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줄거리 / 이명자)
세상이 태어난 이래
살아 숨 쉬는 모든 미물들에게 각자의 이야기가 주어지듯 나의 이야기는 강풍을 동반한 폭설과 함께 시작된다. 산천이
몸살을 앓았다. 수십 년 된 고목들이 부러져나갔다. 도처에
날마다 자연재해는 일어났고 급기야 모든 학교들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대 도시에서도 전봇대가 넘어지고
전선줄이 튕겨져 나가 곳곳에 암흑을 불러왔고 처치 곤란한 눈들은 쌓여만 갔다. 신기록을 갱신한 무서운
폭설에 나는 매료되어 나의 한계를 뛰어넘고야 말았다. 내가 눈을 뜬 건 어디선가
계속 들려오는 환청 때문이었다. "재민아, 재민아. 숨을 크게 내쉬어라. 너는
아직 그럴 자격이 있다." 나의 온 몸이 감미로움에
휩싸인다. 그러나 함부로 눈을 뜨고 싶지 않다. 천천히, 천천히 일생동안 그래왔듯이 치밀하고 은밀하고 알듯 모를 듯…… 나의
가느다란 눈 속으로 비친 아버지. 아버지의 얼굴이 우중충하다. 나 때문일까? 갑자기 일어나는 의문부호가 무섭다. 나는 도로 눈을 감아버린다. 조금이라도 내게 불리하면 일어나는 현상이다. 세상을 밖을 주변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보지 않아도 굴러가는 세상의
간섭이 나를 독촉한다. 미물에게도 있는 이야기를 어디 한번 주절거려 보라고 말이지. 그래, 좋다. 그동안
아무도 내게 귀 기울여주지 않았는데 그러니 기회란 붙잡는 거다. 옛날 옛날에 뭐 옛날이라고 해봐야 내
일생에 비하면 엊그제 이지만, 우선 나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어린 시절: 여자처럼 길게 늘어뜨린 곱슬곱슬한 노랑머리 파란 하늘처럼 파란 눈동자 연약한 아이처럼 핏기 없는 흰 살결을
지닌 남자가 나를 매료시켰다. 그의 가느다란 검지와 엄지사이에 끼어 있는 담배 그의 입이 허공으로 만들어내는
동그란 연기 처음 본 것처럼 신기했다. 나는 그때 열 살이었고 내 귀와 등에는 버거운 의무가 시시때때로
찰나마다 얹어져서 열 살의 삶이란 게 무엇인지 안개 속이었다. 그 남자는 더러운 공원의 한쪽 구석에
서서 무념무상의 모습이었다. 나의 눈길에 그가 말을 걸었다. “야-쪼그만 녀석 기웃거리지 마라. 난 알아 네가 노리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이야. 어린주제에 뭔가 특별한 것을
찾아 헤맨다는 표정이야. 그렇지? 어디 보자. 세상에 특별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까
말까.” 나무가 우거진 공원
안쪽 동서남북 이 미터거리에 단둘이 맞닥뜨리자 친근한 미소를 띠우고서 말이지. 공원은 아버지의 지적대로였다. 공원은 더러웠고 공원을
떠도는 공기도 더러웠다. 공원을 청소하는 청소부의 이맛살이 결코 펴지지 않는 곳이었고 아버지의 엄명으로
나는 공원을 들락날락 할 수 없었다. “가르쳐 주세요. 알고 싶어요.” 세상에 특별한 것이
있다는데 열 살쯤 된 아이들은 호기심이 미나리처럼(습한 연못가 잡초들이 자라는 습지 등등 이상한 곳에서도
잘도 자라나니까) 피어올라 알면서 모르면서 열 살 또래들이 지닐 수 있는 호기심 만발한 기질에 곧바로
빠져버리기 쉬웠을 거고 단언하건데(훗날 변명의 여지로 삼았지만) 나는
파란 눈의 그 남자에게 첫 눈에 꽂혀버렸다. 나는 세상속의 특별한(?) 것을 도시의 뒷골목에서 배웠다. 도시의 거리는 암울한
인간들이 넘쳐나는 곳 무언가에 찌들어 삶을 포기한 사람들 무언가에 중독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군상들이 세계의 도시라 일컫는 토론토의 한 거리에서
배회하는 곳, 쉘번과 퀸 스트리트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그 거리는
내 아버지의 보금자리 겸 황금을 거둬들이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일류’ 라는 낱말을 가장 신봉했다.
