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증]바다로 사라진 우리고대사
고조선 평양(古平壤)과 고려때 서경의 위치를 밝힌 명나라 고지도
《대명구변만국인적노정전도(大明九邊萬國人跡路程全圖)》
개요(槪要)
2012/9/29일자 다수 일간지(조선일보)등의 보도에 의하면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은 9월27일(현지 시각)
유엔 총회 일반연설에서 "일본이 댜오위다오를 도둑질했다"고 비난했다.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가 전날 연설에서 "영토 문제에 타협은 없다"고 한 발언에 대해 중국 측이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양 외교부장은 "댜오위다오는 중국의 고유 영토로, 역사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명확한 증거가 있다"며 "
(일본의 댜오위다오 국유화는) 중국이 가진 고유한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국제 질서와 유엔헌장에
대한 엄중한 도전"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 말기에 댜오위다오를 도둑질했다.
역사적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같이 중국은 자신들의 고유영토에 대해서 역사적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엔총회의 의사
당에서 공언한것이다.그렇다면 다음에 소개하는 대명구변만국인적노정전도(大明九邊萬國人跡路程全圖)
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도 검토한 후 그들이 추진하고있는 동북공정이 어떻게 잘못되고 있는지도 밝혀야
할것이다.
과연 한사군중의 낙랑군이 한반도의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이 옳은 주장이었던가?
또는 산해관 인근의 갈석산에서 멈춰야 할 만리장성은 무슨 목적으로 만주벌판으로 자꾸만 동진하고 있는
것인가.
대명구변만국인적노정전도(大明九邊萬國人跡路程全圖)는 그동안 미궁에 빠져있던 한국의 고대사를 복원
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자료이다.
이 지도에는 그동안 발해의 윤몰로 잃어버렸던 연.진.한나라와 국경선을 가르는 갈석산과 대요수(패수.열수)
등의 흔적이 그려져 있고, 당시 조선 강역이었던 (현 발해바다) 내륙지역의 모습이 윤몰전의 모습으로 고스
란이 지도에 나타나 있다.
한 무제가 침략하여 위만조선의 평양을 낙랑군으로 삼았고,당나라가 고구려를 치고 안동도호부를 두었으며,
원나라가 동령로총관부를 두었던 평양이 바다가운데 섬으로 그려져 있는것이다.
이지도에는 우측 바다에 고평양과 후 서경.원의 동령로와 당의 안동도호부, 원 총관부등이 세개로 나누
어진 섬에 표시되어있다.
무슨사연이 있었길래 평양을 산동반도 북동쪽의 섬으로 표시하고 있는가.
그 진실을 구명하면 고조선의 실체가 밝혀진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평양을 서경으로 만들었던 평양은 한반도의 대동강 평양이 아니었다.
그곳은 산동반도 등주의 바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현 장도였다.
이곳은 삼신산이 있어 진시황이 불사약을 구하려다 실패하였던 원명(元名)이 낙랑조선이었고,
기자가 그를 따르는 종자 5000여명을 대동하고 동쪽으로 바다를 건넜던 조선이 바로 이곳이었다.
공자는 세상에서 도가 황폐하자 뗏목을 타고라도 건너고싶어했던 군자국도 바로 이곳이었다.
따라서 그동안 실종되었던 한국 고대사의 복원은 이곳에 중심을 두고 풀어가야 할것이다.
지도를 세분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이곳은 한국의 많은 사학자들이 고조선의 수도위치로 강력하게 짐작하고 있던 요동반도의 남단으로 연결된
장백산맥(천산산맥)의 말단에 흩어진 현 묘도열도 중의 장도였다.현재 이곳의 행정구역은 산동성 연태시
장도현(山東省煙台市長島縣)이다.
지도의 전체모습
지도자료제공:향고도 분석연구:장동균
이지도는 제작근거를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산해경(山海經)에 두고있다고 하였다.
[주]1.2로서 보충설명한다. 강희2년(1663)고소왕군보(姑蘇王君甫)발행
한나라때 국경을 이루었던 패수(대요수)가 산해관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다 갈석을 거쳐 남동쪽으로
흘러 등주와 장도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중요한 촛점은 조선과 국경을 이루던 갈석의 위치가 산해관 남쪽의 패수(대요수)가운데 있다는점이고,
산해관의 동쪽은 당시 바다가 아니었고,내륙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내륙안에 현재 장도라는 섬도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은 지진 이전에 한덩이었던 진번조선과 낙랑조선은
지진으로 발해바다가 생성되었을때 각각 분리되었고,
후에 진번조선은 바다로 윤몰되어 발해북부의 요동만이 생겼다.
조(朝).한(漢)의 초기국경을 가르는 패수의 경로도
한나라시대 조선과 국경을 이루던 패수의 경로다.산해관 동쪽으로 흐르는 열수(대요수)와 난하의 용선수.
그리고 천진을 거쳐나온 습여수등이 낙정(樂亭)에서 합류되어 붉은색으로 표시한 열수가 되어 동쪽으로
흘러 왕험성(장도) 남쪽을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것이 초창기 패수의 경로다.그러나 이후로 패수의 경로는 지각의 변동으로 여러차례 방향을 바꾸게
된다.
