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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예수 2
요한복음 풀이 1
「요한복음」은 동양적 사고에 맞아
그저 로고스로 시작이 되는데, 그 하나, 그 속의 그리스도를 말하자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어느 의미로는 동양 사람에게는 더군다나 그런 면이 있어요. 본래 우리 동양, 서양을 말하면 서양 사람들은 현상계의 외면세계에 특별히 주목을 해서 그거를 많이 밝혀오는 게 그 특색이 됐고, 동양은 그것보다는 속에 있는 정신면을 밝혀왔던 것이니까 동양 사람들이 보는 이면이 훨씬 더, 물론「마가」에 있는 그 말이 소용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면을 아는 데에는 이 속이 없으면 어딘지 모르게 잘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요한복음」을 읽어가노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게 퍽 느껴져요. 어째 그랬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마음이 자연히 그랬고, 아마 나도 동양 사람이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근래 더군다나『노자』『장자』를 보다가 그런 걸 비추어 보면 참 많은 것이 밝혀지는 면이 있어요. 그래 그렇게 아시고 이걸 한 번 읽어보시라 그 말입니다.
그래「요한복음」의 기초된 거를 조금 말하면, 그건 뭐 연구하는 사람들이 다 하는 말입니다만, 이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거는 1장 1절에서 18절까지, 보통 이걸 서곡이라 그러는데, 프롤로그(Prologue) 서문인데, 학자들이 연구한 데 의하면 이건 사람이 썼다기보다는 옛날부터 있던, 구약에도 있던 말들이 그거는 보통 말이 아니고 시라고 다들 그렇게 봅니다. 시인데 그걸 인용을 해서 이렇게 쓴 거예요. 그건 자기가「요한복음」전체에서 말하고 싶은 것의 그전체가 간단히 1절에서 18절까지에 다나와 있어요. 아주 뭐 우주관이라면 우주관, 신앙관이라면 신앙관 그게 다 나와 있으니까 아주 중요한 거지요. 그러고는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세례 요한 부분은 아마 삽입을 해서 썼을 거다 그런 말이 있고요.
그 담은 그 밑에서부터 12장까지가 이제 말하자면「요한복음」의 본문 되는 부분이라 할까, 예수님이 전도하신 거, 나와 복음을 전하시던 그 본론이란 거고. 13장 이하는 전도를 하시다가 처음에는, 처음부터 아셨다면 아셨다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맨 처음 갈릴리에서 전도하시던 그때부터 반드시 십자가가 나왔다든지 그렇지는 않아요. 그때에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하고 보통 말로 하면 상당히 어떻게 보면 아주 재미있는 전도라고 할까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는데, 그 다음에 예루살렘을 몇 번 올라오신 걸로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을 보면 말이에요.
그러는 동안에,「요한복음」을 쓰는 방법은 여기「마태」「마가」「누가」 모양으로 사실을될 수 있는 대로 순서대로 죽 다 써보자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이이는 자기의 목적 즉 속의 내적인 예수님이 어떻게 돼서 오셨고, 어떻게 돼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됐는가 하는 그 내적인, 정신적인 면에서의 설명을 하고자 하다보니까 거기 맞도록 자료를 취해서 쓴 것 같아요. 대개 그렇게 말해요.
기사이적 (奇事異蹟) 이야기를 보면 우리가 아는 대로 여기에만 독특하게 있는 것은 2장에 있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변해 포도주를 만드셨다고 하는 게 있는데, 그건 다른 데 없이 여기에만 있는 거예요.
그 담에「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5천명 떡을 먹인다든지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이 일었다고 하는 그런 얘기들은 다른 복음에도 다 있는 건데, 그래도 그런 걸 취해서 쓰는 걸 보면 쓸 때는 자세히 자세히 취해서 쓰는데, 또 어떤 거는 안 쓴 거를 보면 그건 일부러 빼자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마 자기의 쓰려고 하는 목적에 어느 자료들을 갖다가 요렇게 썼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그 목적이란 것이 뭐냐 그러면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나와서 전도하실 때에 참 잘돼간 것 같고 그랬는데 어떻게 어떻게 해서 왜 십자가에까지 가게 됐나 하는 사건, 주로 ‘안식일에 병 고친다”는 것 그것으로 인해서 시작이 돼가지고 한 번 만나고 두 번 세 번 충돌하면 할수록 점점 더해져서 마지막엔 도저히 예루살렘에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한테 용납이 될 수 없게 되면서부터 그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그것이 12장까지의 얘기인데, 그런 전도(傳道) 얘기를 하고는, 13장 이하로 가면 이제는 결정적으로 타협될 수 없고 용납될 수 없이 파탄이 드러나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모였던 그 집단을 이제 어떻게 준비하고 가시나 거기에 주력을 해요. 그건 다른 복음에는 그렇게 길게 쓰인 데가 없잖아요?
