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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곡관 뒷편의 소나무는 콩나물처럼 길고 가늘다.... 피서차림의 山中五友...... 11 : 19 : 34
영남 제2관문 조곡관(嶺南 第二關門 鳥谷關) 사적 제147호 소재지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이 관문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문경 조령의 중간에 위치한 제2관문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조선 선조 25년(1592) 왜란이 일어난 후에 충주사람 신충원(辛忠元)이 이곳에 성을 쌓을 것이 시초가 되었다. 숙종 34년(1708) 조령산성을 쌓을 때 매바위(鷹岩) 북쪽에 있던 신충원이 쌓은 옛성을 고쳐 쌓고, 중성을 삼아 관문을 조동문(鳥東門)이라 하였다. 현재의 시설은 그 후 폐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松崗의 수고로 주차장에 도착.... 08: 44 : 47
옛길 박물관의 야외 조각 작품 ....
새재 길(Saejae Road) 이창호 작. Stone. 2008
이 작품의 전반적인 모티브는 문경시 로고를 형상화한 자연과 길이다. 문경새재를 통한 지역정서와 고유문화, 자연환경의 소중함에 의미를 두었다. 조선시대 서포 김만중과 매월당 김시습이 새재를 넘으며 남긴 시를 새겨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반상하고 걸음의 미학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앞면)
새 재 (鳥 嶺) 김만중(1637~1692)
백두산은 남으로 삼천리를 달려와서 큰 고개 가로질러 칠십 고을 나눴네.
예부터 제후들 할거할 곳 있었거니 지금까지 그 요새 흔적이 있다네.
짓푸른 봉우리 거듭거듭 솟아있고 눈부신 단풍은 나무마다 아름답다.
공명을 세우기엔 네 이미 늙었거니 가던 길 멈추고 개인 하늘 볼밖에
(뒷면)
새재를 넘어서 시골집에 김시습(1435~1493)
소쩍새만 울며불며 새벽바람 맞는구나. 이 좋은 봄날에도 고향으로 못 가는데
그 길은 아득한 청산으로 들어가네. 새재는 남북과 동서를 나누는데
미면사지 다층석탑 기단부 (米麵寺址 多層石塔 基壇部)
이 부재는 석탑의 기초가 되는 기단부재로서 원래 문경시 산북면 소야리 미변사지에 있던 것을 2007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기단부재에는 탑신이 자리 잡았던 폭 110cm 정도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탑신 부재 중 옥개석 일부가 함께 발견되어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옥개석의 재질은 점판암이고 옥개석 받침이 연꽃문양으로 표현되어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된다. 중앙부분에 사리함을 보관했던 공간으로 추정되는 육각형의 큰 구멍이 나 있다. 미면사는 신라 진평왕 초기인 579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백련결사(白蓮結社)로 유명한 사찰이다.
※ 백련결사 : 1244년(고종 31) 최자의 품신으로 이 절의 주맹법사(主盟法師)가 된 천책(天頙)은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를 짓는 한편, 법화도량(法華道場)을 개설하고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조직하여 염불삼매(念佛三昧)를 권장함에 따라 만덕산 백련사와 함께 천태종의 중심 수행처가 되었다. 그 뒤 권문세가의 장지(葬地)로 잠식되어 소수의 탁발승만이 살았으며, 지금은 옛 자취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었다.
가족들이 새재를 찾아와 아이들은 신나서 앞서 뛰어 가고, 어른들은 다칠까봐 걱정한다....
높이 솟은 바위 위에 소나무가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다.....철갑은 두른 저 소나무~
세트장 매표소를 지키는 소나무는 가늘고 만만하다.... 그래서 이쁘다...
맞은편의 쉼터에 현수막을 걸어 놓았다.
쓰레기 되가져가기 캠페인
추억은 가슴속에 쓰레기는 배낭속에
문경새재관리사무소
精神一到何事不成 .... 옛 선비들이 글 공부하기 전에 정신 수양을 위한 투호 .....
뒤편에 현수막을 걸어 놓았다.
코로나 19 확산방지를 막기 위하여
마스크찾용, 거리두기를 생활화 합시다
한 몸에서 나온 가지가 새로운 가지를 만들며 몸을 키운다.....
길가의 소나무는 곧은 것은 목재로 나가고, 굽은 나무는 방문객을 반기니... 後者의 쓰임이 더 넓다...
