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정가(水晶歌)
집을 치면, 정화수(精華水)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平床)의, 갈앉은 뜨락의,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 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올
따름, 그 옆에 순순(順順)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눈 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때마다 일렁여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진실로, 우리가 받들 산신령(山神靈)은 그 어디 있을까마는, 산과 언덕들의 만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水晶)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
* 흥부 부부상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이 문제리
황금 벼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없는 떡방아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 내고
손발 닳은 처지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面)들아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리
그러다 금시
절로 면(面)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本)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
* 한(恨)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前生)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
* 아득하면 되리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 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
* 그대가 내게 보내는 것
못물은 찰랑찰랑
넘칠 듯 하면서 넘치지 않고
햇빛에 무늬를 주다가
별빛 보석도 만들어 낸다
사랑하는 사람아
어쩌면 좋아!
네 눈에 눈물 괴어
흐를 듯하면서 흐르지 않고
혼백만 남은 미루나무 잎사귀를
어지러운 바람을
못 견디게 내게 보내고 있는데! *
* 지는 잎 보면서
초봄에 눈을 떴다가
한여름 뙤약볕에 숨이 차도록
빛나는 기쁨으로 헐떡이던 것이
어느새 황금빛 눈물이 되어
발을 적시누나
나뭇잎은 흙으로 돌아갈 때에야
더욱 경건하고 부끄러워하고
사람들은 적막한 바람속에 서서야
비로소 아름답고 슬픈 것인가
천지가 막막하고
미처 부를 사람이 없음이여!
이제 저 나뭇잎을
우리는 손짓하며 바라볼 수가 없다
그저 숙이는 목고갯짓으로
목숨은 한풀 꺾여야 한다
아, 묵은 노래가 살아나야 한다 *
* 자연 -춘향이 마음 抄
뉘가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 바닷가 산책
어제는
가까운 신수도(神樹島) 근방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오르고 있어
열댓 살 적으로 돌아와
그리 마음 가려워
사랑하는 이여
안으로 홀로 불러 보았고
오늘은
멀리 창선도(昌善島) 쪽
아까운 것 없을 듯 불붙은 저녁놀에
스물몇 살 때의 열기(熱氣)를 다시 얻어
이리 흔들리는 혼을 앗기며
사랑하는 사람아
입가에 뇌어 보았다
사랑은 결국 곱씹어
뒷맛이 끊임없이 우러나게 하는
내 고향 바닷가 산책이여! *
* 박재삼시전집-민음사
* 무제
대구 근교 과수원
가늘고 아득한 가지
사과빛 어리는 햇살 속
아침을 흔들고
기차는 몸살인 듯
시방 한창 열이 오른다
애인이여
멀리 있는 애인이여
이런 때는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 *
* 박재삼시집[천년의 바람]-민음사
* 수양산조(垂楊散調)
궂은 일들은 다 물알로 흘러지이다
강가에서 빌어 본 사람이면 이 좋은 봄날
휘드린 수양버들을 그냥 보아 버릴까
아직도 손끝에는 때가 남아 부끄러운
봄날이 아픈 내 마음 복판을 뻗어
떨리는 가장자리를 볕살 속에 내 놓아.....
이길 수가 없다, 이길 수가 없다
오로지 졸음에는 이길 수가 없다
종일을 수양이 뇌어 강은 좋이 빛나네 *
* 박재삼시전집-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