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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획연재 -미국의 여성 불교 >
가장자리에 서 있는
서구 여성 불자들의 현대적 시각들(3)
[Buddhist Women on the Edge: Contemporary Perspectives
from the Western Frontier, Edited by Marianne Dresser,
North Atlantic Books, Berkeley, CA. 1996]
서평자: 주 현 (뉴져지 드루대학에서 불교심리학 전공, 현재 스토니부룩 대학에서 불교학 강의)
Part 3-2
이 책은 메리안 드레서(Marianne Dresser)가 삼십 명의
서구 여성 불자들이 쓴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필자
들 각각의 삶의 이력을 드러내기보다는, 본래의 여성성 안에
서는 불교가 어떻게 이해되고 수행되었으며, 또한 그에 따
른 문제점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불교의 가르침,
철학, 윤리, 심리, 종교성 등을 거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
의 서평도, 번역의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이 책을
직접 읽는 시간이나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배려와 함께, 필자들이 쓴 각각의 글의 핵심적인 내용을 가
능한 한 있는 그대로 정리하여 알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지난 5월호(Part 1)와 6월호(Part 2)에 이어, 이번 호에 세
번째의 Part 3를 끝으로 이 책의 소개를 마친다.
툽텐 쵸드론 (Thubten Chodron) -
“당신은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 서양 비구니의 삶”
(You’re Becoming a What?: Living as a Western Buddhist Nun)
필자: 툽텐 쵸드론은1977년에 비구니계를 받았다.
현재 시애틀에 있는 법우 회(Dharma Friendship Foundation)에서 가르치고, 수련회 지도를 위하여 해외여행을 많이 한다. 그녀가 쓴 책으로는, “열린 가슴, 투명한 마음”(Open Heart, Clear Mind)과 “당신의 마음은 무슨 색깔인가?” (What Color Is Your Mind?) 등이 있다. 그녀는 1996년 인도 보드가야에 있는 티베트 전통의 서양 비구니를 위한 “서양 비구니의 삶” 연수 과정을 조직했다.
툽텐 쵸드론
툽텐 쵸드론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십대에는 베트남 전쟁과 인종과 성차별 등의 시위들로 만연된 혼란이 호기심 많고 생각이 깊은 툽텐의 어린 시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왜 평화롭게 살기 위하여 전쟁해야 하는지? 왜 다른 사람들에게 편견을 갖는지? 왜 사랑하던 사람들이 이혼하는지? 왜 고통이 존재하는지? 등을 생각했다. 인생에는, 재미있고, 돈을 벌고, 가족을 이루고, 늙고 죽는 것보다 더 무엇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모나, 학교 선생님, 종교적 스승, 누구도 그녀를 만족하게 하지 못했다. 자비심 많은 신(神)이 왜 사람들을 벌하는지, 전지전능하다는 신이 왜 사람들의 고통을 멈추게 하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이치에는 맞으나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고, 삶을 이끌어 줄 만한 합리적이고, 포괄적인 철학을 찾지 못하여 그녀는 결국 종교를 버렸다.
1975년, 교육학 대학원 과정을 하고 있을 때, 툽텐은 두 티베트 불교 승려가 가르치는 명상 수업에서 라마 예쉐(Ven. Lama Yeshe)와 조파 린포체(Ven. Zopa Rinpoche)의 스승들을 알게 되고, 어린 시절부터 늘 생각하고 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놀라게 된다. 그것은 환생과 업에 관한 것이었다. 집착, 노여움, 그리고 무명으로 우리 문제의 근원이 되어 왜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는지 설명이 되었다.
그리고 점점 불법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점검하기 시작했고, 불법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툽텐은 모든 일을 놓고, 라마 예쉐와 조파 린포체가 있는 네팔에 가서 공부하기 위하여, 그들이 일하고, 가르치고 명상하는 집단생활에 참여한다. 한편 불교를 거의 모르고 영적인 성향도 없는 툽텐의 가족들은 그녀의 장래성 있는 직업, 친구, 가족, 경제적 안정 등을 버리고 불교 승려가 되겠다는 그녀를 어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그녀의 부모는, 명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육체적 아름다움의 소유에서는 만족을 구할 수가 없다는 툽텐의 설득으로, 비구니가 되겠다는 그녀의 단호하면서 행복해 보이는 의지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녀에게는 구족계를 받는 것이 가족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가족을 확장하고,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을 키우는 것이었다.
