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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난 지 50년이 되어 2012년 9월 24일 새벽 5시. 맑고 푸른 하늘에 총총히 빛나는 선명한 별들을 보았다. 1963년 내 생애의 첫 직장이자 마지막이 된 KBS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는 통지를 받고 고향을 떠나 종종 고향을 들리기는 했어도 이토록 선명한 별빛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떠 오른 고향생각이 머리를 지배하면서 추억을 더듬고 몇곳을 다니며 사진을 촬영했다.
내 고향 순창 복흥을 말한다. 산태극, 수태극의 명당 / 이장춘
여행을 즐기시는 분, 특히 등산을 즐기시는 분은 최소한 한번쯤은 다녀가셨을 법한 이름들! 노령산맥 따라 형성된 관광의 중심지가 되어 국민들 사이에 그 이름이 익숙해진 곳, 내장산 산줄기 따라 이름지어진 내장사, 신선봉, 장군봉, 서래봉, 까치봉, 연자봉, 가을재(추령), 백방산(栢芳山), 소죽엄재, 새재, 고당산, 복룡산, 복룡재, 화개산, 전라북도 도립 산림 박물관, 녹두장군 전봉준 공원, 백암산을 중심으로 한 백양사, 구암사, 감상굴재, 장성땜, 추월산과 가마골을 중심으로 한 심적산, 천치재, 치재산, 용추봉, 밀재, 대각산, 도장봉, 가인 사법연수원, 담양땜, 금성 온천마을, 강천산, 강천사 등, 그 많은 관광, 명승지들이 복흥에 자리하거나, 복흥에서 직선거리 7Km안에서 찾을 수 있는 이름들이고 필자에게는 늘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정겨운 이름들이다.
이런 산들로 둘러싸인 복흥은 고원지대를 형성하고 있어서 어디서도 그곳을 가려면 구불구불한 산길 따라 올라가야 한다. 정읍에서 복흥을 가려면 99구비라는 가울재 길을 올라야 하고 담양에서 복흥을 가려면 천치재나 밀재를 올라야 하며 장성 백양사에서 복흥에 이르는 길은 감상굴재를 올라야 한다. 그 산길을 오를 때는 이런 곳에 마을이 있을까? 하지만 그 높은 곳에 큰 들이 있고 제법 강 같은 큰 냇물이 흐르며 사람들이 살고 있다. 경상도와 서울 에서만 살던 필자의 아들 “훈“의 장인 장모께서 훈의 안내 따라 이곳을 돌아보시고는 딸, 사위 덕분에 일생동안 제일 훌륭한 여행을 하셨다는 밀씀을 하시더라고 들었다.
이토록 산수(山水)좋은 곳 복흥은 예부터 큰 인물이 나올 수 있는 명당자리가 있다고 해서 산태극(山太極) 자리라 했다. 복흥 사람들은 산태극 자리에서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선생님을 비롯해서 훌륭한 인물들이 났다며 흐뭇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세인이 다 아는 일제강점기 민족변호사이며 독립운동가요 1948년 정부수립 때부터 1957년까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님은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 이곳에 생가가 있고 공부를 했던 경치 좋은곳 낙덕정이 있으며 김병로 선생님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마련한 가인 사법연수원이 최근에 준공되었다. 복흥 사람들은 그 산수 명당의 정기를 받아 스스로의 후손들 중에서도 훌륭한 인재가 나올 것을 기대하며 산다.
복흥에서 발원되는 모든 물줄기는 대가리, 동산리, 낙덕에 있는 세개의 큰 저수지를 거쳐 하나로 모여 석보라는 마을 앞을 지나 섬진강으로 들어가기에 섬진강의 물줄기는 복흥에서도 발원된다. 물줄기의 흐르는 형상따라 수태극(水太極)을 이루어 복흥은 산태극, 수태극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그래서 인지 1950년대 중반이 지나서야 버스가 다닐 정도로 산중마을이었고,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던 복흥이 오늘날에는 국내 굴지의 관광지로 발돋움해서 사통팔달 아스팔트길이 열리고 인삼을 비롯한 각종 특용작물이며 고추를 비롯한 질 좋은 농산물을 생산해서 제법 잘 사는 동내가 되었다.