용추 위의 소나무는 바위틈을 감싸고 올라 햇살에 빛난다...
꾸구리바위 아래 맑은 물은 물고기들의 천국... 오가며 방문객이 외식할 기회를 주니까...
멋진 소나무 그늘을 축복 받은 善良들이 아침을 즐긴다...
松林 사이 정자에는 부지런한 방문객이 휴대폰에 빠져있다...
위쪽의 나무에 현수막을 걸어 놓다.
마스크 꼭! 착용합시다
미착용시 과태료 10만원 문경새재관리사무소
맨발의 여인은 큰 소나무 그늘을 즐기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오감이 작용하는 조곡폭포... 시원한 냉기가 더위진 몸을 식힌다...
주변의 경고 안내판....
우측통행 낙석주의
폭포 사진 촬영대 아래에서 자란 굵은 소나무가 키도크고, 든든하다...
주변의 현수막들
산불조심 불법소각행위 금지 문경시
조곡관의 여름풍경.... 시원한 물결이 으뜸...
회장님이 맨발로 위쪽의 물길을 찾아가서 낙엽을 제거하여 물이 통하도록 하여
진상태님 쉼터 앞 도랑에 시원한이 물이 흐른다......
진선생쉼터의 물길을 찾아서 개울가에 있는 물길 유도 통을 열어본다...
내려오는 길가에 더문더문 소나무가 잡목에 가려있다...
진선생 쉼터에서 충분한 휴식을 가지며 새재의 청량한 공기를 마음껏 마셔본다...
진선생 새재 방문 기념비를 살피는 방문객이 반가웠다...
휴식을 마치고 폭포 앞에서 냉기를 느끼며 ...
곡선미를 자랑하는 이끼 낀 삼형제 소나무......
소나무 사이로 보는 풍경이 새롭고... 껍질의 두꺼움에 세월이 녹아 있다...
교귀정의 소나무는 체중 감량을 많이하여 방문객을 위한 그늘이 없어졌다...
교귀정 앞 비탈에 자란 대형 소나무는 두가지로 자라서 세력이 대단하다....
일제치하의 송진 공출로 상처가 깊이 패인 소나무가 잡목을 뚫고 크게 자랐다...
신길원현감 출렬비각 뒤의 소나무는 볼수록 곧고 씩씩하다...
현감 신길원 충렬비
충신은 반드시 효자 집안에서 구한다더니 신길원(申吉元) 현감 경우가 바로 그 좋은 예이다. 공은 어려서 이미 효성이 지극하여 자기 손가락을 자른 피를 약에 섞어 어머니를 연명케 하였고, 열네살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슬피 울며 삼년상을 마치고 보는 이가 눈물을 흘리었다.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선조(宣祖)가 효자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병자년(1576)의 사마시에 합격한 뒤 태학의 추천으로 참봉 벼슬 등을 거쳐 문경 현감이 되어 백성을 정성으로 다스리고 항상 성리학의 책을 읽어 규범으로 삼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문경으로 외적이 다가오자 모두 형세 불리함을 들어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공은 소리 높여 말하되 “내가 맡은 고을이 곧 내가 죽을 곳인데 어찌 피하리오.” 하고 적은 군사를 독려하더니 적병이 이르자 달아나지 않은 이가 없고 홀로 종 하나만이 가지 않고 있거늘, 의관을 바로하고 관인을 차고 앉으니 적병이 칼을 빼어들고 속히 항복하여 길을 가르키라고 협박하였다. 공은 손을 들어 목을 가르키며 “내가 너를 동강내어 죽이지 못함을 한탄하니 빨라 죽여서 나를 더럽히지 말라.” 하니 적병이 성내어 먼저 한 팔을 자르고 계속 위협하였으나 공은 얼굴빛도 바꾸지 않은 채 꾸짖기를 마지않으니 마침내 살을 발라내는 모진 죽음을 당하였으니, 때는 사월 이십 칠일이오, 나이는 마흔 다섯이었다. 사람이란 조그만 이해가 있어도 지킬 바를 바꾸지 않는 이가 드물거늘 하물며 시퍼런 칼날 밑에서이랴. 공이야말로 충렬의 선비이시다.
좌승자로 추증된 공의 자는 경초(慶初)요, 본관은 평산(平山)인데 장절공 숭겸(壯節公 崇謙)의 후예이며 아버지는 사헌부 지평 국량(國樑)이다.