그리니까 제자들을 놓고 이제 뭐 ‘새 계명’을 주신다는 말씀도 하시고 그러셨어요. 한 번만 아니고 몇 번 몇 번 거듭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중심이 어디 있느냐 하면 처음에는 자기를 중심으로 전체를, 우리가 다 여기만 전도할 것이 아니라 각 동네를 다니면서 전도해야 한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어느 동네를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만류하면서 여기 좀더 계시라고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다. 내가 이 동네를 위해 있는 거 아니고 각 동네 각 곳에 가서 그러기 위해 왔다” 이렇게 말씀하신 게 있는데, 아마 처음에는 그러셨을 겁니다.
그런데 한 번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두 번 세 번 해서 그 사람들과 충돌이 되면 될수록 저쪽에서 아주 예수를 없애버리기로 결정이 되니까, 그런 것을 아신 담에는 전도활동을 첨의 계획과는 다르게 하시게 돼요. 물론 그런 것을 첨부터 아시고 하셨다 그럴 수도 있지만, 보통 말로 해 본다면 제자들을 데리고 퇴각을 해서 조용한 갈릴리 지방으로 내려가서 마지막을 지내다가 이제 올라올 때는 아주 결정을 하고 오는거예요. 그건 공관복음에 나타나 있지만, 돌아가실 것을 결정을 하고 아주 비장하게 오시는데,「요한복음」에서 좋은 건 이제 13장 이하예요. 거길 보면 자기 주위에서 유다 하나가 빠져나가게 되고, 물론 다른 복음에는 유다가 배반한다고 되어 있지마는, 여기에는 이제 자기 이하 남은 사람들을 놓고 마지막 말씀을 해줘요. 이것은 내가 전에도 다른 데 쓴 적이 있지 마는 어쨌건 이제 남은 사람들을 중심하여 특별히 주의를 하고 마지막 말씀을 하신다는 이 문제를 건드립니다.
‘하나님 아들’ 의 참 뜻
연구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한다면 마지막 부분은 요한이 쓴 것이 아니고 그 근본 저자 그런데 근본 저자 얘기가 나오는 건, 본래「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냐 그러면 그게 아마 논란이 많은가 봐요. 옛날에는 그저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이 썼다, 그렇게 많이 믿어왔는데 근래에 와서는 그렇게만 보지는 않나 봐요. 성경에는 이「요한복음」과 아래로 내려가서「요한 1서」「요한 2서」「요한 3서」그리고「묵시록」그렇게 요한 계통의 글이 다섯이 있어요. 바울에게는 바울계통의 서간이 또 여러 개 있잖아요? 하지만「요한복음」하고, 짤막하게 쓴 거지만「요한 1서」「요한 2서」「요한 3서」또「묵시록」이것이 옛날에는 사도 요한이 쓴 거다 전통적으로 그랬데, 근래에 와서 차차 연구해온 결과로는 사도 요한이 다 썼다 그럴 수가 없대요. 왜 그런고 하니「요한 계시록」과 서간이라고 하는 것들이 문체가 서로 다른 점이 확실히 많이 있다고 그럽니다. 그렇다면 여하간에 내가 그거 확실히 모르니까 그저 말을 옮기는 것뿐이지만 대체로 하면 사도 요한이 썼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안 썼다 해도 그 가까운 계통의 사람이 아마 썼을 거다, 대개 그렇게 인정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요한복음」끄트머리에 내려간 거는, 그러니까 주 되는 부분을 쓴 이가 썼다는 거보다는 얘기에 모자라는 것이 있으니까 뒷사람 누가 추가해서 된 것 아닌가 아마 그렇게 말이 있는 모양이고, 대개「요한복음」의 문헌적 연구 결론은 그런 것 같습니다.