필자가 태어난 서정리 마을 뒤에있는 울산김씨 선형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앞에는 멀리 심적산, 추월산 능선이 보인다.
필자 이장춘은 1941년 이곳 복흥 서정리 라고도 불리고, 안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내양실 이라고도 불린 산정리 34번지에서 이해봉(李海)과 최동순(崔東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적상으로는 두 사람의 형과 세 사람의 누님이 있지만 이것은 아버지가 결혼 한지 9년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고 큰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시며 큰 아버지의 아들 딸 들을 아버지 호적에 모두 올렸기 때문이다. 6.25가 일어나 불시에 떠난 1950년 11월경 까지 산정(山亭)리에서 살았다. 그곳에는 큰 명당이 있다고 전해졌고 뒷동산에는 가인 김병로 선생님의 선형과 그 바로 아래 큰 제각이 있다. 그 제각은 지금도 그 형체가 그대로 남아있지만 사람은 살지 않는다.
필자의 옆집에는 울산김씨의 선영을 돌보던 김병갑선생님이 사셨고 그 분은 해방공간에서 복흥면장을 지내신 복흥면의 유지였다. 아들 김재만과 필자는 친구이고 둘이 함께 김병갑선생님 손목을 잡고 국민(초등)학교에 입학해서 3Km가 넘는 곳에 있는 복흥국민학교를 걸어서 다녔다. 6.25가 일어나자 김병갑선생님은 즉시 떠나셨지만 필자는 그 치하에서 상당기간 살았다.
어느 날인지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고 담양에서 정읍으로 통하는 신작로에는 요란한 탱크와 장갑차 등의 소리가 울리며 UN군을 태운 자동차 행열이 3일간이나 이어졌다. 철 모르던 시절, 지나가는 자동차 행열 곁에서 손을 흔들면 군인들은 반기며 깡통을 던져주기도 했는데 그 안에는 과자며 커피, 우유 등이 들어 있었다. 물론 그때는 커피라는 것을 몰라서 모두 버렸다. 그 UN군 자동차 행열이 끝나자 후퇴를 못한 인민군 패잔병들과 빨치산들이 이곳 산중으로 몰려들었다. 경찰이나 소수의 국군으로는 이곳의 치안유지를 할 수가 없었다. 면민들은 모두 피난을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며칠 사이에 다시 돌아 올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되는대로 떠나라고 했다.
사람들은 어린 아이를 등에 없고 며칠 먹을 수 있는 곡식을 손에 들고 무작정 떠났다. 우리는 다행이 소 한 마리를 기르고 있어서 열 살이 된 필자의 손에는 소고삐가 연결된 큰 끈이 쥐어지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등에는 걷지 못하는 두 어린 아이가 업혔다. 피난길에 친척집에서 살면서 끌고 간 소(牛)를 팔아 생활을 이어갔다. 피난길에서 복흥으로 돌아 왔을 때는 대부분의 가옥들은 불타 버렸고 생활터전은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살 곳, 먹을 것, 입을 것 모두 잃어버리고 살 길이 막막했다. 못 먹은 사람들은 얼굴이 부어오르고 병에 걸리면 꼼짝없이 죽어 가던 때다. 우리는 다행이 대방리에 불에 타지 않은 친척집이 있어서 그곳에서 기거 할 수 있었고 피난길에 끌고 간 소 한 마리가 밑천이 되어 고통은 덜한 편이었다. 이곳 대방리에서 살던 시절 밤에는 빨치산들이 종종 들어와 식량과 음식을 요구하고 또 스스로 뒤져갔다. 이들이 오는 길목에 경찰이 숨어 있다가 총을 쏘아 사살하기도 하고 또 이들이 다녀 간 뒷길에 정산리에 있는 경찰 본대에서 포를 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담양을 넘나드는 사람들의 통행을 돕기 위해 경찰들이 밀재까지 날마다 출동했다. 아침에 출동했다가 오후 되면 돌아오곤 했는데 빨치산들이 그 길목에 숨어 있다가 총을 쏘아 경찰을 사살하고 도망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곳에서 몇 개월이나 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산리에 미리 와 흙집을 짓고 살던 사람이 집을 판다기에 그 집을 샀다. 그리고 거기서 장사라고 할 것도 없는 장사를 시작했다. 집 앞에 시과상자를 놓고 그 위에다 소금 몇 되, 과자 몇 개 올려놓고 팔고 어머니와 필자는 소금을 머리에 이고 지개에 지고 다니며 팔기도 했다, 이런 생활 얘기는 길어서 다음 기회로 미룬다.
