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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7-39
한 사람이
본문에서 모세는 요셉이 그 형제들의 곡물자루에 돈을 도로 넣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크게 놀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본문 27절은
"한 사람이 객점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구에 있는지라" 입니다.
무슨 의도에서 요셉이 식량을 주고 받은 돈을 다시 그의 형들의 자루 속에 몰래 집어 넣게 했는가 하는 점은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부친이 이미 파산된 상태에서 다시 식량을 사러 온 능력이 없게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형제들은 자기들의 돈을 발견하고 그 원인을 도무지 발견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두려워했을 뿐입니다.
그들이 너무 당황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자신들의 순결을 입증하는 뜻에서 자발적으로 요셉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전적으로 눈이 먼 상태가 아니었던들 그들은 얼마든지 이 재앙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심스럽고 고통스러운 문제를 당할 때 하나님에게 견인불발 정신 뿐 아니라 현명한 지혜를 허락해 주십사 고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는 또한 사람 숫자가 제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주도하지 않을 경우 얼마나 속수무책이 되고 마는가 하는 점을 여기서 배울 수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서로를 권면 하는 가운데 필요한 대책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상의했어야 마땅하지만 그들의 모든 생각은 거기서 끝장이 나고 어떠한 위로도 어떠한 대책도 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 공포만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우리를 부축해 주시지 않을 경우 인간들과의 어울림이나 인간들의 지지(支持) 자체만으로도 아무런 혜택을 볼 수 없습니다.
2. 본문 28절은
"그가 그 형제에게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 입니다.
그들은 이 위험이 따를만한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하나님과 변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면으로 그들에 대해서 화를 품고 계시다는 점을 깨닫고서 자신들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 크나큰 탄식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들은 요셉을 생각지 않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그가 새로운 올무를 그들에게 놓으려고 계략을 부렸을 것으로 의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람은 생각지 않고 하나님을 직접 당사자들의 보복자로 내세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것은 그들에게 공정한 보상이 따르며 그들의 죄악에 마땅한 보상이 따른다는 이 한가지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그들은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질고를 이 원인으로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전에 그들은 잠들어 있었던 사람들이지만 하나님 심판에 대한 생생한 두려움을 맛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들 눈에는 항상 그분의 섭리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성령의 내적 암시에 따라서 자기를 때린 매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서 정작 그가 당한 재앙의 이유는 다른데 있었지만 당황하거나 상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상처를 싸매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역경이 우리에게 덮칠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습관을 갖는 것은 결코 흔한 분별력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와 동시에 아주 유익한 일입니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의 불행이 우연적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자신들의 원수들을 비난하는 일로 일관하지만 사실 그들은 이러한 아첨이나 분노를 통해서 자신들은 슬픔을 가중시킬 뿐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상대로 더욱 더 불붙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당할 때 자기 죄악을 반성하고 하나님을 자기 재판관으로 세우는 자는 하나님 존전에서 자기 자세를 겸비하게 할것이요 평정한 마음으로 용서를 빌며 인내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꼭 그분의 공의와 연관시켜서 생각할 때만 그 전가를 인정하는 셈이라는 점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대개의 경우 불공정한 자들의 손을 들어서 그분께서 우리를 징계하신다 하더라도 그분께서는 불가해한 방법으로 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기 심판을 행사하시며 그 심판에 대해서 우리가 보복을 하거나 불평 불만을 털어 놓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버림받은 자들도 종종 자신들이 하나님 손에 징계를 받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계속 그분을 상대로 불만을 토로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가인의 전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야곱의 아들들이 하나님에게 그분의 횡포를 탓하는 뜻에서 이런 불평을 한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휩싸인 나머지 이 이중 처벌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몹시 괘씸하게 여기시고 있다는 점을 알아 차렸던 것입니다.
3. 본문 29-34절은
"(29)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 아비 야곱에게 이르러 그 만난 일 을 자세히 고하여 가로되
(30) 그 땅의 주 그 사람이 엄히 우리 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나라 정탐자로 여기기로
(31)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독실한 자요 정탐이 아니니이다
(32) 우리는 한 아비의 아들 십이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말째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 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33) 그 땅의 주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독실한 자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34)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탐이 아니요 독실한 자임을 내 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입니다.
여기에서 앞 이야기가 길게 반복되고 있지만 이것은 결코 필요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세는 그들이 시므온을 감옥에 남겨둔 데 대해서 얼마나 간절하게 그들의 부친에게 설명을 드렸으며 또한 얼마나 끈질기게 시므온을 살려 오기 위해서 그들에게 베냐민을 동반시켜 줄 것을 간청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배고픔이 얼마나 뼈저린 아픔인가 하는 점은 다들 아는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곤경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애굽에서 식량을 가져오는 것이었지만 야곱은 베냐민을 그들과 동반시키느니 보다는 차라리 자신과 그의 가족이 굶어 죽는 편을 택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그의 아들들이 마지 못해서 간청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은 그가 그들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자신의 슬픔을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그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요셉이 들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그들의 주장에 어느 정도 가능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거룩한 족장의 마음 한구석에는 의심에서 야기되는 은밀한 성처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의 죄 없는 어린 자식에 대한 그들의 횡포와 잔인한 증오심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13년 간에 걸쳐서 줄곧 깊은 불안으로 괴로워하고 있던 이 거룩한 사람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했는가 하는 점을 깨닫는 것도 중요합니다.
