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홍천
변인섭
남편과 아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소리에 눈을 떴다. 아들이 운전해서 마음을 푹 놓았던 모양이다. 잠깐 눈을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차는 벌써 시댁 뒷산이 보이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오음산과 월운초등학교를 보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은 어느새 40년 전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던 그날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청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청주에서 다녔고 직장 생활도 청주를 중심으로 했다. 내 삶의 전부가 청주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셈이니 나의 청주 사랑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꿋꿋하다. 여행을 가도 음식점이나 선물 가게는‘청주’라는 간판을 찾아다니는 청주바보인 내가 남편과 결혼하면서 슬며시 홍천에도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시 할아버님께서 홍천읍에서 방앗간과 양조장을 운영하셨다. 남편은 어릴 때 동면 방량리로 이사하여 어린 시절을 방량리에서 보냈다고 했다. 남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치 흑백 영화의 한 장면에 내가 등장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개울에서 친구들과 멱 감던 얘기, 물고기를 잡아 벗어놓은 고무신 안에 담아두었던 얘기, 콩서리 해 구워 먹었던 얘기, 소 풀 뜯기러 소 몰고 나갔던 얘기, 방량리에서 홍천중학교 다니느라 거느리 재를 매일 왕복 4시간씩 넘어 다녔다는 얘기 등 다양했다.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이야기는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익혀 먹는 법이었다. 그림까지 그려가며 신나게 설명해 주면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길 정도였다.
올챙이국수 이야기는 또 어떤가. 만드는 법을 아주 자세하게 알려주어 올챙이국수가 찬 물에 똑똑 떨어지는 그림까지 내 머릿속에 그려지기도 했다. 어쩌다 TV에 강원도 이야기가 나오면 남편은 어김없이 자기의 홍천생활까지 나에게 들려주고 싶어 했다. 40여 년간 결혼 생활을 했으니 내가 들었던 남편의 똑같은 홍천 이야기는 아마 수십 번은 되리라. 그래도 나는 늘 처음 듣는 것처럼 실감 나게 그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가끔은 질문도 했다. 고향을 떠나보지 않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모르는 나는 그렇게라도 남편의 고향생각을 편안하게 재워주고 싶었다.
홍천의 어린 시절을 꿈인 듯 추억인 듯 펼쳐놓는 남편에게서는 늘 그리움이 묻어났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남편은 1년에 한 번씩은 홍천을 찾는다. 초등학교 동창 모임 참석을 위해서다. 동창 모임에 다녀온 날은 또 내가 들어줄 이야기가 많았다. 덕분에 나는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남편의 초등학교 동창생들을 많이 알고 있다. 동창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은 늘 찰옥수수를 사 왔다. 그건 남편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덜어주는 약이었다.
내게 홍천은 나풀거리는 한 마리 하얀 나비였고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내가 직장에 다녀서 시어머님께서 딸애를 봐주셨다. 남편 형제들이 모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살았고, 장남인 아주버님만 직장관계로 철원에 계셨다. 연로하신 시부모님 두 분이 고향에 계셨는데 손녀를 봐주시려고 시어머님은 청주로, 시아버님은 서울 큰댁으로 가셨다. 그런데 서울 큰댁이 집을 다시 짓게 되어 3개월 정도 임시거처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 당연히 시아버님도 청주에 와 계시면 되리라 생각했는데 시어머님 생각은 그게 아니었다. 약주를 너무 좋아하시는 시아버님이 혹시 실수라도 하시면 아들과 며느리에게 누가 된다며 두 살짜리 딸애를 데리고 홍천으로 가셨다. 시댁 쪽 모든 분들이 현대판 신사임당이라 인정하는 시어머님이니 딸애를 맡기는 것은 걱정거리가 아니었지만, 내가 딸애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딸애가 홍천으로 간지 2주 만에 나는 남편과 함께 딸을 보러 갔다. 시댁에 도착해서 딸애를 보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애써 마음을 감추며 들키지 않으려고 딸애를 꼭 안아주었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 잠도 안 자고 딸애를 보고 또 보며 혼자 밤을 지켰다.
야속하게도 아침은 빨리 왔다. 산골의 아침은 맑은 공기와 싱그러운 햇살로 가득했다. 하지만 내 귀에 들려온 것은 뒷산에서 울어대는 뻐꾸기 울음소리였다. 그건 내가 우는 소리였다. 내 마음을 소리로 표현하면 꼭 그랬을 것 같다. 딸애를 안고 대청마루에 앉아있으니 이번엔 하얀 나비가 나풀나풀 마루 안까지 날아왔다. 나비가 원래 저렇게 날아다니던가. 힘없이 나는 나비는 금방이라도 날개를 접고 마룻바닥에 누워버릴 것만 같았다.
아주 잠깐 딸애와 있었던 것 같은데 벌써 청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낌새를 알아챈 딸애는 과자를 먹으면서도 한 손으로는 나를 잡고 있었다. 업어주겠다는 할머니의 등이 좋으면서도 눈은 나를 놓지 않았던 딸애를 업고 옆집으로 내달리셨던 어머님의 모습이 지금도 그대로 살아있다.
버스를 탔는데도 딸의 울음소리가 계속 들렸으니 환청이었나, 칵테일파티 효과였나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때 내가 눈물 삼키며 보았던 월운초등학교는 슬픔의 아이콘으로 내 가슴에 박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아들이 차를 주차하고 우리는 고향집을 향해 걸었다. 딸 때문에 홍천이 더 그리웠는데 정작 딸은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웠다. 고향집은 집터는 그대로 남아있는데 마치 산 짐승들의 놀이터처럼 보였다.
나비 날아들던 대청마루 자리에는 건물에서 나온 서까래와 기둥이 쌓여있었다. 문을 열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던 뒷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그냥 서 있었다. 대청마루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낯익은 소나무를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엄마 부르며 우는 딸애의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상처는 아직도 깊고 쓰라린데 빨간약 하나로 겉만 아물어 있었나 보다.
잡초만 무성한 채 쓸쓸하게 남아있는 이 고향집 터에 작은 주택이라도 지어 시댁 식구들과 함께 추억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살면서 남편이 3년간 넘어 다녔다는 거느리 재를 나도 넘어보고 싶고, 꽃을 좋아하셨던 시어머님을 생각하며 마당 가득 꽃도 심고 싶다.
텃밭에는 감자와 찰옥수수를 심어 청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 옆집으로 통하는 울타리 옆에는 예전처럼 당귀를 심어 그 진한 어머님의 향을 실컷 느꼈으면 좋겠다. 기막히게 맛이 좋았다는 울 안 옹달샘 물도 다시 마셨으면 좋겠다. 나비의 화려한 날갯짓을 보고 싶고, 뻐꾸기 울음을 행복한 가슴으로 들었으면 좋겠다.
혼자 생각에 빠져 고향집터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 사이 남편이 나를 툭 치며 빙긋이 웃는다. 남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찰옥수수 축제를 한다는 홍천군의 광고판이었다.
남편의 그리움이 씨앗 되어 묻혀 있는 곳. 하얀 나비가 나풀거리고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 내가 작은 집 짓고 살고 싶은 곳. 내가 홍천에 마음 한 자락을 내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