시골에서는 공무원을 최우선 시 하던 시절이라 아버지는 필자가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하셨기에 총무처에서 시행하는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서 합격하고 1963년 공무원 첫 발령을 받은 곳이 서울 국제방송국이다, 산중으로 소문이 난 곳이어서 그때의 김순경 서무과장은 나의 신고를 받는 자리에서 첫 마디가 "그 촌사람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서울까지 왔는가? " 였다. 그러면서 노정팔 국제방송국장님에게 신고 안내를 하셨다. 뒤에 알고보니 서무과장님은 진도 섬(島) 분으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나와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서기관이 된 분이고 노정팔 국장님은 함경도 산수갑산에서 태어나 만주 할빈 농업학교를 나온 분이었다. 시골분이기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방송과 인연을 맺어 KBS생활 36년! 전국 방송국을 다 돌아다니고 방송국에서 할 수 있는 여러 일의 대부분의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고향 전북에서는 근무 한 적이 없고 늘 고향을 생각하면서도 고향을 찾은 기억이 별로 없다. 1년에 한두 번 고향을 지나가는 경우가 있지만 길거리에서 만난 분들 외에는 따로 만난 분들이 별로 없다. 70 넘어 뒤를 돌아보니 죄스러운 마음, 고향 친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각을 지배한다.
고향을 돌아볼 때 마다 세상이 많이 달라 졌음을 본다. 8,000명 넘던 사람들은 2,000명 이하로 줄었고, 붉은 산은 푸른 산으로 변했다. 흙담집, 초가집은 기와집 철골 시멘트 집이나 벽돌집으로 변했다. 없던 전봇대가 새로 생기고 사방으로 전기 줄이 뻗어있다. 자갈이 깔렸던 신작로는 아스팔트길로 포장되고 구불구불하던 논두렁, 밭두렁은 반듯한 모습으로 변했다. 산중마을은 관광의 중심지로 변했고 한 대도 없었던 승용차 들이 집집마다 있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다.
2012년 9월 23일 필자가 고향에서 하룻밤을 머무른 박석규남 집이다. 태어나면서 부터 한 동내에 살았던 박석규님과는 6.25때 반동으로 몰려 공산군에게 학살당해 버려진 어머니 시신을 필자의 아버지가 남몰래 옮겨다가 안장 할 정도로 깊은 인연이 있어 친 형제나 다름없이 지내던 터였다. 훌륭한 인품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박석규님은 오랜기간 고시공부에 메어 달리다가 잘 안되어 복흥면장을 지내시는 등 여러 일을 하셨다. 박석규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10년이 넘었고 이 집에는 85세의 형수 정익래님이 홀로 기거하고 계신다. 85세라지만 활동연령, 정신연령은 70대인 필자보다 더 젊으시다.
정산리 전체와 한들, 농암리, 백암산, 신선봉, 백방산 등을 한장의 사진으로 볼 수 파노라마로 촬영한 사진
필자가 살았던 정산리 비거마을을 가깝게 촬영한 사진이다.
아래는 정산리 동서마을 일부로 개방죽방면에서 촬영했다. 개방죽이라는 이름은 개가 누워있는 지형이라고 하며 거기에는 6.25때 불타지 않은 이 부근의 유일한 집 한채가 있었고 김봉기님과 김성만님을 비롯한 아들 김성만 3형제와 딸 4녀가 한집에 살았다. 사진을 찍고 길가에 있는 집에서 고추와 호박 등을 사면서 알아보니 김봉기님의 손주 김희동 장노님으로 올해 환갑이고 김판문님의 아들 되신다면서 인삼 등 약초와 포도, 고추 등의 농사를 짛는다고 했다. 수삼 몇 뿌리를 선물받아 오는길에 차 안에서 피로회복제로 잘 활용되었다. 김희동님 고맙습니다.
