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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대적 / 열왕기상 11:14-43
미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느 여대생이 방학이 끝나고, 뉴욕에 있는 집에서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 밤에 차를 운전하고 갔습니다. 가다가 잠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커피를 사 가지고 다시 차를 운전합니다. 다시 고속도로를 진입하려고 하는데, 뒤에서 대형 트럭이 빵빵거리면서 바짝 쫓아옵니다. 거울을 통해 그 트럭 운전 기사를 보니까, 아주 무섭게 생긴 흑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학생은 차의 속력을 높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트럭도 더 속력을 내서 바짝 따라옵니다. 하는 수 없이 고속도로를 빠져 나왔는데, 그 트럭도 같이 빠져 나옵니다. 이제 여학생은 두려움 때문에, 불이 켜 있는 주유소로 들어가서 차를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트럭도 따라서 주유소로 들어옵니다. 그 순간 그 여학생의 차 뒷문이 열리더니, 어떤 남자가 쏜살같이 도망치는 것입니다. 이 트럭 운전기사는 여학생의 차 뒤칸에, 남자 하나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높은 트럭 위에서 보고, 치한으로 믿어 여학생을 도와주기 위해, 경적을 울리며 뒤따라 왔던 것입니다. 여학생은 자기를 구하기 위해 뒤따라 온 사람을 오해하고, 도망을 친 것을 미안해하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비슷한 현상이 우리 인간들에게서 종종 나타납니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때로는 무관심하고, 때로는 귀찮게 여기기도 하고, 때로는 무서운 분으로 여기고, 도망을 칠 때가 있습니다. 솔로몬에게 ‘말씀을 지키고 살라’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은, 솔로몬을 귀찮게 하거나 단순히 무서운 심판을 위해서 다가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다가오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복이었고, 평안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지키고 살라’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은, 우리들을 귀찮게 하거나, 단순히 무서운 심판을 위해서 다가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진정한 복이고, 평안이 임하는 길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던 시절에, 노라 페릭스라고 하는 기독교 지도자가 로마 군인들의 수색대를 피해, 산으로 도망을 치다가 어느 바위 틈 굴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수색대가, 그런 정도의 굴을 못 찾을 리가 없기 때문에, 페릭스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주여, 나의 생명을 받아주소서’라고 마지막 기도를 올립니다. 그런데 로마 군인들은 그 굴을 수색하지 않았습니다. 페릭스가 굴속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있는 동안, 거미가 그 바위 틈 입구에 부지런히 거미줄을 쳤기 때문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거미줄이 잔뜩 쳐 있는 그 굴속에는, 당연히 방금 사람이 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들여다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페릭스가 그 굴속에 들어간 후에, 거미에게 명령을 내려서, 쉴 틈 없이 일하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페릭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돌로 된 벽과 쇠문도 거미줄처럼 약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거미줄도 철로 된 문보다 더 강하다.’ 여러분, 이것을 가슴에 새겨 두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좋은 것으로 가득 차 있어도 아주 쉽게 와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면, 비록 무능해 보이고, 아무런 가진 것이 없어도, 든든히 그리고 평안히 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생각대로 온갖 머리를 다 동원해서 성벽을 쌓으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새끼손가락으로도 무너뜨리기에 충분합니다.
