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 3/3 조헌趙憲(1544중종~1592선조, 공주목 제독, 호는 중봉重峰, 시호는 문열文烈, 영의정 추증) *고경명과의 금산탈환 협공 약속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숭고한 인물이다. 조헌이 신의를 지키기 위해 그 얼마나 고분군투했는지를 밝혀내고자 노력했다. 조헌 장군과 승장 영규대사는 9월 23일 새벽 금산성 밖 10리 지점에 진을 치고, 정탐 등을 하면서 공격준비를 했다. 고경명 장군에 대하여 참고 눌러온 미안함을 풀 때가 의병군들의 목전에 온 것이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왜군은 그간의 전투에서 6천여 명을 잃고 1만여 명이었다. 성내의 왜군은 조선 군사의 수가 적고 후속 부대가 없는 것을 정탐하고는, 복병을 내어 퇴로를 막은 다음, 23일 아침 모든 정예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정면 공격했다. 조헌 장군은 공격준비 하다가 방어 명령을 내려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의(義)’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 하고 힘껏 싸워 왜군의 세 차례 공격을 모두 물리쳤으나, 온종일의 싸움에 화살이 다 떨어져 더 싸울 수가 없었다. 왜군이 일제공격을 감행해 장막 안으로 돌입하니, 주변 사람들이 조헌에게 피신하라고 말했으나, 조헌은 이를 거절하고 직접 불을 치며 독전을 하다가 아들 조극관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의병과 승병 대다수가 전사하고 일본군 역시 2천여 명의 시체를 옮기는 데 3일이 걸렸다. 왜군이 철수한 다음 날 9월 27일, 살아난 조헌 장군의 소장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700명의 시체들을 모아 금산에 '칠백의총' 이란 무덤을 만들었다. *1300명 중 나머지 600여 명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렇다고 칠백의총의 칠백명이 의병군 전원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조헌 의병군이 700명이다 보니 이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 이렇게 알고 있다. 죽은 자 700명 외에는 운좋게 살아난 후 박정량과 전승업의 통제를 받아 죽은 동지들의 시신을 수습한 후 고향으로 갔을 것이다. 크게 부상당해 있다가 살아남은 영규대사가 고향 갑사 인근까지 겨우 와서 입적하였기에 추정해봤으며, 승병장 영규 대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저서로는 동환봉사(東還封事), 조천일기(朝天日記)연도일기(沿途日記), 중봉집(重峰集)이 있다. *조헌 장군은 관군, 곽재우와 협공하여 고경명 장군이 탈환하지 못하고 죽은 금산을 탈환하여,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영규 승군장과 협공으로 분전하였으나 이또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으나,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 쐐기가 됐다. 의병장 조헌 님의, 의병장 고경명 님에 대한 문경지교(刎頸之交) 의리에 거듭 거듭 탄복하며 삼가 공경의 예를 올립니다.
살아 숨쉬는 역사의 현장에 참으로 숙연해진다 만일 그 자리 내가 있었더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우리의 역사와 정신을 지켜낸 선열에게 부끄러운 참화와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ㅡ바람 박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