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베껴쓰기 415] 정동길 봄밤 / 고두현 논설위원 / 한국경제 / 2016.05.21
덕수궁 옆 정동[貞(곧을 정) 洞(마을 동)]골목은 100여년 전 '덜덜골목'으로 불렸다. 1901년 덕수궁에 설치된 발전기 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생긴 별명이다. 덕수궁 전깃불도 '덜덜불'이라 했다. 툭하면 전기가 끊어져 '건달불'로 불린 경복궁 전기와 비슷했다. 아관파천 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이 밤마다 신변을 걱정하던 시절의 애환이 깃든 이름이기도 하다.
다음 주말 정동야행[貞(곧을 정) 洞(마을 동) 夜(밤 야) 行(다닐 행)] 축제에서 이 덜덜불을 체험해 볼 수 있다. 그때처럼 전구를 이용해 덜덜꼬마등을 만들면서 자가 발전기의 작동 원리와 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든 덜덜불로 정동의 밤거리를 밝히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아이들과 함게 덕수궁길과 시청별관 앞에서 마당극 '덜덜불을 가진 자, 그는 누군인가'도 구경할 수 있다.
오는 27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지는 정동야행의 주제는 다채롭다. 밤에 피우는 문화의 꽃 야화[夜(밤 야) 花(꽃 화)], 근대유산을 따라 걷는 야로[夜(밤 야) 路(길 로)], 역사와 함께하는 야사[夜(밤 야) 史(역사 사)], 거리에서 펼치는 공연 야설[夜(밤 야) 設(베플 설)], 아름다운 봄밤의 야경[夜(밤 야) 景(경치 경)], 먹는 즐거움을 누리는 야식[夜(밤 야) 食(밥 식)]까지 아우른다. 지난해 인기를 모았던 정동 제일교회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의 파이프오르간 연주도 흥미를 돋운다.
각국 대사관이나 성공회 수녀원 등은 홈페이지에 미리 신청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제한이 없다. 덕수궁 중명전과 옛 러시아공사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5곳에서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정동을 한 바퀴 도는 것도 좋다. 마침 중구가 개발한 모바일 앱 '중구 스토리여행'에서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해설이 나오니 금상첨화다.
개화기 고종이 마시던 커피를 만들어 보는 '가비의 향'도 색다르다. 가비는 커피의 한자 표현. 커피콩을 절구에 갈아 맛보고 커피가루는 향첩에 넣어 방향제로 활용할 수 있다. 옛 신문사의 납활자로 가족신문을 찍어 보는 행사도 있다. 덕수궁 중화전 앞에서 펼쳐지는 봄여름가을겨울 콘서트(27일)와 금난새의 고궁음악회(28일) 역시 빠뜨릴 수 없다.
이 길의 추억을 오래 간직하는 특별한 방법도 있다. 근대식 우편제도를 도입한 우정총국이 있던 것에서 착안한 '느린 편지' 이벤트다. 미래로 보내는 편지를 써서 옛날식 우체통에 넣으면 10월 정동야행(마지막 주 금·토) 때 받아볼 수 있다. 정동에는 근대문화 유산만 많은 게 아니다. 돌담길을 따라 걷던 연인들의 밀어와 오래된 골목에 배어 있는 남만의 향기도 멋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