사문도(沙門島)는 《고려도경》에서 송나라 선화봉사단의 경유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건국지를 등.래.빈.체주에서 서로 마주 볼수있는곳이라고 한것이다.이곳이 바로 사문도다.
위 지도에서 산해관 아랫쪽의 주기중에 "사문도(沙門島)는 송나라 선화견사단의 경유지"라는 대목을 주시
해야 한다.《고려도경》성읍편에서는 고려 초기건국지를 등.래.빈.체주에서 서로 마주 보이는곳 이라고만
밝혔고,사문도(沙門島)라는 구체적인 지명을 직접 거론한적은 없었다.
그러나 보통 지도에서 사문도의 위치는 등주 봉래각의 북쪽에 있어야 하는것이 정상이지만 이지도에서는
서북쪽으로 많이 벗어나 그려져 있는점이 혼란스러웠는데 이를 주기로 설명하기를 사문도는 송나라의
선화봉사단의 경유지라는 설명으로 이곳이 고려의 최초 건국지임을 확인할 수 있는것이다.
그리고 <국성>에서 설명하길 한반도에 있는 평양은 당나라 말에 누대에 걸친 전란을 피하기 위해서 동쪽
으로 옮겨간 평양이지 옛날 평양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http://blog.daum.net/gusan0579/8016129
[국성(國城)]
高麗。自唐以前。蓋居平壤。本漢武帝所置樂浪郡。而唐高宗所建都護府也。以唐志考之。平壤城乃在鴨綠
水東南。唐末。高麗君長懲累世兵革之難。稍徙而東。今王城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矣。其城
周圍六十里。山形繚繞。雜以沙礫。隨其地形而築之。外無濠壍。不施女墻。列太上御名延屋。如廊廡狀。
頗類敵樓。雖施兵仗。以備不虞。而因山之勢。非盡堅高。至其低處。則不能受敵。萬一有警。信知其不足
守也。
고려는, 당 나라 이전에는 대개 평양(平壤)에 있었으니, 본래 한 무제(漢武帝)가 설치했던 낙랑군(樂浪郡)
이며, 당 고종(唐高宗)이 세운 도호부(都護府)이다. 《당지(唐志)》를 상고하여 보면 ‘평양성은 바로 압록강
동남쪽에 있다’ 하였는데, 당 나라 말엽에 고려의 군장(君長)들이 여러 대를 겪은 전란을 경계하여 점점
동쪽으로 옮겨간곳이다. 지금 왕성(王城)은 압록강의 동남쪽 천여 리에 있으니, 옛 평양이 아니다.
그러나 밖에 호참(濠壍)과 여장(女墻 성가퀴)을 만들지 않았으며, 줄지어 잇닿은 집은 행랑채와 같은 형상
인데 자못 적루(敵樓)와 비슷하다. 비록 병장(兵仗)을 설치하여 뜻밖의 변을 대비하고 있으나, 산의 형세
대로 따랐기 때문에 전체가 견고하거나 높게 되지 않았고, 그 중 낮은 곳에 있어서는 적을 막아낼 수 없었
으니, 만일 위급한 일이 있을 때는 지켜내지 못할 것을 알 수 있다....하략
지도:거란지리지도 등주.래주.빈주에서 마주보이는 위치는 사문도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三
城邑 封境
高麗。南隔遼海。西距遼水。北接契丹舊地。東距大金。又與日本,流求,聃羅,黑水毛人等國。犬牙相制。唯新羅,
百濟。不能自固其圉。爲麗人所幷。今羅州,廣州道是也。其國在京師之東北。自燕山道。陸走渡遼。而東之其境。
凡三千七百九十里。若海道則河北,京東,淮南,兩浙,廣南,福建皆可往。今所建國。正與登萊濱棣相望
《주서》권49 열전41 이역(異域)고려
高麗者,其先出於夫余。自言始祖曰朱蒙,河伯女感日影所孕也。朱蒙長而有材略,夫餘人惡而逐之。土於紇斗骨城,
自號曰高句麗,仍以高為氏。其孫莫來漸盛,擊夫余而臣之。莫來裔孫璉,始通使於後魏。其地,東至新羅,西渡遼水
二千里,南接百濟,北鄰靺鞨千餘里。治平壤城。其城,東西六里,南臨浿水。城內唯積倉儲器備,寇賊至日,方入固守。
王則別為宅於其側,不常居之。其外有國內城及漢城,亦別都也,復有遼東、玄菟等數十城,皆置官司,以相統攝。
其地, 東至<新羅>, 西渡<遼水>二千里, 南接<百濟>, 北隣<靺鞨>千餘里. 治<平壤城>. 其城, 東西六里, 南臨<浿水>.
城內唯積倉儲器備, 寇賊至日, 方入固守. 王則別爲宅於其側, 不常居之. 其外有<國內城>及<漢城>, 亦別都也,
復有<遼東>·<玄토 >等數十城, 皆置官司, 以相統攝.
