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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좌표
[연작소설] 섬에 태어난 죄-산전1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잠녀 반일 항쟁'
--- ⑧ 산전(山田)
* 4. 3 제60주년을 맞는 '오름 이야기' 블로그 특집으로 졸작 ‘섬에 태어난 죄 - 8’을 세 차례에 나누어 내보냅니다. 이 소설은 4. 3을 다룬 연작소설로, 제주작가 2008년 봄호(통권20호)에 실렸던 것인데, 무장대 이덕구 사령관의 최후를 다룬 부분입니다. ‘산전(山田)’은 개오리오름 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이덕구 사령관의 마지막 활동무대입니다. 이곳에 실린 삽화는 지금 ‘제주4.3평화 기념관’ 예술전시실에 개관 기념으로 전시회를 갖고 있는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의 해설서(학고재 간)에서 뽑았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6월 30일까지 전시됩니다.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강제노역'(* 일제 강점기말 결7호 작전의 제주요새화)
1
“케겡 께게겡 께게게겡---, 케겡 께게겡 께게게겡---.”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우짖는 새끼노루의 울음소리에 잠이 깬 이덕구(李德九) 사령관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몇 시나 되었을까? 조그맣게 터진 창구멍이 희끄무레한 것이 얼마 없어 먼동이 트겠다. 그는 시간을 가늠하며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회복 불능 상태에 처한 무장대의 수습책을 생각하며 밤새도록 전전하다가 얼핏 잠에 빠진 것 같다. 그는 간헐적으로 들리는 노루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폐부를 찌르는 것 같아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어제 유격대원 몇 명을 데리고 개오리오름으로 정찰을 나갔다가 노루가 올가미에 걸려 죽어 넘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다가서 만져 보니 아직 온기가 남아 있고, 젖을 빨았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까운 곳 어딘가 분명 어린 새끼가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며 측은해 했었다. 올가미에 걸려 버둥거리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남은 새끼를 생각했는지 눈은 부릅뜬 채였다.
전화선으로 만든 올가미 끝이 녹슬어 있는 걸 보면 묵어 놓은 지 꽤 오래되었다. 바른 길로 잘 다녔는데 죽으려 했는지, 평소 안 다니던 구멍으로 들어가다가 걸린 것이다. 죽은 노루를 떼어놓으려고 나무에 묶인 올가미를 풀려는 순간 “툭!”하고 나무가 잘리며 힘없이 꺾이었다. ‘조금만 더 힘을 주었더라면 살아날 수도 있었는데….’하고 중얼거리며 유격대원들에게 구렁텅이에 돌을 쌓아 묻도록 지시했다. 그것을 묻는 대원들은 은근히 잡아먹었으면 하는 눈치였으나 너무 잔인한 것 같아 무시해버렸다.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해방'
저 소리는 분명일시 어제 죽은 그 어미의 새끼가 틀림없었다. 다시 한 번 노루 새끼의 울음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귀에 이명(耳鳴)이 일기 시작했다. 3․1사건으로 잡혀가 고문을 당해 고막이 파열된 후로, 큰 충격이 있거나 감기 기운이 있을 때 간혹 일어나는 증상으로, 처음에는 귓속에서 머리끝까지 바늘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있고, 차차 매미 울음소리나 웅성거리는 소리로 이어졌다. 가끔씩 ‘왓샤! 왓샤!’ 하는 소리와 노래도 섞였다.
그 중에는 점호 때 자주 부르던 ‘제주유격대 빨치산가’도 있었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 밑에 전사는 용감한 전사/ 더운 피 흘리며 말하던 동무/ 쟁쟁히 가슴에 울리어 온다/ 동무야 잘 가거라 원한의 길을….” 이어졌다 끊겼다 하는 노랫소리가 오늘따라 맥이 풀렸다고 느낀다.
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 운동을 하면서 몸을 풀면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는 벌떡 일어나 몸을 비틀었다. 언제나 입고 있는 옷이 잠옷이었고, 툭툭 털고 일어나면 평상복이 되는 생활이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귀한 손님을 만날 때나 공식적인 행사에는 학병으로 있을 때 입었던 위아래가 붙은 일본군 비행복을 차려 입었다. 그는 냇가에 가서 세수나 할 요량으로 돌로 지은 막사(幕舍)를 나와 다시 몸을 비틀며 기지개를 켰다.
