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대🍁 | |
✿1882년 음력 7월 23일 임오군란이 일어남.
신식 군대 별기군
고종 19년인 1882년 6월 5일, 13개월 동안이나 녹봉미를 받지 못한 무위영(武衛營) 소속의 군인들이 우선 1개월 치를 선혜청(宣惠廳) 도봉소(都捧所)에서 지급받았다.
이들이 한 해 전부터 동요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정부가 6월 초 서울에 도착한 전라도 세곡(稅穀)을 내주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받은 쌀은 절반이 겨와 모래였다. 선혜청 관리들의 착복에 격분한 이들은 쌀 수령을 거부하고 시비 끝에 담당 고지기(庫直, 고직)를 구타했다.
이에 고지기의 상전인 선혜청 당상 민겸호(閔謙鎬)는 김춘영(金春永)과 유복만(柳卜萬) 등 주동자 네 명을 잡아 가두었다. | |
✿1895년 7월23일..동학혁명 지도자 전봉준 교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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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 |
🌲03년 드자동차 첫 판매
1903년 7월23일...포드자동차 첫 판매, `모델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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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년 정부, 국민들의 황무지 개간권 반대 시위에 호응. 한 치의 땅도 외국인에게 대여하지 않겠다고 고시. | |
🌲31년 아동문학가 방정환 세상 떠남
소년운동과 아동문학의 선구자였던 소파 방정환 선생.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소파 방정환 선생이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1931년 7월 23일 사망했다. 방정환은 1899년 서울 종로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조실부모해 고아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는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내면서 얘기꾼으로 소년들을 끌어 모았고 이 얘기들이 소년들에게 인기를 끌자 `소년 입지회`를 만들정도로 운동가의 기질을 일찍부터 보여주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소파는 선린상고에 진학했으나 2년 만에 중퇴하고 생계를 위해 취직을 해야했다.
당시 청년운동 여성운동 소년운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던 천도교당을 찾은 것은 소파가 일생을 `어린이 사랑`으로 일관하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때 그는 손병희의 눈에 들어 그의 셋째 딸 손용화와 결혼하게 된다.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한 소파는 일본 동양대학 문과에 들어가 아동문학에 전심, 1921년 귀국후에는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번안하기도 했다. 1923년에는 손진태, 윤극영 등과 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어린이날`로 정해 행사를 가졌다. 소파는 전국소년지도자대회를 개최하고 소년운동협회를 결성하는 등 어린이 사랑에 대한 활발한 노력을 하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이날 생애를 마감했다. | |
🌲36년 `홍도야 우지 마라` 초연(初演)
`홍도야 우지마라`를 공연한 청춘좌 일동, 황철(우)과 동양극장 전속극단 청춘좌 단원들(좌)
`한국형 최루극`의 원조 `홍도야 우지마라`가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극장이었던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에 의해 1936년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초연됐다. 가난했던 시절, 비극적인 홍도의 삶에 사람들은 눈시울을 적셨고, 몰려든 인파로 극은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홍도야…`의 원 제목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였지만 유랑극단들이 임의로 이름을 바꾸는 바람에 `홍도야…`로 널리 알려졌다.
영화 포스터, 감독; 전택이 주연; 신영균 김지미 이수련
노래로 더 잘 알려진 `홍도야…`는 1940년 김영춘이 노래하고 콜롬비아 레코드가 제작했다. 희곡은 일제시대 최고 인기배우였던 문예봉의 남편 임선규가 썼으나 1948년에 문예봉과 함께 월북하는 바람에 우리에게는 노랫말만 익숙할 뿐이다. | |
🌲38년 총독부, 교원·공무원 12만명에게 제복 착용 지시. 🌲42년 김두봉, 조선독립동맹 조직 🌲50년 국민병 소집 🌲60년 전국 은행 노조 연합회 결성. 🌲65년 전북 옥구에 농협 최대의 도정공장 준공 🌲65년 이승만 전 대통령 유해, 하와이에서 돌아옴 🌲66년 중부지방 큰 비 내려(7월23-7월26) 67명 사망 116명 실종 | |
🌲67년 미국 디트로이트서 사상 최대 흑인폭동
폭동에 가담한 흑인이 피를 흘리며 구속되고 있다.