그 땅은 동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 '요수'를 건너 이천리이며, 남쪽으로 '백제'에 접하며, 북쪽
으로 천여리에 '말갈'과 이웃한다. '평양성'에서 다스린다. 그 성은 동서로 6리이고, 남쪽은 '패수'에 임한다.
성내에는 오직 창고에 그릇을 쌓아두고 대비하는데, 외적이 침략하면, 사방에서 들어와 오로지 수비한다.
왕은 그 곁에 집을 나누어 짓는데, 항상 이에 거처하지는 않는다. 그 외에 '국내성'과 '한성'이 있다.
즉 다른 도읍이다. 다시 '요동', '현토'등 수십성이 있는데, 모두 관리를 두고, 서로 관리한다.
《삼국사기》권37 잡지6의 북한본에는 아래와 같은 사서들을 인용하여 옛평양을 설명하고 있는데
<당서>에 이르기를, "평양성은 한의 낙랑군이다. 산을 따라 애둘러 성곽을 만들고, 남쪽으로 패수에 임하
였다"고 하였으며, 또 지리지에는 "산동성 등주 동북쪽 바다로 가서 남쪽으로 해안지방을 끼고 패강 어귀
초도를 지나면 신라 서북쪽이 된다" 하였고 또 수양제의 동정조서에는 "창해도군이 주로 1000리에 높은
높은돛은 번개 달리듯 하고 큰 함정은 구름 가듯 하여 패강을 가로 막고 멀리 평양으로 나간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지금의 대동강이 패수임이 분명하며, 서경 평양임도 알수 있다.
<삼국사기><권 37>잡지 6 지리 4
按『漢書』: "<樂浪郡>屬縣, 有<不而>," 又<?章>二年, 英國公<李勣>奉勅, 以<高句麗>諸城, 置都督府及州縣. 『目錄』
云: "<鴨綠>以北已降城十一, 其一<國內城>, 從<平壤>至此十七驛." 則此城亦在北朝境內, 但不知其何所耳. 都<國內>,
歷四百二十五年, <長壽王>十五年, 移都<平壤>. 歷一百五十六年, <平原王>二十八年, 移都<長安城>. 歷八十三年,
<寶藏王>二十七年而滅.[古人記錄, 自始祖<朱蒙>, 王{至}?<寶藏王>, 歷年丁寧纖悉若此, 而或云: "<故國原王>十三年,
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 不可知其然否.] <平壤城>似今西京, 而<浿水>則<大同江>是也. 何以
知之?
『唐書』云: "<平壤城>亦謂<長安>." 而古記云: "自<平壤>移<長安>." 則二城同異遠近, 則不可知矣. < 高句麗>始居
<中國>北地, 則漸東遷于<浿水>之側. <渤海>人<武藝>曰: "昔<高麗>盛時, 士三十萬, 抗<唐>爲敵." 則可謂地勝而兵强.
至于季末, 君臣昏虐失道, 大<唐>再出師, < 新羅>援肋{助}?, 討平之. 其地多入<渤海>·<靺鞨>, <新羅>亦得其南境,
以置<漢>·<朔>·<溟>三州及其郡縣, 以備九州焉.
李丙燾.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書』.
이 지도에서 안락(安樂)을 사문도로 추정하여 오른쪽 바다에 분산되어있는 고평양과 동령,안동도호부와
동령로총관부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위의 지도설명에서 산해관 아래쪽에 사문도는
송나라 선화봉사단의 경유지라는 주기를 근거로 한것이다.모든 지도에서 사문도는 안락위치에 있는 지명
이다.
우측에 세개의 섬으로 분리된 옛 고구려의 평양은 후에 서경으로 개칭되었다고 하고,크기가 다른 두개의
섬에는 당나라때 세워진 안동도호부와 원나라때 세워진 동령로총관부가 표시되어있다.조선국의 설명은
표주로서 길게 연결되어있다.성을 경계로 북쪽은 여진이고 남쪽은 조선이란 표기를 볼 수 있다
《요동지(遼東志)》에 의하면 명의 요동도사의 관할하에 모두 25위(衛)외에 요양과 안락(安樂) 등
자재주(自在州) 2주(州)를 두었는데 명 영락7년(1409) 조선 태종9년에 사문도(沙門島)로 부르던 현 장도
를 안락주로 개명하였다.
자재주란 지금의 자치주를 뜻한듯하다. 신한의 왕망은 낙랑조선을 낙선(樂鮮)으로 고쳐 불렀고,
명 성조(成祖)는 안락(安樂)으로 불러 낙랑이었던 지명을 락(樂)자를 살려 계승시킨 셈이다.
《독사방여기요》<산동1>에는 안락주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있다.
동쪽으로 바다에 의지하고 있는데 그 바다는 등.래주를 남쪽으로 안동소계와 접하고 북쪽둘래로 조선의
경계인 요동과 접한다.또 서쪽으로는 제남부 빈주 동북쪽에 이르고,북쪽으로는 직활인 반산현계에 접한다.