여하튼 이 책은「요한복음」저자의 이러한 집필목적 같은 거를 맘에 두시고 보시기 바랍니다. 그야 공관복음도 마찬가지지만, 더구나 이거는 예수님의 속마음이 어떠신가를 이제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해서, 마지막의 결론 부분은 그 본래 있던 저자가 쓰진 않았을는지 몰라도, 그거야 뭐 제자인지 후계자인지 모르지만, 이걸 쓴 것은 왠고 하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우리에게 믿게 하려 하기 위해서 쓴다”고 그랬으니까, 어느 성경도 다 그렇지만, 그게 중심이니까 여러분들은 잊지 마세요. 그러니까 마지막에 있는 결어부터를 보고 시작을 해서 이 책이 뭣 때문에 쓴 거냐 그런 거를 이전에 우리가 교회에서 듣던 모양으로 그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기 위해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한다는 그런 거 아니라, 그보다는 좀더 깊은 의미에서 “예수님 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무슨 뜻을 갖는 건가”, 그 점이 여기에선 공관복음에서 얘기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그 깊이를 좀더 주의해서 보시란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본다면 뜻이야 다 같은 뜻이지마는「마태」나「마가」나「누가」는 “예수님은 정말 요셉의 아들이냐 아니냐” 또 무슨 “마리아가 성모 마리아가 처녀로 수태해서 낳은 거냐” “고향이 베들레헴이고 다윗 지파냐 아니냐” 뭐 이런 문제가 중요한 것 같아서 분명히 알려주려는 것같이 그렇게 보이지만, 그래 그런 의미에서 “다윗의 자손이냐 아니냐, 우리가 다윗의 자손으로 생각할 거냐 아니냐” 하고 깊이 묻고 또 “다윗의 자손이란 데는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걸 많이 생각해봤는지는 몰라요. 그렇지만 여기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는 무엇을 의미하는 거냐? 어떻게? 뭐냐” 이런 거를 생각하고 쓴 것 같아요. 그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거는 여러분들이 이제 여기 오신 분들은 그래도 다 학교공부를, 뭐 안한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아무튼 현대사람은 학문적으로 생각을 하고 그랬으니까 조금 이렇게 깊이 생각을 해보시오. 물론 ‘아버지’요 ‘아들’이요 하는 거는 상징으로 쓰는 겁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
이제 성경을 보시는 데는, 나는 내가 내 자신이 그것 때문에 많이 고민을 하고 그랬어요. 그래 또 그걸 내 나름대로는 어느 정도 어렵게나마 그래도 해결을 하고 그런 사람이니까, 비록 완전하다고까진 몰라도 어느 정도는 해결을 한 그런 사람이니까, 자연히 나는 내가 지낸 것을 얘기할 수밖에 없는데 혹시는 지금 사람이면 어느 정도는 다 그런 뭣이 있지 않겠나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실지 아직도 기독교 안에서 그런 문제가 논쟁이 되는 점도 있고 하니까 그런 거는 어떻게 생각을 할 것인가? 또 그거는 기독교만 아니고 다른 종교의 경전에도 마찬가지예요. 그거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 점에 대해 다 좀 생각을 해야 될 것 같아요.
첨에 우리가 어려서 이걸 볼 때는 제일 많이 문제된 것이 “하나님이 천지창조 하셨다” 였어요. 그러면 젤 많이 걸렸던 것은 그럼 “하나님이 정말 뭘 어떻게 했단 말이냐” 라든지, 그럼 “하나님 지은 천지간에 왜 이런 어려움이 있느냐” 뭐 이런 말이 나오면 대답을 할 수 없기도 하고 대답을 해보려 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다른 분들도 많이 지내본 건 줄 압니다만, 그때 우리가 제일 많이 걱정을 한 거는 과학하고 맞나, 맞지 않나 그 문제예요. 요새는 그 문제가 재연이 돼서 또다시 진화론은 잘못이다, 진화론 얘기는 할 거 없고 사람이 진화돼서 된 거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거는 참 그냥 넘어가지를 말고 생각을 하셔야 될 거예요. 뭐 이거냐 저거냐 내 마음에 어느 편을 취할 거냐는 내 마음에 결정할 탓이지 진화론 부정한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진화론을 그대로 인정한다고 해서 그게 뭐 더 잘한다고 그럴 순 없어요. 그거는 생각하기 탓이지, 꼭 그걸 가지고 결정되는 건 아니니까.
나는 어느 편이냐 그러면 인류가 내려온 진화라는 사실은 있으니까 진화론이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고, 진화돼 왔다는 사실은 있으니까 그걸 부인한다든지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또 그런다고 해서 그걸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이 천지창조 했다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건진다든지 하는 데 반대된다는 그런 걱정도 없어요. 나는 그렇게 믿는 건데, 혹 그런 점이 어느 때 문제가 되신다든지, 다른 사람들한테 그런 도전을 받아왔을 때 그럼 어떻게 대답을 하실 것이냐? 그게 문제가 된다면 그건 조금 생각해보시면 될 겁니다.
