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2차 대전에 유태인은 많이 희생이 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 독어권인 말하자면 독일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의 지역만 연상하기 쉬운데 프랑스도 독일에 점령을 당했을 시기에 마찬가지였다. 이번의 주인공인 《 사라 달루아 》는 그때 부모는 모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잃고 기적적으로 풀려나 살았다. 그 이후에 지방으로 피신하며 이름 조차도 다른 이름으로 바꿔 부르면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탓에 생존 자체도 문제이었지만 학교의 교육은 언강생심이었다. 온전히 홀로 모든 삶에 대한 책임을 줘야했기 때문이다. 이후에 프랑스가 해방이 되어 파리로 돌아왔을 때도 그녀의 나이는 이제 고작 16세에 불과했다. 이때 어린 그녀에게 손을 벌린 곳이 공산당이란 존재이었다.
현재 나이로 이미 85살이나 된 사라는 말한다.
" 나는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산당에서 배웠다 "
" 당은 나에게 인생을 가르쳐 주었지. 역사, 문화 그리고 노동, 자본, 사회에 대해. 문학, 영화, 오페라 그리고 인간에 대해. 당에는 지식인도 있고, 노동자도 있었어. 나 같이 유대인도 있고, 프랑스인, 이탈리아인도 있었지.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그냥 동지였어. 그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지.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살찌웠어. “
독일에서 해방이 된 직후 프랑스 사회는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려는 의지로 충만했던, 말 그대로 해방의 땅이었다. 그때 우파 계통이나 부르주아가 아닌 공산당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해방을 위해 큰 역할을 했던 레지스탕스들이 재건 과정에서 전면에 나섰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이다.
사라는 금상첨화 격으로 평생의 반려자도 그곳에서 만났다. 당시 조셉이란 남자는 서른 두 살이었고 사라는 열일곱 살에 불과했지만 공산당으로 맺은 인연은 그 어떤 것도 극복이 가능했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조셉은 나치 점령 하에서 《 마누시앙( Manouchian ) 》이란 조직의 멤버였고, 해방 후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1940년대 프랑스에서 마누시앙 멤버였다는 사실은 80년대 한국에서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멤버였던 것, 30년대 일제치하에서 광복군이었다는 것과 비슷한 무게를 갖는다고 한다.
남편과 함께 살았던 아파트에 여전히 살고 있는 사라는 그 당시 포스터를 아직 간직하고 있으며 그 마누시앙이란 존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 했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일제 치하에 3·1운동을 통한 저항의 역사가 없었다면 한민족은 정신이 죽은 민족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목수정은 그런 저항의 역사마저 없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부끄럽게 해방을 맞고, 그리고 지금은 어떤 자세로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리게 다가왔다는데 사라에게는 남편과 그가 속했던 마누시앙이란 바로 우리에게 3.1 운동과 같은 그런 존재인 것이다.
어쨌든 이 커플의 삶과 사랑의 중심에 정치가 굳건히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거기서 비롯된다. 그들은 야만적인 세력이 인류의 생명과 존엄을 더 이상 유린하지 못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꺼이 헌신하면서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물론 활동가로서만 살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가죽 제품을 집에서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러나 조셉은 사라가 서른 아홉 살이던 해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쉰 넷이었다. 일찍 떠났지만 그와 함께한 20여 년의 세월이 그녀를 이후로도 오랫동안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사라는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한다. 시장에서 점원으로도 일하고, 백화점에서 판매원으로도 일했다. 그녀가 사마리텐 백화점에서 해고된 것은 공교롭게도 미테랑 시절이었다. 열성적인 노조활동가이기도 했던 그녀는 사측의 미움을 샀던 것이다.
아직 사라는 유태인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 살고 유태적인 정체성은 가지고 있지만 신앙은 없는 무신론자라고 한다. 공산주의자이기에 당연히 그럴 것이다.
2차 대전 중에 나치에 협력을 한 비시정부는 나치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면서 비협력적인 수많은 프랑스인을 박해를 했었다. 가족 전체를 잃은 사라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증오가 엄청나지 않을까하는 질문을 목수정은 던진다.
이에 대한 사라의 대답은 이랬다.
"살아야 하니까, 인류에 대한 믿음을 택한 거지. 내가 왜 모르겠어. 내 부모를 데려가고, 고아에게서 집을 뺏어간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런 날 돌봐주고 다시 파리로 돌아왔을 때 내 후견인이 되어주고, 또 내가 집을 되찾을 수 있도록 재판을 함께 준비해준 사람들도 프랑스 사람이었지.
우린 계속 배신당하면서 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인류에 대한 믿음을 선택한 거야. 안 그러면 죽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덧붙이는 말은 충만한 사랑을 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사랑이란 사별한 남편과의 20년이란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그 기간의 사랑이다. 실로 목수정은 콧등이 시큰거리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현재 프랑스의 공산당 위치나 정치에 관심은 여러 가지 이유로 상당히 전락해 있는 처지이다. 젊은 세대들은 정치보다도 이 순간의 휴식과 쾌락을 이야기한다. 90세를 바라보는 원로 공산당원인 사라는 이에 대해 개의치 않고 뚜벅뚜벅 죽을 때까지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 공산당원의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 시절 남편과의 사랑에서 왔던 충만한 사랑의 배터리는 평생 쓰고 남을 만큼 축적이 된 모양이다. 게다가 90을 바라보는 그 나이에도 검은 머리카락이 흰 머리카락 보다도 훨씬 많다고 한다.
사라에게 좌파는 공산당인 동시에 인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놓지 않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자본보다 이익보다, 그 무엇보다 사람을 최우선의 가치로 놓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신념을 가르쳐주었고, 여전히 같은 신념을 나누고 있는 동지들을 찾을 수 있는 곳이기에, 당의 쇠락에 대해서 그녀는 크게 상심하지 않는 것이다.
목수정은 인터뷰를 마치며 제대로 된 멋진 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온 느낌이라고 한다. 그 박물관이 어떤 것인지 이 글을 읽은 사람은 제대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당과 사랑, 그것의 제대로 된 역사일 것이다.
witpo
Ⓐ 공산당원 집회에 참석을 하는 사라 달루아. 예전의 사진.
Ⓑ 사라 달루아의 가족들. 근래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