1977년, 툽텐은 삼보(三寶)와 영적 스승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으로, 키압제 링 린포체(kyabje Ling Rinpoche)와 달라이 라마(Dalai Lama)를 증명으로 비구니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불교에서 계는 구속하는 것이 아니고, 자유롭게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제, 출가 수행자인 그녀는, 가진 것 많지 않고, 감정적으로 얽히지 않고,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따라서 내적 탐구와 봉사활동에 시간을 더욱 많이 갖는, 단순한 삶을 지향하게 된다. 계는 또한 관계를 맑게 정리해준다, 예를 들어, 남자들과의 관계는 훨씬 더 곧바르고, 솔직하며, 승려복을 입거나 삭발을 해도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기 때문이다. 계를 지키며 생활하는 그녀의 삶에서 단순함의 혜택은 명확하게 드러났다. 구족계는 네 가지의 기본적인 계가 있다: 살생, 투도, 음행, 그리고 영적인 깨달음에 관한 거짓이다. 이 외에도, 다른 출가자와 재가자들과의 관계, 먹고 마시는 내용물과 시간, 그리고 의복이나 소지품들에 관한 계들이 있다. 어떤 계는 염처수행을 방해하는 산만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계이다; 자신의 오래된 헛된 습관을 바꾸고, 생각 없이 돌아가는 업을 중단시키어, 시간을 지혜롭게 쓰고, 삶을 의미 있게 만들도록 촉진한다. 출가 생활은 거침없는 순항이 아니다. 계를 받는다고, 삭발하거나 납의를 입는다고 혼란스러운 태도나 생활습관이 간단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수도원 생활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모순적인 면과 맞닥뜨리게 한다; 한편으로는 삶의 깊은 의미를 느끼며 인간의 가능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진지한 원(願)을 세우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은 재미있는 오락, 재정적 안정, 명예, 쾌락을 추구한다; 한쪽 발은 열반에, 다른 쪽 발은 윤회에 담그고 있다.
툽텐에게 출가승으로 산다는 것은 이러한 다면적인 자신을 직시하며, 더욱 깊은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겹겹이 쌓인 위선, 집착, 그리고 두려움의 껍질을 벗겨 낼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노력으로 수행의 점차적 진전과 행복을 발견한다.
이렇게 19년 동안의 출가 생활을 통하여, 툽텐은 홀로 또는 사원에서 여럿이 함께 공부하고, 가르치고, 일하고, 용맹 정진하며, 도시에서, 시골에서, 아시아에서 그리고 서구에서 살았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티베트 전통을 따르는 서양 비구니의 첫 세대로서 직면하는 몇 가지 장애를 털어놓는다. 우선, 서양 비구니들은 스스로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티베트 스승들은 망명자 신분이기 때문에 서양에서 출가한 제자들에게 재정적인 보조를 할 수 없고, 그들의 주 관심사는 오직 망명처에 사원을 세우고 티베트 망명촌을 돌보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 비구니들은 일반인의 옷을 입고 도시에서 일해야 하고, 계를 지키기도 어렵고, 또 인도에서 공부하고 수행할 때는 질병, 비자 문제, 정치적 불안정 등의 문제에 직면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아이들은 머리가 없다고 놀리고, 어떤 동정심 있는 낯선 이들은,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은 아직 아름답고, 암 치료가 끝나면 머리가 다시 날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처한 물질적인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흔히 묻기를 “당신 수행승들은 무엇을 생산하나요?” 또는, “명상하며 앉아있는 것은 사회에 어떠한 공헌을 하는 것입니까?” 서구 사회에서도 비구니로 산다는 것은 이처럼 다양성 있는 많은 문제점에 직면하게 하지만, 바로 그런 문제점들이야말로 툽텐에게 수행을 더욱 깊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민주주의와 평등사상에 길든 서양인으로서의 출가자가 기관단체의 부정적인 위계질서를 접할 때 도전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녀는 진정한 영적 수행의 목적은 우리를 자비롭고 현명한 사람으로 전환하는 것이지, 어느 스승을 숭배하거나 다른 문화를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툽텐은 다년간의 수행을 통하여 영적 수행과 종교적 기관의 구분이 명확해지면서, 영적 수행이 종교적 기관의 중요성보다 우위에 있음을 다짐하게 된다. 더 구체적으로, 사원 생활에서 여성으로서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한다: 서양의 장점인 직설적인 의사소통과 솔선수범, 그리고 동양의 장점인 겸손과 온화함이 바로 그녀가 채택한 방법이다. 툽텐은 앞으로 붓다가 될 가능성을 가진 인간의 본질에 주목하며, 어려움 속에서도 승가 생활이 직접적으로는 몇몇 사람을, 간접적으로는 온 사회를 이롭게 하는 수행의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미셀 벤자민-마수다(Michele Benzamin-Masuda) -
“전사를 위한 비옥한 땅”(Fertile Ground for a Warrior)
필자: 미셸은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 있는 오디너리 달마(Ordinary Dharma)에서 남편 크리스토퍼 리드(Christopher Reed)와 함께 가르치고, 워너 스프링스에 있는 만자니타 빌리지 수행센터(manzanita Village Retreat Center)의 공동 창립자이다. 베트남 선 스승 틱낫한 스님의 “Order of Interbeing”에서 재가 수계를 받았다. 그녀는 합기도(aikido) 4단, 검도(iaido) 3단이고, 13년째 무예
를 가르치고 있다. [주: “Order of Interbeing”은 1964-1966에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이 건립한 종단으로, 사부대중으로 구성되어 있고, 염처 선(mindfulness meditation)을 중심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 종단의 명칭, “Interbeing”은 불교의 무아, 연기, 중도 원리에 근거하여 합성된 영어 이름으로, 한자로는 “상즉(相卽)” 또는 “접현(接現)”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미셀 벤자민
미셸은 문화적, 종교적으로 많은 전통 속에서 살아왔다.