그런데 하나 말할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거예요. 종교는 종교 차원이다. 종교 차원 다르고 현실의 현실 차원 다르고. 그러니까 그럼 다르다고 해서 두 가지가 이렇게 갈라져 있나? 그런 말 아니지요. 그런 말 아니고 가령 여기 책상이 이렇게 있으면 자연히 이것을 이렇게 하나의 몸 하나의 부피를 가지고 있는 이 형상으로 보느냐 이걸 뭐 무슨 빛으로 보느냐 예술로 보느냐 그거는 차원이 다르다고 그렇게 봐야 할 게 아녜요? 좀더 쉽게 예를 든다면, 우리 친구들 중에도 혹 그런 분이 있을 테니까 말합니다만, 가령 시인이 저 밭에서 논에서 일하는 농부를 보고 시를 읊어요. 시를 읊으면 그 시는 우리가 듣고 보기에 참 좋잖아요? 그런데 어떤 이는 뭔고 하니 “농사꾼이 거 농사하느라고 피땀을 흘리고 있는데 그 생각을 한다면 옆에서 그걸 뭐 예술적으로 그림이라 한다든지 미(美)라 하는데 그럴 수가 있냐?” 하는데 그거는 모르는 말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하고는 예술이고 뭐고 정신적인 그 뭣을 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도덕적인 면에 서서 우리가 얘기를 하면 농사꾼이 죽도록 일하는데 “저 먹을 것은 벌지도 못하고 저는 대우를 받지도 못하고 불쌍하다” 마땅히 그래야 옳은 말이지마는 예술적인 면에서 보면, 도덕적인 그런 거 아니고,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 미라면 미라는, “참 미다” 그런 것도 있으니까 그런 것을 볼 때에는 논 가운데 서서 일하는 농부의 그림을 그린다든지, 시로 읊는다든지 그런 것은 그대로의 그 뭣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현실의 이 사회문제라든지 도덕 문제하고 혼동을 시켜서, 그럼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말짱 농부를 농부의 불쌍한 것을 알지도 못하고 사회의 잘못되는 것이 있는 것조차 도무지 비판할 생각도 없어 그런다 그렇게 오해하면, 그러면 예술이고 뭣이고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모양으로 종교적인 글을 읽으실 때는 이것은 종교적인 목적에서 그 차원에서 보시라는 거, 과학이라는 차원에서 보시면 안된다는 것, 그렇게만 생각하시면 돼요. 그걸 실지 그러면서도 혼동을 일으키는 일이 많기 때문에 그런 저런 문제가 일어나는데 그걸 꼭 쉽게 말하면, 나는 내가 풀긴 그랬어요, 뭐냐 그러면, 말이란, 그 말이 나오게 된 데는 다 뭣을 설명하잔 것입니다. 현상의 세계를 혹은 의미의 세계를 한번 설명해보잔 것인데 이걸 엉뚱하게 서로 바꿔서 적용하게 되면 혼란이 오게 돼요.
성경은 ‘의미의 세계’에 대한 표현
성경은 ‘의미의 세계’ 에서 하는 것이라 그래요. 사람이 뭘로 사느냐? 사람이란 살아가자는 어느 의미가 없이는 못 살아가잖아요? 사람을 뭘로 보느냐 하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있을 거지만, 지금으로서는 사람은 우주 전체를 보는 면에서 생각도 하고 무슨 의미를 추구해가는 그런 존재로 보는 게 아마 제일 높이 보는 거라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무슨 미 (美)면 미를 따를 수도 있고 지식이면 지식을 따를 수도 있고 그렇지만, 그런 것만이 아니고 다 종합해서 말을 하면 ‘보람’이라는 어느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라 그럴 수 있어요. 그건 또 딴 얘기가 되니까 길게 말할 순 없습니다만, 나는 내 나름대로 의심이 풀리기는 그렇게 해서 풀었어요. 자기 나름대로 결정을 하고 넘어가야 돼요. 그렇지 않고는 해답이 안 나오니까.
