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석 시집 {안녕, 잘 지내지?} 출간
김영석 시인은 서울에서 출생했고, 2021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2020년 ‘중원문학상’ (시부문)을 수상했으며, 충북 충주에서 활동하고 있다. 충북문인협회 회원, 사람과 시 동인이고, 현대 동양대학교 재직 중이다. {안녕, 잘 지내지?}는 김영석 시인의 첫 시집이며, ‘까만 시간을 품은 사물의 시학’으로 잘 축조되어 있다.
노란 은행잎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떨어질 준비를 한다/ 가을을 떨구는 샛노란 바람/ 몸뚱이는 풍장 되는 거지/ 알맹이는 조장 되는 거지/ 이파리는 화장되는 거지/ 밟히고 나뒹굴고 썩어가고 매장되는 거지/ 낙엽 타는 냄새/ 가을이 뚝 떨어진다/ 파란 하늘이 뚝 떨어진다// 넌 떨어져 봤니?
----[하늘이 뚝] 전문
김영석 시인은 모든 사물에 드리워진 자연 이치에 시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이를테면 첫 시인 「하늘이 뚝」에서 시인은 시간이 되면 “떨어질 준비를” 하는 은행잎에 주목한다. 샛노란 가을바람이 불면 은행잎은 “밟히고 나뒹굴고 썩어가고 매장”된다. “낙엽 타는 냄새”가 퍼지면 드높았던 가을 하늘도 “뚝 떨어진다”. 자연 이치란 이런 것이다. 피어날 때는 피어나고, 떨어질 때는 떨어진다. 피어남과 떨어짐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피어나면 떨어지기 마련이고, 떨어지면 다시 피어나기 마련이다. 시인은 파란 하늘도 뚝 떨어지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를 향해 “넌 떨어져 봤니?”라고 묻는다. 노란 은행잎은 떨어진다는 마음 없이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자연 이치를 자연 이치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피어나는 일이나, 떨어지는 일에 매이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피어나는 이치와 떨어지는 이치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김영석의 시는 무엇보다 자연에 드리워진 이러한 역설을 눈여겨보는 데서 비롯된다. 자연 현상만 이런 게 아니다. 우리네 삶 자체가 그렇다. 태어나는 일은 늘 죽음과 이어져 있고, 죽는 일은 늘 태어남과 이어져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져 있지 않으면 생명 순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넌 떨어져 봤니?”라는 시인의 질문에는 모든 자연 사물을 관통하는 생명 이치가 스며들어 있다. 모든 사물이 피어나는 자리에서 모든 사물은 떨어지고, 모든 사물이 떨어지는 자리에서 모든 사물은 피어난다.
「직하폭포」에서 시인은 “끝을 향해 밑바닥을 향해 사정없이 모두 놓아두고” 전속력으로 떨어지는 폭포를 노래한다. 모든 것을 놓아야 폭포는 비로소 자유에 이를 수 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려면 ‘떨어지는’ 두려움을 떨쳐내야 한다. 시인은 “확 놔버려라”라고 외친다. 머릿속 생각으로 두려움을 떨쳐낼 수는 없다. 머리가 움직이기 전에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내려놔야 한다. 내려놓아야 뛰어 들어갈 틈이 생기고, 내려놓아야 움켜잡을 무언가가 생긴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이 힘을 시인은 절박함에서 길어 올린다. 절박함은 죽음을 각오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폭포는 죽음을 각오하고 까마득한 밑바닥을 향해 뛰어내린다. 밑바닥이란 심연(深淵)과 같다. 살아남으려는 욕망에 매인 사람이 어떻게 심연을 가로지를 수 있을까? 자기를 내려놓은 존재만이 심연을 거슬러 오를 수 있다.
