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가 함께, 평화가 함께
사랑하는 길벗 가족 여러분께 드립니다.
한용걸 신부 (프란시스, 강릉기도소)
도시의 밤은 어둡습니다.
휘황한 네온사인 숲 사이에서도 대낮같이 밝힌 가로등도 이 도시가 가진 슾지고 눅눅한 어두움을 감추질 못합니다.
경자도 애자도 툴툴거리던 은주도 조랑 거리던 두 할머니의 늦은 밤의 옛 추억 더듬기도 이제 덮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어둔밤 사무실 창밖으로 뵈는 도시의 밤하늘과 그 속에서 조금씩 잠들어 가는 마음시린 사람들 틈속에서 이렇게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그러니까 10년 전 이맘때 어느 고즈넉한 저녁이었습니다.
동창 신부님과 담소 중에 사제관 창문 아래쪽 어느 허름한 판자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 울음소리의 주인공을 찾았고 몇칠후에 세브란스에서 위암 말기 로 확인 했습니다.
윤기선 할머니 셨지요.
위독하시다 는 전갈을 받았을 때 저는 부제서품을 위한 피정지에서 였어요.
고독한 할머니의 임종과 장례를 치르는가 ?
아니면 수년을 기다려온 서품을 받느냐 ? ....
"내년에 서품 받지 뭐" .... 벗에게 이 말을 남기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갔습니다.
수사신부의 길을 위해 수련 중이던 젊은 친구는 이렇게 운명과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후로 저의 믿음은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일, 곧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 믿고 살았습니다.
도시에서 외로이 죽음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우연히도 많이 만났습니다.
수만명이 운집한다는 예루살렘교회 담 밑에 어린아들과 살던 알콜 중독자이며 장애인인 권오봉 님, 그 형제를 화장하고 돌아오던 날 홀로 남겨진 아들이 서러워 꺼이 꺼이 울어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제가 서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그들 곁으로 더 가까이 가고 싶었고 마침내 수도복을 벗어두고 산동네 판자촌에 작은 방을 얻었습니다.
제 안에는 능력도 카리스마도 없고 삶의 신비도 없었습니다.
맨발의 성자 프란시스는 없고 그저 약하고 세상모르는 어린 청년혼자 이 도시의 그늘에서 그저 두엇의 외로운 이들 곁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지치고 고독했을 때 제곁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고독의 밑바닥 인줄 알았는데 인생의 깊은 밑바닥은 제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깊었습니다.
치유의 능력을 보여주길 기대한 몇몇의 친구들도 떠나고 산동네 쪽방엔 "하느님과 나" 둘이 있었습니다. 고독과 치열하게 마주할수 있었습니다.
차라리 행복했습니다.
아내는 이때 옹송거리고 떨고있는 제게 다가왔고 이듬해 여름 우리는 결혼을 하여 산동네에 살림을 차렸습니다.
그러나 수도생활도 결혼생활도 내면의 깊은 외로움을 막아주지 못했습니다.
결혼은 행복이 아니라 차라리 고통이었고 책임을 요구 했지만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 굴뚝 같았습니다.
하느님은 선물로 "요한과 혜린" 이 두아이를 주셨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비로서 어찌 처신 해야 하는지 많이 배웠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아버지들과 나눌 얘기가 많이 생겼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는 "가난부인"을 데리고 살았다는데 ....
그런데 저는 대학교수의 외동딸이고 이화여대와 그 대학원을 마친 아내였어요.
대소변을 받아내는 중환자들과 중증 정신지체인들 , 알콜중독자들, 노숙자들의 곁방에서 함께 지냈어요 ... 딸아이 낳을 비용이 없어 한 살 더 먹은 제 오빠의 돐 반지를 팔아 병원비를 마련해야 했지요. ,
6 개월 된 딸아이가 폐결핵을 앓을 때 ..... 결핵을 이유로 영구임대 아파트로 얻어나갈 때 일곱 평 짜리 영구임대 아파트가 너무 넓고, 너무 깨끗하고, 하수구 냄새 안 나서 좋아하던 아이들에게....
우리 아이들만의 공간이 생긴 것에 너무 좋아서 눈물을 흘리던 아내에게...
성자의 가난은 아름다와 보여도 가난한 저는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속으로 눈물을 삼켯지만 "여봐라" "우리도 이제 아파트 산다"며 토닥여 주었습니다.
그래요 가난부인은 언제나 저와 함께 있었습니다.
전쟁같은 생활에도 우리 부부는 장애인 복지사업을 하는 사단법인을 설립하였습니다.