모친은 일본인으로서 신도(Shinto)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나, 나중에 카톨릭으로 개종했고, 부친은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라난 가톨릭 신자이다. 그녀의 양친은 한국 전쟁 당시 일본에서 만나 고베의 가톨릭 성당에서 결혼했고, 그들이 정착할 곳을 결정하려고 미국과 일본을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는 중에, 미셸은 미국에서 태어났고, 동생은 일 년 후 일본에서 태어났다. 점점 커가면서 미셸은, 오직 한 나라와 한가지 종교만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비추어 볼 때, 그녀의 부모가 느꼈을, 두 인종 간의 결혼과 미국에서 양육문제 등에 적응했어야 하는 어려움을 공감하면서, 일종의 혼란과 억압감을 느끼게 된다. 21세 때, 미셸은 세 살 적 떠난 후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동안 잊었던 자신의 일부와 접하게 된다. 나라(Nara)와 교토(Kyoto), 가마쿠라(Kamakura)에 있는 거대한 청동불상의 내부를 걸으면서 이상하게도 익숙하다는 생각이 든다. 미셸은 미국 생활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은 후 모국에 돌아와서 다시 일어서게 된 그녀의 어머니를 보고 놀란다. 미셸의 어머니가 그녀의 전통적 유산, 뿌리 깊은 종교, 그리고 개인적인 소신 있는 주권을 다시 찾았기 때문이었다. 언어장벽이 있었음에도 미셸은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의 연계를 다시 맺고, 이것이 후에 삶과 영성에 대한 그녀의 전체적인 관점을 바꾸게 된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무예와 카라데를 배우기 시작하고, 위빠사나 명상도 시작한다. 가라데 선생을 좋아했으나 대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수련 방법에 실증을 느끼게 되어 이 년쯤 후에는 다른 스승을 찾아서 합기도(aikido)를 배우게 된다. 그녀 자신에 내재해있는 강인한 호전성을 합기도가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즈음, 친구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불교사원 안의 거대한 불상 앞에 서며, 미셸은 위파사나 수련을 시작하게 되는데, 거대한 불상 안에서, 달마 안에서, 그녀는 모든 가능성을 본다. 그녀에게 그것은 무도와 명상을 통합하는 잘 다져진 길이었고, 그렇게 그녀 삶의 퍼즐 조각을 맞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퍼즐 조각이란 미국과 일본에 있는 그녀의 친척들, 진주만과 히로시마, 예수와 성모 마리아, 석가모니와 타라(Tara), 천사와 보살, 이 모든 것에 대하여 그녀와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드디어 미셸은 전사(warrior)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면서, 지금과 같은 고통과 혼란의 시대에는 전사들이 나와서 평화를 회복하고, 이해와 투명함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이 요구된다고 강조한다.
안락함과 편리함에 쉽게 빠져드는 생활 형태 안에서, 오직 인간의 값어치와 욕망만이 존경받는 닫힌 세계에 안주할 때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과 단절하게 된다. 불교도들이 아주 쉽게 말하는 부정은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삶에도, 이 행성에도… 그러나 우리는 결부되어 있어, 분리될 수 없으며, 상호 연결 속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미셸은 “언젠가 지구에 떨어지는 하나의 낙엽이 머나먼 별에 미치는 영향을 잴 수 있는 도구가 나올 것이다”라고 한 틱낫한 스님의 말을 인용하며, 명상 수행(mindfulness)이 바로 그 도구라고 이해한다; 명상 수행이 바로 우리 의지와 작은 행동이 세상에 두루 영향 미치고 있음을 알게 하는 도구라고... 그녀는 영적 단절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있는 우리의 현실 안주, 부정, 두려움 등과 연관된 지구상의 생명 파괴는 마치 난로 위에서 더워지고 있는 주전자 안에 떠 있는 개구리를 연상시킨다고 설명한다; 아직은 불이 낮아 미지근하나 점차 끓어 올라서 곧 죽음에 직면해있는 상황을 모르는 개구리, 그래서 주전자 밖으로 뛰어 달아날 이유를 모르는 개구리처럼. 우린 이미 죽었는가? 죽은 불교도인가? 그렇지 않으면 깨어나서 독소를 감지하고 너무 늦기 전에 행동할 것인가? 그 행동은 지금 이 자리에서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로 전환함으로써 바로 나올 수 있을 만큼 간단하다. 모든 전사에게는 자비의 종자가 있고, 그 종자는 지금은 휴면기에 있지만, 마음이라는 비옥한 땅에서 탐진치를 태우는 불에 의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불법의 길은 자비와 지혜의 검으로 미셸의 무도 수행을 이끌고, 이 수행은 미셸에게 지치지 않는 활력과 집중력을 발달시키는 도구였다. 전사의 진정한 적은 자기만족과 독선이라고 강조하며, 미셸은 여성 전사로서, 자신과 다른 여성들을 위하여 이러한 여성의 힘의 원형을 회복시키고, 전통적으로 남성들만이 걸었던 긴 계보를 벗기고 있다. 미셸은 “이 지구는 여성 전사가 걷는 비옥한 땅이다”라고 그녀의 마음의 소리로 외친다.
