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順興)! 경북 영주시에 ‘순흥면(順興面)’이 있다 고구려 땅이었던 이 곳엔 ‘고분벽화(사적 제313호)’가 있고, 고려 때 유학자 ‘안향’을 대표로 하는 ‘순흥 안씨’의 고향이다
소백산에 둘러쌓여 죽계(竹溪)를 품고 있는 순흥은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으로 사대부들의 칭송을 받았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영천(榮川·지금의 영주) 서북쪽 순흥부(順興府)에 죽계라는 계곡이 있는데, 죽계는 소백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다. 이 곳은 들이 넓고 산은 낮으며 물과 들이 맑고 깨끗하다. …참으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다.” 했다.
오랜 기간 ‘흥주’로 불리다 고려 말 ‘순흥부’로 승격되며 번성했던 이 고장에 숱한 희생이 따른 큰 사건이 있었으니,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일으킨 단종 복위사건(세조 3년, 1547)이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당시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돼 유배지를 떠돌다 순흥에 귀양 와 있었고, 단종은 영월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에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고을의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경상도의 선비들에게 격문을 돌렸지만 거사를 감행하기도 전, 밀고로 발각돼 희생되고 만다.
당시 금성대군과 이보흠, 그리고 단종 복위에 동조했던 수많은 영남 선비들이 흘린 피는 죽계천을 붉게 물들이고 40리 아래에 있는 동촌리까지 흘렀다 그래서 이 지역 일대에는 지금도 ‘피끝’이라는 지명이 남았다.
이 ‘참사’로 ‘순흥도호부’는 폐지됐고, 이 땅은 풍기·예천·봉화로 조각조각 나뉘게 된다 그렇게 반역의 땅이 되었다.
200년 세월이 흐른 뒤, 숙종 37년(1711), 단종이 복위되면서 순흥은 다시 도호부로 승격됐고, 이 지역에는 금성대군을 모시는 사당 ‘금성단’이 세워졌으며 충절의 고장으로 평가받았다.
‘금성단’은 상단에는 금성대군, 오른쪽 단에는 이보흠, 왼쪽 단에는 모의에 연루돼 죽은 사람들을 모셔, 지금도 해마다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거기를 간다. 소백산 아래에 죽계계곡과 초암사.....
송년의 이 계절에 아픈 역사의 현장 순흥에 그리운 님들과 그렇게 걷는다.
▲ 줄기차게 달려온 2018년, 오늘은 '우리들 산악회' 송년 산행일입니다.
▲ 함께 이어온 '장수..' '오솔길.. 회원들을 세웠으나 너도나도 같이 찍었으니...
▲ 우리의 호프, 전 사장님은 오늘따라 힘이 없습니다. 조금 젊은 여성분들이 별로 없어 그런가요?.
▲ 초암사까지는 포장도로가 이어집니다.
▲ 죽계구곡(竹溪九曲) 1곡은 백운동 취한대(白雲洞翠寒臺)/ 2곡은 금성반석(金成盤石)/ 3곡은 백자담(栢子潭) .▲ 4곡은 이화동(梨花洞) / 5곡은 목욕담(沐浴潭)/ 6곡은 청련동애(淸漣東崖) / 7곡은 용추비폭(龍湫飛瀑)/ 8곡은 금당반석(金堂盤石) / 9곡은 중봉합류(中峯合流).
▲ 9곡 중봉합류 입니다.
▲ 깊은 산골 고향이 도시화가 되듯, 계곡 옆으로 포장도로가 생기고...
▲ 옛 전설과 신화를 간직한 계곡이 너무 세속화 된듯한 황망함.
▲ 이 곳 주민들이야 도로가 필요하고 포장도 되어야 하겠지만... 옛 길의 정취는 사라지고.
▲죽계구곡(竹溪九曲)의 이름은 누가 붙였나?
▲죽계계곡이 처음 언급되는 것은 고려후기의 명현이자, 문장가인 근재 안축의 “죽계별곡”이며,
▲이 후 순흥부사, 풍기군수등을 지낸 주세붕, 신필하, 이황 선생등이 이 죽계구곡에 관련이 되었는데
▲ 계곡 안내판에는 퇴계 이 황이 계곡의 풍취에 심취되어 . ▲ 산수를 즐기면서 아홉구비를 헤아려 이름을 붙이고 서각 하기를 죽계 구곡 이라고 했다고 전합니다.
▲ 여기 죽계계곡이 시작 되기전 소수서원이 자리합니다. . ▲ 소수서원은 고려 때 유학자인 '안향'을 기리기 위해 1542년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의 후신입니다.
▲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를 지내면서 ‘소수서원’이라는 임금의 친필 현판을 받아 이름을 ‘소수서원’으로 바꾸었습니다.
▲ 8곡-금당반석(金堂盤石)... 너를 바둑판이란 의미 일텐데...