복흥의 대표적인 들 한들 (큰 들이라는 뜻)을 넘어 내장산 신선봉, 백양사를 품은 백암산 등이 펼쳐진다. 다 연결된 산줄기이고 특히 등산객들이 즐기는 코스이기도 하다.
복흥 시작점에서 끝난점까지 어디에서도 비슷한 모양으로 보이는 해발 660m의 백방산! 이 사진은 담양에서 천치재를 넘어 답동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어린시절 이 산을 잡방산 이라고 불렀다. 아래 사진은 주변모습을 함께 담은 모습이다. 답동에서 들어가는 이 산의 입구에 낙덕정이 있다.
율평마을 앞 자동차길에서 촬영한 풍경으로 여전히 백방산과 소 백방산이 작은 산 너머로 보인다.
낙덕정 아래로 주변이 아름다운 낙덕 저수지가 펼쳐진다.
위는 앞에서 본 서정리 마을이고 아래는 뒤에서 본 모습입니다.
위는 외양실 또는 받양실 이라고 불렸던 산정리 앞마을 추령천 다리에서 추령천과 멀리 길게 뻗어있는 백암산 능선을 촬영한 사진이고 아래는 장소를 조금 옮겨 석양의 노을을 촬영한 사진이다.
필자 이장춘이 복흥을 떠날때까지 살았던 정산리
필자가 고향을 떠나기 전 마지막 살았던 집이다. 정산리 비거마을에서 유일하게 옛 모습이 남아있는 집이다. 정읍, 순창, 담양으로 통하는 3거리에 있었고 한쪽면은 지서와 또 한쪽면은 농협, 그리고 뒷쪽에는 교회가 있었다, 교회는 1959년부터 복흥에 공의로 온 국희종씨가 헌신적인 교회활동을 하면서 짛은 건물이다. 1926년생으로 해군 군의관 장교출신이라고 했다. 1959년부터 의료불모지 복흥에 와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필자와는 깊은 친분이 있었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았다. 늦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던 국희종씨는 광주에 살던 집안 가족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어린 시골처녀와 결혼을 했다. 복흥의 교회는 국희종씨로부터 비롯 되었다. 2010년 국희종씨의 공덕비를 세웠다는 얘기를 뒤에 들어서 그때는 그일을 알지 못해 그 비를 보지는 못했다.
위 사진의 집 왼쪽이 순창경찰서 복흥지서가 왼쪽으로 보인다. 건물모양은 다소 달라졌어도 예나 지금이나 위치는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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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권의철님이 이 글에 댓글을 단 이래 글을 써 주신 글을 옮겨 춘하추동방송 기록으로 남깁니다. 권의철 robert 선생님 2013.02.01 16:58 내 고향(정읍 칠보면) 이웃 선배님의 고향 "순창 복흥을 말한다" 감명 깊었고 고맙습니다. ┗ 이장춘 2013.02.01 18:19 고맙습니다. 권회장님께서 다녀 가셨군요. 이 글을 쓰던때 그때 칠보를 구경하고 싶어서 정읍에서 칠보를 거쳐 전주로 가는데 칠보가 그토록 산길로 형성된 곳인줄은 그때 처음 알았어요. 태인에서 칠보 발전소를 지나 강천으로 가는 길은 종종 다녔는데 작년 9월에 온 길은 어디로 해서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동내도 없고 산만 연결되어 있었어요. 차에 기름이 떨어져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납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댓글을 썼습니다. 유카리나
2013.03.30 21:22 국장님, 고향에 대한 이 많은 자료와 사진들이 우선은 국장님의 자서전으로, 그 다음엔 장르별로, 그 외 어떤 특별한 목적과 쓰임새로 각 각 묶여진 책이나 자료집으로 나오는 날을 꼭 기대하겠습니다. ┗ 이장춘 2013.03.30 21:27 주위 분들은 그런 얘기를 하시는 분도 계시고 방송역사 서적을 출판하라고 권고도 하지만 제가 뭐 그런 능력이 있는것도 하니고 사람과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면 어떨가. 해서 이곳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유카리나