지코 린다 루스 컷츠 (Ji Ko Linda Ruth Cutts) -
“어두운 실마리” (The Dark Clue)
필자: 지코는 1971년부터 샌프란시스코 젠 센터에서 수행하는 선사이다. 현재 그린 걸치 농장(Green Gulch Farm)에서 수련 책임자로 선을 지도하는 전담 선사이며, 남편과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이 글은 1995년 가을과 겨울에 캘리포니아, 마린 카운티에 있는 그린 걸치 농장에서 행한 법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지코 린다 루스 컷츠
지코는 우리의 일상이나 불교 수행 중에 가끔 느끼는 바를 미로(maze or labyrinth)에 비유한다. 미로란 진로 안에서 길 잃기 쉬운 복잡한 연결망을 의미하는데, 이에 덧붙여, 놀랍다는 의미를 지니는 “amaze”도 역시 어리둥절, 망연자실, 몽롱함의 뜻을 가지고 있다. 지코는 낮과 밤, 그리고 계절의 시간에 따라서 땅 위와 땅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동식물의 생명 현상들을 볼 때, 비록 땅 위에서는 잠시 생명이 없어진 것처럼 보여도, 어두운 땅속에서는 생명이 진행됨을 보고, 이처럼 어두운 땅속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과정을 미로에 비유한다.
미로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전통에서 발견되는 다면적 가치를 지닌 상징이다. 이 미로의 상징은 영적인 길, 특히 여성의 영적인 길에 가득 차 있다. 미로의 가장 오래된 의미는 우주적인 바다, 그리고 생사의 신비한 근원인 자궁과 관계가 있다. 몇 천 년 된 옛 유럽 유적 발굴지에서 나오는 화병, 정제, 자궁 모양의 제단, 특히 위대한 여신상에서 미로와 같은 형태의 장식이 발견된다. 특히 미로(Labyrinth)라는 말은 그리스어 양날의 도끼(double ax)를 의미하는 labrus 와 비슷하고 그러한 양날 도끼의 신성한 상징은 지중해의 크레타섬에 있는 크노소스 궁전에서 두루 발견된다. 그 자체가 미로로 불리는 크노소스 궁전은 왕비가 거주하는 곳이었고, 황소가 뛰는 종교의식의 장소였다. 황소는 위대한 여신을 위한 으뜸가는 신성한 동물로, 머리와 뿔은 놀랄만하게 여성의 자궁과 나팔관의 모양이고, 뿔은 초승달과 비슷하여 인생의 주기적인 모습을 기념하는 상징이었다.(Marija Gimbutas, The Language of the Goddes, 1989).
이 글의 의도를 부각하기 위하여, 지코는 미로의 이미지가 잘 서술된 그리스 신화에서,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rus, 미노스의 황소)를 퇴치한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Theseus)를 소개한다; 미로의 궁 안에 갇혀있는 과격한 미노타우로스를 찾아 처형하기 위하여, 테세우스는 자신에게 반한 미노타우로스의 이복 여동생, 아리아드네(Ariadne)의 도움을 받는데, 아리아드네는 크레타의 미로를 만든 아덴스(Athens)의 장인에게서 미로를 탈출할 수 있는 실타래(clew/clue)를 얻어 테세우스에게 주고, 테세우스는 결국 미로 안에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찾아 죽이고, 실타래 덕분으로, 성공적으로 미로에서 탈출한다는 신화이다. 이 신화의 메시지는 많은 역경과 좌절에 빠질 수 있는 어두운 지하 미로에서도 아리아드네의 지혜로운 실타래 덕분으로 아무리 어려운 길이라도 벗어나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비유이다. 위대한 여신의 옛 가르침과 기능을 상징하는 자궁과 양날 도끼의 장소로서의 미궁은 지코에게 강력하게 작용하여 여성상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고, 많은 영적 전통의 여성 선조들의 지혜와 자비의 연계를 맺게 한다. 위대한 여신의 기능은 생명을 부여하고 죽음으로 인도하며, 또한 재생으로 이끈다. 이러한 상징에 공명하는 여신, 특히 티베트불교에서 숭배하는 자비심의 화신인 타라(Tara)와 흔히 선 법당에서 모시는 지혜의 문수보살이다.
문수보살은 무명을 베어내는 양날 도끼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삶의 내면적이고 외형적인, 태어나서 죽고 재생하는 완전한 주기를 의미한다. 두 삼각형이 맞대어진 양날 도끼는 또한 나비와 비슷하여, 이 나비는 오랫동안 덧없이 발현하는 삶 그리고 벗어남의 상징으로 알려져 왔다. 지코는 정원사 친구를 통하여 나비야말로 무상, 덧없는 생, 생사의 불가지한 변형과 밀접하게 연계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변형과 재생은 인간의 혼이나 마음에서도 심리학적으로 반향을 일으킨다. 융 분석심리학자인 버지니아 빈 러터(Virginia Beane Rutter)는 그녀의 저서, “여성을 변화시키는 여성(Woman Changing Woman)”에서, 여성의 입회식(Initiation ceremony)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유형을 기술한다: 억제(containment), 변형(metamorphosis), 그리고 출현(emergence)이다. 지코는 이 세 유형이 불교 수행의 여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본다.