▲ 너른 바위판은 보이지 않지만 시원한 물줄기가 보기 좋습니다.
▲ 이렇게 '장수...'팀들과 동행했습니다. 필자도 장수회원이니...
▲ 게곡따라 여러 한시, 현대시가 세워져 있습니다. 멋진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고.
▲7곡-용추비폭(龍湫飛瀑), 용이 승천 하는 모습이라는데... 하여간 구곡 모두가 조금은 뻥이 쎈듯합니다.
▲ 7곡에서 건너다 보면 여름날 시원할 휴식 공간도 있습니다.
▲ 이 죽계계곡은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조선 세조 3년인 1457년, 이 곳에서 유배 와 있던 세종의 6째아들 금성대군은
▲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고을의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경상도의 선비들에게 격문을 돌렸지만 거사를 감행하기도 전, 밀고로 발각돼 희생되고 맙니다.
▲6곡-청련동애(淸漣東崖) 푸르고 맑은 잔 물결이 일렁이는 동쪽 언덕이란 뜻이겠습니다.
▲ 당시 금성대군과 이보흠, 그리고 단종 복위에 동조했던 수많은 영남 선비들이 흘린 피는 죽계천을 붉게 물들이고 ...
▲ 40리 아래에 있는 동촌리까지 흘러, 이 지역 일대에는 지금도 ‘피끝’이라는 지명이 남았습니다.
▲ 이 ‘참사’로 ‘순흥도호부’는 폐지됐고, 이 땅은 풍기·예천·봉화로 조각조각 나뉘게 되어, 그렇게 반역의 땅이 되었습니다. . ▲ 그 후 200년 세월이 흐른 뒤, 숙종 37년(1711), 단종이 복위되면서 순흥은 다시 도호부로 승격됐고, .
▲ 이 지역에는 금성대군을 모시는 사당 ‘금성단’이 세워졌으며 충절의 고장으로 평가받았습니다.
▲ 그렇게 아픈 역사는 흘러갔습니다. 이 계곡의 물줄기와 함께.
▲ 5곡-목욕담(沐浴潭) 천사들은 아니라도 목욕하기 좋은 곳이겠습니다.
▲ 금성대군의 단군복위사건으로 그 많은 피를 흘린 뒤.
▲ 8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1541년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였고.
▲ 7년후인 1548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합니다.
▲ 그렇게 하여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은 이 곳에 세워지게 됩니다.
▲ 초암사 주차장, 잘 정비되었습니다.
▲ 4곡을 놓치고 초암사 까지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 촬영합니다.
▲ 4곡-이화동(梨花洞) 하얀 배꽃이 만발하는 신선의 세계라는데... 그러나 이 계곡은 배나무보다 사과 나무가 많습니다.
▲ 소백사 초암사... 일주문이 멋집니다.
▲3곡-백자담(栢子潭) 측백나무 백자에 아들자, 못 담 이라...
▲ 다시 서둘러 초암사로 오릅니다.
▲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신경림의 '나목'이란 고교교과서에 나오는 시 일부입니다.
▲ 2곡-금성반석(金成盤石) 넓고 멋진 반석은 보이지 않습니다.
▲ 초암사, 소박하고 정갈한 모습이 좋습니다.
▲ 초암사(草庵寺).. 신라의 의상대사가 창건했답니다.
▲ 배점 주차장에서 3.4K를 왔고 여기서 비로사까지는 다시 3.4K입니다.
▲여기부터 비로사 까지 계곡 따라 이어지는 길, 정겹고 아름다운 길입니다.
▲ 그렇잖아도 세월 앉은 모습에 겨울의 벙거지등은 더 볼품없게 만듭니다.
▲ 그러나 여인은 어디서나, 언제나 빛나는 법이니.
▲ 이런 시를 대하면 한 시를 좀 배울 것을... 안타까워집니다.
▲ 한 참을 내려가 숨어있는 마지막 1곡을 찾았습니다.
▲ 1곡-백운동 취한대(白雲洞翠寒臺) 소수서원에 자리한 '취한대' 만큼이나 풍광이 아름다습니다.
▲소수서원에 있는 취한대(翠寒臺)는 이 황선생이 지었다고 전해옵니다.
죽계천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옛 시 '송취한계'의 비취 ‘취(翠)’와 차가울 ‘한(寒)’자에서 따온 것이랍니다.
▲ 달밭골... 초암사-비로사 사이의 골짜기를 말합니다.
▲ 옛 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변란마다 아픔 영혼들이 기대어 살던 소백산 자락.
▲ 달밭골도 그 중 하나겠지요.
▲ 송년의 세밑에서 길을 갑니다. '0 0야, 인생 말이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어찌보면 간단해,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믿지 않다가.. 결국에는 본인이 산타할아버지가 되는거, 그게 인생이야'.
▲ 하긴 호손의 '큰 바위 얼굴'도 그렇게 끝났지 싶습니다.