거리는 약 1000여리다.남쪽으로는 회지역과 떨어져있다.
三万卫又辽海卫及安乐州,俱在郭内。羁縻属夷附见
东据海,*海,自登、莱以南,接南直安东所界;环绕而北,接辽东、朝鲜之境。又西至济南府滨州东北,
而北接直隶盐山县界,凡千余里。南距淮,
지도에 표주된 내용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朝鮮國]
朝鮮國, 地在遼東東海, 三面濱海, 此隣女直。原箕子所封之國。周漢以後, 始自爲聲敎, 建號高麗。漢初無人, 衛滿據
具(其)地。漢武帝定朝鮮爲四郡。唐征高麗, 置安東都護府。五代時, 王建闢地益廣, 倂新羅、百洛(濟)爲其地。有八
道, 分統府州縣。東西二千里, 南北四千里。□□董善瀆(讀)書。明朝洪成(武)二年, 其國長蜀(顓)卽位, 賜金卽(印)誥命
高麗國王。其後苻?卽李成住(桂)代位, 請段(更)國號爲朝鮮。前朝朝貢不蚤。
묘도열도가 생성되기전의 안락(장도)은 서경에서 말하는 동표(東表)지역이었다.그후 묘도열도는 지진으로
인하여 16개의 섬으로 분화된다(중국고금지명대사전).
지도에서 설명하는 표주(標注)에는 조선국은 요동에 있다고 하고 기자가 주나라로 부터 봉직을 받은 곳이며,
위만과 한나라의 4군시대를 거쳐 당나라의 안동도호부도 모두 이곳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별도로 표주한 "都護府元總管府(도호부 원 총관부)"란 당나라때 설치한 안동도호부는 원나라때
동령로통관부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이 지역이 내륙이 아니고 섬이었다는 사실은 대동강 평양성을 부정하는 대목이다.
그후 오대(五代)시에 왕건이 신라.백제지역을 통합하여 동서 2천리.남북 4천리로 영토를 확장하였다고
하였다.그리고 섬에 있던 옛 평양을 후에 서경으로 바꾸었다는 표주와 원나라때 동령로도 이곳이였음을
밝히고 있는것이다.
한편 지도에서 평양의 동북쪽으로 표시된 선비산은 한때 모용외가 거점을 삼았다 제기한 여순의 철산으로
추정되지만 《후한서 동이열전》서(序)와《동사강목》에 의하면 백두산의 맥으로 곤륜의 별지라고 하였다.
후한때 동호부락이 그 아래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산 이름을 선비산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산동통지》의 지도에는 성경(심양)에서 요동반도의 천산산맥으로 이어져 여순을 거쳐 장도까지 이어지는
산맥을 장백산맥으로 기록하고 있다.따라서 장백산이나 태백산맥등은 이곳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이렇게 이어졌던 장백산맥은 지진으로 윤몰되어 묘됴열도를 만들었다.
《후한서》<동이열전>서(序)
東方 有古國 名曰東夷 星分箕尾 地接鮮白
동쪽에 오래된 나라가 있으니 동이(東夷)라 부른다. 별자리로는 기성(箕星)과 미성(尾星) 방향(동북방)이다.
땅은 선백(鮮卑선비)에 접해 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유리명왕조
(유리명왕)十一年 夏四月 王謂群臣曰 鮮卑恃險 不我和親 利則出抄 不利則人守 爲國之患 若有人能折此者
我將重賞之 扶芬奴進曰 鮮卑險固之國 人勇而愚 難以力鬪 易以謀屈 王曰 然則爲之奈何 答曰 宜使人反間入
彼 僞設我國小而兵弱 怯而難動 則鮮卑必易我 不爲之備 臣俟其隙 率精兵從間路 依山林以望其城 王使以羸
兵 出其城南 彼必空城而遠追之 臣以精兵 走入其城 王親率勇騎挾擊之 則可克矣 王從之 鮮卑果開門出兵追
之 扶芬奴將兵走入其城 鮮卑望之 大驚還奔 扶芬奴當關拒戰 斬殺甚多 王擧旗鳴鼓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
力屈 降爲屬國 王念扶芬奴功 賞以食邑 辭曰 此王之德也 臣何功焉 遂不受 王乃賜黃金三十斤-良馬一十匹
11년 여름 4월,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선비가 자기네 땅의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려
하지 않으며, 정세가 유리하면 나와서 약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수비를 하니, 나라의 걱정거리로다.
만약 이들을 제거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장차 큰 상을 주겠노라." 부분노가 앞으로 나와 "선비는 지세가
험준하며, 사람들이 용감하고 우직하여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꾀로써 그들을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했다.
"거짓 간첩을 만들어 그들에게 보내어 거짓말을 하되,'우리 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므로 겁이 나서 움직
이지 못한다'고 하면, 선비가 반드시 우리를 얕잡아 보고 수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 틈을 이용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잇길로 들어가 산림 속에 숨어서 그 성을 노리고 있겠습니다.
