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이 아닌 조언으로 / 이임순
88올림픽이 개최되던 해부터 자동차를 운전했다. 어느덧 운전경력이 수월찮다. 운전은 오래 했다고 잘하는 것이 아니다. 설사 잘한다 하더라도 자랑할 것은 못 된다.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을 잃기도 하니 뽐낼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운전은 안전이 보장되어야 하니 나만 잘한다고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언제 어디서 생명을 가로채 갈 지 모르니 도체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 요인을 방어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오늘 운전하다 난처한 일을 겪었다. 지리를 잘 모르는 객지에서 일방통행의 길로 간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앞의 차가 가지 않고 멈추어 서 있어서 투덜댔다. 불만이 가득한 내게 반대편 차선의 운전자가 머리를 내밀고 창문 내리라고 신호를 보낸다. 그는 “여기 일방통행입니다. 사고가 나면 다 아주머니 책임이에요.” 한다. 순간 놀라 당황해하니 미소를 띠고 상냥한 목소리로 조심히 가라는 말을 남기고 천천히 빠져나간다. 아차 싶다. 등골이 서늘하다.
엎질러진 물이다. 침착하게 위기를 넘겨야 하는데 긴장하니 가슴이 마구 뛴다. 옆에 주차된 차에 바짝 붙여 조금이나마 길을 넓힌다. 심호홉으로 숨을 고르며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반대편 차선의 운전자에게 머리를 주억거린다.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내 심사를 알 리 없는 반대편에서는 차들이 꼬리를 문다. 점심시간인 데다 식당가 주변이라 복잡하다. 영락없이 독 안에 든 생쥐 꼴이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했던가.’ 잠시 자동차의 흐름이 멈춘다. 얼킨 자동차 틈에서 얼른 핸들을 좌측으로 꺾고 우측으로도 꺾어 바로 옆 건물의 주차장으로 간신히 들어간다. 안도의 숨을 쉬며 차를 돌려 나가면서 보니 일방통행 표시가 길바닥에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다. 눈뜬장님이 된 기분이다. 그러면서도 무사히 빠져나온 것이 다행이다. 불안했던 마음이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온다. 평정을 찾으니 30분 남짓한 시간이 몇 년을 산 것 같다.
일방통행, 운전하다 보면 가끔 그 입간판이 눈에 띨 때가 있다. 자기가 사는 지역은 도로 사정을 알고 있으니 피해 가면 된다. 문제는 초행길이다. 긴장한 상태에서 운전하다 보면 표시해두거나 간판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오늘 나처럼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지혜로운 분을 만나 낯뜨거운 꼴은 당하지 않았는데 다른 운전자들은 핏대를 올려 인상을 쓰고 힐긋거리며 갔다. 그래도 지은 죄가 있어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다. 인상도 쓰지 않고 웃는 낯으로 조심히 가라고 염려까지 해준 그가 생각할수록 고맙다. 내가 상대편 운전자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혹여 내 주변에서 생기면 나도 그렇게 상대방이 긴장하지 않도록 다독여 줄 수 있을까?
인격은 위기의 상황일 때 나타난다고 한다. 보통의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고 갔다면 그때 기분은 더러웠겠으나 지금쯤은 기억도 하기 싫을 것이다. 순한 눈빛의 그분이 자꾸만 떠오른다. 가슴에 새겨지는 충고를 해주었는데 당황한 나머지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했다
’천 냥 빚도 말 한마디로 갚는다’는 말을 되짚어 본다.
내게 깊은 인상을 준 생면부지의 그 운전자한테서 느낀 바가 많다. 천성은 바꿀 수 없다고 하는 데 노력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내 목소리는 투박하다. 보통 음성으로 말을 하는데 왜 화를 내느냐고 한다. 앞으로는 입꼬리는 살짝 올리고 목소리 톤은 한 음 낮추어 웃는 얼굴로 말을 하려고 한다. 목소리가 부드럽지 않으면 인상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이도 저도 갖추지 못했으니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깊은 인상을 준 그분이 나처럼 투박한 말씨거나 표정이 좋지 않았다면 내 잘못은 덮어두고 재수없어 성격 더러운 사람 만났다고 볼멘소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 천당과 지옥을 오간 느낌이다. 여성 운전자의 웃음 띤 모습이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보름달 같다. 나도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문병을 다녀오면서 / 이임순
지인이 입원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평소 신세 지는 것을 꺼리는 분이라 소식을 전해주면서도 염려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며칠 전에 만났을 때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신 말씀이 자꾸 생각난다. 두 마음이 팽팽하게 줄다리를 한다. 힘들 때 위로라도 드리고 지청구를 듣더라도 뵙고 싶다는데 더 반기를 들 수 없다.