노숙자를 진료하고 장애아 부모대학을 개설하고 장애인의 재활센터와 재활병원을 설립하려는 시도를 하고 통합교육 장애아 부모 모임 , 그리고 장애아동 보조교사 사업, 그리고 이 사업에 대한 제안이 인천시에서 조례로 제정되고 국회에서 법률로 받아들여지기 까지 전쟁과도 같은 시간을 걸어왔습니다.
우리는 이 달 말 부터 남구에 장애인의 재활센터를 건축하기 시작합니다.
남구와 인천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이 이용할 공간입니다.
모든 예산은 확보되었습니다.
10월이면 준공식과 입주를 하게 됩니다.
이 건물을 세워주신 것은 안영근 국회의원님과 박우섭 남구청장님을 비롯한 여러 지역 선배님들.
보이지 않게 모든 면에서 음덕을 베풀어주신 후원자님들.
그리고 길벗공동체의 회원님들.
그리고 격려해 주신 모든 분들입니다.
실패와 성공, 사랑과 애증, 분노와 용서, 눈물과 회한 그리고 용기와 도전이 뒤엉킨 가난하지만 당당하게 살았던 10년이었습니다.
지난 이른봄 저는 성공회 대전교구의 주교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선배이신 신부님으로부터 " 아직도 사제의 길을 희망하는가" 하는 물음과 동시에 " 아직 이라면 만나보고 싶다" 는 전갈과 함께 3월 어느 날 대전에서 서울, 부산, 대전 세 교구의 주교님들을 뵈었습니다.
부산의 주교님은 환한 웃음으로 "멋진 중년으로 변했다" 면서 용기를 주시고 서울의 대주교님은 10년 동안 장애인들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온 사실에 감사해 하셨고 대전의 주교님은 그저 잔잔한 미소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선배 신부님의 "다시 돌아왔으면 한다" 는 말씀은 마치 천둥처럼 울렸고 신중한 답변을 위해 주변의 벗들과 어른들께 상의를 드리고 그분들의 한결같은 동일한 대답은 "랫잇비" 였습니다
"순리에 맡겨라" 그 한마디 뿐 이었어요
저는 하느님을 잊고 살기도 하였고 떠난 듯 하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한순간도 저를 잊지 않으셨어요 그 고독의 순간에도 저를 업고 오셨습니다.
10년을 기다리고 계셨지요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이 달 말이면 저는 길벗 공동체를 떠나 성공회 대전교구 가서 사제 서품을 위한 여러 시련의 과정을 다시 밟게 될 것입니다.
독신의 수도사제에서 이제 결혼한 교구 사제로 서품을 준비를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어떤 모양으로 저를 기다리실지 알수 없으나 저는 거부할수 없는 운명적인 힘에 이끌리고 있습니다.
헷세의 "나르치스"와 같던 삶의 여정이 다시 시작되는군요
과거 수도자 시절 눈푸른 납자에서 이제 펑퍼짐한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 터덜거리며 먼지나는 길을 따라 다시 걸어갑니다.
다만 두렵고 떨릴뿐입니다.
한없이 품 넓으셨던 어머니께 감사드리고 제게 가장 냉혹한 비판자이자 훌륭한 동지인 아내, 그리고 내 모자란 영혼에 늘 무던하게 품어주시고 언제나 큰나무 그늘처럼 서 계셔 주셨던 스승이신 박종렬 목사님. 그리고 길벗 가족 여러분 모두,
모두 제겐 어둠 속의 빛이었고 선생이셨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제가 다시 길벗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다면 여러분에게 미처 하지 못한 사랑을 깊고 넓게 나누기를 바랄 뿐입니다.
10년을 하루같이 보살펴 주신 여러분의 하늘같은 음덕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다만 어디에 있던 저는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식탁에 쪼개지는 빵과 떡이 되어 살겠습니다.
함께 걸어 주신 길벗 가족 여러분께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보내며......
모두에게 하느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2004년 6월
그리스도 안에서 프란시스 형제 드림
<에이집 왕초>
첫댓글 한용걸 신부님, 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 한국성공회 안에 이렇게 훞륭하신 성직자님이 계신 것 전에 미쳐 몰랐어요. 글도 잘 쓰셨습니다. 하느님이 함께하시고 많은 축복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張貞文 신부
신부님! 1995~96년에 섬김의 집에 다녔던 사람입니다. 병원 일을 하며 토요일에 잠시 들러 어머님과 맹인청년과 파킨슨 환자, 미스 홍 등등 만나서 사랑을 나눴던 시간들이 늘 기억됩니다. 특히 어머님의 헌신적인 섬김을 통해 저의 사역이 시작되고 지금은 시골교회를 맡아 복음을 전하는 여 목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늘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지탱해 나갈수 있는 힘은 주님이 만나게 해주신 분들이 심어준 예수님의 사랑이라 생각됩니다. 힘들때마다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다시금 주먹을 불끈 쥐고 주님을 바라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