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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 열둘을 택하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6:6-19 요절/ 누가복음 6:12~13 | 2022. 2. 27 | |
봄학기 준비특강 2강 |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빙상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대회 돌풍을 일으킨 팀이 있는데 바로 슬로바키아 아이스하키팀입니다. 그들은 강호 미국과 스웨덴을 꺾고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동메달을 차지했습니다. 특히 17세의 신예 슬라프코프스키는 이번 대회 7골을 터뜨리며, 첫 출전한 올림픽에서 득점 선두에 올랐습니다. 슬로바키아 감독 크레이그 램지는 "이 어린 선수가 이런 일을 해내다니 놀랍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를 믿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을 위해 그에게 몇 년 동안 기회를 주었습니다." 라고 인터뷰 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어리지만 가능성 있는 몇 사람 택하여 함께 하시며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키우신 분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우리 각자를 택하신 예수님의 소망을 새롭게 영접하고 봄 학기를 힘차게 출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여러 가지로 배척당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이유 중에 하나가 안식일 문제였습니다. 6장 1-5절의 내용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으로 비난 받자 예수님께서 다윗의 예를 들어 그들을 변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고 거기에는 오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왼쪽 새끼 손 가락 하나만 다쳐도 참 불편함을 느낍니다. 세수 할 때도 힘들고 뭘 먹기도 힘들고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생깁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아니 손가락이 왜 그래요?’ 물을 때 계속 똑같은 대답을 하는 것도 힘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오른 손이 말랐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생활의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고 자의식과 인생에 대한 회의로 심령이 마르기 잘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집콕 하지 않고 안식일에 회당에 온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그를 위로하고 하나님의 소망을 심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고 안식일에 예수님이 병 고치시는가 엿보았습니다. 그들은 시기심과 율법주의에 사로 잡혀 참 안식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고발용 CCTV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으면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이럴 땐 오른손 마른 자에게 “내일 가버나움 홍길동 집으로 오시오” 쪽지를 전해주고 나중에 고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사람을 회당 한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질문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는 대답을 요구하시는 질문이 아니라 그들의 죽은 양심을 깨우는 질문입니다. 그리고는 무리를 둘러보셨습니다. 무리들은 설마 예수님이 이 상황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실 까 조마조마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0b절을 보십시오.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네 손을 내밀라” 오른 손 마른 자는 이 명령에 순종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한 여름에도 긴 소매의 옷을 입고 다녔을 것입니다. 회당에 와서도 맨 구석에 앉아 있다가 축도가 끝날 때쯤 급히 일어나 남의 눈을 피해 슬며서 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향한 예수님의 음성은 그를 치유하고자 하시는 목자의 음성이었습니다. 어떤 위협이 있어도 나는 너를 고치겠다는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의 명령이 그를 압도했을 때 그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마른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랬을 때 죽은 혈관에 피가 돌고 끊어진 신경들이 이어지고 마른 근육에 힘이 생겼습니다. 건강한 오른 손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오른 손을 번쩍 들고 “예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회개하지 않고 분노가 가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의논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의논했다는 것입니다.
“네 손을 내밀라” 하시는 예수님은 도전적으로 생명역사를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주로 온유하신 예수님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이런 도전적인 모습도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요즘 표현으로 예수님은 때로 훅 들어오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뜨거운 목자의 사랑과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이렇게 도전적으로 일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오른 손이 마른 자와 같이 내면과 삶이 마른 자에게 도전해 주십니다. 어릴 적 상처와 결핍, 아픔으로 인해 삶이 마른 자들에게 도전하십니다. 게임 중독, 음란물 중독, 유튜브 중독으로 영혼이 말라가는 자들에게 도전하십니다. 신입생들 중에도 학교문제, 적성에 맞지 않는 학과 문제, 취업걱정으로 희망이 마른 분들도 있습니다. 물질문제, 건강문제, 인간관계의 어려움으로 삶의 의욕이 마른 자들에게 도전하십니다. 숨어 있지 말고 정상인 척 하지 말고 “네 손을 내밀라” 기도로 내 밀고, 소감으로 내 밀고, 중보기도의 부탁으로 내 밀라고 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도전하듯이 쉽게 은혜가 마르는 우리에게도 도전해 주십니다. 먼저는 생명의 말씀으로 도전해 주십니다. 삶의 힘든 문제들을 통해 도전해 주십니다. 또 세우신 영적 리더를 통해 도전해 주십니다. “이번 수양회 말씀을 섬겨 주세요”, “요회 멤버를 새롭게 하겠습니다”, “새벽을 깨워 함께 기도합시다”, “학생목자라도 일대일에 도전해 보세요” 이렇게 도전적으로 훅 들어오면 약간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는 신앙생활이 마르고 굳어지기 쉬운 저희를 향한 예수님의 도전입니다.