일류라는 것은 상류사회(?)이고 로-얄의 삶을
영위하는 바로미터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는 바로 그곳 찌들어 냄새 풀풀
풍기는 밑바닥 인생들의 혹은 오가다 들락거리는 평민들의 가난한 주머니속의 황금 같은 돈을 노리는 곳이었다. 그
들. 온갖 것을 포기한 사람들. 자신들이 무엇에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삶이 아주 간단한 사람들. 그들의
희망은 오로지 취해있는 것(복잡다단한 희망이든 이룰 수없는 꿈이든 알 콜이든 마약이든 사랑이든 알게
뭐야 무엇이든.), 삶이 간단한 사람들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했다. 정부의
보조가 나오는 그날로 그들의 수표는 아버지의 가게에서 영리를 위해 매겨진 비싼 값들을 무시하고 죄다 사라졌다. 아버지는
손 놓고 코푸는 식으로 돈을 벌어들였다. 그들이 행여 배고픈 손을 내밀어 아버지의 자존심을 건드릴까봐
아버지는 그들의 눈을 외면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들처럼 굴었다. 무언가에 중독된 사람처럼
가게는 허술했고 아버지의 차림새도 거리에 넘쳐나는 중독자들처럼 허술했다. 그러나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일변했다. 아버지는 밤마다 정성들여 자신의 몸을 닦았다. 그래서 밤마다 아버지의 몸은 향긋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레퍼토리
또한 여지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의 미래를 ‘일류’로 만들어 놓기 위해 하는 노심초사. 이해하지도 못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가능한 것은? 있을 리 있나 아니 있었다.
그 거리에서 나는 담배와 마리화나와 코케인이라는 신세계를 만났으니까…… 나의 온갖 이유와 거짓말의
시초가 때맞춰 열한 살이 되었고 내가 홀딱 빠져버린 나의 신세계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가 지향하는 ‘일류’를 향하여 보내어진 사립학교에서 나는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믿어
달라. 나는 공부도 열심이었고 치밀하고 은밀하게 행하는 마약투여법도 사립학교의 간판 얼굴 살쾡이라는
아주 적절한 별명을 지닌 선생에게도 한번 들킨 적 없이 무사히 육년을 마치고 대망의 일류대학인(하버드대학은
아니지만.) 토론토대학에 합격통지서를 받아 들었으니까 말이지. 그러나
너무 빨리 빨리 앞서가지 말자. 육년이란 긴 세월을 견디어온 나의 이력을 좀 뽐내고 가자. 육년이란 긴 세월(중 고등학창시절): 나는 아버지가 지향하는 ‘일류’의 학생이 되기 위하여!!! 첫발을 내디뎌 여섯
시간을 아버지가 운전해가는 차속에 있었다. “잘 들어라. 너는 이제 내가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것이다. 인생은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밑 바닥을 기어서는 안 된다.
인생의 가치는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너에게 물심 양 면으로 헌신하고 있는 것이다. 내 기대를 어기지
말아다오. 나의 기대는 네가 앞으로 ‘일류’가 되는 것뿐이다. 매진하여라. 너는 꼭 하버드대학에 들어가야 한다. 시간은 충분하고 네 뒤에는 내가 버티고 있으니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시골산천에 해방의
종소리가 만연한데…… 아버지가 원하는 심오한 뜻은 나는 전혀 알아듣지도 못했다. 내 몸속에 대기하고 있는 중독성이 딴 따라 딴 춤을 치며 발광을 해대니 내 입가에 비실비실 일어나는 행복한
미소를 숨겨야 했으니까 말이지. 만사에 조심조심 해서 나쁠 건 없잖아.