첫 단계인 억제는, 용맹정진을 시작하기 전 자신을 자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다: 매일의 일정, 육체적인 한계, 묵언 등, 음식은 간단히, 주의는 산만하지 않도록 줄인다. 어려운 일, 미로에 들어가기 전에 이처럼 시간을 봉쇄하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나비의 생애도 비슷하여, 스스로 지은 번데기 혹은 고치(cocoon)라고 불리는 단단한 껍질 속에서 봉쇄의 기간을 갖는다. 변형을 위한 일종의 자궁이다. 용맹정진도 일종의 고치처럼 틀어박힌 생활, 또는 탈출(cocooning)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고치 생활의 진정한 의미는 탈출이 아니고 우리에게 필요한 성장과 변형을 위한 시간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억제는 주의를 가지런히 하여 수행해야 하는 일을 하려는 황금(khrusos) 같은 시간을 주는 것이다.
두 번째 과정은 변형으로, 고치 안에서는 밖에서 보는 것처럼 조용히 매달려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좌선할 때 흔히 땅속의 감자처럼 조용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감자는 땅속에서 계속 자라고, 고치속의 애벌레도 계속 변형하고 있다. 그렇게 나비는 전혀 새로운 생명체로 출현 되는 것이다.
세 번째 과정은 출현이다. 석가모니 붓다가 그의 억제, 변형,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친 후 출현하여, 세상을 위하여 가르치고 법륜을 굴릴 것을 요청받았을 때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당신이 출현할 때가 되면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당신 삶의 요구에 부응하여, 중생을 위하여 간호, 교직, 경제, 건축, 예술 등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지코가 이야기하는 네 번째 과정인, “재능을 가지고 남을 베풀 수 있도록 시장으로 돌아감”이다 [필자주: 이 내용은 종교적 탐구의 체계를 그림으로 설명하는 십우도(Ten Ox-herding Pictures)의 열 번째 부분으로, 이 과정은 구도자가 결국 한 바퀴 돌아서 성취의 흔적 없이 일상으
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비는 짧은 생의 요구에 부응한다. 일상생활로 돌아가, 꽃에서 꽃으로, 준다거나 받는다는 생각 없이 자신의 재능인 수분(受粉, pollinate)을 하며 돌아다닌다; 바로 “보시의 완성”(Perfection of Giving; 보시바라밀)이다. 온 세상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고, 본래부터 부여받은 온화한 말과 행동의 재능을, 바라는 바 없이 수분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미로에서 그리고 고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리스 신화에서와 같은 실마리(clue)가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이에게는 어느 때의 말 한마디가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지코는 처음에 들었던 어느 법사의 법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직장에서 연필을 슬쩍 집어 왔다면 좌선할 수가 없다.” 지코는 삶의 모든 면이 다 중요하고, 있는 그대로 깨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놀란다. 이처럼, 실마리들은 매우 단순한 것들이지만 그 끄트머리를 쥐고 있기는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고 한다. 그것은 하루 24시간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놓지 않고 인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마리들은 우리를 삶의 모든 부분과 완전하게 만나게 한다.
지코는 끝으로, 한평생 고치처럼 억제되었던 삶으로부터 탈바꿈한 에밀리 디킨슨의 시, “My Cocoon tightens - Colors tease -“를 소개하며 그녀의 글을 마친다.
앤 월드만(Anne Waldman) -
“마법으로서의 시”(Poetry as Siddhi)
필자: 앤 월드만은 30권 이상의 시집을 발표했고, 앤드루 쉘링(Andrew Schelling)과 공역한 “붓다 자녀들의 노래(Songs of the Sons and Daughters of the Buddha)”도 출판했다. 또한, 비트 북(Beat Book)의 편집자이고, 육신을 떠난 시학(Disembodied Poetics: Annals of the Jack Kerouac School)의 공동 편집자이다. 1974년 앨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콜로라도 보울더(Boulder, Colorado)에 있는 나로파 협회(The Naropa Institute)에서 케루액 학교(Kerouac School)를 공동 창설했다.
앤 월드만
앤 월드만은 어린 시절부터 글을 써왔고, 1970년부터는 정식으로 티베트불교를 수행해왔다. 그녀는 불교 사상과 수행이 예술과 자연히 어울리는 것 같아서 불교에 끌리게 되었다고 한다. 앤은 탄트릭 불교를 공부하면서, 인간의 마음이 평화롭기도 하고 또한 분노에 차기도 하는 다양한 심리학적 에너지 원리와 관계가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녀는 특히 티베트의 도하(doha) 전통에 관심을 끌게 되는데, 도하 전통은 스승과 제자 간의 확신을 갖고, 일종의 주고 받는 이중주적인 시의 형식의 대화로 전달되는 특별한 지혜와 가르침을 탐구하는 “깨달음의 노래”를 말한다. 이러한 형태의 시는 수행자의 강한 헌신적 수행에 해당한다.