그래 그런 것을 얘기하면 아까 하던 진화론 문제와 또 관련이 돼옵니다. 언제나 사람이 나면, 여기 이렇게 나면, 종교를 믿건 안 믿건 우리 생각에 ‘유의미’ ‘무의미’의 이 우주란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간적으로 얼마나 되고 공간적으로 얼마나 되는지 도저히 설명을 할 수 없지마는, 알지는 못하면서도 이 우주는 하나로 “이 우주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 말입니다. 그럼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됩니까?” 하고 물으면 그것도 또 대답하기 어렵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생각해요. 생각 정도가 아니에요. 그것이 우리의 살림이지. 만약에 사람이,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 곤충, 미물도 그렇지만, 이것이 이 우주와 자기가 하나로 되어 있는 이런 거로 산다는 그 믿음이라고 할까, 그 사는 힘이 아니면 우리 이렇게 생존해 있을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에게는 가장 높은 점 구경(究境) 마지막에는 그 점에, ‘생각한다’는 데에 있는 거예요.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하는 이들은 물론 ‘의미의 세계’를 생각 안하는 사람들은 그냥 그냥 넘어갈는지는 모르지만 이 ‘생각한다’ ‘의미를 캔다’는 생각이 있는 이들은 그 책을 한번 보시오. 그거는 요새 우리 말로는 번역이 돼 있나 봅디다. 플랑클(Flanckle)의『사람의 의미 탐구』(Man's Searching for Meaning). 플랑클이란 사람은 오스트리아에서 났는데, 2차 대전 때에 있었던 유대 계통의 심리학자예요. 그 사람 그때도 사카이어트리스트(Psychiatrist) 노릇을 했다는 거고. 심리학에 관한 자기의 원고 뭉치를 가지고 수용소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다 빼앗기고 불타고 해서 낙심도 하고 그랬다가 다시 쓰고 그런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거기서 보니까, 물론 그는 심리학을 한 사람이니까 그랬겠지만, 보니까 같은 환경을 당하고도 어떤 사람들은 태연히 견디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튼튼하게 있는 것 같다가도 맥없이 턱 죽어버려요. 그래 그런걸 보다가 연구해서 얻은 결과가 그거예요.
사람이 사는 것이 뭐냐? 사람은 보람에 사는 건데 자기가 하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다 믿어지면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견디어가고, 고난으로 죽을 것 같은데 잘 견디어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튼튼한 것 같은데 맥없이 턱턱 죽더라 그거예요. 그래서 이걸로 새로운 학설을 하나 세워 그걸 로고데라피(Logotheraphy)라, 로고(Logo)는「요한복음」첨에 나오는 '로고스’라는 말인데, '로고데라피’는 로고스에서 나온 말로서 로고스 때문에 살아간다고, 의미 때문에 살아간다고, '의미’라고 그걸 번역해서 한 학설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만, 그 사람의 말대로 한다면 가장 힘있는 거는 “사람은 나는 무슨 보람에 산다”, 무슨 보람에 무슨 의미가 있어 산다는 걸 알게 되면 환난을 견디어 잘 지내갈 수가 있는 것이고, 그것 없이는 도저히 못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의 결론인데, 그렇게 되면 그거는 사람의 일생만이 아니라 이 우주 전체 내려오는 것을 보고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학자들이 보는 거는 그것과는 별개로 이 현상은, 여러분이 그 책을 보셨는지 안 보셨는진 몰라도, 저 프랑스 사람 샤르댕 (Teihard de Chardin 1881-1955)의 책 말이에요. 우리나라에선 이효상 씨가 번역해서 냈지요.『인간현상』(Le Phenomene humain)이라고 하는 거. 원어는 프랑스 말로 났을 테고, 내가 본 거는 영어 번역으로 보고 그랬는데 우 리 말로 번역됐으니까 한 번씩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보시오.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거예요. 현상, 이거 다 우리가 모양살이로 사람은 이렇게 생겼다든지 저 나무는 저렇게 생겼다든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현상의 세계 아니에요? 현상의 세계, 물질계라 그렇게 말 해도 좋지만 물질이나 뭐나 다 현상으로 나타난 거니까 사람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설명하잔 책이에요. 그는 제수이트(Jesuit)파의 신부였는데, 그이가 전공한 것은 고생물학이고 독실한 크리스천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지요. 이제 그런 신앙을 가지고 학문적인 말로 이 우주를 설명 해보자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면 이 우주는 마지막에 어느 한 점으로, 학문적으로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는 그 어느 ‘오메가 점’을 향하여 나간다고 그런 말 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이제 말하고 싶은 거는 이이의 신앙은 기독교 신앙인데, 그것을 이 현상의 세계의 인간을 기독교적 입장에 서서 설명을 해보자는 거예요.
신앙을 과학과 연결하려는 샤르댕의 입장
그 사람은 물론 진화하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그 사람의 말은 내면의 세계를 말하자는 것인데, 지구는 앞으로 조금만 더 알면 다 알게 되는 거니까, 다른데로 갈수야 없고 하니까, 이제는 인류의 앞날이 있다면 ‘내면화’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겁니다. 지구가 아주 한정이 돼서 형용을 하려고 그런다면, 우리 맘으로 본다면 이건 뭐 불과 요만한 한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럴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돌아가서 아주 작은 것이 되고 말았어요. 지금은 더구나 기술이 크게 발달해서.