여기 한 녀석은 조심성이 전혀 제로였다. 그리하여…… 짐을 꾸리는 케빈을
나는 싸늘하게 지켜보고 서있었다. 중독자들의(?) 정해진
수순을 케빈은 일치감치 밝고야 말았다. 나는 항시 외모에 신경을 쏟았다. 아침세수는 정성스레 했고 첫 수업이 시작하기 전 나는 내 눈이 촉촉이 빛을 발하도록 안약을 넣었다. 훗날 생각해 보니 치 떨리도록 영악한 짓을 오랫동안 해냈던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쪽 누구의 DNA를 더 많이 내 몸속에 지니고 있어서일까? 아니
일체의 의문은 삼가야겠다. 한 인생의 생애에 허리가 휘도록 쌓여가는 역사를 좀 더 지켜보아야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인데. 짐을
싸기 하루 전날 케빈은 내 주의를 무시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행동은 의젓하게 외모는 깔끔하게 눈은 초롱초롱
빛나도록(한창 빛나는 눈을 지니고 있어야 할 시기니까.) 수시로
참견했건만 케빈은 자신이 숨기고 있는 돈이 바닥나기 전 거창한 끝을 한번 맛보고 싶어 했다. 거창한 끝. 그 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중독자들. 케빈은 들떠 있었고 요령도
없었다. 혼자 몰래 어디서 얼마큼 집어 삼켰는지 초점 없는 눈을 희번덕거리고 입에는 게거품을 질질 흘리며 ‘나 죽는다.’ 고 소리 내지르고 그런 난리는 이 학교가 생긴 이래
처음이었다는 후문이었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고 케빈은 교사들과 학교가 내세우는 교칙에 의해 단칼에 잘려버렸다. 가을에 신입생으로 학기가 시작하여 꼭 반나절 밖에 안 된 것 같은 입학하여 찬란한 봄이 오는 소리도 듣지 못한
케빈은 변명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씽씽 불어대는 겨울 찬바람의 등에 떠밀려 학교에서 쫓겨났다. 눈은
떴지만 아직 온전한 정신으로 되돌아오지 못한 케빈을 말이지. 그리고...머나먼
나라에서 유학 온 이반 공화국을 세워 은밀하고 치밀하게 관리하여 어리석은 총탄에 맞아 쓰러진 케빈처럼 되지 말자고 으스대던 한국계 황태자, 나의 일 프로를 믿어주던 룸메이트 다니엘, 한 순간이었지만 사랑을
느꼈던 불공평한 삶을 짊어지고 사는 나의 첫사랑 마가렛…… 비록 번개 같은 찰나였지만 달콤하게
꾸어보았던 세상이 환호하는 작가였던 불경스런 나의 꿈…… 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나는 케빈을 본보기삼아 더욱 열심히 더욱 치밀하게 육년이란 긴긴 세월을 이겨냈던 것이다. 그리고 받아든 일류대학의 합격증. 나르는 새도 부럽지 않았다. ‘장하기도 하셔.’ 삐딱한 눈이 있어 그렇게 비웃는다 해도 나는
다시 대도시로 돌아온 흥분에 휩싸여 반박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대학은 어른의 반열에 당당히 입문한
연령대라 자유는(?) 더 많이 대학가에 흐르고 있었다. 당당한 연령대: 대학은 내가 선택했고 새로운 인물들을 만났고 가을 하늘은 눈부시게 파랬고 토론토의 다운타운에 자리 잡고 있고
고색창연했다. 때를 같이하여 가장 훌륭한 일은 아버지의 이사였다. 전원생활을
하고 싶은 이유로 아버지는 한 시간여나 먼 곳으로 집과 비즈니스를 옮겼다. 나는 육년 동안의 사립학교를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뭐 의식적으로 지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미 지워져 얼룩만 남아
있을 게 빤하다고 말하는 게 타당하다. 어쨌거나 과거는 자루 속에 담아 주둥이를 꽉 묶어버리고 나는
대학이 주는 신선함에 매료되었다. 신선함은 대강당에서