앤은 자신의 불교적 수행이 글 쓰는 수행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용어는 바로 “에너지”라고 말한다. 이 에너지는 우리의 기본적 감각인, 열정(passion)으로 나타나는데, 탄트릭 불교에서는 열정의 에너지가 이원성, 대조성, 그리고 극단성의 체험과 관련되어 있어서, 우리의 몸이나 생각이 각각 떨어져 있는 확고한 실체처럼 나타나게 된다고 설명한다. 티벳 불교 수행은 그 자체가 에너지의 탐구와 변형이다. 그러한 에너지는 신경증적이고 집착하는 자아로 나타나는 것 외에는 그냥 에너지일 뿐이다. 이러한 순수 에너지를 산스크리트말로 ‘시디(siddhi)’라고 하는데, 글자 그대로 “마법”이라고 번역한다. 앤은 시(poetry)가 이원적인 놀이를 하는 곳에 우주의 순수 에너지의 능력이 쓰이기 때문에, 시는 아마도 일종의 마법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의 마하시다(Mahasiddhas)들은 실제로 복잡한 밀교의 상징들이나 금강승 가르침들을 노래와 도하의 방법으로 구성했다. 티베트불교는, 역사적 존재가 아닌, 환상이나 꿈에서나 만날 수 있는 보신불 혹은 광채의 발현인 법신(Vajradhara 金剛總持)으로부터 시작하여, 티베트 불교 시집으로 된 원문 경전은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다. 앤은 특히 시인들이 불교 전통 안에서 여러 가지 도전에 어떻게 직면해왔는지 늘 궁금하게 생각했다. 우리의 마음을 조용히 유지해야 하는데 왜 그렇게 많은 말 잔치를 벌여야 하는지… 요가 시인 밀라레파(Milarepa, 1040-1123)는 시를 통하여 가르침을 편 좋은 예이다. 밀라레파의 노래는 보통으로 하는 가르침의 방법인, 스승과 제자의 대화 형식을 띠고 있다. 한 예로 밀라레파와 여성 제자 팔다붐과의 대화는 간단한 산문으로 되어 있는데 감정이 격렬해지면 대화는 노래의 형식으로 부서지고, 결국에는 시가 된다.
앤은 가장 잘 써진 시에 나타난 지혜나 마법은 자기나 자신(I, me)이라는 기준점의 대상을 벗어나 있다. 그러한 시는 그것을 쓰고 있는 사람을 떠나, 에밀리 디킨슨이 “내가 쓴 시는 숨을 쉬나요?”라고 표현한 것처럼, 시 자체가 스스로 숨을 쉰다고 한다. 1960년, 시인 제임스 슈와일러(James Schuyler)는 한 잡지에, “우리는 흔히 대상의 추함이나 아름다움에 놀라지만, 예술이 그러한 외형들에 사로잡혀 흥미를 갖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주된 관심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예술의 핵심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이 말은 불교에서, “당신이 아름다운 것을 보면 끌리지 말고, 추한 것을 보면 내치지 마시오”라는 자명한 이치와도 상통한다. 슈와일러의 구절에서 키워드는 “외형들(appearances)”이다; 요점은 외형의 환상 그물에 걸려있지 말고, 어휘 자체의 에너지를 즐기라는 것이다. 앤은 시(詩)를 일종의 터마(terma), 즉 “귀하게 숨어있는 가르침”으로 본다; 그것은 바위나 산이나 바다에서 캐내거나, 위대한 스승들의 마음의 흐름에서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앤은 마지막으로, 이 글의 첫머리에서 던진, 그녀 자신의 불교적 수행이 글 쓰는 수행과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한 그녀의 한 구절 대답이다.
“이처럼 마음이 일어나고, 저절로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과정은 시를 쓰는 수련과 서로 통하는 울림이 있어, 시인은 생각을 붙잡아 언어로 정제한 다음 흘러가게 내버려 둔다.”
에린 블랙웰(Erin Blackwell) -
“구원된 사람들의 지대”(The Province of the Saved)
필자: 에린 블랙웰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글 쓰는 작가이다. 그녀는 Bay Area Reporter에서 예술 비평을 하고 있고, 여성 동성애자 월간지, Dykespeak의 예술 편집인으로 일하고 있다. 에린은 보살 시인이라고 불리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poem) No. 539에서 가져온 제목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구원된 사람들의 지대
그곳은 구원하기 위한 예술이어야 하는
본래부터 터득된 기술을 통한
무덤의 과학…
에밀리 디킨슨, 1862
에린은 맨 기둥이 받치고 있는 큰 방에서 숙달된 수련생들과 함께 검은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자신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신비한 마음속으로 끌려들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것은 선방 방석에 앉아서 하는 좌선이 기이한 동양 의식이고 그녀가 서양의 초심자라서 때문이 아니고, 선(禪)이 개념상으로 완전하고, 그녀는 너무도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에린은 다르마(Dharma)가 삶의 모든 각도에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녀는 어린 시절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할머니 밑에서 자유스럽게 자랐다. 캘리포니아를 떠나 뉴욕으로 왔을 때, 에린은 노자의 “삶의 道”(The Way of Life)를 집어 들고, 어느 해 뜨는 아침 그랜드 캐니언에서 노자를 크게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모든 지식은 결국 자기인식이라는 것과 의식의 움직임이 물질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설명함으로써 주객 분리의 논쟁을 조정한 독일 낭만주의 철학자 헤겔에게 깊숙이 빠져들었다.