19C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찰스 스펄전이 어느날 자신의 방 안에서 홀로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방에 들어온 그의 아내가 이 모습을 의아하게 여기며 스펄전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여보! 왜 홀로 앉아 울고 계셔요?” 아내의 물음에 스펄전 목사는 “여보! 오늘은 홀로 기도하는데 내 마음에 주님이 느껴지지 않는군요, 나의 심령이 언제 이렇게 메말랐나 싶어서 서글픈 마음이 들어서 눈물이 난다오!”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심령이 메마르고 굳어질 때 너무나 마음 아파하십니다. 우리의 마른 심령을 슬퍼하시며 강하게 도전하시는 주님 사랑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화내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른 손 마른 자처럼 순종함으로 영적으로 마른 손을 내밀고 회복의 은혜를 체험해야겠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쉽게 굳고 마르는 저희의 영혼에 도전해 주시는 사랑의 목자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고 더욱 완악해지는 종교지도자들을 보며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한 의도로 뭔가 해보고자 하다가 반대에 부딪히면 어떻게 합니까? 낙담하여 술집으로 가서 독주를 마시고 세상을 욕하고 사람을 원망합니다. 의욕을 상실하고 속세를 떠나고자 하거나 민중봉기를 계획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12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답답하고 힘든 시대문제를 안고 홀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시대의 어둠과 아픔을 들고 나가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문제의 크기보다 더 큰 무게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사람과 갈등하지 않고 사단의 계략을 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당면한 문제를 넘어 온 세상, 온 세대를 섬길 방향을 구하며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밤이 새도록 기도하신 것을 볼 때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배울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기도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기도에 대한 메시지, 기도에 대한 은혜로운 찬양, 기도에 관한 독서, ‘기도해 줄께요’라는 인사말이 기도자체를 대체하지 못합니다. 코로나 19가 3년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오미크론의 전파로 매일 십육만육천명 이상 사람들이 확진자 되고 있습니다. 요회 펠로우쉽을 자유롭게 한지도, 수양관에서 말씀과 사랑의 교제를 한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게다가 전쟁의 소식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캠퍼스가 개강을 하고 22학번 새내기들은 들어오는데 어떻게 주의 역사를 섬겨야 할지 막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 주님은 현실을 뛰어넘는 지혜와 힘과 방향을 주십니다. 우리가 여러 한계앞에서 무력지지 않고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가 될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기도에 힘쓰지 않았을 때 현실은 커 보이고 맡기신 사명은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새벽을 깨워 기도하고자 결단하고 순종했을 때 새 힘과 방향을 주시는 은혜를 체험케 되었습니다. 제가 올 한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배워 기도에 마음과 시간을 드리는 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 무엇을 하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날이 밝자 예수님은 그 따르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는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라는 말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위임 받아 세상으로 보내진 ‘대사’라는 말입니다. 호주 멜버른에는 세계적인 관광지인 그레이트오션로드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12사도’라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해풍과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육지에서 떨어져 나간 거대한 규모의 바위기둥들이 서 있습니다. 호주를 개척한 사람들은 이 위용에 압도되어 ‘12사도’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렇듯 ‘사도’라는 칭호는 참으로 큰 무게를 지닌 칭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택하여 사도라 칭하신 12명은 누구입니까?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시몬, 야고보의 아들(다대오) 유다와,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될 가롯유다”(14-16)입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첫째, 이들은 평범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이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복음을 너무 담대하게 전하여 이상히 여겼다고 되어 있습니다.(행4:13) 이들은 집안 배경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탁월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평범한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을 사도로 택하여 함께 하셨을 때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이후 복음역사를 계승하고 초대교회를 세우며 세계선교를 섬기는 특별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택하여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특별하게 쓰시는 탁월한 사도양성가 이십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보며 별로 특별한 것 없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머리가 비상한 것 같지도 않고 외모가 특출 난 것도 아니고 재주가 기발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유력한 집안의 자녀도 아니고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닙니다. TV를 보면 노래 잘 부르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도 참 많은데 나는 평범한 것 같습니다.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청년들을 사도로 세우시는 예수님은 평범한 우리를 택하여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쓰시고 그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겸손해지고 또한 큰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고전 1:26-29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평범한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목자요 복음의 일꾼 삼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둘째로, 이들은 출신과 기질이 다양한 사람들이 이었습니다.