이 때 왕께서 약간의 군사를 적의 성 남쪽으로 출동시킨다면, 적은 틀림없이 성을 비우고 먼 곳까지 추격
해올 것입니다. 그리되면 저는 정병을 거느리고 그들의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용감한 기병을 거느
리고 그들을 양쪽에서 협공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이 의견을 따랐다.
선비는 과연 성문을 열고 군사를 출동시켜 추격해왔다.
이 때, 부분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으로 달려 들어가니, 선비가 이것을 보고 크게 놀래어 다시 성안으로
달려 들어 왔다. 부분노는 성문에서 싸워 그들을 수없이 목베어 죽였다. 그 때, 왕이 깃발을 들고 북을
올리며 전진하였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여, 대책이 없고 힘이 다하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이 부분노의 공로를 생각하여, 상으로 식읍을 주었다. 부분노는 사양하며 "이는 왕의 덕이 훌륭한 결과
입니다. 저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채, 상을 받지 않았다.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열
필을 주었다.
《동사강목》에 기록된 선비산은 곤륜산의 별지이고 백두산의 줄기이다.
이곳에서 후한시 동호부락이 발흥하였기 때문에 선비산으로 불렀다고 하였다.
「西晉末年,居於北方的鮮卑族控制遼東. 307年 鮮卑族首領慕容외...此時 旅順被稱爲“還(沓)渚”或“還(沓)津”。“渚”在古代是“水中的小塊陸地”的意思。404年高句麗占據後燕國土,統治整個遼東半島.此後 2.3百年,
遼東境內各民族相互呑倂,成爲多民族雜居之地.」
「서진말년 북방의 선비족이 요동을 공략하였을때, 즉 307년 모용외...이때 여순을 환저 또는 답저,환진
또는 답진으로 불렀는데 '저'란 옛날에 물가운데 육지가 생겨난(삼각주=필자주)를 뜻한다.
404년 고구려가 점거한 후 연나라국토(공손씨=필자주가 되었고, 이 후 2,3백년간은 요동내에 있던 민족
상호간에 탄병하여 다민족들의 잡거가 되었다.」
*지도에서의 선비산(鮮卑山)위치는 발해해협의 위치를 정확하게 확정하는 상징이 되었다.
만약 일명 장군산(將軍山)이라고도 부르던 이 산이 없었다면 바다에 표시된 고평양의 위치등에 대해서
반론자들이 이견을 제기할 수 도 있었다.그러나 선비산은 요서나 대흥안령산 외에 요동에서는 생소한
산으로서 한반도주변에선 볼 수 없는 산이다.
《속산동고고록》중<산동총도> (청)섭규수작(葉圭綏作)1850
묘됴열도의 여순 남쪽으로 연결되는 산맥을 성경(심양)으로 부터 내려온 산맥이라고 하였다(山脈自盛京長
白山來).이러한 표주는 《삼국유사》에서 신시의 발상지가 태백산이란 기록을 증명해준다.
태백과 장백은 같은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그러니까 현재의 한반도 백두산은 장백산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연태시의 지세는 기복이 완만하고 얕은 산과 구릉이 대부분을 이루며 여러 갈래의 하천이 종횡으로 교차
하고 있다. 총면적에서 산지가 36.62%, 구릉이 39.7%, 평원이 20.78%이며 나머지는 저수지나 하천이
차지하고 있다. 시내를 통과하는 산맥은 白頭山(중국에서는 長白山이라 부름)에서 이어진 것이다.
백두산의 산맥이 요동반도 남쪽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달리다가 동쪽으로 꺾어지는 곳에, 동서로 大澤山,
羅山, 艾山, 牙山, 昆崙山을 형성하고 있으며, 연태시가지는 이 산들을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해발 500M가 넘는 봉우리가 78개나 되는 가운데 가장 높은 곤륜산의 주봉인 泰礴頂은 해발 923M의 위용
을 자랑하고 있다. (출전:연태시소개)
《대명일통지》<외이>조선편 권89
*고조선의 평양을 한반도지도에서 볼 수 없는 이유는 한반도의 평양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고 평양을
뽑아버리자 동쪽으로 옮겨간곳이었기 때문이다.
지도출전:만주원류고를 사랑하는 모임 장진근
*지도에 보이는 낙랑조선에 대한《전한서(前漢書)》 28 권 하 《지리지(地理志)》는 기자가 건너간
조선을 사문도에 있었던 낙랑조선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백성들에게 예절의식과 농사짓고 누에치고 베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낙랑조선(樂浪朝鮮)의 백성들에게는 8조목의 범금(犯禁)이 있어,5) 사람을 죽인 사람은 즉시 목숨으로서
죄를 보상을 하고, 남에게 상해를 입힌 사람은 곡식으로서 죄를 보상하고, 남의 물건을 몰래 훔친 사람은,
남자의 경우 바로 도적맞은 집에 적몰되어 노예로 되고, 부녀자는 노비로 되는데, 자신이 돈으로써 죄를
대신하고 싶으면 한 사람당 10만 전을 내야 했다.