그녀의 다음 스승은 프랑스의 브리타니 지방에 사는 중학교 여선생 니콜이었다. 니콜은 여성 동성애자이고, 검은 가죽옷, 욕망, 그리고 물질적 위험을 수반한 모든 것을 갖고 있었다. 무섭게 아름다운 그녀는 내가 프랑스에 갔던 이유였다.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은밀한 지식을 모두 에린에게 제공해 주었다. 니콜이 운전하는 모터사이클 뒤에 타고 앉아 비가 쏟아지거나 거센 바람이 불거나 얼어붙는 겨울에도 시속 100마일 속도로 불란서, 이태리, 그리고 스페인을 종횡무진 달렸다. 150마일마다 쉬어서 휘발류를 넣거나 벤딩머신에서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면서…그것은 기쁨이었다, 비록 귀는 울리고, 관절은 뻣뻣해지고, 발은 감각을 잃고, 다리에 경련이 와도… 그녀는 니콜에게서 세상은 모순으로 작동된다는 것을 배웠고, 에린에게 전에 없었던 것 같은 영혼의 미개발지로 인도하였다. 그것은 강렬한 성적인 그리고 영적인 연결이었고, 놀랍게도, 몸과 영혼은 하나라는 것을 느꼈다. 니콜과의 마지막 여행은 프랑스 고딕풍의 성당, 노트르담이었다. 니콜에 대한 지나친 감정적 의존 감에 대안을 찾던 에린은 노트르담이 바로 해답이었다. 13세기의 프랑스 영감을 주는 성모마리아는 여신이고, 어머니, 사랑하는 사람, 간호사자 친구이면서, 에린이 늘 여성에게서 찾고 있던 모든 아름다움, 우아함, 연민의 정수를 갖춘 개요서이었다; 그러나 에린은 자신에게 그것들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최근에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에린은 독일 금발 머리 브릿타에 매혹된다. 브릿타는 금문교를 건너 에린을 선방으로 안내하고, 스즈키가 쓴 “선마음, 초심자의 마음”(Zen Mind, Beginner’s Mind)을 빌려준다. 그 안에 헤겔도 있고, 노자도 있지만 난생처음 마음을 개선하는 실질적인 지침을 발견한다. 그것도 마흔 한살이나 된 나이에, 에린에게 그와 같은 보물이 나타난 것에 대하여 스스로 놀란다. 집에서도 두세 시간씩 좌선하고 스즈키 책을 읽고 또 읽는다. 그 후 그린 걸치(Green Gulch)에 있는 초심자를 위한 일일 명상모임에 나가서 비구니 게일린 가드윈(Gaelyn Godwin)을 만난다. 비구니 게일린이 매주 하는 심경 강의에도 참석하고,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구절에 매혹되어, 열심히 그 뜻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해 가을, 페이지 거리(Page Street)에 있는 젠 센터에서 3개월간의 수련을 시작하고, 감상적이 아닌 모임의 공동생활을 통하여 에린은 자신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견해를 상향 조정하게 된다. 한편, 에린은 좌선하면서 다리에 오는 불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어릴 적 무엇이나 아픈 것을 돌보아 주시던 그녀의 어머니를 연상한다; 어쩔 수 없을 때는 위로해 주시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던 어머니였다. 당신 잘못이 아니었더라도 딸이 아픈 것에 대하여 모든 책임을 다 스스로에 돌리시곤 했다. 좌선 과정에서 마음을 모아 집중하는 수련(sesshin, 接心) 중에, 나를 낳아서 키워 주시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에린을 세상 모든 중생에게로 나
아가게 했다. 그녀에게 고통에 대한 대답은 회피가 아니고 자비였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에게 또 서로에게 모성을 수련하였다. 이 같은 발견에 에린은 기뻐서 눈물을 흘린다. 좌선의 마지막 단계로, 그녀는 젠 센터의 주지로 있는 칠십 세의 비구니, 블랑쉬 하트만(Blanche Hartman)과의 독참을 요구하고 스승과 함께 앉아 고백한다, “지금 있고 싶은 곳에 있습니다.” 에린은 선 센타의 최초 여승으로서 영적 스승의 위치에 있는 하트만 비구니에게서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받는다.