12사도는 어부출신이 많았지만 세리 출신도 있었고 열심당 곧 운동권 출신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외향적이고 적극적이지만 업 다운이 심했고, 야고보와 요한은 조용하고 섬세하지만 야심이 많았습니다. 안드레는 단순하고 진심이 많았으며, 빌립은 머리 회전이 빠르고 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경험한 것만 믿는 도마와 존재감은 없지만 늘 그 자리에 있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도 있었습니다. 이런 다양성은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사랑안에서 하나 되었을 때 다양성은 더 큰 그릇으로 쓰임 받게 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슬로바키아의 장에스더선교사님은 외향적이고 친화력이 대단하며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실행하는 스타일입니다. 반면 박그레이스선교사님은 내향적이고 사색적이며 무슨 일이든 계획성 있게 일하는 스타일입니다. 이분들이 처음 슬로바키아 역사를 동역하고자 할 때 서로의 스타일 차이로 약간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부족한 점을 채워 주며 동역하였을 때 슬로바키아에는 풍성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활력 넘치는 쌍둥이 자녀들도 잘 섬기고 양들이 쌍둥이로 몰려 와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다양성을 통해 크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예수님을 높이 찬양합니다.
그런데 왜 12명일까요? 120명, 1200명을 뽑아 세우면 더 빠르게 엄청난 역사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수가 많으면 좋을 것 같지만 한 몸처럼 움직이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12명을 뽑으신 이유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소수라도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전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배우고 영적 권세와 능력을 위임받은 자들이 필요합니다. 12명의 사도들은 소수지만 이스라엘 12지파를 대표하고 온 세상 만민을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실제 이들이 둘씩 둘씩 전도여행을 나갔을 때 놀라운 역사를 일어났습니다. 초대교회의 집사로 세움 받은 사람은 단 7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그들은 교회를 잘 섬길 뿐 아니라 능력 있는 복음의 종들이었습니다. 17-19절을 볼 때 12사도가 택해졌을 때 많은 제자의 무리와 유대 사방과 이방 땅에서도 양들이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병 고침을 받고 귀신이 떠나가는 희망의 역사가 풍성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배우고자하는 제자그룹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에 족하지 않고 소수라도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함께 할 사도와 같은 영적 리더들이 있어야 합니다. 요회 목자들이 있어야 하고 캠퍼스 현장을 섬길 사도가 있어야 합니다. 세계선교에 보낼 사도, EBF와 JBF를 섬길 사도, 온라인 사역을 섬길 사도, 음악 역사 섬길 사도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적인 제자를 택하여 세우는 일, 복음의 동역자를 택하여 세우는 일은 많은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 있어야 가능합니다. 시간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또 수고했지만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소원이 약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적 제자양성이 예수님이 사역초기 승천하시기 까지 하신 일임을 볼 때 우리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명입니다. 봄 학기 저희가 춘천 5개 대학에 복음의 씨를 넓게 뿌려야 합니다. 또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많은 이들을 초청하고 말씀을 가르쳐야겠습니다. 무엇보다 소수라도 사도적 수준의 제자를 택하여 세우는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먼저 사도적 제자가 되며 또 그런 제자를 키우는데 올 한해 더욱 헌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영적으로 어둡고 도울 양 무리는 많은 시대에 우리를 사도와 같이 택하사 생명역사에 쓰시는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 니다. 저희도 예수님과 같이 사도적 제자를 택하여 세우는 일을 힘써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