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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기념관에서
거재도에 간 참에 청마기념관을 찾았다. 신거제대교 입구에서 견내량을 끼고 우회전하여 그의 생가가 있는 둔덕면(屯德面) 방하리로 가는 길, 관광안내지도에서 짐작되는 길보다 굴곡진 길이 멀었다.
이정표조차 길을 떠난 나그네에겐 친절하지 않았다. 청마기념관은 폐왕성이 바라다보이는 남쪽마을, 산방산으로 가는 초입에 있었다.
폐왕성은 우두봉(牛頭峰)의 중허리에 있는 산성(山城)이다. 이성은 1170년(고려 제18대 의종24년) 9월에 상장군 정중부(上將軍 鄭仲夫)등 무신(武臣)들이 경인란을 일으켜 왕이 거제도로 쫓겨와서 3년간 살았던 산성이라 한다.
둔덕의 유래는 폐왕성의 서북하에 오량성(烏良城)을 쌓아 군영을 두어 견내량의 해상을 감시하고, 수역(水驛)을 두어 진남(忠武市)과 교역을 하였으며, 동남에 상둔(上屯)과 하둔(下屯)의 양둔을 설치하여 방어케 하였다고 해서 둔덕(屯德)이라 칭하였다고 했다.
지방자치제가 이루어지자, 관광객을 불러들여 제원을 마련하고자,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문화유적들을 찾아내 이벤트화하기에 부산을 떨었는데, 전설로 전해오는 인물뿐 아니라 근세기 이후의 인물조차 제저끔 제 고장에 연고권을 주장하는 일이 많아졌다. 근례로 이효석과 유족과 평창시의 다툼이 그러했고, 연전에 벌어진 통영시와 거제시가 법정싸움까지 불사한 청마 생가의 다툼이 그러했다.
그의 문명(文名)만큼이나 전국에 새워진 시비가 11개로 많은 축에 끼는 청마고보면 출생지를 둘러싸고 벌이는 그런 다툼도 무익하지는 않을 게다. 법정에서는 통영에서 기록한 '출생'을 '유년시절을 보냄'으로 고치라 했다. 유족과 작품의 정황으로 미루어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로 정리가 된 상태다. 해서 청마는 문학관 내지 기념관을 2곳에 가지는 복많은 작고문인이 되었다.
아닌게 아니라 시인의 연보에 출생지가 지금까지 통영시 태평동 552번지로 표기되어 있고, 자작시 해설하면서 자신의 출생지
가 통영이라 해서 혼돈을 야기하긴 했다. 그러나 <출생기>에서는 '열 나흘 새벽달빛을 밟고 유월이가 이고 온 왕고모 댁의 제삿밥을 먹고 난 후 자신이 태어났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왕고모는 부친의 부계친척이므로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임이 분명하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거제도 둔덕면 방하리는 청마의 출생지인 생가이고, 2살 때부터 살아온 통영시 태평동은 유년을 보낸 성장지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어떤 이는 시인의 정서가 유년의 것이라 해서 통영이 생가라 주장하는데 논거의 비약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생가의 의미는 시의 성과와 엄연히 별개인 것이기 때문이다.
방하리에 도착하면 우선 350년 수령을 자랑하는 마을나무인 팽나무가 방문객을 맞는다. 청마가 이곳에서 태어나 2살 때 외가인 통영으로 떠났으니 이 나무에는 오르락내릴락 하지 않았을 테지만 방학 때, 친척집을 찾았을 뗀 분명히 미끄럼을 탔으리라.
차에서 내려 그의 시가 음악을 타고 들리는 돌계단을 오르려는데, 미니버스에서 내린 4.50대 주부들이 우르르 내려 뒤따라 오르면서 "저 행복이란 시를 보면 다시 연애편지를 쓰고 싶어지네." "그리움은 어떻하고?"