시인은 심연을 가로지르는 폭포의 이 힘에 “서늘한 정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용대리 겨울 직포」에 나타나는 폭포의 서늘한 정신은 “고요 속에 격렬한 울림”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겨울 폭포는 찰나의 순간에 얼어버려 “황태들이 떼지어 오르”는 형상을 내보이고 있다. 시인은 폭포의 얼음 기둥이 우르릉 무너지며 황태들이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순간을 상상한다. 황태들이 살아 있는 한 겨울 폭포는 늘 봄을 꿈꾼다. 봄이 오면 폭포는 다시 절벽에서 밑바닥으로 뛰어내리는 모험에 거침없이 뛰어들 것이다. 시인은 가만히 옷깃을 여미며 봄의 정신을 잊지 않은 겨울 폭포의 모습에 허리 숙여 삼배를 올린다. 1950~60년대 한국시를 이끈 김수영은 「폭포」에서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지는 폭포를 “고매한 정신”으로 표현한 바 있다. 두려움에 매인 존재가 어떻게 서늘하고 고매한 정신과 마주할 수 있을까? 김영석 시의 밑자리를 형성하는 시 정신이 이러한 폭포의 정신을 따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반란을 꿈꾸며 먹태, 백태, 무두태
미이라처럼 구부러지지도 않는 지느러미로
덕대에서 내려선다
황태 너는 남아 늙은 시인의 시가 되어라
얼어버린 강 따라가다 보면
바다 만나리
몸서리치게 그리운 비린내 맡으리
- 「황태의 반란」 부분
오래도록 우려낸 침묵
맑고 깊게 퍼져서 간다
그의 두툼한 손길 닿는 곳마다
새순 불쑥 키가 커지고
왁자지껄 떠들던 버들치 한 박자 숨소리 낮추는 것을
꽃들은 자기만의 색깔 더하고
다 늦은 저녁
천년 잠에서 깨어난 결 고운 돌무늬 고요히 눈을 뜬다
- 「석종(石鐘)」 부분
여기에서 걸어 나갈 수 있다면
강물 속에서 뚜벅뚜벅
허기진 나무 밑으로 걸어갈 수 있다면
내 피가 머루주처럼 차가운 돌덩이 혈관
구석구석 돌아 철근 같은 무릎
후두둑 떨쳐낼 수 있다면
끓어오르는 피 생명을 꿈꾼다
- 「석상」 부분
「황태의 반란」에는 영하 15도 혹한에서도 반란을 꿈꾸는 황태가 나온다. 황태의 반란은 말 그대로 죽음을 삶으로 되돌리는 과정을 통해 펼쳐진다. 죽음을 삶으로 되돌리는 일은 심연을 가로지르는 일과 연동되어 있다. 반란을 꿈꾸는 황태는 얼어버린 강을 따라 바다에 이른다. 바다는 뭇 생명이 태어나는 모체(母體)와 같다. 그곳에서 황태는 “몸서리치게 그리운 비린내”를 드디어 만난다. ‘비린내’로 표현되는 살아 있음의 감각은 김영석이 추구하는 “늙은 시인의 시”를 낳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영하 15도의 혹한을 극복하는 이 힘이 “서늘한 정신”을 낳고, 그 정신으로 시인은 “그리운 비린내”가 넘쳐나는 시를 쓴다.
생명의 비린내를 품은 서늘한 정신의 미학은 「석종(石鐘)」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맑고 깊게 퍼지는 종소리를 시인은 “오래도록 우려낸 침묵”으로 표현한다. 종소리가 닿으면 새순은 불쑥 키가 커지고, 왁자지껄 떠들던 버들치는 한 박자 숨소리를 낮춘다. 꽃들은 자기만의 색깔을 더하는가 하면, 돌무늬가 천년 잠에서 깨어나 고요히 눈을 뜨기도 한다. 오래된 침묵에 길든 사물은 석종이 내는 침묵의 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침묵 속에서 온전히 눈을 뜨는 사물만이 새로운 생명으로 뻗어나간다. “동그란 원안으로 들어와/ 골똘히 제 속 들여다본다”라는 시구를 가만히 음미해 보라. 오래도록 우려낸 침묵의 소리는 어찌 보면 생명과 생명 사이에서 피어나는 맑고 깊은 소리인지도 모른다. 생명과 생명을 하나로 아우르는 ‘숨소리’라고 말해도 좋겠다.
석종(石鐘)에서 울리는 침묵의 소리는 「석상」에 이르면 “철근 같은 무릎”을 떨쳐내고 “끓어오르는 피 생명”을 꿈꾸는 석상의 이미지로 거듭 표현된다. 석상은 돌 팔 한 개쯤 끊어내서라도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고단한 하루”나마 얻고 싶다. 무엇이 석상을 이토록 간절하게 만든 것일까? 석상은 생명이 되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싶다. 석상이 흘린 눈물은 강물이 되어 흐르다가 어느 날 “모래가 된다”. 석상이 모래로 변하는 그 엄청난 시간을 묵묵히 버틴 존재만이 비로소 “끓어오르는 피 생명”이 될 수 있다. 얼어버린 황태가 비린내를 품고, 석종이 생명을 품으며, 석상이 생명으로 거듭나는 이 간절함을 품고 시인은 시를 쓰는 셈이다.
----김영석 시집 {안녕, 잘 지내지?}, 도서출판 지혜,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