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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등산하면서, 말굽버섯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말굽버섯인지 아니면, 그것과 흡사한 버섯인지 확신이 가지 않아 그냥 지나쳤습니다. 이렇게, 높은 산을 오르다보면, 말굽버섯이든, 석이버섯이든, 운지버섯이든 여러 종류의 버섯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버섯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는 버섯에는, 우리가 아는 버섯과 흡사한 독버섯이 많습니다. 독버섯은 눈에도 잘 뜨이지만, 화려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버섯을 따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데, 그러한 버섯의 대부분은 독버섯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겉으로는 모두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같지만, 그 중에는 거짓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제가 전임 전도사로 사역을 할 때, 방송실을 담당했었습니다. 그 때, 모든 성도들이 눈을 감고 기도하는 시간에도, 저는 눈을 뜨고 모니터를 주시하며, 카메라를 돌렸습니다. 왜냐하면, 눈을 감고 기도할 때, 옆 사람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서, 기쁨과 감사로 예배를 드린 후에는, 중요한 소지품을 분실하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겉으로는 모두가 성도인 것 같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 가운데도, 이와 같은 거짓 성도나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진실한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과 자신만의 독대관계를 중시하며, 주변의 성도들을 조용히 돕습니다. 하지만, 다른 마음을 갖거나 자신의 욕망을 앞세우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돋보이려고 내세우기도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겉으로는 진실한 교회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이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교회를 내세우며, 주변의 정통교회들을 비난하거나 비교한다는 겁니다. 오래 전,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사역을 하셨던 조용기 목사님을 신비주의라 하여, 저희 교단을 비롯하여 몇몇 정통교단들이 이단으로 정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조용기 목사님은, 자신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교단들에게, 정중한 필체로 사과문을 보내었고 또, 신문에 기재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자신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교단들에게 맞서지 말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자라며, 금요 철야예배에서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이후로, 이단으로 정죄한 교단들로부터 해제를 받았습니다. 당시, 저는 금요 철야예배만 여의도 순복음 교회로 다녔기에,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더욱 조용기 목사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도인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매 주일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드리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까? 아니면, 기독교 정통 교리를 따르며, 우리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우리의 정체성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입증하는 본질적인 요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겉으로 드러내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이며, 성경 주석가인 “윌리암 바클레이”는, 하나님에 대해 “그의 백성에게 친히 찾아오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자녀를 찾으며, 자녀에게 먼저 찾아오는 부모와도 같다는 겁니다. 눅 19: 10을 보시면,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기드온에게, 그리고, 여호수아, 야곱등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음을 우리는 구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번 달 마지막 주일이 성탄절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기다리며, 성탄절을 축하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나님이신 독생자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성도의 정체성에 대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 하였습니다. 즉, 성도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본문의 시작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라고 합니다. 이는,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자들도 있다는 겁니다. 눅 9: 18 - 19을 보시면,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실 때나 승천하신 후, 사도들이 사역을 할 때나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고, “세례 요한, 엘리야, 옛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성인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의 믿음은, “나사렛 예수를, 구약에서 예언하신 대로, 성부께서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메시야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분별하는 기준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는 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의 고난을 당하신 것에 대해, 그 고난은 자신을 위한 고난임을 믿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가 성경을 대하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예수님이 이 땅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행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전체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는 말을 3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며 사용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마 16: 16에 기록된 베드로의 고백을 기억해야 합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에 대해, 성부께서 이 땅에 보내신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믿었습니다. 성부께서 죄 가운데 거하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메시야로 보내신 겁니다. 그러기에, 요 1: 10 - 12을 보시면,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인 성도가 되는 것은, 오직, 나사렛 예수를 성부께서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야로 믿고, 영접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하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되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 - 3절을 보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분의 말씀을 지킵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인 성도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순종합니다. 내 자신이 원하지 않지만, 할 수 없이 그에 따르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에게 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를 테면,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에게, 공부는 피할 수 없는 짐이 되지만,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에게는 공부가 즐거움이 됩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과 장소는, 아무리 긴 시간이라도 짧게 느껴지며, 아무리 비좁은 공간이라도 비좁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됩니다. 그리고는, 아무리 지켜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롬 7: 24 - 25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이어, 3절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시면, 그 시작을 “왜냐하면”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 10: 13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고, 우리가 그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보시면,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가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주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 안에 거하는 겁니다. 요 15: 7을 보시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행복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애 3: 33을 보시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행복을 원하십니까? 복된 삶을 원하십니까?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 - 5절을 보시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깁니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떠나서 불순종하는 불신앙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욕망이 살아있는 곳, 우리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의 “세상”은, 우리 안에 있는 불순종의 욕망이 살아있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욕망으로 인해, 우리로 하여금, 사도 바울과 같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며, 사망의 몸에 잡혀 있는 곳에서, 승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인 성도된 우리가 품고 있는 믿음입니다. 여기서, “세상을 이기느니라”고 한 것은, 어느 한 순간에서만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승리의 삶을 산다는 겁니다. 그것은, 본문 앞에 있는 요일 4: 4에서 증거하는 바와 같습니다. 보시면,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일에는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찬송하지만,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을 살아가면서, 주일에 품었던 마음과 생각을 그대로 간수하며 지키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혹시, 작심삼일이 되지는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욕망이 살아있는 장소나 순간에서도 우리가 승리의 삶을 기대하거나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아래의 6절을 보시면,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에, 우리는 세상과의 전쟁 속에서, 칠전팔기의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 또,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불신앙의 세계 속에서, 죄악된 풍조를 거스리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도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 16: 33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합니다. 우리의 죄악된 욕망이 살아있는 곳이든,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불신앙의 환경에서든,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은, 이미, 우리의 전쟁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믿음이야말로 승리의 원천”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더 우리의 믿음을 붙잡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승리하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인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