 없앨 수 있으며, 또한 바른 지혜를 인연하여 나타난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좋은 법을 따라 행하고 갖추어 행하게 합니다.
셋째의 열 가지 법은 마땅히 분명히 알아야 할 안팎의 열 가지 색입(色入)이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 번째는 눈[眼入]이요, 두 번째는 빛깔[色入]이요, 세 번째는 귀[耳入]요, 네 번째는 소리[聲入]요, 다섯 번째는 코[鼻入]요, 여섯 번째는 냄새[香入]요, 일곱 번째는 혀[舌入]요, 여덟 번째는 맛[味入]이요, 아홉 번째는 몸[身入]이요, 열 번째는 거칠고 고움[麤細]입니다.
넷째의 열 가지 법은 버려야 할 열 가지 안팎의 덮개[蓋]이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 번째는 안의 욕심의 덮개요, 두 번째는 밖의 욕심의 덮개이니, 이것이 갖추어지면 이로 인하여 지혜가 없어지고 또 이해도 없게 되며, 또한 함이 없음[無爲]으로 세상을 벗어나지도 못하게 됩니다.
세 번째는 성냄이요, 네 번째는 성내는 모양입니다. 성내더라도 또한 덮개이고 성내는 모양을 보이더라도 역시 덮개이니, 이것이 갖추어지면 지혜를 이루지 못하고, 또 이해를 이루지 못하며, 또한 함이 없음으로 세상을 벗어나지도 못합니다.
다섯 번째는 수면(睡眠)이요, 여섯 번째는 어둠입니다. 수면도 덮개이고 어둠도 역시 덮개이니, 이것이 갖추어지면 이로 인하여 지혜를 이루지 못하고, 또 이해를 이루지 못하며, 또한 함이 없음으로 세상을 벗어나지도 못합니다.
일곱 번째는 고뇌요, 여덟 번째는 의심입니다. 고뇌도 덮개이고 의심도 역시 덮개이니, 이것이 갖추어지면 이로 인하여 지혜를 이루지 못하고, 또 이해를 이루지 못하며, 또한 함이 없음으로 세상을 벗어나지도 못합니다.
아홉 번째는 혹 청정한 법에 대해 의심함이요, 열 번째는 혹 나쁜 법에 대해 의심함입니다. 설령 청정한 법에 대해 의심하더라도 덮개이고 나쁜 법에 대해 의심하더라도 역시 덮개이니, 이것이 갖추어지면 이로 인하여 지혜를 이루지 못하고, 또 이해를 이루지 못하며, 또한 함이 없음으로 세상을 벗어나지도 못합니다.
다섯째의 열 가지 법은 줄여야 할 열 가지 나쁜 행이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 번째는 죽임이요, 두 번째는 도적질이요, 세 번째는 음행이요, 네 번째는 이간질이요, 다섯 번째는 허망한 말을 함이요, 여섯 번째는 추악한 말을 함이요, 일곱 번째는 꾸미는 말을 함이요, 여덟 번째는 어리석음이요, 아홉 번째는 성냄이요, 열 번째는 삿된 소견입니다.
여섯째의 열 가지 법은 많이 행하여야 할 열 가지 깨끗한 행이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 번째는 죽이는 짓을 떠나 죽이는 짓을 그침이요, 두 번째는 도적질을 떠나 도적질을 그침이요, 세 번째는 음행을 떠나 음행을 그침이요, 네 번째는 이간질하는 말을 떠나 이간질하는 말을 그침이요, 다섯 번째는 허망한 말을 떠나 허망한 말을 그침이요, 여섯 번째는 추악한 말을 떠나 추악한 말을 그침이요, 일곱 번째는 꾸미는 말을 떠나 꾸미는 말을 그침이요, 여덟 번째는 어리석음을 떠나 어리석음을 그침이요, 아홉 번째는 성냄을 떠나 성냄을 그침이요, 열 번째는 삿된 소견을 떠나 삿된 소견을 그치는 것입니다.
일곱째의 열 가지 법은 받아 깨닫기 어려운 열 가지 도덕적 삶이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 번째는 자기를 위하여 다섯 가지[五種]를 버림이요, 두 번째는 여섯 가지 바른 도덕을 닦음이요, 세 번째는 하나를 지킴이요, 네 번째는 넷에 의지함이요, 다섯 번째는 스스로 이해하고 다시 이해하기를 기다리지 아니함이요, 여섯 번째는 자기를 위하여 구하는 것을 버림이요, 일곱 번째는 구함이 이미 청정해짐이요, 여덟 번째는 몸의 업이 이미 그침이요, 아홉 번째는 입의 업이 이미 그침이요, 열 번째는 뜻의 업이 이미 그침입니다. 마음이 최고의 해탈하는 지혜와 해탈하는 행을 구족하면 으뜸가는 사람이라 합니다.