그러면 이건 샤르댕이 한 말은 아닙니다만 성경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하나님이 인류를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해라. 땅에 충만해라. 만물을 다스려라”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나 지금은 생육하고 번성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걱정났어요. 다스리는 게 아니라 이제 망하게 돼 걱정나지 않았어요? 그래 저 언젠가 유영모 선생이 우리보고 말씀하시다가 그랬어요. 그때엔 문제가 이렇게까진 심각하지 않았는데도 뭐라고 그러셨는고 하니, 조금 우스운 말이지만 “이제 종자바가지가 쏟아져서 걱정이다” 그랬어요. 인간이 낳는 정도가 아니라 “씨바가지가 엎어졌다” 그랬어요. 이제 그러니까 문제가 이렇게 어려워졌다 그 말이에요. 그럼 이제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 말이 어떻게 된 말이냐? 이건 하나님도 모르고 한 말이냐? 이게 생육하고 번성한 거냐? 이거 뭐 낳기는 고사하고 바가지가 쏟아진 셈으로 이렇게 돼서 낳는 것이 걱정이 돼서 사람이 서로 뱃속에서 죽이고 있잖아요? 그러니 그런 건 성경을 보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하나님 믿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성경을 보게 된다면 그럼 이거 어떻게 된 건가? 기독교란 뭐냐? 하나님이 말씀하신 건 뭐냐? 당연히 그게 의심이 될 게 아니에요?
이제 그런 데 참고로 하는 거는 샤르댕이 그래요.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발달이 되고 보니까, 옛날에는 땅끝이 어디 있는지 몰라, 땅하고 하늘하고 맞붙은 줄 알았는데, 지금은 뭐 싹 돌아서면 요거 뭐 요만한 거예요. 이젠 여지가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문명이 발달된대도 이젠 이 땅에선 갈 데가 없어요. 캐먹을 게 밑천이 다 돼서 걱정 아니오? 그러니 하나님이 축복하고 여기서 무한히 발전하라고 했다는 말을 이걸로 하려다간 설명이 안되고 말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 뭐라고 그랬는고 하니 이젠 “내면화의 방향으로 진화가 있을 거다” 그랬어요. 내면화란 뭔고 하니 이 현상세계완 딴 것인데,그러니까 심지어 이제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만 우치무라 선생한테 우리가 배울 때도 무슨 얘기를 하다가 “하늘나라라고 하는 거, 우리 천국이라고 하는 거는 어느 별나라에 어디 준비가 돼 있는지도 몰라요.” 우스개 말 비슷하게 그렇게 말씀 했지만, 나는 그렇게는 생각 안해요. 그럴 수가 없지. 지금 우리 과학이 발달됐으니까 온 우주가 무언지 빤히 다 알고 있는데 말이오, 가긴 어딜 가겠어요. 그건 샤르댕의 말이 옳은 겁니다.
생명이 이렇게 발달을 해오다가 생각하는 인간에 와서는 이제는 생각한다 하기 때문에 한 새로운 단계가 나왔다, 그 말이에요. 존(Zone)이라고 그래요. 그 사람 존이라고 그랬는데 첨에는 단세포 그 담에는 식물, 동물, 동물에서도 또 포유류, 이렇게 차차 나오잖아요? 나오다 이제 사람에 와서는 사람은 두뇌를 가지고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데, 생각하면 그 뭣에 도달하냐 뭘 하는 거냐 그러면 뭐가 있어야 할 게 아니에요? 지금 보면 생각으로 해서 열린 게 소위 정신의 세계라는 거, 영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에게는 영의 세계라는 것은 허황하다, 그건 실체가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지만 그건 무식한 소리예요. 벌써 이미 생각하는 한 사람이 생겨서 육신을 초월해서 순수하게 생각으로, 생각 속에 있는 그 세계를 개척하기 시작했으면, 천만 사람이 못했더라도, 그 한 사람으로 인해서 하나의 새로운 단계가 열린 거니까, 이 앞으로는 이제 거기에 있다 그래야 옳을 겁니다.
그러니 샤르댕의 그 말은 참 좋은 말인데, 이렇게 우주가 물질적으론 한정이 된 거니까 인간이 물질적으로 발전할 여지는 없는 거고, 앞으로 인간이 만약에 발전을 한다면 이제는 ‘내적’ 인, 이 ‘안’으로 ‘정신’적인 데로 할거다 그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직은 모르니까 그 안에 무엇이 어떤 형식으로 될는지 추측을 할 수야 없지요.