그랬다. 한 때 사춘기 청소년의 가슴을 휘둘러대던 그의 시들이 기념관 앞 공간 새겨져 있었다. 〈행복〉,〈출생기〉,〈거제도 둔덕골〉이 새겨진 대리석 조형물우측에 그의 동상이 오른쪽 다리를 꼬고, 왼손 위에 오른쪽 손으로 얼굴을 괸 채 고개를 들어 기념관 건물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키꼴임직했기에 174cm인 내 키를 붙여보았다. 더 커보였다. 한 2m는 좋이 돼 보였다.
청마의 약력이다.
기념관 오른쪽으로 돌아들자, 청마의 생가가 담장이가 덮인 돌담장안에서 드러났다. 행랑채를 단 ㄱ자 가옥인데, 마당에 토종잔디가 카펫처럼 깔려있었다.
화단에는 붉은 꽃을 달았을 박태기나무가 잎만을 달고 있었고, 역시 꽃을 지워낸 목단도 늦은 객을 맞고 있었다.
본체 왼쪽에 굴우물이 나무덮개로 덮여있었고 우물과 돌담 사이에 장독대가 나무우리로 구획되어 있었는데,박꽃이 하얗게 일었다.
어릴 때 떠난 생가지만 그를 추억하는데 도움을 주려는 듯 그를 연상케하는 생활도구들이 가택 요소요소에 구색을 맞추고 있었다.
나, 역시 고향 친척집에 온 듯 엉덩이를 마루끝에 걸쳐보았다.
거제도 둔덕골
거제도 둔덕골은
팔대(八代)로 내려 나의 부조(父祖)의 살으신 곳
적은 골 안 다가솟은 산방(山芳)산 비탈 알로
몇 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마을은 언제나 생겨난 그 외로운 앉음새로
할아버지 살던 집에 손주가 살고
아버지 갈던 밭을 아들네 갈고
베 짜서 옷 입고
조약 써서 병 고치고
그리하여 세상은
허구한 세월과 세대가 바뀌고 흘러갔건만
사시장천 벗고 섰는 뒷산 산비탈모양
두고두고 행복된 바람이 한 번이나 불어 왔던가
시방도 신농(神農)적 베틀에 질쌈하고
바가지에 밥 먹고
갓난것 데불고 톡톡 털며 사는 칠촌(七寸) 조카 젊은 과수며느리며
비록 갓망건은 벗었을망정
호연(浩然)한 기풍 속에 새끼 꼬며
시서(詩書)와 천하를 논하는 왕고못댁 왕고모부며
가난뱅이 살림살이 견디다간 뿌리치고
만주로 일본으로 뛰었던 큰집 젊은 증손이며
그러나 끝내 이들은 손발이 장기처럼 닳도록 여기 살아
마지막 누에가 고치되듯 애석도 모르고
살아생전 날 세고 다니던 밭머리
부조(父祖)의 묏가에 부조(父祖)처럼 한결같이 묻히리니
아아 나도 나이 불혹(不惑)에 가까웠거늘
슬플 줄도 모르는 이 골짜기 부조(父祖)의 하늘로 돌아와
일출이경(日出而耕)하고 어질게 살다 죽으리
청마기념관은 2008년 4월 18일에 개관되었다 그 가 1809년에 태어났으니 100주년이 되던 해다.
글 쓴 이들이 타계하면 그의 연고지에 그를 기리 는 문학관이란 이름으로 자료전시관이 서는데,이곳을 굳이 청마문학관이라 하지 않고 청마기념관이라 한 것은 필시 통영 청마문학관 때문이리라.
1층은 그를 추억하는 영상실로, 2층은 지인간에 오간 편지들, 교편을 잡았던 자료들, 그의 유필과 발간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소설가 박종화의 서신
생명의 서(書)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청마 유치환은 편지쓰기를 즐겼다. 하기야 통신수단이 빈약한 그때에는 유일한 소통의 통로였을테지만.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써 보냈다. 그 끈질김에 소녀는 마음을 주었다. 그녀
가 나중에 청마 옆에서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끈질기게 연서를 써 보내는 것을 지켜보며 속태움을 했던 부인 안동권씨 권재순(權在順)씨다. 시인 김춘수를 화동(花童)으로 삼아 결혼식을 올리고도 말이다.