지난 시간에 솔로몬이 누렸던 부와 영광에 대해 말씀을 드렸지만,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를 누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이 다윗과 같지 아니하면, 그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 자로 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남을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앞에서는, 천하에 제일가는 재물도 권력도, 모두가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혜의 삶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내다보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신의 간섭 없이 인간이 스스로 움직이고, 인간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엄연한 현실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다스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람 불고 비오는 것 하나까지도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심의 흔적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하나님을 말하나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삶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똑같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도, 우습게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일어났던 일들을 통해, 여러분은 무엇을 배우고 깨닫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엄중히 외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벗어난 자에 대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면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잘 산다는 것이 축복의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자로 여김 받는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 곧 축복임을 믿는 자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부를 누렸던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4절에서 언급한 대로, 솔로몬이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마음이 여호와를 떠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여호와의 법도와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섬기면, 이스라엘을 끊어버리신다는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하나님의 경고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11:11절에서도 보면,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변함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키라고 하신 언약이 무엇이고, 법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솔로몬에게 주어진 것은, 이스라엘을 솔로몬에게서 빼앗아, 신하에게 주신다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시행되어지는 것이,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솔로몬을 대적하는 자들이 일어납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대적하는 자들을 일으키심으로써, 솔로몬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말씀하고자 합니다. 14절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그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 이 내용을 보면 에돔 사람 하닷이, 솔로몬을 대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닷의 이야기는 오늘 본문 당시로부터, 약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이 왕이 되기 전, 아버지 다윗이 왕좌에 있을 때, 일어난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윗이 에돔에 있을 때, 당시 군사령관인 요압이 군사들을 이끌고 에돔으로 내려갔다가, 에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요압은 약 6개월 동안 에돔에 머물렀고, 그 기간 동안 에돔의 모든 남자를 거의 다 죽이다시피 했습니다. 아주 잔인한 짓을 저지른 것이죠. 바로 그 때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했던 하닷을, 아버지의 신하였던 몇몇 에돔 사람들이 데리고서, 애굽으로 도피를 했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빠른 길이 아닌, 아라비아 반도 남단에 있는 바란 광야를 통해서였습니다. 그 말은 어찌하든 살아남으려고, 힘들고 어려운 길을 택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최종 목적지인 애굽에 도착했습니다. 그러고는 애굽 왕 바로에게로 인도되었습니다. 아마도 하닷이 에돔의 왕족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만, 바로는 아직 어린 하닷을 환대해 주었고, 그에게 집과 음식과 땅까지 주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닷이 마음에 든 바로는 자신 처제, 곧 왕비 다브네스의 동생과 하닷을 결혼까지 시켰습니다. 다브네스의 동생이 하닷에게서 아들 ‘그누밧’을 낳자, 왕비는 그 아이를 궁에서 양육했습니다. 이것은 하닷이 가족들과 함께 애굽에서, 왕족처럼 편안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는 말이고, 그 아들은 애굽 왕 바로의 양자처럼 자랐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 말은 하닷이 애굽으로 가서, 거기서 자기 고국, 곧 사해 아래 불모지와 같은 땅인 에돔에서보다, 더 호화롭고 안정된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가난하고 작은 나라의 힘없는 왕자보다, 애굽 황실에서의 삶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30년 전의 상처와 아픔은, 얼마든지 잊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30년 전의 일은 그가 너무 어릴 때였기 때문에, 기억조차 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닷이 다윗 왕과 당시 사건의 원흉인 요압 장군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서, 고국 땅 에돔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바로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22절에서 그에게 “네가 나와 함께 있어 무슨 부족함이 있기에, 네 고국으로 가기를 구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에돔의 상황을 바로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돌아가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 또 지금 무슨 부족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닷은 비록 고국이 황폐한 땅이고, 남은 사람도 별로 없고, 돌아가 봐야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보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하닷은 적은 무리들을 모은 후, 솔로몬을 대적하여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이 하닷의 경우는, 솔로몬의 입장에서 볼 때 억울한 일입니다. 30년 전에 있었던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자신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 다윗과 관련된 일이고, 또 굳이 따진다면 한때 자신의 대적이기도 했던, 요압이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하닷은 애굽 황실에서 보장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굳이 모래 바람 거센 에돔 지역으로 돌아와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그런데도 그는 왜 솔로몬의 대적자가 된 것일까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14절이 그 답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말입니다.