2013.03.30 21:42 물론 시작은 편하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데 기여하겠다싶어서 시작하셨지만, 워낙 내용이 충실하고, 역사적인 가치도 있는 자료들인데, 그래도 기왕에 국장님같은 분이 뜻을 세우시고 다잡아 하시면 좋지않을까 해서요. 이미 가지고 계신 자료들을 편집을 하셔서 출판사를 정하셔서 C.D.를 출판사로 보내고 가끔 편집진들과 만나서 조절하시면 될터인데요. 꼭 그렇게 해 보심이 ....방송역사서, 후세들에게 꼭 필요한 책입니다. ┗ 이장춘 2013.03.30 21:59 고마운 말씀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안기영선생님의 노래 3곡을 보내 드렸습니다. ┗ 이장춘 2013.07.17 02:30 유카리나님과 이가인보나님이 함께 국내에 계셨으면 만나실 기회가 계셨을 터인데 멀리 떨어져 계시니 사이버 공간에서만 만나시는 군요. ....... 이가인보나 2013.07.17 00:56 오늘 이 자리에 잠시 머물며 춘하추동님의 고향에 마음 담고 갑니다 유카리나님 말씀처럼 이렇게 편집하시는 자료들이 귀하고 소중한 자료로 남겨 질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이장춘 2013.07.17 02:17 아! 이 산골까지 오셨어요. 등산객들이나 관광객들이 들리는 곳인데 이처럼 와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이장춘 2013.07.17 02:30 유카리나님과 이가인보나님이 함께 국내에 계셨으면 만나실 기회가 계셨을 터인데.......이가인 보니님 글을 읽으신 분이 저에게 전화가 왔어요. 그분 연세들어 이민을 가셨으면 외로우실 터인데이민을 갔다가도 연세들어 돌아오는데 어찌 이민을 가셨데요. 여간 외로우신 것이 아닐 터인데.......... 하며 아쉬워해요. 미국에서도 활동영역이 넓어 잘 계실거라고 했지요. 핸복하세요. ┗ 이가인보나 2013.07.20 12:17 염려 해 주신분 말씀이 맞으십니다 모두들 고국으로 돌아 올때인데 이제사 가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하셨습니다 가끔씩 고국생각에 외롭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족이 있고 일이 있어 외로움은 온몸을 파고 들었다가 잠시 후 떠나가니 다행이지요염려해 주신 분께 감사의 말씀 전해 주십시요 열심히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수필가 김영중님께서 미주 팬문학 회장을 맡으셨는데 8월3일 제26회 해변문학제을 준비하고 계셔서 작은 손이라도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번 강의는 한국에서 시인 김후란<한국문학의집 이사장>님께서 8월1일에 도착하십니다 이 행사 프로그램 정해지면 소식 드리겠습니다 더운 여름 이 먼곳까지 하루 강의 맡으셔서 오시는 시인 김후란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 드려도 되겠죠? 이장춘선생님 유카리나님 감사합니다 ┗ 이장춘 2013.07.20 12:24 열심히 활동하셔요. 김후란 선생님 대단한 열정 이시군요.모두가 한마음 한뜻이라 는 정표지요.행사 잘 끝내셔요. 건강하시고요. 사진 김삿갓 2016.06.19 11:05 아이고 . 제고향이야기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저는 고향은 전북순창쌍치 둔전리 이지만 복흥도 잘압니다 . 복흥동산리에 저의큰댁 안동김씨 집성촌이 있어서 어렸을때부터 많이 갔었고 정산리 . 개방죽에 저의 이모부님 . 신씨가 사셨고 말씀하신 산정리 서정리 잘 아는곳입니다 .정말 고향소식을 자세히 설명해주시여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 이장춘 2016.06.19 12:52 고맙습니다. 본문에 옮겨 기록으로 남기겠습니다. 雪은 오고요 선생님 글 저는 산정리 외오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사진으로 보니옛추억과 옛기억 희노애락이 교차 합니다. 그리고 저희 고향에 이런 휼륭한 분이 계시 다니영광스럽습니다. 서정리에서 밭일하던 부모님 흙내음이 생각나 눈물이 납니다. 언제 고향가서 고향사진 듬북 담아 와야겠네요 헤게모니 님 글 오늘은 김병갑 할아버지 제사여서 광주에서 김재만 작은아버지 오셔서 블로그 읽어 보셨네요 저의 아버지는 김재섭님으로 복흥면장도 하셨고 몇해전 작고 하셨습니다. 블로그보면서 매우 기쁘고 특히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사연보고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장춘의 답글 참으로 반갑습니다. 되셨군요. 김재섭 형님이 그토록 장가를 늦게 가셨는데도 아드님을 제가 블로그에서나마 는 광주 교육대학에 다니실 때 잠시 뵌적이 있었는데 참으로 오랜세월 못 뵈었습니다. 할머니 광주댁, 73세쯤 되었을 고모 재순님도 머리에 생생하고 보고 싶습니다. 아버님! 재섭님은 어릴때부터 보아왔고 복흥면장을 하실때 뵌적이 있습니다.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박석규형님 그 형수님은 89세가 되어 지금도 복흥에 살고 계시고요.