청마는 정지용과 일본의 아나키스트에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31년 24세에 "문예월간" 2호에 '정적' 이라는 시로 정식으로 등단하게 된다.
이때부터 문학을 좋아하는 소녀들이 집으로 찾아오게 되고 이들과 밤을 새우며 담론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내인 권 재순씨는 '시인은 원래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때부터 청마의 행동을 인정해 주고 있는 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본격적인 일은 38세 때에 벌어진다. 통영여자중학교 근무 중 청마보다 8살 아래인 시조시인 이영도(李永道)가 가사선생으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시조시인 이호우 여동생인 이영도는 가정교사를 둘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일찍 결혼하였으나, 21세에 남편이 결핵으로 타계하자 딸 하나를 두고 있는 처지였다. 청마가 단아한 이영도에 대한 연심은 대단해서 3년의 구애 끝에 이영도의 마음을 여는데 성공했지만, 사회적인 환경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청마는 편지를 써서 새벽기도 차 교회에 가면서 우체통에 넣기 시작했다. 1947년 일이다.
이렇게 전해진 편지를 이영도가 받아 보관하고 있다가 6.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소실하고, 6.25 이후에서 청마가 교통사고로 타계한 1967년까지 보낸 편지만 5천 여통이나 되었다. 물론 이영도에게선 한 통의 편지마저 받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밤비/청마 유치환
해 지자. 날 흐리더니
너 그리움처럼 또 비 내린다.
문 걸고
등 앞에 앉으면
나를 안고도 남는 너의 애정
무제/정운 이영도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
바라가도 하리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루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보내리라.
청마가 사망한 다음 두 사람의 애뜻한 관계가 세상에 알려져 주간한국에서 5,000통의 편지 중에서 200통을 선정하여 '행복'이라는 시에서 얻은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시집이 출간하게 되었다. 이때 젊은이들은 이 책을 사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곤했다.책 판매로 얻은 인지세는 "한국문화사"가 주관하는 "정운시조상" 기금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청마가 세상을 하직한 지 9년 뒤,이영도도 세상을 떠나 두 사람의 사랑도 끝을 맺게 된다.
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의 시집들.
청마시초(1939)
청마의 처녀시집으로 겨레와 혈육,그리고 야성적 생명력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청마의 시관(詩觀)은 이후의 시에서 보여 주는 공통된 시세계로 발전하게 된다.
시 「깃빨」외 53편 수록
생명의 서(1947)
청마시초』이후 북만주 생활 5년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을 모은 시집으로, 자신의 시 작업이 운명적인 것임을 밝히고 있다.
시「광야에 와서」, 「수(首)」,「도포」,「절명지」등이 이 시기에 쓰여진 대표적인 작품이다.
시 「귀고(歸故)」외 57편 수록
울릉도(1948)
청마는 이 시집을 통해 해방의 기쁨과 미래에 대한 기쁨, 조국과 겨레에 대한 뜨거운 사람. 불의와 부정에 대한 강한 비판적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시「동백(冬栢)꽃」외 34편 수록
청령일기(1949)
정감적인 연가류와 동양적인 허정의 세계를 노래한 시집으로, 청마는 자신의 글「나의 문학」을 통해 "고절에 유열을 느끼는 유유자적한 은둔"의 세계가 바로「심산」의 시세계임을 밝히고 있다. 특히 이 시집에서는 다른 시집에서 볼수 없었던 5행시가 많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시「심산(深山)」외 65편 수록
보병과 더불어(1951)
6.25동란 중 국군을 따라 종군한 10여일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전선(戰線)시집으로, 시인 자신이 직접 종군한 생생한 체험이요 증언이란 점에서 한국 현대문학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이 시집은 조국애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시인의 휴머니즘과 준엄한 윤리의식을 찾아 볼 수 있다.