핵전쟁으로 지구가 파멸해도 정신세계는 건재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데에 “미래를 향한 굉장히 긍정적이고도 함축적인 무한한 것이 거기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면 심지어 요새 핵전쟁이 한번 나기만 하면 이 지구 전체를 바쉬먹을는지 다 태워버릴는지 모르지만, 이거 탄다고 그래서 적어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예수면 예수, 석가면 석가 같은 이로 인해서 개발이 되었던 그 세계는 여기서 뭐 핵전쟁이 일어나서 다 타버린다고 해도 그걸로 인해서 없어지는 세계는 아닐 것입니다. 그건 믿어져요.
그러니까 샤르댕의 말을 여기 인용합니다만 거 근래 과학이 말한다고 해서 너무 단순하게 비관적으로 ‘아무것도 없다’ ‘허무’ 그런 데 빠지지 마시도록. 사람이란 언제부턴가는 모르지만 본래부터가 사람이 살아가는 그것이 물질적으로 얼마만큼 쾌락하게 살아가나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보람을 느끼는 거, 그것이 사람의 사는 원리로 돼 있어요. 그건 우리도 다 지금 알고 있잖아요? 제일 문제가 뭔고 하니 “아이고 아이고 내 마음 답답”이 문제에요. 그러면 안돼요. 답답하다, 맘이 답답하다는 것은 내속 정신의 세계가 숨통이 막혀서 그래요. 우리의 육체는 공기를 숨쉬고 있지만, 공기만 숨쉬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숨을 분명히 쉬고 있는데 그 정신적인 숨을 쉬지 못하는 고로 그런 거에요. 우리가 답답하다가도 이 성경을 펴놓고, 성경의 좋은 것을 골라서, 그전에 내가 읽어봤던「시편」어디라든지「이사야」라든지 가령 산상수훈이든지 읽어보세요. 그럼 그 숨이 열리나 아니 열리나.
우리 육신의 숨이 답답하다가도 여기 연곡에라도 와서 서울 공기보다 좋은 공기를 마시면 시원해지는 거를 알지만은, 이 공기는 또 없어질 날이 있을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그 사람 몸뚱아리 사람만이 답답하다 시원하다가 있는 거 아니라 우리 속의 사람은 더군다나 답답하다 시원하다가 있어요. 그리고 지금만이 아니라 인류가 처음 인류로 나오던 그 때에 있어서도 인류가 인류답기 시작된 거는 속의, 정신적인 숨을 쉬면서 살아온 그것 때문에, 그 속사람 때문에 발전이 되어온 거니까, 이제 이 앞으로도 진정한 소망이 있나 없나는 그것으로 결정이 되는 것이지, 여기 무슨 공기가 더 있을 수 있느냐 없느냐, 석유자원이 계속이 되느 냐 아니냐, 태양 에너지를 발견하느냐 못하느냐에 있는 게 아니에요. 물론 육신의 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그걸로 되지만, 그리고 이 땅에서 그것이 계속이 돼가면서 그 정신 살림을 할 수 있다면 다시 없이 좋은 일이지만, 만일 안 그런다면 도리어 우리가 순 정신적인 면으로 정말 놀라운 발전을 하기 위해서 여기 이 현상적인 생명줄이 탁 끊어질는지 누가 알아요?
그거는 너무 공상 같은 일이 아니냐 그렇게 말할는지 모르지만 정신이란 거는 이날까지 발달되어오기를 “그럼 그런 구멍이 어디 있나?” 그런 생각을 해오는 동안에 늘 새로운 구멍이 요렇게 열리고 조렇게 열리고 해서 온 거요. 과학적인 발전이 나올 때도 그런 거니까 사람으로서 제일 중요한 거는 엉뚱한 터무니도 없는 생각을 하는 데서 와요. 왜 그러냐 하면 터무니없는 생각을 내가 하자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어찌 오는지 나에게 터무니도 없는 그런 생각이 나오고는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런 것을 과거의 과학에 있어서도 발명을 한 사람들도 그랬지만, 석가 같은 이 어째서 그런 생각 했나? 예수 같은 이 어째 그런 생각을 했나 하는 점 좀더 깊이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우리하고 예수하고를 같은 인간인 줄을 알아야만 믿는 거지, 그는 인간이 아니고 독특한 뭣이다, 그래 가지고는 우리가 예수를 믿지 못하게 돼요. 그리고 또 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거니 그런 따위 생각에만 묻혀 가지고는 예수가 열어놓은 나라를 그건 뭔지 모르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그를 하나님이요 사람이요, 과학으로는 도저히 말이 안되는 “사람이면서 하나님이다” 그런 존재예요. 그런데 이걸 교리적으로 사람들한테 틀어막으려고 하니까 이게 무리가 돼서 여러 가지 미신도 나오고 이러지만,「요한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는, 그런 것을 열어가는 데 퍽 도움이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마 서양 사람보다는 동양 사람들이 이 구멍을 뚫고 나가는 데는 더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서양에서 난 이 기독교 중에서 동양 사람 모양으로 생각을 하는 것은 그래도 비교적 퀘이커 사람들이 그래요. 그거는 뭐 자기네도 다 아는 거지만, 그 사람들은 다분히 동양적인 데가 있잖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 떨어진 면이 있다고 해서 비관할 거 없어요. 과학적으로 뭐 다 됐다 해서 그것 때문에 낙심할 거 아니고, 이제 와서 정말 예수란, 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누구냐? 이게 정말 뭐냐? 당초에 어떻게 되는 지경이냐? 이걸 생각해야만 되는 겁니다.
