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피 가는 길
오후 2시쯤 되었나, 우리는 푸른 초원에 노니는 양떼가 보이는 산자락에 있는 안젤루스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잠시 쉬고 고대 그리스시대 성지중의 성지 였던 신탁의 도시 델피로 가는 여정을 계속했다.
아테네에서 델피 까지 가는 길은 무척 멀어서 거의 하루길이 되었다.
하지만 가는 길은 설원과 초록의 신선함을 음미할 수 있는 넓은 평원과 높은 산이 이어져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차는 높은 산등성이를 오르면서 달렸다. 난생처음 보는 널따란 평원이 눈 아래로 펼쳐졌다.
멀리로 가까이로 높은 산이 보인다.
우리나라처럼 아기자기한 평야가 아니라 마치도 거대한 지도를 펼쳐놓은것 같았다.
바위와 흙의 빛깔도 다양했다. 눈 덮인 높은 산에는 강철과 유황 같은 지하자원이 묻혀있다고 한다.
경작지가 아닌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평야와 계곡을 보면서 창조 때의 세상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한참을 달리던 차가 눈을 이고 있는 높은 산과 굽이굽이 산길 아래로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쯤에서 멈추자 모두들 차에서 내렸다.
우리가 있는 곳 위편으로 사진에서 본 것 같은 예쁜 교회가 있었다.
맞은편 산자락에 빨간 지붕에 하얀 칠을 한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 보였다.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마을 이름은 ‘아라코바’라고 했다. 옛날에는 델피 신전으로
신탁을 받으러 가는 사람들이 머물렀지만 지금은 스키를 타러가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마을이라고 한다.
차를 타고 아라코바 마을에 들어섰다. 옛날부터 있던 작은 마을길과 건물 모양을 바꾸지 않으면서 현대적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마을 가운데를 지나는 길은 대형버스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아라코바에서 약 8 km 정도 더 지나자 멀리 목적지인 “파르나소스” 산 중턱에 있는 “델포이” 신전 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파르나소스 산 아래를 지나쳐 마을로 들어가 숙소인 호텔 앞에서 차를 내렸다.
우리가 머문 호텔은 평지가 아닌 절벽에 붙여 지은 건물로 현관 로비는 층으로는 육층이었다. 우리가 머물게 될 방은 삼층에 있는데 수동으로 여닫는 이중문이 달린 고풍스런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짐을 내려놓고 널찍한 베란다로 나가 나무로 된 창문을 양편으로
활짝 열었더니 눈 아래로 올리브 나무들이 난장이처럼 펼쳐졌다.
멀리 올리브 농원의 끝자락으로 푸른 에게 해가 보였다.
저녁 미사시간까지는 시간이 있었기에 모두들 주변을 산책하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올리브 농장이 있는 아래편 계곡으로 으로 내려가는 자매들도 있었는데 나는 몇몇 자매들과 함께 델포이 신전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갔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가는 온화한 날씨에 웃자란 식물들이 저마다 소담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강아지똥풀 같은 노란 꽃이 무리지어 피어있었다.
길 왼편 언덕위에 작은 공동묘지가 눈에 띠었다. 갑자기 무모한 호기심이 발동한 우리는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잡초가 무성한 길도 없는 언덕을 네 발로 기다시피 올라가 묘지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그곳에 들어서자 그곳에 있던 누군가 문을 열고 나가는 듯 한 소리가 들렸다.
하얀 대리석 묘에는 세상을 떠난 이들의 생전 모습이 남아있었다.
젊은이, 나이든 사람, 모피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들이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 일으켰다. 묘앞에는 금방 갖다 놓은 듯 한 싱싱한 꽃이 놓여 있기도 했다.
이들은 세상을 떠나서도 사랑하는 친지, 가족들과 사랑의 유대 속에 살아 있구나 싶었다. 죽은 사람의 진정한 무덤은 살아있는 이들의 가슴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묘지에 들어갈 때는 담을 넘었지만 나올 때는 마을로 가는 길이 이어지는 정문을 찾아 나왔다. 이 마을에서 묘지는 거리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마치도 이웃집처럼 가까운 자리한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오래된 집들이 이어지는 길가 돌 틈새로 봄꽃이 피어있는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자
은근한 분위가 느겨지는 풍기는 레스토랑과 호텔, 기념품 가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 가운데 커다란 나무가 있는 작은 광장에 깨끗한 정교회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 의논이나 한 것처럼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 벽을 장식한 화려한 이콘들은 성경속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천사와 성인들의 그림을 보고 있는데 저녁 기도시간이 되었는지 지성소에서 성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음의 높고 낮음이 많지 않아 단조로운 느낌을 주는 가락은 그리스도교 초기의 음률로
그레고리안 성가와 비슷했다. 우리는 조용히 성당을 나왔다.
성당마당에는 동네 꼬마들이 놀고 있었다. 여행자들이 낯설지 않은지 아이들은 쉽게 다가왔다. 함께 사진도 찍었다.
산비탈의 지형을 이용하여 들어선 아담하고 깨끗한 집들과 호텔, 나무가 무성한 집사이를
걷다가 길을 잃어버렸다. 오던 길을 찾아 돌아갔지만 찾지 못하고 다른 길을 헤매다가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후 6시, 미사장소인 호텔 로비로 자매들이 모였다. 모두 산책시간이 즐거웠던 얼굴이었다.
미사가 시작되고 독서를 마친 순간, 갑자기 주위에 고요함이 짙어졌다. 무슨 일일까 싶은데 저녁노을이 내려앉으며 보이는 모든 것을 감쌌다.
창밖으로 보이는 넓은 평야는 물론 우리 모두 장엄한 황혼의 침묵 속에 잠겼다.
아! 하는 짧은 탄성이 들린 것도 같았다.
순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신비로움과 경건함이
감돌았다. 황혼이 어둠으로 바뀌는 고요한 시간에 주님은 미사를 통해 우리를 축복해 주셨다.
지금도 그날 그 황혼의 시간을 생각하면 고요함이 주위로 내려 앉던 느낌이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