시「호천(好天)」외 33편 수록
청마시집(1954)
시기가 다른 두 권의 시집-『기도가』와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를 합본한 것으로 청마는 이 시집의 후기를 통하여 조국의 현실에 대한 절망과 문단에 대한 증오를 느끼면서도 시를 쓸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자신이 시보다도 인생을 더욱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시「낙화(落花)」외 111편 수록
제9시집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이 쓰여진 시기에 이르러 청마 시인의 방황하던 인생은 겨우 자리를 잡게 되고 시편들도 보다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이후 이 시집은 아세아 재단의 '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춘조(春朝)」외 38편 수록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제9시집』이후부터 60년까지의 작품을수록한 시집으로, 정직한 인간이 현실의 부조리에 반응하는 도덕적인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미루나무와 남풍(1964)
이 시집에서는 서정성을 띤 작품과 60년대 우리 나라 현실을 비판한 참여시의 두 성향을 살필 수 있다.
시「미루나무와 남품」「열애」는 짙은 서정성을,「그래서 너는 시를 쓴다」에서는 냉철한 비판정신을 살펴볼수 있다.
시「한 그루 백양나무」외 41편 수록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그동안 발표되지 않았던 시 「오막살이 두 채」와 그동안 발간된 시집에서 서정시 만을 가려 뽑은 애정서정시 집
위로부터 시계 방향으로 시집<보병과 더불어>의 후기를 쓴 조지훈 시인, 제자같이 아꼈던 김춘수 시인, 통영문화협의회를 같이 했던 시조시인 김상옥, 그와 절친했던 정진업 시인.
가운데 사진은 청마를 안의중학교및 경북대교수로 초빙한 허유 하기락 박사와 그와 친하게 교류했던 이상의 초상화
이상과 일화다.
어느 날 이상(李箱)이 일본으로 간다면서 예고없이 청마를 찾아왔다. 두주불사하는 두 사람은 항구의 싸구려 술집에서 엉망진창이 되도록 마셨다.
생명력이 충천한 시인 청마와 생명력을 찾아 얻어 보려는 이상(李箱)이 만난 술자리이니 의기투합했을 것이다.
그날밤, 부산 우체국 건너편에 있는 조선 여관이란 삼류 여인숙에서 지내고 이튿날 저녁 관부연락선 부두에서 영원한 작별의 손을 마주 흔들었다.
'이상(李箱)은 까마귀 같은 퀭한 눈에 커다랗게 입을 벌려 흥소했다.'
이것이 청마가 기록한 이상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사진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한학에 조예가 깊은 김달진 시인, 부산문학을 같이 이끌었던 김정한 소설가, 그와 한국시단의 쌍벽을 이룬 서정주 시인,
시인 서정주와 일화다.
사상논쟁에 휘말린 서정주가 심신이 지친 몸으로 청마를 찾아왔다. 청마는 그런 그를 맞으며 마음이 아팠다.
그 날 저녁 청마는 서정주가 머무는 방에다 큰 딸애와 어린 손자를 보냈다. 서정주가 어린 생명을 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청마의 성품은 친계(親系)로부터는 강직함을, 모계(母系)로부터는 후덕한 덕성을 물려받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런 연유로 그의 성격 규정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로 대표되는 양면성에서 찾아져 왔고, '의지와 사랑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타인으로부터 받아 왔다.
청마는 자기가 시인인 것을 별로 달가와 하지도 않았던 것같다.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려고 시도한 일 조차 있었다.
<생명의 서> 서문에 이런 글이 보인다.
'또한 염의도 없는 분뇨를 하듯 어찌 시인이 시를 낳으려고 애를 써야 하겠습니까. 참아서 능히 견딜 만하거든 아예 붓대를 들지 아니하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불행을 하나라도 덜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그는 자신이 시인임을 부정하려고 하고 있다.