불교를 내가 잘 모르니까…… 불교 것도 좀 빌어서 얘기하면 좋겠는 데, 불교는 그건 내가 잘 몰라요.
불교나 기독교나 근본은 같은 것
하지만 나는 생각하기를 기독교나 불교나 근본적인 면에서는 같다고 봐요. 어느 종교라도 고등종교는 근본에서 말하면 다를 리가 없다, 똑 같은 지경을 체험했는데 그 사람의 개성이 다르든지, 그 민족의 문화관계 이런 걸 따라서 말이 다르게 발표됐을 뿐이지, 상관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걸 증명하려면 증명을 하기가 어렵지만 믿기는 그렇게 믿는 사람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 앞으로는 이제 그렇게 믿는 믿음이 아니고는 이걸 뚫고 나가기가 어려울 거다, 현실문제 어려운데 막혀서 현실문제가 어렵다고 해서 우리가 낙망이 되고 죽는 종교라면 사람 건질 수 없는 종교 아니요! 그걸 가지고 뭐를 건지겠어요.
그러니까 서로 될 수 있으면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핵전쟁이 나오지 않도록, 무슨 일을 해서라도 그거 방지하기에 힘써야 돼요. 지금 우리의 처지, 우리 같은 나라에 났더라도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더 앞장을 서야 하는지 몰라요. 우리가 생각이 없는 것만이 잘못이지, 우리의 처한 이 입장 때문에 그거 못하는 거 아닙니다. 그래선 안돼요. 우리가 이 지구를 맡았으면 어떡하든지 이걸 건지는 게 우리의 책임인데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못하더라도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의 잘못한 일로 인해서 이 지구를 그냥 유지해가질 못하고 어떻게 잘못되는 일이 있다 그런다면, 그렇더라도 우린 거기서 탈출할 그런 구멍이 있어야 될 겁니다. 우리라고 해서 이 몸이 있어 탈출하는 거 아니지만, 우리 믿는 믿음으로 해서 그런 겁니다. 그런 걸 믿는 믿음이 안 생기고는 현재 사는 이 살림에서 보람을 느낄 수가 없잖아요?
우리가 그런 게 중요한 건데, 이제 우리 처지가 이렇게 어렵기 때 에 그러는데…… 앞에 다가오는 과제가, 굉장히 어려운 과제가 있어요. 어렵기 때문에 그 대신 굉장히 희망적인 놀라운 과제가 우리게 있다는 걸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우주개발이란 그런 따위가 아니고一그런 그 우주개발 따위 가지고는, 적어도 그걸로만 가지고는 안될 겁니다 우리 이런 신앙이 아니고는 개발이 안될 겁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오던 그 일이 무슨 일대의 큰 고비를 넘으려고 해서 이렇게 되는 것이니까, 그런 점을 우리 믿음이 모르더라도, 모르면서도 점점 무슨 확신이 생겨 가는 것이 있어야겠는데, 그런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라는 그 인격이 상당히, 상당히만이 아니라 그것만이 그 문제만이 우리 문제에 걸려 있는 것이에요. 그걸 내가 어떻게 믿나, 믿는다는 것이 그걸 깨치고 들어가는 것인데, 그러면 그걸로 인해서 이날까지 우리 알면서도 모르고, 잘, 밝은 해석을 못했던 고로 이러고저러고 했는데, 이제 그런 게 일단 새로운 단계가 올려고 해서 이렇게 되는 게 아닌가, 기대감이 우리 속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1981년 8월 2일 연곡에서 퀘이커 모임 수련회에서 하신 말씀.
친우회보 1981 가을호
저작집30; 21- 171
전집20; 19-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