흑인에 대한 실질적인 차별문제가 해결되지 않은채 수렁에 빠진 베트남전의 전쟁비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정부가 약속했던 복지정책마저 실행하지 않자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1967년 7월 미국의 흑인폭동이 전국적 규모로 번져 동부 뉴욕에서 서부 샌프란시스코까지 그리고 북부 디트로이트와 그랜드래피즈, 또 시카고에서 남부 피닉스와 휴스턴에 이르기까지 전국 17개 도시에서 연달아 일어났다. 뉴욕시 맨해턴의 가장 번화한 5번가에서도 흑인청소년들이 7월 26일 밤 상가를 파괴,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존슨 미국 대통령은 흑인폭동으로 거의 마비된 디트로이트에 4천1백명의 공수부대 병력을 급파했다.
연방군이 투입된 디트로이트시는 27일 밤 저격수들과의 총격전이 그치고 폭동발생 5일만에 점차 평온을 돼 찾았다. 디트로이트시의 사망자수는 36명으로 미국현대사상 가장 큰 폭동 피해를 기록했다. 부상자도 약2천명 정도, 체포된 시민수는 3천5백명에 달하며 방화와 약탈로 인한 피해액은 1억5천만 달러 이상으로 집계됐다. | |
🌲73년 수원 팔달산에 홍난파 노래비 세움 🌲78년 정비불량 서울 시내버스 한강 추락(승객등 33명 사망, 13명 중경상) 🌲81년 전국 민주 학생 연맹 전국 민주 노동 연맹 사건 발표. | |
🌲82년 국제포경위원회, 포경전면금지를 결정
반(半)인어 모습으로 포경반대를 호소하는 데모대와 3년의 유예기간동안 상업적인 포경을 전면금지하기로 한 국제포경위원회(IWC) 위원이 서로 악수하고 있다.
1982년 7월 23일 국제포경위원회(IWC)가 1986년 이후 상업포경을 전면금지하기로 결정했다. 1972년 스톡홀름 유엔 인간환경회의가 `고래가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며 10년간 포경 금지를 요청하자 10년간의 갑론을박 끝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IWC(국제포경위원회)는 당초에는 고래를 관리해 계속 잡아나가려는 취지에서 1946년 설립됐다. 당시 무분별한 포경으로 고래 자원의 감소 징후가 뚜렷해지자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국제적인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관리 대상은 전체 80여종 중 밍크고래 등 대형 9종. IWC는 산하 과학위원회가 고래 자원 유지가 가능하도록 합리적인 할당량을 제시하면 이에 대한 포경업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본 회의에서 포획량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본회의에서는 보통 할당량을 상향 조정하게 돼 `고래 고갈`에 직면했다. 이같은 위기감이 반영된 것이 이날의 포경전면금지 결정이다. | |
🌲85년 남북국회회담 첫 예비접촉(판문점), 국회회담 위한 서울∼평양간직통전화가설등에 합의 🌲87년 북한, 남북한 및 미국이 참가하고 중립국감독 위원회 대표가 옵서버로 참가하는 다국적군축협상 제의 🌲88년 일본 공동통신, 박철언 보좌관이 6월 노태우 대통령의 특사로 소련과 중국을 방문했다고 보도 🌲88년 인천지법 형사2부, 성고문 문귀동 피고에게 징역 5년 자격정지 3년 선고 🌲89년 해운대등 전국의 피서지에 300만명의 인파가 몰려, 48명 익사 🌲90년 정부, '8ㆍ15범민족대회'에 우리측 단체ㆍ인사 들의 참가를 허용키로 🌲90년 연형묵 북한 총리, '7ㆍ20민족대교류' 제의를 협의키 위한 실무회담개최를 거부 🌲90년 방송구조 법안등 날치기통과-평민-민주등 의원직사직서 제출 🌲90년 시멘트 품귀 가수요 악순환-10개 시멘트공장, 3470만톤 🌲90년 부산시 해운대 반송동 주민, 일주일째 동네에 산업쓰레기 매립장 건설 반대를 외치며 국도 점거 농성. 🌲90년 평민당 소속의원 70명, 민주당 소속 5명과 무소속의 김현 서경원 의원 국회의원직 사퇴서 제출. 🌲90년 북한 조선 고고연구, 방형준원분이 발굴 됐다고 보고. 🌲90년 여자양궁 김수녕 선수(19·고려대)는 태릉 훈련원에서 3개의 한국 및 세계신기록을 수립 🌲91년 국회, 본회의를 열고 4조1985억원 규모의 91년도 제2차 추경안을 정부 원안대로 통과 🌲91년 정부, 폴리아세탈수지 국내 덤핑한 듀퐁과 일본의 아사히케미컬 3사 덤핑방지관세4.0~9.7% 부과. 🌲92년 서울지검, 정보사 부지 매각사기 사건은 660억 원을 사취한 단순 사기 사건이고 배후는 없다고 발표. 🌲92년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범국가 투쟁본부, 서울 등에서 단식 농성 시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