설사 죄를 면하여 백성이 된다고 하더라도 세상에서는 이를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겼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데 있어 거래를 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이 나라의 백성들은 처음부터 한결같이 서로 도적질을 하지
않았고, 출입문을 걸어 두지도 않았고, 부녀자들은 정신하여 음란하지 않았으며, 이 나라에서 씨뿌려 농사
짓고 사는 사람들은 변두(籩豆)로써 음식을 먹거나 마셨다.
(教其民以禮義,田蠶織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相殺以當時償殺;相傷以谷償;相盜者男沒入為其家奴,
女子為婢,欲自贖者,人五十萬。雖免為民,欲猶羞之,嫁取無所讎,是以其民終不相盜,無門戶之閉,婦人
貞信不淫辟。其田民飲食以籩豆。)라고 하였다.(《전한서(前漢書)》 28 권 하 《지리지(地理志)》14쪽
서진군국도(西晉郡國圖)의 낙랑군이 등주북쪽 해중에 위치한 지도
[주2]《산해경》제18장 해내경(海內經)
《산해경해내경》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畏人愛之>
동해(황해)의 안쪽, 북해(발해)의 모퉁이에 하늘이 다스리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
그사람들은 물안에 살며 사람을 아끼고 사랑한다.
해석의 근거:
1.동해=황해=조선만(코리아 베이). 2.북해(발해). 3.해우(海隅)
출전:《이아 爾雅》<제유해우>(齊有海隅-爾雅釋地一十蔽),
<제유해우>(齊有海隅-爾雅釋地一十蔽),제나라에 있는 해우는 내륙에 열 개가 있는데 물가에 있는
큰 숲이라는 뜻이다. 그외 9개는 숲이 골마다 있다는 말이고,
바닷가에 울창한 숲이 있는데 1,000여리나 되는 이 숲을 해우(海隅)라고 불렀다.
이 해우는 산동의 등주(登州), 내주(萊州)에서 천진(天津)까지 펼쳐있는 천 여리나 되는 큰 숲이
라는 뜻이며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현재의 발해가 내륙으로 있을때였다. 《
사기》<오제본기>에는 이곳을 울이(鬱夷)라고 불렀으니 울창한 숲속에 사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해석이 되기도 한다.이를 우리말로 연계하면 '우리'가 되는것이요,등주지역을 '우이=隅夷'로 부른
연유가 되기도 한다.《후한서》<동이열전>
천독(天毒) 출전:
때‘하늘이 다스리는 나라’ 즉 ‘천자가 다스린다’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독(毒)자는 노자(老子)
나 장자(莊子)에도 나오는데 모두‘기르다’‘거느리다’는 뜻으로 읽고 있다.
그리고 역(易)에서도 ‘다스린다’로 읽는것은 당연하다.
역(易)자체가 태호복희씨 이래 그것이 천하를 다스리는 고대 정치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천독>에서 독의 해석을 <다스린다>는 개념으로 읽듯이 `하늘이 다스리는’은 천자가
다스리는’으로 읽어야 그 의미가 통하게 된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이를 하늘과 연게를 시키고
있는가는 별도의 장으로 설명드릴테지만 이지역이 해시신루(海市蜃樓)가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그림처럼 거의 매년 해상에서 일어나는 신기루를 하늘의 조화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은 이를 두고 하늘이 다스린다고 믿었던것이다.
등주해상의 해시신루(신기루) 출전:신시본토기
기인수거(其人水居)
지도:산동반도도 [Maps published in 1655 by the Jesuit priest Father Martino Martini]
발해연안으로 펼쳐진 9개의 섬들은 지진으로 이루어진 섬들이다.이를 최초로 구주라고 불렀다.
따라서 이곳에 살던 주민들을 구이(九夷)또는 묘족(苗族)으로 불렀다.
후에 이들은 내륙으로 흩어지면서 확대된 구이족으로 불리우게 된다.지도에서 가장 큰 섬이 사문도로
기록된 현 장도의 본모습이다.
이곳에 삼신산이있고 바다로 내려앉은 옛평양이 있었다.이와같은 산동성도는 블라우와 센코등의 네델란드
인이 제작한 지도가 더 있다.한가지 더 주목할것은 요동만 위치가 바다가 아닌 내륙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이고 사문도의 형태도 현재의 모양과는 다르다.따라서 요동만은 1655년 이후에 생성되었다는 결론이다.
이는 지도의 위도와 경도로서 확인된다.
이아(爾雅)에는 <물 가운데 가히 살 수 있는 곳이 있다. 이 섬을 아홉 고을(九州)라 한다.>
(水中可居曰州 九州同-爾雅釋地九州) 이렇게 ‘이아’에서는 명확하게 수거(水居)가 아홉 고을
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옛날 즉 산해경 조선시절에는 고조선의 강역이 지진으로 무너져 발해
바다가 생성되는 과정을 걷게 된다.이때 생겨난 아홉개의 섬을 말하는것이다.(중국고금지명대사전)
이같은 해석은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한나라 때 허신이 만든 자전에도 나와 있다.