▲ 막대한 부나 사회적 지위보다도 지속적인 자기성찰이 인간의 위대한 가치를 드높인다는 것을 보여줬지요.
▲ 골골에 많은 집터, 경작하던 달덩이 만한 밭등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 한 해가 저물어 가니 한 해동안 읽은 것은 얼마이며, 쓴 글들은 얼마인가? 부끄러워 집니다.
▲ 많이 읽고, 많이 쓰고 , 많이 생각하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사량(多思量)... 그게 글을 잘 쓰는 비결이라는데....
▲ 3 가지는 커녕 한 가지도 그렇다 긍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 말과 글은 머리에만 남겨지는게 아니라 가슴에 새겨지는 법.
▲ 마음 깊숙하게 꽂힌 언어는 지지 않은 꽃과 같을 것입니다.
▲ 그 골 양지바른 곳에서 옹기종기 점심을 나눕니다.
▲ 하필 저런 추운 곳에 터 잡은 이들도 있습니다.
▲ 담다디의 이상은의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 ...하지만 이제 뒤돌아 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듯, 때로은 조금 떨어져서, 한 발 물러나서,,,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 소중한 것일수록 더욱 그래야 하겠습니다.
▲ 멋진 분은 어디에 세워도 그러합니다.
▲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위안이 되었던 노래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 봄이 온다네 봄이와요 ....
▲ 쇠발자국이 있다하여 쇠자우골...
▲ 그게 어디 진짜 소 발자국 이겠냐만... 그 시절 수 많은 이들이 넘나들던 이 고개의 하나의 깃점 이겠지요.
▲ 이런 다리를 여럿 건너갑니다.
▲ 숲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고.
▲ 아무런 대가를 서로에세 바라지 않듯, 그러면서 늘 최선을 다해 사는 것처럼.
▲ 사랑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말자고 사랑에게 대가를 바라지도 말고 늘 최선을 다하자고....
▲ 감성이 홍수난듯 넘치면 그냥 하는 이야기도 시가 되는 경우를 봅니다.
▲ 바람도 쉬어 넘어가고 사람도 그렇게 앉아 가는 것을...
▲ 잣나무 숲을 지나며.
▲ 저마다 추억도 이야기하고 여름날 누워보고 싶은 희망도 이야기 하고...
▲ 에너지가 넘치는 양반들은 벤취에 누운 여인을 상상하며 걸죽한 음담패설도 즐거움이 되는데...
▲지난 1월, 너머 단양의 어의곡에서 출발하여 비로봉을 넘어 여기로 내려왔었습니다.
▲ 겨울의 달밭골은 수북히 눈이 쌓여야 제맛인데.
▲ 거기서 다시 모아 앉혀봅니다.
▲ 감자전, 막걸리 맛이 좋았던 추억,
▲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는듯.. 이렇게 추억의 자리 언제 다시 와 오늘을 그리워 하겠지요.
▲ 달밭골의 추억이 명품마을이 되었습니다.
▲ 이제 2,2K 삼가 주차장 까지 걷습니다.
▲ 비로사... 신라의 의상이 세웠다는 설도 있고, 승려 진정이 지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 보물, 지방유형문화재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합니다.
▲소백산 자락길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문화생태 탐방로로 가장 먼저 이름을 울렸습니다
▲ 영남의 진산이라 불리는 소백산 자락길은 소백산국립공원 전체를 둘러서 싸는 전체길이143km.
▲ 평균 길이 12km 내외의 12자락으로 문화 생태탐방로입니다.
▲소백산의 울창한 숲과 깨끗한 물이 흘러내리는 긴 계곡을 보며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 ▲ 그래서, 소백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 산자락 마다 선조들의 오랜 문화가 숨을 쉽니다.
▲ 오래오래 계절따라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명품 길이 되어지길 바래봅니다.
▲ 그렇게 9K의 길은 끝이나고. 도착한 '삼가 주차장'.
▲ 인삼과 사과의 고장, 풍기의 한 사우나에 들어가 차가운 몸을 녹이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시절.
▲ 그리고 나누는 뜨끈한 돼지국밥 한 그릇... 절로 행복감이 넘칩니다.
▲ 달리는 버스에서 본 석양.. 2018년. 그렇게 저물어 갑니다. 남기고 싶은 일들도 지우고 싶은 순간들도
다 소중한 날들이고, 열심히 살아온 날들이려니...
▲ 그렇게 정겨운 님들과 같이 걸은 세밑의 하룻 길...
소수서원을 순례하지 못한 아쉼이 크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그렇게 그렇게 다시 남으로 남으로 달렸습니다.
오늘의 그 길은 다시 추억이 되고 어느시절 그리움에 사무치겠지요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서로 사랑을 했구나.... ----------------------
나목 ( 裸木 )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밴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트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
출처: 산꾼 미시령 원문보기 글쓴이: 산꾼미시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