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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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9 07:55
물빛 39집 원고(정해영)
하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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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가 왔다
연둣빛 나뭇잎 한 장
손바닥에 올려 본다
한 잎의 무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한 잎의 봄
사월의 바람에 실려
푸른 말로 쓴
엽서가 왔다
둥근 속
시들해진 양배추
반을 잘랐다
겹겹
물결치듯 복잡한 주름
숨긴 듯 고여 있는
번민이 보인다
시든 잎을 벗겨 내면
이목구비가 똑 같은
새 잎이 나온다
벗겨도 벗겨도
알맹이는 없다
햇빛과 흙과
뿌리의 기억만이
얼비칠 뿐
불현 듯 다가오는
놀라움마저도
천천히 주저앉아
한 겹 잎사귀로 덮는
싸고 또 싸고
감쌀 줄 밖에 모르는
둥근 속이
꽉 찼다
뭉클한 것
세 살 된 아이가
울고 있다
막대사탕을 주어도
토끼 인형을 안겨주어도
발버둥을 치고 있다
말 대신 울음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점점 크게 들려오는데
엄마는
말없이 등을 내밀어
아기를 업는다
앉을 때도 같이 앉고
화장실도 같이 가고
다림질도 같이 한다
원래 한 몸이었던 둘
작은 심장이
둥글고 뭉클한 원적(原籍)에
닿았는지
뚝 울음을 그친다
틈 없는 밀착
소리를 죽인
더 큰 진동이 오래
아기를 흔들고 있다
평평하고 납작한 오후
수성시장 모퉁이
오래된 쌀가게 할머니
손님이 오면
품이 넉넉한 웃음을 얹어
한 됫박 봉긋이 담아 올렸다
펑미레로 고봉을 날려버린다
한 되를 맞추고
깎여나간 여분은
흰 새처럼 날아갔다
어둠이 평등하듯
바람이 공평하듯
공산품에 쓰인 규격처럼
숫자로 채워지면
온전한 생인 줄 알았는데
삶에 누런 잎이 생긴다
하고 싶은 일을
꿈으로 쌓아 올린 고봉
평미레로 날아가고
평평하고 납작한 오후
딱 한 되다
그 흔한 말로
아직 바람 끝 차지만
볕이 따뜻해 졌다는
그 흔한 말에
푸슬푸슬 흙이
부드러워진다
멀리 있어도
따스하게 전해오는
소식이 있어 가족이
관계를 이루듯
불어오는 바람에
묻어나는 봄
벌써 맺혀 있는
목련 봉오리
솜털을 두르고 있다
사소한 눈짓에
흔한 말 한마디에
이미 와 있는 봄
볕이 따뜻해 졌다
강을 빌리다
몇 년을 앓고 난 뒤 장애를 얻은 그녀,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주인이 따로 있는 빌린 몸, 되돌려 줄 것을 생각하고 아끼고 헤아리며 사용 했어야 했다고, 불편한 하루를 뒤척이는 일은 바다보다 혹한 보다 다스리기 어렵다 했다
경사 진 밭을 일구며 흙속을 몇 바퀴나 돌아 나온 강물의 노래에 흥건히 가슴 적신 적 있었지만 받은 대로 온전히 돌려주지 못하는 몸, 찢겨지거나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물건처럼 가엾다 했다
늘 새롭게 흐르는 생명의 강에 한 발을 담그고 그 분 앞에 설 것을 생각하는 밤, 밑바닥을 긁고 또 긁어 하얀 박꽃 몇 송이 피운다고 했다
꽃 뒤에 숨는다
그가 돌아온다
기러기처럼
그 동안 불러보지 못해
딱딱해진 호칭이
벌써 글썽이는데
책장이며 움푹한 세면대에
그리움이 고여 있다
급한 마음으로
아파트 담장 붉게 핀
장미 가지를 꺽어다
병에 꽂는다
불꽃같은 뜨거움이
번져간다
낯빛이 다르고 흙빛이 다른
타국에서
서늘히 식은 몸
덮어 줄
붉은 향기를 펼쳐 놓는다
무거운 등짐을 진 우리
서로
얼굴 바라보지 못해
꽃 뒤에 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