원비 조선 숙종 32년(1706)
글 전 사간원정언 채팽윤(蔡彭胤)
글씨 전 성균관전적 남도익(南 圖翼)
1982년 3월 일
김영하(金英夏) 요역(徭役). 이상복(李相馥) 씀
비석명 : 縣監 申侯吉元 忠烈碑
신길원현감 충렬비(申吉元縣監 忠烈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45호
신길원현감 충렬비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문경현감 신길원을 기리려고 세운비석이다. 처음 세울 당시에는 문경현 관아 앞 (지금의 문경 초등학교 앞)에 세웠는데 1관문(주흘관) 뒤편과 새재관리사무소 옆으로 옮겨졌다가 1999년대 이후 지금 자리에 옮겨 세웠다. 신길원은 선조 때에 사마시에 급제한 후 태학의 추천으로 참봉을 거쳐 문경현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관군을 거느리고 끝까지 항거하다가 장렬히 순국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를 좌슨지로 추증라고,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에 비를 세웠다. 현재 는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으며, 지역 유림이서는 해마다 사당에서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문경새재 옛길보존기념비
새재관리사무소 앞 거리에서 그늘 아래 차를 기다리며....
진남휴게소에서 중식을 하고 벚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진남교반이 경북제일경이라는 비석이 궁금하여 ....
慶北八景之一
진남휴게소 바로 위쪽 숲속에 묻혀 있는 비석. 전면은 ‘慶北八景之一(경북팔경지일, 경북팔경 중 제일)’ 뒷면은 ‘소화(昭和) 8년(1933) 10월에 대구일보사 주최로 경북 주민대상 명승지 투표를 한 결과, 진남교반이 으뜸으로 1경을 차지했다’고 전하며,
비석은 소화 13년(1938) 가을에 마성면장이 세운 것으로 돼 있다.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문경새재가 제2경이다. 진남교반이 그만큼 더 아름다웠다는 얘기다.
첫댓글 새재를 찾으며 이번에는 소나무를 차례로 올라가며 사진에 담아서 그 모양과 위치를 파악하고 목재로는 기피했던 나무가, 수 많은 방문객에게 피톤치드를 발산하여 신선한 공기와 그늘을 제공하여, 항상 고마운 존재임에도 무심히 지내왔다.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미래의 자손들을 사랑하는 바탕이 되는 생각은 가졌으나 행동으로 해 본적은 없었다. 소나무의 생김새와 외형의 수려함을 느끼며 즐거운 탐방이 되어 감사하다.
39會째 關門길을 간다.이른시간에 駐車場에 닿고보니 餘裕가 있어서 좋다.博物館 뜨락에 展示된 米麵寺址 多層石塔의 盜掘 殘餘部分인 基壇部를 보니 億丈이 무너진다.얼마전에 踏査했던 山北 蘇野里의 귀한 積石塔의 훼손된 現場을 돌아봤을때의 歎息을 또 할 수밖에.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번갈아 숲을 이룬 進入路는 風景마져 爽快한 氣分을 준다.八旺酒幕 近處의 잣나무 숲은 間伐을 하여 어울리지 않게 둥쳤다고 나름 評價했으나 되돌아보니 숲에 밀린 도열한 단풍나무 自生力을 주기위한 勞力이다.交龜亭 앞의 傷處난 소나무의 윗둥엔 까투리가 飛上하는 形狀의 멋진 자연스런 彫刻品이 있었는데 꼬리부분을 切斷하여 作品을 망쳐 놓았다.꾸꾸리바위를 觀望중에 만난 아담한 女人은 가냘프나 맨발로 씩씩한 步行이 장해보여 對話를 나눠보니 麻城 燕雀煞에 居住한다고 한다.우리들 公園에 도착하자 會長은 막힌 管路의 通水부터 解決하여 水路가 말끔해지고 週邊이 환해진다.오랫만에 鳥谷關을 背景으로 記念撮影을 하고보니 關門의 象徵的인 모습인 釜峰이 웃자란 樹木에 가려 背景寫眞이 실망스럽다.下山을 서두르니 40분만에 完了했다.歸路에 鎭南休憩所에 들려보니 약돌한우 開場 影向인지 煩雜하지않아 모처럼 돈가스 食事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