<물가운데 가히 살수 있는 곳을 고을이라고 한다.> (水中可居曰州-說文解字說明)
다음으로 외인애지(畏人愛之)는 조선의 풍속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씨족들만 가까이 하고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네 씨족 이외에도 모두 가까이 하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즉 인내천(人乃天)사상이나 호혜평등(互惠平等).홍익인간(弘益人間)등 신시나
고조선의 건국이념과 상통하는 사상이라는 말이다.
이외 원나라때 주치중(周致中)이 쓴《이역지=異域志》는 조선국(朝鮮國)은 동북해빈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동북해빈(東北海濱)은 어디인가?
이를 《상서》[주1]에서는 양곡(暘谷).탕곡(湯谷).동표(東表),우이(隅夷)지역으로도 불렀다.
일반적으로 동북지방이라면 요동지역을 말하지만 동북해빈이라면 요동까지 미치지 못하는 발해해협을
지목하는 표현이었다.따라서 요동이나 한반도라는 표현은 동북해빈(東北海濱)의 핵심을 벗어나는 외부
지역을 말한다.
○《異域志》朝鲜国 (元 周致中)
古朝仙,一曰高丽,在东北海滨,周封箕子之国,以商人五千从之。其医巫卜筮、百工技艺、礼乐诗书
皆从中国。衣冠随中国各朝制度,用中国正朔,王子入中国太学读书。风俗华美,人性淳厚,地方东西三千,
南北六千。王居开城府,依山为官,曰神窝。民舍多茅茨,鲜陶瓦。以乐浪为东京,百济金州为西京,有郡
百八十,镇三百九十,洲岛三十。以鸭绿江为西固,东南至明州,海皆绝碧,至洋则黑海,人谓无底谷也。
○《이역지》조선국(원 주치중)
당시 상나라 사람 5천명은 의무복서,백공기예,례악시서등 문물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모두 중국풍이었다.
의관은 중국 각조의 제도를 따랐고,중국 정삭(세력)을 사용하였다. 왕자는 중국 태학에 들어가 독서를
하였고,화풍(華風)의 풍속을 따랐다.인성은 순후하였고 지방은 동서 3천리,남북 6천리다.왕은 개성부에
살았는데 산을 의지하여 궁을 짓고 신와(神窩)라고 하였다.백성들의 집은 초가와 기와를 사용하였다.
낙랑을 동경으로,백제 금주를 서경으로 삼고 180군,390진,주도가 30,이었다.
압록강을 서쪽으로 고정시키고,동남쪽으로 명주에 이른다.바다는 모두 절벽이고, 물이 깊으며 낮은 골짝
이는 없다.
*만약 고려의 영토가 한반도에만 국한되었다면 국토의 넓이가 동서 3천리,남북 6천리가 될수는 없지 않은가.
《사기》<조선전>은 주석에서 해내로 400여리라 하였고,여타의 사서들의 기록도 강역의 크기가 들쭉 날쭉
다르다.그렇지만 중요한 대목은 한반도의 크기를 벗어나는 강역의 면적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여하튼 《이역지》에서 말하는 고려의 영토는 동서가 3천리요 남북이 6천리라는 대목은 한반도에 만주를
포함하는 면적이 아니면 불가능한것이다.
다음 낙랑을 동경으로, 백제 금주를 서경으로 하였다는 대목은 《통고》의 기록과는 조금 다르다.
《통고》에서는 신라 동주 낙랑부를 동경으로,백제 금주 금마군을 남경으로,평양 진주를 서경으로 불렀다고
하였다.당시 신라 동주 낙랑부는 봉황성이었다.그리고 백제 금주 금마군은 대련이었고,평양 진주는 사문도
(장도)였다.그만큼 고려의 초창기에는 변화가 많았다.
국경은 압록강을 서쪽에 고정시켰다고 한 대목은 압록강이 요하였음을 지목한것이다.현재 한반도의 압록강
은 북쪽 아니면 서북쪽에 있는것이지 서쪽에 있다고 볼 수 는 없지 않은가.동남쪽으로 명주(明州)에 이른
다는 대목은 좀더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주1]《상서(尙書)∙요전(堯傳)》 전에 이르기를, “동표지지(東表之地)는 우이(嵎夷)이다.
양(暘)은 밝다는 뜻이다. 골짜기에서 태양이 솟아올라 온 세상이 밝아지므로 양곡(暘谷)이라 한다.
양곡(暘谷)과 우이(嵎夷)는 같은 말이다.”라고 하였다. 《정의(定義)》에 이르기를, “청주(靑州)는 동쪽에
있고, 경계의 바깥 쪽에 있는 것이 표(表)이다. 그래서 동표지지(東表之地)라고 하는 것이다.
해가 솟아오르는 것에 근거해서 양곡(暘谷)이라고 하고, 그 지명을 가리켜서 바로 우이(嵎夷)로 일컫게
된 것이요, 따라서 양곡과 우이(嵎夷)는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흠정사고전서에 수록된 《조선사략》에는 단군과 조선의 위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단군은 동방의 9종족중에 최초의 군장이라고 하였다.나라의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는데 해가 솟아
오르는 동표에 있었다.옛날에 이곳을 조선이라 불렀다.』조선이 있었다는 동표(東表)에 대한 설명은
《상서》《우공추지》《후한서》등의 구이족(九夷族) 설명에 들어있다.