6월초라 하지만 산이어서 그런지 으스스 한기(寒氣)를 느낀다. 음력 5월 초아흐레 달은 이미 졌고, 샛별이 높이 올라와 있어 어슴푸레 여명이 비친다. 이곳 냇가는 물이 여러 군데 고여 있어 식수로 사용하는 샘과 그냥 쓰는 물이 구별되어 있다. 이번 겨울은 이곳 산전(山田)과 개오리오름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지냈다. 두 곳은 4~5km 거리에 위치해 있는데, 산전(山田)은 양쪽 냇가를 통해서 숨거나 도주하기 용이했고, 개오리오름은 숲이 깊고 봉우리가 많아 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싸울 수 있어 적은 병력으로 대치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인민위원회'(* 해방후 마을, 읍, 면 단위로 생긴 자치기구)
처음에 터를 잡았던 물장오리는 별천지였다. 철철 흘러넘치는 분화구의 물, 장엄한 한라산 아래 불칸디오름과 쌀손장오리, 테역장오리, 물장오리로 둘러친 공간은 평평하고 아늑하여 훈련하기에도 좋았고, 어느 쪽으로 적이 쳐들어오든 삽시간에 약속된 장소로 분산되어 숨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잰걸음으로 걸어 나오면 산의 남북을 잇는 길이 있어 어디든지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년 11월 중순의 대공세로 그곳은 초토화되었고, 이곳 산전(山田)으로 겨우 옮겨와 그 춥고 혹독한 겨울을 날 수 있었다. 그런 이곳과는 달리 아랫마을에서는 작년 말 계엄령이 해제되었지만 올 기축년에 들어서서도 양민 학살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곳 무장대는 새해 첫날을 기하여 악랄하기로 소문난 오등리 2연대 3대대 주둔지를 공습했는데, 중과부적으로 얼마 안 남은 병력 손실만 가져왔다. 삼양리나 협재리 공습도 별 성과가 없었다.
그에 비해 토벌대의 보복은 극심했다. 외도지서 경찰과 특공대원들은 무장대로 위장하여 제주읍 토평리에 난입, 주민들이 속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틀 동안 수십 명을 총살시켰다. 이미 피를 보고 악귀로 변한 함병선 2연대장은 계엄령의 지속적인 시행을 요구하며 주민 학살에 열을 올렸다. 초나흘날엔 화북리 곤을동 주민을 집단 총살했다는 보고 등 주민 무차별 학살 소식이 속속 올라왔었다.
이에 분개한 무장대는 남원면 의귀리에 주둔해 있는 2연대 2중대를 습격했으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곳에 수용되었던 죄 없는 주민만 수십 명 집단 총살당했다. 중순에 들어 마을 인근에서 군인들이 기습 받은 데 대한 보복으로 조천면 북촌리를 불바다로 만들며 이틀 동안 주민 수백 명을 총살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아연실색했다. 더욱이, 2월 들어 가까운 곳에 있는 봉개지구에서 육해공 합동작전을 벌여 수백 명을 살해했다는 보고는 전의(戰意)를 상실하기에 충분했다.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학교 창설' (* 해방과 더불어 높은 교육 열기)
이대로 더 버티어야 할 것인가? 그는 지금 각 지대에서 보고가 제대로 올라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들도 사살되었거나 무작정 숨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럴수록 군경이 증파된다는 어두운 소식은 계속되고, 이곳 산전(山田)에 남은 무장대원 동지들도 부상병 일색에다 제대로 된 간부도 없기 때문에, 바짝 엎드려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런 상황이 막막하고 외롭기만 했다. 이럴 때 좌구(佐九) 형이라도 있었으면….
어렸을 적에 일본으로 건너 가 큰형(호구)의 보호 아래 둘째 형(좌구)을 의지해 자란 그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면 무엇이든 척척 해결해주던 둘째 형을 생각했다. 여덟 살 터울의 둘째 형은 그의 스승이었다. 그러기에 오사카 미오키모리국민학교 때부터 일신상업고등학교, 입명관대를 거치는 동안 형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해방 후 제주도로 건너 온 큰형은 고향에 중학교를 설립했으며, 둘째 형은 남로당 제주도당 총무부장을 지냈다. 해방 후 그는 아버지의 종용으로 서울에서 생활했는데, 제주에서 일하는 둘째 형이 같이 있자고 불러들여 조천중학교에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며 지냈다.