여덟째의 열 가지 법은 구경에 이르게 하는 열 가지 두루하는 선정이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 번째는 비구에 있어서 땅이 위와 아래에 널리 두루하여 둘이 아니며 한량없음이요, 두 번째는 수행하는 비구에 있어서 물이 위와 아래에 널리 두루하여 둘이 아니며 한량없음이요, 세 번째는 수행하는 비구에 있어서 불이 위와 아래에 널리 두루하여 둘이 아니며 한량없음이요, 넷째는 수행하는 비구에 있어서 바람이 위와 아래에 널리 두루하여 둘이 아니며 한량없음이요, 다섯 번째는 수행하는 비구에 있어서 푸른 것이 위와 아래에 널리 두루하여 한량없음이요, 여섯 번째는 수행하는 비구에 있어서 노란 것이 위와 아래에 널리 두루하여 둘이 아니며 한량없음이요, 일곱 번째는 수행하는 비구에 있어서 붉은 것이 위와 아래에 널리 두루하여 둘이 아니며 한량없음이요, 여덟 번째는 수행하는 비구에 있어서 흰 것이 위와 아래에 널리 두루하여 둘이 아니며 한량없음이요, 아홉 번째는 수행하는 비구에 있어서 허공이 위와 아래에 널리 두루하여 둘이 아니며 한량없음이요, 열 번째는 수행하는 비구에 있어서 의식[識]이 위와 아래에 널리 두루하여 둘이 아니며 한량없음입니다.
아홉째의 열 가지 법은 부처님의 열 가지 힘이니, 무엇이 열 가지 힘인가? 첫 번째, 부처님께서는 갖가지 이치에 대해 사실대로 아시니, 당연함과 당연하지 않음을 아시고 이치와 이치 아님에 대해서도 사실 그대로 아십니다. 지혜의 행으로부터 스스로 아시니 이것이 첫 번째 힘입니다.
두 번째, 부처님께서는 과거ㆍ미래ㆍ현재에서 지은 죄와 원인이 되는 종자와 그 재앙을 있는 그대로 아시니, 이것이 두 번째 힘입니다.
세 번째, 부처님께서는 온갖 곳에서 겪은 일을 사실 그대로 아시니, 자기의 분별하는 지혜의 행으로 이것을 아십니다. 이것이 세 번째 힘입니다.
네 번째, 부처님께서는 번뇌를 버리고 해탈하여 선정에 들며, 또한 선정에서 이것은 속박이라고 알고 이것은 해탈이라고 아시며, 또 이로 인하여 선정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아십니다. 이것이 네 번째 힘입니다.
다섯 번째 부처님께서는 원하는 대로 다른 집안이나 다른 집안이나 다른 사람을 사실 그대로 아십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 힘입니다.
여섯 번째, 부처님께서는 온갖 한량없는 여러 가지 천하의 행(行)을 이와 같이 아시나니, 이것이 여섯 번째 힘입니다.
일곱 번째, 부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근기가 온전한지 온전하지 못한지를 사실 그대로 아시니, 이것이 일곱 번째 힘입니다.
여덟 번째,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분별을 맨 처음부터 나중에 스스로 기억하는 것까지 사실 그대로 아시니, 이것이 여덟 번째 힘입니다.
아홉 번째, 부처님께서는 천안(天眼)이 이미 청정하기가 인간보다 뛰어나서 사람들이 가고 오며 나고 죽는 것을 그대로 아십니다. 이것이 아홉 번째 힘입니다.
열 번째, 부처님께서는 이미 결박을 다하여 번뇌의 결박이 없으며, 마음이 이미 해탈하고 지혜로써 해탈하여 스스로의 지혜로 증득한 법을 보시며, 또 수(受)가 다하고 생(生)이 끝나며 행할 바를 이미 만족하였음을 알고, 다시는 세간에 왕래하지 않고 이미 세상을 벗어났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아십니다. 이것이 열 번째 힘입니다.
열째의 열 가지 법은 스스로 증득하여 열 가지 배움이 만족한 것을 알아서 다시는 배우지 않는 것이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 번째는 바른 견해가 이미 만족하여 다시는 정직한 견해를 배우지 아니함이요, 두 번째는 바른 사유와 계교가 이미 만족하여 다시는 바른 사유와 계교를 배우지 아니함이요, 세 번째는 바른 말이 이미 만족하여 다시는 바른 말을 배우지 아니함이요, 네 번째는 바른 행이 이미 만족하여 다시는 바른 행을 배우지 아니함이요, 다섯 번째는 바른 업이 이미 만족하여 다시는 바른 업을 배우지 아니함이요, 여섯 번째는 바른 방편이 이미 만족하여 다시는 바른 방편을 배우지 아니함이요, 일곱 번째는 바른 기억이 이미 만족하여서 다시는 바른 기억을 배우지 아니함이요, 여덟 번째는 바른 선정이 이미 만족하여 다시는 바른 선정을 배우지 아니함이요, 아홉 번째는 바른 해탈[度世]이 이미 만족하여 다시는 바른 해탈을 배우지 아니함이요, 열 번째는 바른 지혜가 이미 만족하여 다시는 바른 지혜를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배우는 수행자의 100가지 법입니다.
100가지로 말한 이 법은 그르지 않고 다르지 않으며, 진실하고 여여하며, 미혹되지 않고 전도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실하게 지혜로운 마음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은 배우는 자들이 들어야 할 설법으로서, 처음 말도 청청하고 중간의 말도 또한 청정하며 마지막 끝내는 말도 역시 청정합니다. 이로움도 있고 좋음도 있으며 청정함과 구경의 해탈을 구족한 행들을 이미 드러냈으니, 이것을 10보법(報法)이라 말합니다. 이는 앞에서와 같이 말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입니다.”
첫댓글 심법하나가 사후세계로 날라가 버렸군..특히 대승불교는 중유,중음이 죽어서 공중에 동동 떠있는 귀신들이라고?...남방불교는 중음이란 없다 죽은후 곧바로 태에 든다고 사기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