《명일통지》권89 외이
조선국 동서남 빈해 북인 여단. 서북지 압록강 동서 2천리 남북 4천리 자 국성지 경사 3천5백리 지 남경
4천리 연혁은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곳이고,진(秦)나라때 요동외요에 속했으며 한나라 초에 연인 위만이
점거했던 땅이다. 무제가 조선을 정벌하고 진번.임둔.낙랑.현도등 4군을 두었다. 소제시(bc75)낙랑과
현도2군으로 합병하였다.한말에 공손도가 점거하였다가 연(淵)에 이르러 위(魏)에 망하였다.
진(晉)영가 말(312)고구려에 함몰되었다.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왕 고련(장수왕 )이 살던 평양성 즉 낙랑군지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뽑아버리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그 나라는 동쪽으로 옮겨갔는데 압록수 동남 천여리(현 평양)다.
5대당시(五代唐時) 왕건이 고구려의 궐지(빈터)와 고신라와 백제의 영역을 합쳐서 넓히고 송악으로 천도
하고 평양은 서경으로 삼았다....
*《명일통지》의 중요한 포인트는
1) 조선의 강역이 동서 2천리,남북 4천리로서 현재의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
이다.북경에서 조선까지 3500리라고 하였으니 《후한서》<군국지>에서 말하는 북경에서 의무려산까지의
거리를 넘지 못하는것이다.
2)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란 대목에서 고구려가 부여를 계승하였다는 뜻으로 이는 현재 중국이 동북공정
에서 주장하는 고구려가 한사군의 현토에서 발생되었다는 설을 부정한다.
3)고구려 장수왕이 살던 평양성 즉 한나라의 낙랑군땅은 당나라가 정벌하여 뽑아버리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그 평양은 동쪽으로 옮겨갔는데 압록수의 동남쪽 천여리라고 하고 있다.
압록수는 요양의 동쪽 요수(청하)를 말한다.따라서 옮겨간 평양은 현재 한반도의 평양을 말하는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평양은 당나라가 평정하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평양이 아니다.
한나라가 사군을 두고 설치한 낙랑군이 아니라는 말이다.
4)후당 5대시 왕건이 건국한 고려를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에서는 고구려와는 아무런 연계가 없다고 하지만
그 강역에 고구려의 궐지를 수복하였다고 한 대목은 고구려와의 연계성을 확인하는것이다.
*《일성록》고종 34년(1897 / 대한제국 1년) 10월 13일(양) 2번째 기사에는“국호를 대한으로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하다.”
우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
(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及我太祖龍興之初, 輿圖以外, 拓地益廣。 北盡靺鞨之界, 而齒革?絲出焉, 南收耽羅之國, 而橘柚海錯貢焉。
幅員四千里, 建一統之業.禮樂法度祖述唐虞.山河鞏固垂裕我子孫萬歲磐石之宗...』
지도:대청광여도 산동반도의 동북부 부분이다.이 지도에는 등주를 고우이(古隅夷)로 표시하였고,기자가
바다를 건너려고 대기하던 청주.창락등이 표시되어있다.《
고려도경》에서 말하는 고려의 건국지는 등.래.빈.체주와 서로 마주 보인다는 위치로 사문도가 표시되어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동해는 황해이고 북해란 발해를 말하므로 동북해란 등주를 기준으로 갈라지는
발해해협을 말하는것이다.그리고 해빈(海濱)이란 바닷가 또는 해안. 퇴적토가 싸여 이루어진 섬을 말하
므로 발해해협을 따라 이루어진 묘도열도(廟島列島)를 말하는것이다.
이를 《산해경 》에서는 "동해지내'북해지우"(東海之內 北海之隅)에 조선이 있다고 하였고,
《한서》<천문지>에서는 한무제가 정벌한 조선은 내륙에서 건너다 보이는 해중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기》<조선열전>의 주석에서는 "경사의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러 바다로 부터 해중 400여리가
조선이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상서》<주소> 《후한서》<동이열전> 《신.구당서》《송사》 <식화열전>《고려도경》
《원서》<지리지> 《원서》<천문지> 원시대 주치중의《이역지》《우공추지》등 수없이 많다.
이곳은 《사기》<봉선서>에서 말하는 삼신산이 있는 사문도(현 장도)였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발해> 부(部)(1930년 장려화본)에서는 동북해빈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외의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이미 이 기록이 삭제되었다.
이러한 장려화 본도 원형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기록이 삭제되어 묘도군도가 고조선의 강역이었던
사실을 제외시켰다.
그런데도 한국의 유수한 대학도서관에서는 1930년대 출판되었던 장려화본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보기가 어려웠다.대부분의 대학들은 근간에 간행된 상해본만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1930년판 발해에 대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