그러다가 큰형이 숙환으로 먼저 죽고, 둘째 형이 1.22 사건에 그와 같이 검거되었다가 풀려난 뒤 봉기를 전후해 일본으로 건너가 버린 것이다. 둘째 형은 당시 젊은 지식인들이 심취했던 노동운동이나 유물사관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모른 것이 없었고, 그 영향으로 이 사령관 역시 그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둘째 형으로부터 어려움에 봉착한 그에게 사람을 보내 왔다.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3. 1 대시위' (* 1947년 3월1일 사실상 4. 3의 도화선. 부분화)
http://blog.daum.net/jib17/12645074
[연작소설] 섬에 태어난 죄-산전2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3. 1 대시위' (* 1947년 3월1일 사실상 4. 3의 도화선. 부분화)
2
어제 있었던 일이다. 그가 8시쯤 트(아지트)에 앉아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막막한 심정으로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데, 제주읍 삼도리에서 김 동지라는 분이 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김 동지는 그가 작년에 딱 한 번 만난 동지로, 제주 성내(城內)에 머물러 있으면서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얻은 정보를 비밀 경로를 통해 알려주고, 가끔은 구급약품을 사모아 두었다가 보내는 등 자원해서 조력하는 동지였다.
형편없이 허물어진 비선(秘線) 조직 때문에 마을과 산 사이의 정보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얼마나 다급하고 중한 내용이기에 직접 올라 왔을까 하는 조바심이 일어 얼른 모셔오라 재촉했다. 잠시 후 트에 들어선 그를 보니, 온 몸이 흙과 땀에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한참동안의 침묵이 흐르고 어둑한 방에 적응이 되었는지 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면서,
“사령관님! 혼자서 얼마나 고생이 심허우까? 중요한 일이 있어 새벽 3시에 성(城)을 넘어 냇가를 따라서 이까지 왓수다.”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 사령관은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눈 뒤
“아이고, 고생 많이 햇수다. 아무리 바빠도 숨 내리쉬고 저기 가서 좀 씻고 옵서.”하고 당번병에게 안내하도록 했다.
이 사령관은 서울에서 전문학교를 나왔다는 김 동지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바로 작년 여름 물장오리 쪽에 있을 때였다. 귀한 조력자가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 본부에 들렀더니, 핏기 없는 얼굴에다 맑은 눈을 가진 청년 김 동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어지러운 시기여서 고향에 돌아와 조용히 가업을 이으며 살고 있는데, 봉기가 일어난 날 담장 안에 떨어진 삐라를 보고 감동했다고 했다. 김 동지는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여러 사람 앞에서 비장한 어조로 그 때 살포했던 ‘시민동포들에게 드리는 글’을 외워나갔었다.
시민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형제들이여! ‘4. 3’ 오늘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은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 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이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인민유격대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발포' (* 1947년 3월1일 사실상 4. 3의 도화선)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암송하고 난 김 동지는 자신이 하고 싶던 일을 대신하고 있는 의로운 분들을 꼭 한 번 뵙고 싶었다면서 자신이 질어지고 온 배낭의 비상약품을 내려주고, 비선(秘線)을 확약 받은 뒤 총총히 내려갔었다. 잠시 후 씻고 머뭇거리며 트로 들어온 김 동지는 방안에 이 사령관과 자기 둘 뿐인 것을 알고,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사령관 님, 이제 어떻게 할 거우까?”
“게메 마씀(그러게요). 어떻게 하면 조으쿠가(좋겠습니까)?”
예상치도 않게 튀어나온 물음에 이 사령관도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랫마을에서는 반도(叛徒)라는 이름으로 중산간에 머물러 있는 주민들을 대량학살하고 잇수다. 또 관음사를 불태우는 만행을 벌여 그곳에 머물러 있던 스님들을 살해하고, 도두에서도 대량학살을 햇수다. 육군 본부에서 비행기 2대가 파견되었고, 6여단 유격대대를 불러 들이고, 전국에서 뽑은 경찰특별부대도 500명가량 왔고, 그것도 모자라 3월에 제주지구전투사령부도 설치해십주. 가만히 보니까 5. 10 재선거 제대로 치르려고….”
“맛수다. 우리가 처음 봉기한 것도 망국적인 단선(單選) 저지를 목표로 시작한 일 아니우까? 1차 세계대전 후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내세워 약소민족을 독립시키고 그들 민족끼리 스스로 잘해 가도록 도와주자던 미국인들이 들어와 사사건건 내정에 간섭하면서 민족을 분단시켰고, 간악하게 굴던 일제의 주구들을 앞세워 이렇게 죄 없는 민간인까지 잡아 죽이는 것을 부추길 줄은 몰라십주.”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피살' (* 1947년 3월1일 발포로 인한 죽음)
“3. 1사건만 하더라도 좀 봐줘도 될 일을 가지고, 그렇게 심하게 할 건 뭐우까? 아, 36년 동안 민족정기를 말살시키고, 지식인들을 불러다 고문으로 죽이고, 전쟁터에 데려가 총알받이로 죽이고, 좋은 문화재 다 빼앗아가고, 젊은 부녀자 강제로 데려다 전쟁터에서 정조를 유린하고…. 그렇게 당했던 복받친 설움을 풀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정신 차리자면서 오랜만에 기를 펴려는 민중들에게 사정없이 발포(發砲)하는 그런 자들이 어디 잇수가?”