병실 문을 두드린다. 평소의 인자한 모습 그대로 침대에 앉아 계신다. 적적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손녀가 갈아입을 속옷을 가지러 갔다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가끔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럼 내가 방해꾼이냐고 하니 당신 때문에 괜히 바쁜 사람이 시간을 축내서 미안하다 하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이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참 곱다. 그 모습 속에 어진 성품이 오롯이 담겨있다.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내공이 쌓인 사람의 자연스런 표정이다.
깔끔한 성격이라 평소에도 조심스런 분이었다. 가끔 내게서 당신 젊은 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단손에 아이 넷을 키우면서 농사짓고 시부모 봉양하며 틈틈이 문학 활동도 했다. 저녁으로 책을 읽을라치면 잠이 쏟아지면서 도둑이 가로채 가듯이 손에서 벗어났다. 그런 뒷날이면 몸이 가뿐하고 집중력이 있어 일의 능률이 오르고 글감도 생각났다.
책은 오늘 못 읽으면 다음 날 봐도 되는데, 잠은 그날그날 자야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한다. 어쩌다 한두 번은 보충이 되었는데 계속 잠을 아끼다 혼난 적이 있다고 한다. 차분히 만나면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며 내 두 손을 꼬옥 잡는데 가슴에서 따뜻한 물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진정 어린 충고의 말씀이다. 요즈음 이상한 징후가 몸 여기저기서 있었다고 한다. 원인을 되짚어 보니 며칠씩 잠을 자지 않은 날 몸에 쌓였던 에너지가 빠져나가면서 자국을 남긴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그 모습이 늦가을날 황량한 길을 축 처진 어깨로 걷는 것처럼 보여 마음이 아리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용히 타이른다. “내 말 명심했으면 좋겠다.” 하는 지긋한 눈빛에 그분의 온 마음이 담겨있다. 잠은 충분히 자라고 또 당부를 한다. 세월 앞에 장사 없는데 그나마 잠이라도 자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자의 말이니 명심하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한다. 나에 대한 사랑이 오롯이 담겨있음이 느껴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환자복 위에 옷을 걸치더니 나가자고 한다. 내게 맛있는 점심 먹여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흰쌀밥을 먹으면 혈당 수치가 올라 지인들 모임이 있는 날에도 현미밥으로 도시락을 준비해 가서 먹는 분이다. 그런데 나를 위해 식당 밥을 먹겠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당신 건강도 현미밥을 철저하게 고집한 결과라고 하신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어떻게 따라나설 수 있겠는가. 겨우 설득하여 혼자 병실 문을 나서는데 뒤따라 오실까 봐 마음이 조급하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은 자기 몫을 내려놓아야 가능할 때가 있다. 남의 것도 욕심나는 세상인데 자기 몫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지인의 나에 대한 배려는 곳곳에서 묻어났다. 급히 가느라 목에 스카프를 두르지 못한 날이 있었다. 당신 것을 내게 둘러주시며 입고 있는 옷과 잘 어울린다고 했다. 바람이 머리를 헝클어 놓은 날은 가방에서 핀을 꺼내 꽂아주며 이제야 핀이 주인을 제대로 만난 것 같다고도 했다. 매번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무엇이든지 주고 싶은 당신 마음이라며 미소 지었다. 예쁜 구석이라고는 없는 나를 챙겨주시는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부지런히 사는 모습이 예뻐서라고 했다. 나와 잘 다니는 친구가 있다. 그녀는 지인과 나는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그분이 눈빛이 내게 머물 때는 평소와 다르다고 한다. 당신 젊은 날의 모습을 내게서 보는 듯 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과정이 다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슷해질 때도 있고 반대의 방향이 되기도 한다.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은 다름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지인이 나를 배려하는 것은 다름을 인식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색깔이 다르고 성격도 제 각각이다. 그러니 모두가 같을 수 없다. 살아가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정답은 없다. 다만 본인의 만족도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질 뿐이다. 지인이 그랬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는 지인의 눈빛이 고운 것도 마음을 비워야 지을 수 있는 미소가 아닌가 싶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찌 남이 나를 알겠는가. 다만 서로 다름을 인식할 때 배려가 있고 상대방이 이해도 되지 않을까? 지인이 나를 챙기는 것도 당신과 나의 다름을 인식하고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 고마움을 알기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어서 훌훌 털고 완쾌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