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8일 토요일 오전 10시에 신분당선 청계산입구역 2번 출구에서 모여 수송병과 동우회가 청계산 산행을 한다 고 하여 처음으로 등산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약 1개월전에 수우회 최원묵 회장님으로 부터 문자를 받고,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일주일전 다시 문자를 받고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하여 조금 일찍 8시경 청계산입구역 2번출구에 도착하였다.
청계산입구역에 앉아서 수송동우회원들이 오실 때 까지 기다리며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의 산세와 기후 그리고 국민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등산하겠다며 멋진 등산복에, 등산화를 신고, 등산모에 썬그라스들을 끼고, 쉬는 날이면 모두가 등산하겠다고 산으로 몰려 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대한민국 사람들이 오랫동안 장수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가장 먼저 도착되시는 분은 이영흠 선배님이었다. 오랜만에 반갑게 인사를 드리고 청계산입구역에서 이동로를 따라 굴다리를 건너 점심식사 때 식사장소로 예약이 되었던 장수촌 현수막이 보이는 곳(조선면옥 앞)으로 이동하여 다른 수우회 인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더니, 고재욱 사무차장님의 위치확인 전화가 오고, 잠시후에 회장님, 사무차장님, 이영호 LG예비군 대대장님 과 가족, 김대곤선배님 가족이 도착되어 잠시 대화를 나누며 인사를 하였고, 대화를 나누는 동안 김대곤선배님 가족이 야구르트를 사와서 나누어 마시고, 이번 등산 목표를 매봉까지 올라갔다가 하산하여 후발대로 도착되는 인원들과 함께 장수촌에서 중식을 하는 것으로 정하고 출발하였다.
개인적으로 무릅이 좋지 않아서 일행들께 양해를 구하고 무리하지 않고 나의 페이스대로 중간쯤(원터골 쉼터)까지 올라갔다가 한 참을 쉬었다. 휴식을 하는 동안, 쉬고 있는 등산객들로부터 들려오는 이야기는 요즈음 매스컴에서 한동안 뜨겁게 이야기 되고 있는 “윤창중” 이야기들이었다. “대통령을 수행하던 사람이 어떻게 나라 망신을 이렇게 시킬 수 있느냐~!” 라는 화두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무릅이 염려되어 원터골 쉼터에서 쉬었다가 하산하는데 오를 때 보다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무릅과 발목에 더욱 무리가 되어 뒤로 걷기식으로 내려오다 보니, 속도가 늦었지만 중간에 2회 쉬며 가장 먼저 장수촌에 도착되어 한동안 쉬고 있을수 있었고, 다음으로 동기생인 서영출이 등산은 하지 않았지만 식당으로 직접 왔고, 다음은 전우뉴스 부사장겸 편집국장으로 재직중인 이소웅님, 제 3수송정비창에서 재직하시던 서범석 선배님이 도착되었으며, 최종적으로 매봉 정상까지 등산을 마치고 돌아오신 본진이 도착되었다.
장수촌의 예약된 가장 좋은 장소로 이동하여 서영출 동기가 예약해 놓은 한방 오리고기를 소주 막걸리까지 주문하여 “수송병과의 무궁한 발전 과 수송 동우회원들의 건강을 위하여~!”건배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옛날 군대생활로 돌아가서, 많은 추억담과 에피소드를 주고 받으며 즐거운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였다.
참석한 인원들 중 잘 된 사람은 이영호 학훈출신 후배로 현역중령에서 전역하여, LG 디스플레이 예비군대대장이 되었다고 한다. 전투병과가 아닌 수송병과 출신이 예비군 대대장이 된 것으로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다. 축하한다는 박수를 받고, 점심식사까지 부담한다. 수송병과 출신들이 잘되어서 축하 박수치는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맛있는 한방 오리고기를 훌륭하게 잘된 후배가 대납하고, 참석한 인원들에게 회장님께서 선물을 한 뭉큼씩 나눠 주셨는데, 무릅이 아픈 저에게는 많이 걸어서 건강하게 살아라 는 뜻으로 양말 2켤레 와 타올 1장을 주셔서 고맙게 잘 받았다. 건강하게 무릅을 위하여 양말을 갈아 신으며 자주 걸으며 무릅 근력을 키우고, 땀이 나면 주신 타올로 땀을 닦으며 고마움을 생각하여야 겠다.
이글을 쓰면서 잠시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언젠가 병과 모임에서도 이야기 하였었는데, 군인공제회 본부에서 재직하며 보고 느꼈던 사항으로, 태릉 골프장 사장님으로 재직하셨던 병과의 사령관님께서 수송사에서 재직하였던 전역 장교사병 4명을 골프장에 취업채용하여 군인공제회 본부에서 다른병과 장교 출신들에게 수송병과 훌륭하신 분들의 후배 사랑하는 것을 자랑하며, 흐뭇해 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이러한 분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을 개인적으로 가져 본다.
개인적으로 수송장교 생활을 하면서 기억되는 일은, 수송병과로 전과하여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다시 항공병과가 생기고, 항공병과 장교 전과신청을 받고 있었는데, 당시에 전과신청을 하였으나 당시의 류사령관님께서 전과승인을 허락하지 않아서, 항공병과 장교로 전과를 하지 못하였던 생각이 난다. 좋게 생각하면, 장래가 있는 수송장교를 항공병과 장교로 빼앗기기 싫어서 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결국 수송병과에 남아서 미국에 군원교육도 다녀올 수 있었고, 수송학교 항공학처장을 하였으며, 오늘의 제가 존재하고 있는데, 가끔은 항공병과로 갔었더라면, 어떻게 인생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부족한 제가 영어를 조금하게 된 계기는 ‘74년경 항만사 302항만대대 행정과장 겸 본부중대장으로 재직할 때로, 주간에 부대에서 근무하고, 야간에 부산시 영어학원에서 영어회화 공부하는 것을 항만사 운영처장( 작고하셨음)님께서 보시고, 3부두 본선통역장교로 명령 내어, 3부두에 출입하는 미국 군용 선박에 탑승하여 한국군 화물 적재계획을 알아서, 화물을 하화할 수 있도록 하는 업무를 수행하면서 였고, 종합행정학교 군영반에서 ALC교육을 받고, 미육군 수송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수송학교 재직시에는 교장이셨던 임장군님께서 당시에 자주 방문하는 미국군 장교들께 설명할 “학교현황”을 영어로 만들도록 지시 받아서 준비하고, 직접 영어로 브리핑 하였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고, 한미야전사령부에서 수송장교 생활을 2년 정도 하였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을 해 보며, 당시에 도움을 주신 선배님들께 늦었지만 감사를 드리고 싶다.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이 아쉽지만, 다음에 만날 때에는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각자 집을 향하여 전철역으로 이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