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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소원/인애/아는 것
제목: 하나님의 소원으로 삽시다!
성경: 호6:1-6
찬송: 409장
저자: 이삼규목사
출처: 20250928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 6: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호 6: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미국의 유명한 흑인 교육가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은 어린 시절에 노예였습니다. 먹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한 조각의 빵이나 그렇지 않으면 한 잔의 우유와 두 서너 개의 감자였습니다. 그것도 그릇에 담지도 못하고 먹었습니다. 그냥 냄비 채로 가져다가 손으로 집어먹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여러 가지 음식을 먹는 것이 소원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 집 따님들이 손님들과 함께 정원에서 생강으로 만든 과자를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워싱턴은 그 생강과자가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나무 위에 숨어서 그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소원을 그렸습니다. √"만일 앞날에 자유의 몸이 된다면 생강 과자를 실컷 먹으리라." 그러다가 워싱턴이 진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유인이 되고 보니 생강과자 먹는 것은 소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노예였을 때는 생강과자 먹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지금 자유인으로서는 더 높은 소원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훌륭한 교육가가 되리라는 소원을 갖게 되었는데 열심히 노력하여 흑인 중에서 가장 위대한 교육가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미개하면 미개할수록 낮은 차원의 소원을 갖습니다. 철학이 없는 사람들은 먹는 것을 소원합니다. 입는 것을 가장 큰 소원으로 생각합니다. 반대로 사람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소원의 수준도 높아집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성도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그런 것으로 소원을 삼지 않습니다.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소원을 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에는 하나님의 소원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성도는 무엇보다도 이 하나님의 소원을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의 소원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함께 생각하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소원으로 삽시다!”
√1.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것은?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오늘 본문에서 “원하고”라는 히브리어 원문의 뜻은 ‘원하다’보다 더 강한 ‘즐거워하다’(delight in, have pleasure in)라는 뜻입니다.
소요리문답 제 일 문에 보면 사람의 제 일된 목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1)인애을 원하십니다.
인애는 ‘헤세드’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뿐만 아니라 이웃을 향한 사랑도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것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 즉 ‘헌신’(devotion), 또는 ‘충성’(loyalty)이라고 말합니다.
√2)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번제를 원치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제사 제도를 누가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소원하셔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제사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는 것은 단순한 제사 형식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제사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근원적으로 사랑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사와 의식을 집행하시기 위해서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인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하시기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러한 언약을 맺은 언약의 백성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또한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인애란 바로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애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나 충성만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서로 반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인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렘 22:15 네가 백향목으로 집짓기를 경쟁하므로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과 의리를 행치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궁핍한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 곧 인애(헤세드)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병행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고 소원하시는 것은 의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입니다. 아무리 많은 양떼와 소떼를 이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제단에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호 5:6 저희가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향한 소원이 있다면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인애(헤세드)를 소원하셨건만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인애는 아침 구름과 같았고 쉬 없어지는 이슬 같은 것이었습니다.
훗날 에베소 교회처럼 그들이 처음 사랑을 간직한 것은 잠시 잠간이었습니다. 옛날 여호와를 따라 광야로 갔을 때 가졌던 부드러운 감정은 점차 사라져 버리더니, 이제는 아침 태양이 솟아오르자 아침 이슬이 사라지는 것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소원하시는지 깨달으셨습니까? 쉬 없어지는 아침 안개 같고 이슬 같은 인애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뿌리를 둔 참된 사랑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엡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 지어다
√2.하나님께서 소원하시는 것을 이루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소원을 가지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세 가지를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let us return)(1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소원하십니다. 진정한 회개가 무엇입니까? 잘못된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떠나 방황하다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탕자는 자신의 비참함을 스스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돌아온다는 것은 잘못된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다시 찾았다는 것입니다. 탕자가 있을 곳은 방탕한 계집의 품속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품안에 있을 때 그에게 행복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무가치한 인생입니다.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품을 떠난 자식이 돌아오기를 문 기대어 기다리고 계십니다.
√2)우리가 그 앞에서 살자(let us live)(2절).
우리말 성경에는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과 영어성경을 보면 ‘살자’(live)라는 강한 권유의 말로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강력한 권면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의 얼굴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살자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시 139: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나의 생각과 나의 심혼 골수까지 찔러 쪼개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 눈 가리고 아옹 하는 식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경건한 삶을 강조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의 은혜의 그늘 아래서 다시는 떠나지 말자는 간곡한 눈물의 호소이기도 합니다.
렘 30:20 그 자손은 여전하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무릇 그를 압박하는 자는 내가 다 벌하리라
하나님은 진실한 삶을 소원하십니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죽도록 충성하는 삶을 소원하십니다.
√3)우리가 여호와를 알자(let us know)(3절).
이스라엘이 왜 망하였습니까? 교만함과 음란한 마음이 그들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여호와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여호와를 멀리 떠나게 되었고 멸망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지자는 간곡하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기에서 ‘힘써’라는 말은 여호와를 아는데 최대의 정성과 힘을 기울여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우리 믿음의 백성들에게 최대의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체험하는데 가만히 앉아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최대한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사 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 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3.하나님께서 소원하시는 것을 행한 결과는?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는 것을 행한 사람에게 오늘 본문을 보면 세 가지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1)치료의 축복을 받습니다(1절).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께서 왜 찢으시고 왜 때리십니까? 패역하기 때문입니다.
사 1: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사 1: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 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용서하시고 낫게 하여 주십니다. 싸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신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욥 5: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이러한 치료의 축복을 누가 받습니까? 하나님의 소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받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가지고 사시는 여러분이 되어 치료의 축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생명의 축복을 받습니다(2절).
호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 말씀은 세 가지 견해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①구문상 대구를 이루어 문장을 유창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기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표현하는 것이 극히 적은 수난 시간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뜻은 하나님께서 환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을 ‘곧’ 구원하시리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마른 뼈에 대한 환상이나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 속하는 것입니다(사26:19, 겔 37:1-10 참조).
②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예견하는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일으키시리니’라는 말은 실제적으로 육체적 죽음에서 일으키시는 것을 말합니다.
③메시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구원이 성취되리라는 것입니다. 위의 견해와 비슷한 견해입니다. 좀 다른 것은 3일을 이스라엘의 세 차례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보려한다는 것입니다. 첫날의 구원을 애굽의 종 되었던 곳에서의 구원, 둘째 날의 구원을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 셋째 날의 구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로마 제국의 압제로부터 메시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주로 유대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생각건데 여기의 이틀과 삼일은 다니엘의 말한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단 8:25)와 같이 시간의 장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환난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인내의 때를 말하는 것이나, 둘째 날은 아닐지라도 제 삼 일에는 반드시 주께서 일으키시라는 위로의 약속인 것입니다(칼빈).
아무튼 하나님의 소원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생명의 축복이 임합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3)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습니다(3절).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의 뜨거운 은혜는 아무도 막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은혜를 거두셨으나(5:15절) 새벽빛이 나타남으로 어두움은 물러가고 그 온기가 온 누리에 퍼지듯이, 마른땅에 소낙비와 같이, 봄비와 같이 그의 풍성한 은혜의 단비가 우리에게 임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사 55:10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잠 16:15 왕의 희색에 생명이 있나니 그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소원이 무엇인가를 깨달으셨습니까? 형식적인 예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으로 사는 자에게는 치료의 축복, 생명의 축복, 풍성함의 축복이 임합니다. 그런 축복을 받아 누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