“정말 나도 잡혀가 봤지만 도저히 견딜 수 으십디다. 뚜렷한 근거도 없이 잡아갔다 결국은 놓아주면서도 그 고문의 정도가 말로 표현 못해 마씀. 아무데나 총대로 짓이겨 고막이 터지고 골절(骨折)되어 아프다고 해도 막무가내여시난. 아니 오히려 엄살을 부린다고 더하면 더했지 고문은 끝이 으섯수다.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발악하는 이승만과 그에 붙어 출세하려는 자들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고, 분하고 불안해서 한시도 견딜 수가 으선 일어선 거 아니우까.”
“무사 아니우까? 그런데 어찌 돌아가는 건지, 지난 연말에 소련에서는 북한에서 완전 철수해시난, 유엔에서는 미국도 남한에서 철수하라고 하는데도 꿈적도 안하는 걸 보면 처음부터 무슨 꿍꿍이수작이 이선 탄압한 거라. 아,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대국 놈들이 남의 나라에 들어와서 그렇게 ‘밤 놓아라. 배 놓아라.’ 할 줄은 몰랏수다.”
“사실이지 처음 무장봉기를 결정할 때 나도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안햇수다. 그리고 우리는 당초에 악질 경찰과 서청(西靑)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지, 경비대나 미군을 지목하지는 아니 햇수게. 미군이 밉지 않은 건 아니나 여러 가지 신무기를 가졌고, 신사적인 나라여서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아십주. 우선 시위를 하며 결의(決意)를 보이면 협상하자고 덤빌 것이고, 우리를 함부로 대하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겁주. 그리고 온 도민을 등에 업고 하는 싸움이어서 겁날 것도 으섯수다.”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서청 입도' (* 파업을 제압하기 위해 서북청년단을 불러들임)
“그러나 도민 중에 그들의 앞잡이가 이서부난 안되어십주게. 이왕 일어선 거 똘똘 뭉쳐서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고, 적어도 우리 제주섬 사람들의 주장대로 이끌어 나가려는 생각을 아니 한 거라 마씀. 이 참에 힘센 쪽에 붙어서 일제시대에 잘못한 걸 무마시키고 다시 힘을 구축해보자 하는 놈이나, 기회를 노려 출세하려는 놈 때문 아니우까.”
“처음에는 그런 걱정은 안햇수다. 무기가 없어 죽창을 깎아서 훈련을 하면서도 모두가 신이 났고, 우리 좌구 형이 이야기 몇 마디만 하면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렷수다. 그리고 총사령(김달삼)의 젊은 패기와 자신 있고 민첩한 대응은 볼만햇수다. 더욱이 내가 맡은 3․1지대는 머리 좋고 의지 강한 조천면, 제주읍, 구좌면 출신이라 언제나 믿음직스러워서, 그 동무들과 함께라면 어떤 일을 해도 성공할 자신이 이서십주.”
“지금은 빨갱이나 반도(叛徒)로 몰아붙이고 있지만, 그건 시작할 때 뿌린 ‘경찰관에게 경고함’이라는 전단지에도 나와 있지 안수가?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 있는 경찰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 있는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 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그 뒤에도,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 있는 경찰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 있는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 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고 독려하지 안햇수가.”
“실지로 선거에 불만을 품은 경비대원들이 대거 탈영한 일도 잇엇수게.”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넘치는 유치장'
3
대화가 한없이 이어지려는데, 이 사령관이 화제를 돌렸다.
“그러나 저러나 급하게 여기 올라온 용건이 있을 텐데….”
“맛수다. 사실은 일본에 있는 좌구 형이 보낸 사람이 나에게 이런 걸 꼭 전해주라는 부탁을 하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왓수다.”
그가 내미는 봉투를 집어든 순간 이 사령관은 이제 결정을 할 때가 왔구나 하는 직감이 퍼뜩 들면서 다시 이명(耳鳴) 현상이 일어났다. 어느 때보다 강력한 통증이 일면서 머리 전체를 쥐어짰다. 이 사령관이 충격에 의해 멍하니 있는 것을 본 김 동지는 자기 탓이라도 되는 양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얼마 없어 통증이 좀 멎었는지 후들거리는 손으로 천천히 봉투를 뜯었다.