평단에서는 청마의 시정신은 줄기차서 일찍부터 대가의 품격을 지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일부 그의 시가 생경하고 현대시의 특징인 기교를 도외시한 시로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대하와 같은 시심의 흐름과 사유의 깊이는 시의 지엽적인 표현에만 집착하기에는
너무나 건강하다고 진단을 했고, 그는 평생동안 뚜렸한 시적인 변모를 보임이 없이 한결 같은 목소리로 생활과 자연.애련과 의지, 허무와 신 등을 노래했는데, 이러한 그의 특성이 시로써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시가 바로 시인 자신의 인생과 직결되어 있었기에 그런 것이 가능했다고 언급했다.
유치환의 시 '수(首)'에 나오는 '비적'을 놓고 몇 년째 친일시 논쟁이 거듭되고 있다. 지금껏 친일행위에 대하여, <총칼을 들이대는데 버틸 재간이 있겠는가, 너 같으면 친일 안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항변했던 서정주에 비하여 친일행위에는 비교적 자유로웠던 청마였다.
그가 북간도로의 망명에 앞서 남긴 유명한 <생명의 서>란 작품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불거져 나왔던 것이다. <실록 친일파>를 쓴 고 임종국 씨 글의 서문에서 “유치환의 '수(首)’(<국민문학>, 1942. 3) 역시도 거짓말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시가 '친일' 시라고 밝혔다. 그는 “ '작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목이 효수된 그 시의 ‘비적(匪賊)’은 대륙 침략에 항거하던 항일 세력의 총칭이었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청마에 대한 친일논쟁이 불이 붙었다. 문제가 되었던 시 '수'의 전문이다.
수(首)
유치환
十二月의 북해(北海) 눈도 안오고
오직 만물(萬物)이 가각(苛刻)하는 흑룡강(黑龍江)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비적(匪賊)의 머리 두 개 내결테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少年)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寒天)의 모호(模糊)히 저물은 朔北의 산하(山河)를 바라보고 있도다
너희 죽어 율(律)의 처단(處斷)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秩序)를 보전(保全)하려면 인명(人命)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희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威協)을 의미(意味)함이었으리니
힘으로서 힘을 제(除)함은 또한
먼 원시(原始)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法度)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生命)의 검렬(險烈)함과 그 결의(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수 없는 무뢰(無賴)한 넋이여 명목(暝目)하라!
아아 이 불모(不毛)한 사변(思辨)의 풍경(風景)위에
하늘이여 사혜(思惠)하여 눈이라도 함빡내리고지고
이유인즉 항일투사의 죽음을 조롱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통영시와 보수적인 문인단체인 문인협회 등에서는 '비적은 단순한 도둑떼일 뿐이다'라고 전제한 뒤, '정말 가성네거리에 효수된 사람이 독립군인지 밝혀내라'고 역공을 펼쳤다. 그러자 문제를 제기한 측에서 일본측에 보관 중인 자료를 제시하며 '비적의 머리 두 개'는 '항일독립군의 머리'임이 분명하다고 문제를 확대시켰다. 2004년에 드러난 일이다.
청마의 친일논란이 가열되던 차 움직일 수 없는 자료가 발굴되었다. 2007년 10월 경남대 박태일교수가 1942년 만전일보에 기고한 청마의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기사를 공개했기 때문이다. 옆에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써 문학작품인 '수'에 대하여 여러 각도로 막연히 해석하며 주고 되받던 공방도 끝나게 되었다.
청마의 문학으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청마기념관을 나서며 새삼 사람의 처신에 대한 어려움을 깨달게 되었다.
첫댓글 청마선생님의 정원을 돌아보는듯합니다,
높고넓은 그만의 시세계...
나라가 있어야 산하(조국)도 예술도 있다는 것을 내가 하나하나 들어말하지 않아도 지금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