더욱이 그의 침묵 그 자체가 그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자신이 느끼는 슬픔을 억지로 감출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큰 점은 하나님 약속이 허사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는 약속된 자식을 통해서만 소망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자기로서는 집안에 마귀 새끼들만 키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인간적으로 그 놈들에게서 기대할 것이라곤 생명이 아니라 사망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요셉이 죽은 것으로 여겼으며 베냐민만 더럽혀지지 않은 자식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구원이 어떻게 그처럼 사악한 자손들을 통해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가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매달리는 것을 볼 때 그에게는 크나큰 인내의 복이 있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자기 가문에 있다는 점을 확신하는 가운데 그의 자식들이 회개하기까지 계속 그들의 처사를 참아온 사람입니다.
신실한 자들은 이 본을 오늘날 자신들에게 적용하는 가운데 거의 온 사방에 널리 깔려 있는 처참한 황폐 현상을 보고 낙심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4. 본문 35절은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인의 돈 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 아비가 돈 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입니다.
그들이 한 사람의 자루 속에서 돈이 발견된 뒤에 각자의 자루를 점검하지 않았다는 점 역시 그들이 여행길에서 얼마나 당황해하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기에 기록된 것은 인간들이 공포의 매를 맞을 경우 하나님께서 진정시켜 주시기까지는 그들에게 전혀 지혜나 건전한 마음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뜻에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도 자기 부친의 가난을 구제하려는 뜻에서 그런 행동을 했지만 그에게 그처럼 큰 슬픔을 안겨 주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의 행동 역시 전적으로 분별 있는 것이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항상 용의주도한 것은 아니요 그들의 행동에서 그들이 소원하지 않는 무엇이 야기될 수도 있다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5. 본문 36-37절은
"(36)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37) 르우벤이 아비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 다" 입니다.
물론 야곱은 자식들에게 그들의 아우 살해에 대한 죄책을 공개적으로 묻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두 자식을 이미 잃은 마당에서 셋째 자식까지 죽이려고 안달을 부리고 있다는 듯이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가 이 모든 재앙을 당하는 쪽은 자기 자신 뿐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가 그들이 마땅히 같이 슬퍼했어야 하는 판에 그렇게 하기는커녕 동생들의 생명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죽이는 일을 무모하게도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을 경우 자기 두 자식들을 죽여 달라는 르우벤의 제안은 자못 야만적인 행동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물론 야곱은 자기 손자들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핏줄에게 그처럼 잔인하게 행동한다 해서 얻을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그들이 요셉에게 배신한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르우벤은 그처럼 강력한 항변을 통해서 자기 부친의 공포를 달래고 자기와 형제들이 베냐민에 대해서 결코 악한 계략을 꾸미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6. 본문 38절은
"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거룩한 야곱이 얼마나 큰 슬픔에 잠겨 있는가를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온 식구가 사라져 가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식과 결별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잃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마음이 매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인내를 더욱 칭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육신의 연약성과 싸우는 가운데 거기에 침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의 언어를 웅변적으로 과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 자식을 둘이나 약탈당한 이 마당에 셋째 아들을 데려가려는 이 놈들아 어쩌면 그렇게도 이 아비에게 잔인할 수 있단 말이냐' 하는 그의 불평 속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큰 슬픔에 압도되어 있었는가 하는 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7. 이제 본문을 다시 요약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1) 본문 27-28절까지에서 요셉은 사람들을 시켜서 그 형들이 가진 자루에 곡식을 채운 후 그들이 지불했던 돈을 다시 그들이 가진 자루에 넣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만 그들을 불쌍히 여긴 표요, 후에 트집잡으려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43:23).
이것은 하나님의 종들 안에 은밀하게 두신 친절이요, 선(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은밀한 친절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 중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하나님을 닮은 성품으로 그리 한 것입니다.
요셉은 그 형들에게 은밀한 친절을 베풀기 위하여 이렇게 하였는데 그들은 자루에서 돈을 발견한 후에 도리어 두려워 떨었습니다(27-28, 43:12).
그들이 요셉의 인격을 두려워하기만 하고 아직은 그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이와 같이 불신자들이나 외형은 신자이나 내면으로나 실천적인 불신앙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나타난 은밀한 친절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라고 하였는데(28절), 이것은 곧 곡식 값으로 지불했던 돈이 그 자루에 도로 들어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일 때문에 장차 애굽의 총독인 요셉으로 말미암아 저희에게 화(禍)가 미칠 것이라는 뜻입니다.
2) 본문 29-36절에는 그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와 애굽에서 당한 그 모든 일을 부친에게 보고한 사실과 및 그들 각 사람의 자루에서 나옴에 따라 모두 두려워한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야곱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경우에 그는 실상 속아서 걱정 가운데 떨어졌습니다.
애굽에서 된 일은 요셉이 그 형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꾸민 사건들이었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사람을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일찍이 자기 부친 이삭을 속여 그에게서 축복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27:18-29).
3) 물론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그 형들에게 대하여 취한 행동들은 그들을 회개케 하려고 시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속인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흔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역경과 고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그분의 사랑으로 깨닫지 못하고 화(禍)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생각할 때에 그것은 화가 아니라 참는 자에게는 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역경과 고난은 비유컨대 암행어사(暗行御史)와 같습니다.
그 암행어사가 민간에 정체(正體)를 드러내지 않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상 선한 뜻으로 오는 것입니다(롬5:3, 8:1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