<내 소중한 동생 보아라. 혼자 고생이 많구나. 처음에 시작할 때 있던 동지들은 다 사라져버리고 너만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버티고 있구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남조선의 모든 악랄한 군인과 경찰과 청년들이 다 제주섬으로 몰려들어 무장대원들을 그렇게 잡아 죽이고도 모자라 이제는 죄 없는 주민들까지 학살한다하니, 무슨 대책이 있겠느냐. 너는 이제까지 잘 버티어왔지마는 앞으로 잡히면 개죽음이다.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으니, 잠시 피하여 힘을 충전한 뒤 후일을 도모하여라. ○월 ○○일 ○시에 네가 알고 있는 ○○지점에 어선을 가장한 빠른 배를 보낼 테니, 그걸 타도록 하여라. 나도 그랬거니와 해주에 가는 김 사령관 일행도 그 배편을 이용했다. 이 편지를 전달한 사람에게 꼭 회답을 주어야 사업이 진행된다. 만일 변동이 있을 시는 다시 연락할 것이니, 그리 알고 꼭 탈출하도록 하여라. 이곳에 나와서도 조국의 인민을 돕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명심하라. --오사카(大阪)에서 좌구 형이>
이 사령관이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상상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그런 편지를 직접 받고 보니 가슴이 몹시 쿵쾅거렸다. 그러나 애써 태연한 척 하면서 김 동지에게 잠시 답장을 쓸 테니, 나가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종이와 만년필을 꺼내 책상 위에 놓고 나서, 편지를 다시 읽으며 옛 생각에 빠져 들었다.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고문'
…봉기 직후 정신적 지주였던 둘째 형이 일본으로 건너가 버리고, 작년 8월초 김 총사령관이 해주로 간 뒤로는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제주지역 대표 일행이 해주에 무사히 도착해 김 사령관 동지가 영예롭게 주석단 일원으로 선출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는 무엇이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소련이 UN의 결의에 따라 북한 주둔군의 연말 철수 방침을 세웠을 때에도 올해만 잘 버티면 미군도 물러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철수 연기를 요구하고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나서, 송요찬 9연대장이 ‘제주 해안에서 5km 이상 지역에 통행금지 명령을 내려, 이를 어길 시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총살에 처하겠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하며 해안선까지 봉쇄했을 때는 오기가 생겼다. 바뀐 사령관의 이름으로 한 번은 무엇인가 보여줘야겠다고 남은 병력을 끌어 모아 차근차근 공격 준비를 했다.
10월 19일, 제주에 파견 명령을 받은 여수 14연대 장병들의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10월 23에는 때가 왔다 싶어 주민들에게 제일 많은 피해를 주었던 삼양․조천․함덕지서를 일제히 습격하고, 다시 50여 개의 오름에 봉화를 올리는 한편, 새 사령관 명의로 선전포고를 하고 토벌대에게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 때가 절정이었고 마지막 승부였다.
친애하는 장병,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피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총은 우리들이 피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총부리를 당신의 부모, 형제, 자매들 앞에 쏘지 말라. 귀한 총과 탄알 허비 말라.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 준다. 그 총은 총 임자에게 돌려주자. 제주도 인민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로 쫓겨내기 위하여 매국노 이승만 일당을 반대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부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은 인민의 편으로 넘어가라.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 지켜주는 빨치산들과 함께 싸우라. 친애하는 당신들은 내내 조선 인민의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라.
이게 화근이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봉기가 이미 발동된 이상에는 최선을 쟁취하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라는 레닌의 말을 따랐던 것이다. 11월 중순부터 시작된 9연대와 2연대의 강경진압은 무장대의 씨를 말리려 들었고, 남아있는 무장대원들도 발붙일 곳 없어 겨울을 더욱 춥게 했다. 의지할 곳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신념과 정신력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눈[雪]이 있어 숨을 곳이 있었지만 굶주림을 견디다 못하는 걸 위로하기 위해 이듬해 1월 유격대원들을 소집했다.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기의 강매' (* 서북청년단의 횡포)
“이제 식량, 의복, 신발 등 모든 보급이 끊겼소. 최선의 노력을 다해 살아남도록 하시오. 만일 잡힐 경우 입을 열기 시작하면 고문이 심해져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털어 놓게 되고 결국 죽게 될 것이오. 아는 부분만 말하겠다고 밝히고 말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입을 다무시오. 우리가 죽더라도 그것은 영원히 빛나는 죽음입니다. 겁낼 것 없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한 이 사령관은 작정한 듯 만년필 뚜껑을 열고 답장을 써내려갔다.
