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5] 홍순애 (洪順愛) - 꿈에 그리던 주님을 뵈옵고
10. 대구와 제주도에서의 생활 - 1
1 그때까지도 허호빈씨는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다. 공산당은 점점 더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이남으로 가자고 하셨다. “아니, 사모님이 아직 옥중에 계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냥 가겠느냐"라고 했더니 “여기 그냥 있다가는 우리가 죽는다”라고 하시면서 이남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2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남으로 가는 것이 옳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냥 가기가 뭐 했다.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도 결국 이남으로 가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6.25 직전에 어머니와 아기를 데리고 이남으로 왔다. 3 사모님은 옥에서 나오지 못했고, 재림주님은 거기에 나타난다고 하셨기 때문에 평양을 등지고 나오려니 기가 막히고, 아픈 가슴은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와야 될 것만 같아서 이남으로 왔다. 4 남한은 나에게는 생소한 곳이었다. 나는 이전에는 서울에 한 번도 와 보지 못했다. 정석천 장로님(성주교 식구였던 분)이 먼저 이남으로 왔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정 장로님을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5 서울에 온 후에 6·25가 나고, 1·4후퇴가 있었다. 1·4후퇴 때 나는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에서 정 장로님 네를 만났다.
6 정 장로님 식구들과 모여서 얘기하다가 결국, “우리가 이북에 있을 적에 새주님과 허호빈씨를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았고, 큰 역사가 있었다. 재림주님은 한국에 오실 것이니 이 길을 찾기 위해 우리가 모여 힘써 기도하자”라고 마음을 모았다.
7 그래서 제주도에 가 있다 부산에 나와 있던 제 남편을 부르고, 정석온 권사님도 부산에서 올라오시라고 했다. 그래서 여러 식구들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8 그때 나는 에덴동산을 이룬다고 남편과도 성별하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그러면 이혼하자 하고는 떠나버렸다.
9 우리 식구들끼리 기도하니 “이제는 열심히 기도만 해서는 안 되고, 생식을 해야 된다”라는 계시가 내렸다. 그래서 우리는 솔잎을 먹기 시작했다. 그것도 쪄서 먹으면 괜찮았을 것인데 미련하게 그냥 먹었다. 생솔잎을 먹으니 굉장히 이가 아팠다. 김칫국도 소금만 쳐서 먹었다. 10 나는 어머니를 소학교까지는 내가 공부시켜야 되겠다는 책임감을 느껴서 대구에서 조그만 장사를 시작했다. 김칫국과 솔잎과 왜콩만 먹고, 그것도 하루에 2식만 하면서 장사를 했는데, 기운만 조금 없다 뿐이지 정신은 더 말짱했다. 11 친정어머니가 오시더니 “야 미쳤지, 이걸 먹고 어떻게 장사하느냐? 기적이다” 그러셨다. 그래도 내 마음은 편했다. 그렇게 3달가량 장사를 했다. 성주교와 복중교를 통해서 신앙했던 나는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만 알고 있었다. 지혜라는 것은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