23절 “하나님이 또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자가 되게 하시니, 그는 그 주인 소바 왕 하닷에셀에게서 도망한 자라.” 이 내용을 보면, 하닷만이 아니라 르손을 일으켜, 역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십니다. 르손은 다윗이 소바 사람을 죽일 때에, 르손이 사람들을 모아 다메섹으로 가서, 거기서 왕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25절 “솔로몬의 일평생에 하닷의 끼친 환난 외에, 르손이 수리아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미워하였더라.” 이 말을 보면 솔로몬이 하나님이 일으키신 대적들로 인해서, 많은 고통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고통 속에서, 솔로몬은 어떤 생각을 해야 했습니까? 그 모두가 하나님이 일으키신 일임을 알고, 자신의 잘못됨을 발견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솔로몬은 전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26절을 보면 여로보암이 솔로몬을 대적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여로보암이 솔로몬을 대적하는 이유는,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은 당시 큰 용사였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고, 다윗의 무너진 성을 건축할 때, 솔로몬이 여로보암의 부지런함을 보고,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하는 감독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선지자 아히야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아히야는 자신이 입은 새 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고, 그 중에 열 조각을 여로보암에게 주면서,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어떻게 하실지에 대해 예언을 합니다. 아히야가 여로보암에게 말한 예언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찢어서 열 지파를 여로보암에게 주고, 한 지파만을 솔로몬의 아들에게 남기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했고,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아히야 선지자의 말은, 자신의 잘못됨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들이었습니다. 아히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33절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경배하며, 그의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내 법도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함이니라.” 솔로몬이 우상을 섬기고, 다윗이 행함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의 길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찢어서 여로보암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자신의 악함을 돌아보고, 다윗이 행함 같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길로 행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상한 심령이 되어, 여호와께 나와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셨던 다윗의 마음이고, 다윗의 행함이며 언약인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찢어지고, 여로보암이 열을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여로보암만 죽이면 된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결국 솔로몬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이 여호와로부터 떠났기에, 여호와의 살아계심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37-38절을 보면 아히야 선지자가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여로보암이라 할지라도 다윗이 행함같이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면, 이스라엘을 네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누구든 여호와의 복에 거할 자는, 다윗이 행함같이 행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자신의 악을 깨닫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왔던 그 행함만을,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행함만으로 여호와 앞에서 온전하다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상한 심령이란, 죽어 마땅한 자가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용서 받았음을 아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임을 알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행함같이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용서 안에 있음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만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일컬음을 얻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여호와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36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 왜 한 지파는 솔로몬의 아들에게 주시겠다고 합니까? 만약 다 뺏어 버리면,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의 성취를 위해 한 지파를 남기시고, 결국 남겨진 한 지파를 통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세상을 보내심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세우신 언약이, 곧 ‘긍휼에 의한 죄 용서’였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고, 그것이 곧 심판의 이유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행함이 아니고 여호와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죄 용서의 길을 긍휼에 두지 않습니다. 물론 신의 용서와 은혜를 말하기도 하지만, 신의 용서와 은혜를 받기 위해, 덕을 쌓고 선을 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곧 아무에게나 베풀어지는 긍휼과 용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신의 긍휼을 받기 위해, 덕을 쌓고 선을 쌓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긍휼을 받고 죄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 세상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만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물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본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긍휼의 죄 용서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복을 받았음을 알기에, 세상 것을 구하는 것은 악이며, 긍휼의 죄 용서를 외면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 안에서는 족함이 없는 마음 자체가 악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악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의 용서에 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무한한 복으로 여기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내 손에 쥐어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멸망의 자식인 나를 긍휼이 여기시고 용서하신 은혜가 클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잘 지내던 하닷이 솔로몬에게 문제가 되었습니까? 왜 르손이 솔로몬에게 문제가 되었습니까? 왜 아들 같은 여로보암이 솔로몬에게 문제가 되었습니까? 왜 30년이나 지난 일이 과거가 되었습니까? 왜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이름이 어느 날 문제가 됩니까? 왜 내가 사랑해 주고 도와준 사람이 내게 문제가 됩니까? 내가 하나님께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그 만큼 문제와 가까워지는 것이고, 어려움과 고난과 시련을 가까이 느낀다면, 그만큼 하나님과 멀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보지 않으면 그 만큼 문제가 크게 보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는 만큼 원망하고 불평하고, 한숨 쉴 일들이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늘 예배, 말씀, 기도 가운데 깨어 주님과 동행함으로서, 남은 삶이 주안에서 형통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솔로몬에게 하신 안타까운 말씀이,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 또 이러한 모습들이 우리 시대에도 나타납니다. 혹시 지금 현재 내게 있는 고통과 아픔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께로 가까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게 채찍과 아픔으로 주시는 그런 아픔이 아닌지 살펴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결코 우리의 나머지 인생에서, 헛된 우물을 파느라고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낭비해 버리는 안타까운 인생 되지 말고,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심으로, 우리의 인생이 복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여호와 앞에 순종의 마음으로 나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의 날개를, 우리 가운데 베풀어 주옵소서.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길을 따라 살아감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크신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