<존경하는 형님! 서신 잘 받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마음먹었던 때의 하늘을 뚫을 듯 차오르는 의기(義氣)는 다 사그라지고 봉기(蜂起)했던 동지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일본인 대신 제주섬에 진주한 미 점령군은 모처럼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인사들을 다잡기 위해 단죄되어야 할 친일파들을 재기용하고, 서북청년단을 불러들여 만행을 부리고 진정한 해방을 바라는 인사들을 탄압하여 잡아 가두고 고문을 했습니다. 탄원하는 인사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여 고문 치사자가 생겨나자, 우리는 ‘앉아서 죽는 것보다 싸우다 죽겠다’는 각오로 무장 항쟁을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꿈꾸었던 대로 변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많은 인민들이 죄 없이 죽어갔습니다. 우리가 정당한 이유로 봉기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그 피해가 다른 많은 사람에게 미쳤다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잘잘못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역사가 판단하리라 믿습니다. 이제 와서 제가 그곳으로 건너가 생명을 부지한다고 하여 몇 백 년이나 살며, 그 삶이 떳떳하겠습니까?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을 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하들을 두고 비겁하게 도망가지는 않겠습니다. 형님의 깊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못난 동생의 거절을 용서해주십시오. -- 고향에서 동생 덕구 올림>
김 동지는 내용도 모르는 그 편지를 받아들고, ‘지금 경찰에서는 자수해 온 사람들에게 죄를 사(赦)하고 상금도 주며, 큰 공을 세웠을 때는 경찰로 특채한다.’는 등의 달콤한 유혹으로 입산자들을 앞장 세워, 자신들이 있던 곳을 안내하게 하여 하나하나 토벌하고 있다면서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겁간' (* 서북청년단의 부녀자 희롱, 강간 등의 횡포)
http://blog.daum.net/jib17/12645074
섬에 태어난 죄-산전3
*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 중 '횃불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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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령관이 이런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혹독한 겨울을 갇혀 지내면서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하며 토론을 벌여서 얻은 결론이었다. 어떤 날 잠이 들면 꿈속에 처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떼로 나타나 자신을 보며 히죽히죽 웃는가 하면, 무언가 손가락질을 하며 사라지기도 하고, ‘내 팔을 내 놓아라. 내 다리를 내 놓아라.’ 하며 어깨에 매달려 자신을 괴롭혔다.
놀라 잠이 깨면 다시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있고 예의 이명(耳鳴)이 일어나 전전하며 잠 못 이루는 불면의 밤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시작할 때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순반란이 일어나 본토에서 벌어진 게릴라와의 전쟁에서 정부측 손실이 커지게 되자 ‘반공(反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미군과 정부당국에서는 ‘빨갱이들은 나라를 뒤엎으려는 세력이기 때문에 무조건 잡아 없애야 한다.’는 식으로 밀어붙여 공감대를 넓혀나가면서 제주도민들도 차차 살기 위해 힘센 쪽으로 붙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달리 전국에서 뽑혀온 수많은 군인과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까지 가세하여 의심을 가진 쪽 주민들을 무더기로 죽여 없애 공포감을 조성하며 조금치의 틈도 주지 않고 있어, 이제는 더 이상 동조자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재선거의 투표율이 거의 100%에 육박했다는 보고에 그는 씁쓸해 쓴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 중 '입산' (* 탄압을 피해 산으로)
그래. 지금 입장에서의 항쟁은 희생만 따를 뿐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마지막 남아 있는 병력을 쓸어 모아 가미가제(神風) 특공대 식으로 장렬히 전사하려고 해도, 대세가 기운 마당에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 어디에 이렇다 할 병력과 무기가 있어 싸울 것인가? 몇 안 되는 불쌍한 부상병들만 애꿎게 희생될 뿐이다.
그래서 그는 용단을 내렸다. 늦었지만 이제 싸움을 끝내야 한다.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나아가 잘못 꼬인 실을 풀어내야 한다. 시작하기 전 무장 항쟁 결의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초심으로 돌아가자. 그 때 준비를 철저히 한 다음에 시작할 것을 주장했지만, 모든 것을 다 갖춰 시작하려면 언제나 시기가 늦는 법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지 않았는가.