못 가셨다면서 늘 걱정을 하던 때가 생각 나는데 이제 아드님이 장성하셨군요. 제 연락처는 왼쪽 상단 블로그 작은 사진 밑에 있는 블로그 소개난에 자세히 써 놓았습니다. 헤게모니 님 글 작은아버지 김재만님과 고모 김재순님께도 댓글 보내 드리겠습니다. 글도 감사하고 소중한 사연과 사진 정말로 감사합니다 강형문님과의 인연 그리고 주고받은 글
2014년 7월 선대의 고향이 순창 복흥이라는 강형문씨로 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선대의 고향이 복흥 이라고만 알고있던 강형문씨는1970년에 태어나 지금은 순천에 살고있다고 했다. 필자와 예기를 나누면서 선대가 살던 그 곳이 바로 필자의 출생지 복흥 산정리 안 마을 서정리임을 알았다. 그리고 몇편의 이메일을 주고 받았고 2015년 1월 25일 새벽 그곳에 가 촬영한 사진 4장과 사연을 보내와 이곳을 찾는분들이 함께 보실 수 있도록 2014년의 이메일 글 한편과 이번에 받은 글, 사진을 올렸다.
2014년 7월의 글
선생님의 글에 의하면 서정리가 부친의 고향이 맞는것 같습니다. 부친의 성함은 강대윤, 1935년생, 조부의 성함은 강걸수(재봉)이시고..할머님은 나남순이십니다. 부친이 4형제 밑으로 동생 3명 대홍,대섭?,대문 이십니다. 모두 고인이 되셨습니다. 서정리에 현재 강대영씨라는분 집에 갔던 기억이있고 그집에 할머니께 인사를 했었지요. 그집뒤에 공터가 옛집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동네를 돌아 큰 대추나무가 마당에 있는집에도 인사를 갔었던 기억이있습니다. 625당시 조부모님은 폭사하셨다고 들었으며, 부친은 인민군에 소나무에 묶여 죽을뻔하였다고 합니다.(당시16세)
그리고 할머님의 고향인 순창풍산면 순정리로 찾아들었고, 그후 금과면 내동리 아버지 처가로 들어와 사셨습니다. 현재도 내동리에 제 어머니(1942년생)가 계십니다. 가슴아픈 역사에 희생되신 분들의 사연을 묻는것이 어려워 그냥 그렇게만 알고 살아왔습니다. 조부모님의 사진마저 본적이 없습니다. 조부모님 선대의 산소가 서정리 어딘가에 있고 서울에 큰집이있고 광주에도 일가가 있지만 부친의 작고 이후엔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2015년 1월 25일 글
선생님 잘 지내고 계시지요?
작년 여름에 한가한 주말에 불현듯 생각난 복흥을 다녀왔었습니다. 증조, 고조의 선영을 확인하고자 부친(강대윤)의 사촌벌인 강대영씨(70대)를 찾았습니다. 7년여만에 찾아간 마을에 강대영씨집은 신축을 했고 옛 아버지집 공터는 담장이 둘러지고 비닐하우스가 들어서 있습니다. 무너져가는 옆빈집을 기웃 거리다 마을을 한바퀴 돌아 강대영씨를 뵙고 나왔더랬습니다...아주 짧은 단상이라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기억나시는 부분 있으시면 회신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어디서든 선생님을 한번 뵙고 싶기도 합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요....
보내주신 사진
행운목이 있는 꿈의 정원 동영상
유튜브에서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FDwjT95-aNo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파일: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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