페마 초드론(Pema Chodron) –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다”(No Right, No Wrong)
필자: 페마 초드론은 티베트불교 카규파에 속하는 미국 비구니로, 캐나다 동부 노바 스코샤의 케이프 브레튼(Cape Breton, Nova Scotia)에 있는 감포사원(Gampo Abbey)의 책임자이다. 그녀는 고
Karmapa)로부터 사미니계를 받았고, 1981년에는 구족계를 받았다. 페마는 “피할 길 없는 지혜, 자애심의 길, 이 자리에서 시작하기(The Wisdom of No Escape and the Path of Loving-Kindness, Start Where You Are)” 등을 포함한 여러 저술이 있다. 이 글은 1993년 트라이 사이클에 발표된 헬렌 트워코브가 행한 인터뷰,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다: 페마 초드론과의 인터뷰” (“No Right, No Wrong: An Interview with Pema Chodron,” conducted by Helen Tworkov for Tricycle: The Buddhist Review, 1993)에서 번안한 글이다.
페마 초드론
페마 초드론은 선의 전통에서 “모른다는 마음”(‘don’t know mind’)이라고 불리는 불교의 이해에 빠
진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모른다”라는 말은, 옳은 것도 모르고, 옳지 않은 것도 모른다고 표현하는 말이다.
페마는 그녀의 개인적인 견해로, “만일 누군가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낸다고 하면 그 사람은 보살도 서원에 대하여 만족스러운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페마는, 보살도 서원은 각자에게 펼쳐지는 어떠한 상황에도 벌거벗고 들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수행의 여정에 나선 보살은 항상 “모른다”는 의미를 되새기며,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트룽파 린포체에 대한 페마의 영원한 헌신은, 매사를 옳고 그름으로 판정할 수 없다는 스승의 가르침에 기인한다고 고백한다. 트룽파는 그의 저서 “영적 물질주의를 잘라 내면서”(Cutting Through Spiritual Materialism)에서 “영적 친구가 할 일은 학생을 모욕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실제 그는 매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혼란을 부추기는 도발적인 스승이었다. 페마는 그것이 필요했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습관적인 패턴에 묻혀 있는가를 일깨워 주기 때문이었다.
트룽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믿음이 커진 것은 그의 유일한 동기가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데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트룽파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보안 경비가 잘된 안전감에 안주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었다. 페마는 자신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원했고, 실제로 발밑에 기반을 형성하고 죽음을 거부하는 잘못된 안전감을 지속시키는 그러한 습관적인 행동 양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않고 마지막 안전지대는 없기 때문에 트룽파는 항상 제자들이 기반이 없는 불안정 상태에서 느긋하게 마음의 긴장을 풀 것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페마에게 “기반이 없다”(groundlessness)는 말은 가장 중요한 의미이다. 페마는 트룽파의 가르침의 핵심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트룽파 린포체는 여성을 사랑했고 매우 열정적이었으며 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
돌이켜 보건대 다른 여성 제자들에게, 그와 엮이게 된다면 그것은 가르침 일부라고 알려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쓴 모든 책을 다 읽고, 법문을 다 듣고, 그리고 가까이 갈 수 있는지 보라고… 그러고 나서 잠자리로 초대받았을 때, 순진함에 빠지지 말고, 받아드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이 사람이 누구 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라고 말한다. 트룽파와 잠자리를 원하지 않았던 다른 제자들은 올바르고 긴장을 유지하는 사람들이라고 믿게 하였으나, 그의 가르침은 경비가 잘된 안전지대를 버리라는 것이었다.
페마의 스승에 대한 헌신은 트룽파 사후에 더욱 깊어진다.
실제 그녀는 마음속 깊이 순수하게 말할 수 있다고 증언한다: 트룽파는 광인이었을지 모르나 그에 대한 경건심에는 변함이 없다고… 왜냐하면 트룽파는 단순히 예스-노를 떠난, 기반이 없는 곳에 머물 것을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트룽파는 용기를 키우는 전사를 훈련하는 첫 단계로 자애심(loving-kindness)의 요람에 자신을 넣어 두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불교 가르침에서 말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애심을 키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의 지저분하거나 기분 좋은 모든 부분을 기꺼이 감당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안전지대는 그러한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페마는 스승 트룽파는 윤리적 표준은 지키지 않았으나, 그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다시 한번 말한다.
스승의 모순되는 모습은 그녀에게는 큰 화두였다. 붓다의 가르침 이래로, 모든 법규나 규정이 깨달음보다 더 강조되면 그것은 곧 불교가 쇠퇴하는 징조라고 예견해 왔다. 다만, 이러한 예견은 계를 설정한 진정한 의도에 대해서가 아니고, 계가 안전지대로 잘못 인식되어 사용될 수 있을 것에 대한 예견이라고 설명하며, 페마 초드론은, 진정한 계율은 단지 율법 재킷을 입은 자신을 보호하는 수준을 넘어 더 깊은 뜻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법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은, 또는 옳거나 그른, 그러한 안전지대에서 벗어난 기반이 없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계율도 기반이 없는 곳에 안주해야 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지 못하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페마는 이것을 중대한 도전으로 본다. 이 점에서, 트룽파는 불법은 치료가 아니고 치유이므로(not about curing, but healing), 이것은 “실행할 수 있다(workable)”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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