단선(單選)이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36년간 겪어온 굴욕의 역사가 어떠했다는 것을 한 세대 이상 충분히 경험했고, 그 교훈을 얻은 바 있다. 벌써부터 악랄해지려는 미제와 정치권력의 야욕에 현혹된 그 하수인들의 굴욕적인 괴뢰정권에 맞장구치며 희희낙락할 수만은 없지 않았는가? 절박한 심정에 급하게 모여 철저하게 준비를 못하고 일어선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5. 10선거가 하루하루 옥죄어 오는데 도저히 그 이상 시기를 늦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어디로 어떤 방법으로든 무언가를 보여줘야 했다. 강력한 의사표시가 요구되었지만, 진전에 따라서 그것은 시위로만 그쳐야 할 일은 아니었을까? 김익렬 9연대장과 김달삼 무장대 사령관과의 회담에서 얻어낸 합의 사항이 지켜져야 했다. 오라리에서는 분명히 이쪽에서 불을 지르지 않았는데….
*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 중 '신촌회의 (* 앉아서 죽을 것이냐, 싸워서 살 것이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이 지긋지긋한 싸움이 빨리 끝내야 한다는 의지가 분명해졌다. 더 이상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처음 힘을 모아 싸우자던 사람은 다 가고 없다. 책임질 수 없는 위험한 싸움은 신중하게 따져 시작했어야 했다. 그러나 거사가 계획된 이상 몸을 도사릴 여유가 없었다. 그들을 믿기로 하고 같이 나선 마당에 그들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떠나간 사람들을 원망하기에는 너무나 먼 길에 서있다.
이덕구란 이름으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희생을 강요하거나 버티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대놓고 밀어붙이는데,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잖은가? 처음 거사할 때는 이 섬의 온 젊은이들이 하나가 되어 미제를 몰아내는 일에 뛰어들 줄 알았다.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될 줄 알았다. 그게 예상했던 수순이었다. 그러나 힘으로 밀어붙이는 데는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처음에 행동으로 옮기자던 사람들은 홍길동의 활빈당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 신출귀몰하게 활동하며 타격을 줌으로써 그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여 조금씩 뜻을 관철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게 뭍에서 많은 경찰과 지원부대를 불러들일 줄 누가 알았으랴. 더구나 악랄한 서청단원 주구들을 불러들여 주민을 옥죄고 횡포를 불이는 데는 당할 재간이 없었잖은가?
그는 서서히 준비를 해나갔다.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남아있는 병력을 이끌고 가서 자수를 한다. 아니다. 그것은 앞서 희생된 동지들에게 치욕을 주는 행동이다. 그렇게 굴복하려고 이 싸움을 시작한 건 아니잖은가? 그러면 무작정 공격을 하여 자폭하는 각오로 최후까지 싸우다 죽어? 그것도 아니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목숨을 버리는 건 죄악이다.
*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 중 '봉화' (*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부분화)
결론은 혼자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다. 앞서 있었던 장두들을 생각했다. 김통정 장군은 주민들의 지지는 받았지만 모든 부하들을 다 소진시키고 나서 최후에 자결했다. 옛날 싸움으로는 꼭 그래야 되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아도 된다. 이재수 장두는 잡혀서 사형을 당했으니 죽기까지의 수모가 어떠했으랴. 그래서 얻은 결론은 혼자서 적을 맞아 자결하기로 했다.
그러자니 자신을 호위하는 10명의 결사대원들이 떠올랐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생사를 같이했던 동지들이 아니었던가. 그들을 떼어 놓는 일이 문제였다. 자신을 잃고 슬퍼할 부상당한 대원들, 들판을 헤매다 몸을 의탁해온 주민들은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다가 자신의 말을 한 마디도 거역 않고 따르는 영리한 오 대원을 생각하고 불렀다.
그는 내가 없었을 때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설득시키는 한편, 절대 비밀을 지킬 것을 약속하고, 그런 날이 오면 꼭 모든 대원들을 해산시켜 제 가고 싶은 대로 가게 하라고 당부했다.
*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 중 '지서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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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지가 다녀간 이틀 뒤인 6월 7일. 드디어 개오리오름에 있던 비께를 통하여 경찰이 민간인을 앞장세우고 그쪽으로 온다는 연락이 왔다. 그는 자신을 호위하는 유격대원들을 불러놓고 각자 일을 시켰다.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그들은 시키는 대로 흩어졌다. 그는 당번병에게 잠깐 운동 삼아 다녀온다는 말을 하고 혼자 나섰다.