받은 충격이었다. 신입생들의 오리엔테이션을 하던 날 강당을 메운 신입생들의 희망에 들뜬 호흡들 반짝거리는
눈동자들 오물에 전혀 물들어 보이지 않는 당당한 태도들 그리고 튼튼한 손과 발 꼿꼿한 목과 강직해 보이는 가슴들 내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신선했다. 나도 그들 속에 끼어있었다. 그들의 당당함이 내게도 전염되었다. 무대에 올라 대학에 대한 여러 가지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강사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고 신입생들이 내뿜는
한 사람 한사람마다 각자의 미래를 향한 믿음의 위력이 대강당에 출렁거렸다. 자신들이 갈구하는 희망에
찬 미래가 환히 내다보이는 것처럼 그들은 환호했다. 모두들 두 손바닥으로 짝 짝짝 손뼉을 쳤고 모두가
두 눈동자로 바로 내일이라도 성적의 적수 출세의 적수 모르긴 해도 사랑의 적수가 될지도 모를 동기생들에게 호감의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거기서 한 눈빛을 발견했다. “피터 너 피터 맞지?” 고사리 손으로 나의
등을 토닥거려주던 우리 서로 어린 시절의 피터. 피터가 내 뿜는 잔잔한 미소에 현혹되었고 피터가 지닌
막강한 사치가 부러웠고, 나는 뱁새처럼 굴었고…… 찬란한
봄이 오기도 전에 나는 대학에서 쫓겨났고. 그리고, 그리고…… 약물로 살아가는 산드라를
만났고 죽음이 우리 둘을 갈라놓았고 섹스중독자인 마녀를 만나 농락당했고, 그러나 나는 생명을 지닌 미물이었다. 시간이 세상을 관통하여
지나갔다. 나는 시간과 함께 지나갔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혼란스러운 관계에서 어릴 적부터 알쏭달쏭 삶이었던 내가 개들을 아름답게 가꾸는 구루머가 되었다. 구루머가 되어가는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는 새로운 마음으로 나를 격려하고 응원했다. “이 아이도 피해자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답니다.” 아버지가 신처럼 느껴진
찰나였다. “너는 참 대단해. 그 힘든 중독에서 거의 다 빠져 나왔잖니. 조금만 더 힘내자.” 어머니의 안심어린 속삭임이
내게 용기를 북돋았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신들이
있어 마침내 내가 쓰잘데기 없는 하등의 가치도 없는 꼭두각시도 하지 않는 그런 짓을 일생동안 삼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를 내동댕이쳐 버렸는지…… 나는 1004의 번호표를 달고 감옥에 갇혀있다. 죄명은; 동물 학대 죄 동물 살인죄 패악 죄(살인현장을 목격한 자신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죽어가는 데도 쳐다만 본 죄.) 마약 소지죄 마약 흡입 죄 자신의 분노의(이유가 전혀 합당치 않는.) 표출을 죄 없는 세상에 살포한 죄 죄
죄…… 무수한 죄. 두 팔 두발이 감옥
침대 위에 묶인 체다. 발작하기 직전의 혹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숨 막힌 고요 속…… 내 머릿속에서 뚜렷한 기억이 기어 나왔다. 한 팔은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고 다른 한 팔은 나를 향해 온갖 것이 난무한 바디언어로 무언가를 말하며 쓰러져가던 아버지의 일그러진 얼굴…… 아-악 저건 또 뭐야. 피다. 피야.
난 죽기 싫어 죽기
싫어…… 나는 헉 숨이 막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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