냇가를 따라 나온 그는 아무도 모르게 나무 그늘을 통하여 길가에 이르러 좌우를 둘러보고는 길을 건너 개오리오름 숲으로 얼른 몸을 감추었다. 잘못하다가 절물오름 옆 봉개에서 올라오는 길과 교래에서 올라오는 길목 어느 나무엔가 숨어 있는 비께 녀석이 알면 시끄러워지기 때문이다. 거기서 주위를 둘러본 그는 이제 마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이곳 개오리오름은 그 사이에 정이 들어 잘 맞는 옷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만큼 여기서 훈련을 하고 교전을 벌였던 곳이다. 개오리오름 위에 비께를 세워놓으면 산천단 위로 올라오는 병력의 이동을 손금 보듯 빤히 알 수 있었고, 그 병력이 오름 옆을 지나 올 때쯤이면 서귀포로 넘어가려는지 이곳으로 토벌하려 올라오는지 일거수일투족이 파악된다. 병력의 수와 지참한 무기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고 대비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다가 지금처럼 나뭇잎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6월에는 숨어 있는 사람은 알지만 토벌대로서는 정말 어디 있는지 모를 요새다. 또 개오리오름은 북으로 샛개오리, 족은개오리오름과 연결되면서 여러 곳으로 통하는 길과 계곡이 있어 사방을 둘러 겹겹이 토벌해 오지 않는다면 도저히 잡을 수 없다.
*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 중 '한라산 자락 백성'
그러기 때문에 웬만한 병력이 왔을 때, 무기와 탄약이 부족한 이쪽에서는 최대한 가까운 곳까지 끌어들여 기습공격을 하고 나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버리면 이쪽 지리에 능통하지 못한 토벌대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천혜의 요지였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적이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면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며 덮쳐 무기를 탈취하는데도 용이하다.
그리고 아지트와는 따로 떨어진 곳이라 훈련을 한다든가 누구를 만날 때는 주로 이곳을 이용했
고, 아무 일이 없을 때에도 편안하게 와서 쉬는 곳이다. 개오리오름과 샛개오리 사이의 분화구에 이르면, 평평한 분화구가 있어 안온하게 감싸줘 자주 찾아와 쉬다가, 샛개오리 북쪽 능선 무덤 잔디위에서 뒹굴기도 하고 사방을 보며 작전도 짰다.
이제 마음이 정리되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이명(耳鳴)도 사라지고 편안하게 여유를 즐기듯 걸어본다. 아직까지 눈에 띈 적이 없는 늦게 핀 금새우란이 숲을 환하게 비췬다. 자세히 살펴보니 새우난초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하얀 갈매기 떼 같은 큰 꽃이 달린 난초 비슷한 꽃도 있고, 새우난초 같은데도 꽃이 제비처럼 검은 색을 띤 것도 보인다.
그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자리인 족은개오리 능선을 넘어 앞과 양쪽을 살필 수 있는 자리에 앉아 그들을 기다렸다. 아무 일 없을 때도 바위로 엄폐된 그 자리에 앉아 있길 좋아했으니, 이곳을 아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찾아올 것이다. 이곳에서 여러 번 적을 맞이해 가까이 다가섰을 때 선제공격을 하든지 옆에 유인한 후 몸을 날려 느슨해진 적의 무기를 탈취했던 곳이기도 하다.
*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 중 '부모들' (* 입산자 아들을 찾아내라고 죄를 씌우고)
드디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경찰 10여 명이 총을 든 자세로 다가온다. 앞장서 손가락으로 이곳을 가리키고 있는 두 명의 민간인도 보인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그들은 낯이 익어 보인다. 분명히 이곳에 많이 드나들었던 사람들이었다. 거칠 것 없이 걸어오던 일행은 사거리(射距離) 정도에서 돌 옆에 엎드려 미동을 않는다.
양쪽에서 아무런 움직임 없이 정적이 흐를 즈음, 한 방의 총성이 고요한 숲을 흔들었다. 동시에 이 사령관이 몸이 번쩍 솟구쳤다가 픽 쓰러졌다. 상대가 이 사령관이고 그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저쪽에서는 이제 일어나 총을 쏘며 한 발 한 발 다가온다. 언제 따라 왔는지 이 사령관 당번병이 손을 들고 달려 나오면서 외쳤다.
“더 이상 총을 쏘지 마세요. 지금 사령관님은 자결한 것 같습니다.”
다가서 보니, 관자놀이에 뚫린 조그만 구멍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 *
이튿날 관덕정 광장에는 이덕구 사령관의 시체가 하루 종일 나무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 중 '장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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