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니은의 나라로 들어가니 ‘나’가 먼저 반갑다고 손을 내미네. ‘나는 세계의 중심’이란 말이 문득 생각나. 그런데 나는 진정 ‘나’라고 하는 집에서 주인으로 살고 있을까. ‘욕망의 나’는 ‘본연의 나’를 버리고 도망갈 때가 많거든. 실은 나도 내 안에 얼마나 많은 ‘나’가 있는지, 나조차도 ‘나’를 잘 모르겠어. 유행가 가사도 있잖아.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아마 나 하나만 주인공으로 삼아 글을 써도 책 몇 권은 족히 넘을 거야.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알려고, 그 숱한 물음표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몰라. 인생지도에서 마땅히 서야할 자리를 찾는 것, 나를 제자리에 놓는 게 쉽지 않거든. 대중의 사랑을 받는 방탄소년(BTS)단의 리더 ‘김남준(RM)’이 유엔 연설에서 한 말이 기억에 남아.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누구이고 싶은지 모두 포함해서 나를 사랑하세요.”라고 하더군. 실수를 한 어제의 나도 여전히 ‘나’이고 조금 더 현명해진 오늘의 나도 여전히 ‘나’라고 그들은 노래해. 실수로 생긴 흉터까지도 다 자신의 별자리니까 감추지 말고, 누군가 만들어 놓은 틀이나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지 말고, 스스로의 이름과 목소리를 찾으라고 외치네. 현재의 성취는 물론 과거의 실패나 상처까지도 온전히 자기 안에 껴안으려는 긍지와 패기가 대단해. 이들의 ‘나’는 ‘작은 것’에 시선을 돌리며 ‘우리’로 ‘함께’ 나아간다는 데 더 가치가 있어. 신화와 우주를 넘나드는 노랫말로 정신의 진폭을 확장하는 우리의 젊은이들, 엄지척이야.
너, 나를 돌아보노라면 홧홧하게 따라오는 것이 있어. 바로 ‘너’야. 너는 너를 잘 아니?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너희’나 ‘너희들’이란 말은 있어도 ‘나희’나 ‘나희들’이란 말은 없네. 아, ‘저희’나 ‘저희들’이 있지.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단수야. 너도 단수이긴 하지만 수많은 너와 너희들은 복수인 게야. 반대로 저쪽의 너희들이 볼 때는 이쪽의 나는 바로 너이고 너희들의 무리 중 하나일 뿐이겠지. 나, 너, 두 글자의 형상을 자세히 봐. ‘나’의 ‘ㅏ’는 손을 기둥 바깥으로 내밀고 있어. 악수하자고. 그런데 ‘너’의 ‘ㅓ’는 손을 기둥 안쪽으로 감추고 있지. 서로 손을 내민다고 하면서도 실은 서로 손을 숨기고 있는 게야. 나도 너도. 서로가 그리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안 그런 척, 속으로 삼키고 마는 게 아닐까. 어쩌면 나와 너는 애초부터 하나가 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일지도 몰라. 요즘엔 혼즐족이나 혼놀족도 꽤 많아. 혼자 밥 먹는 혼밥족이나 혼자 영화 보는 혼영족 쯤은 다반사이고 혼술족은 술도 혼자 마셔. 하긴 혼자 즐기고 혼자 노는 시간이 차라리 편할 때도 있긴 해. 상처를 주고받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면서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리기도 하지만 그건 자유인 동시에 또 다른 외로움의 표시일지도 몰라. 그것이 포기보다는 비움이길, 고독한 자아의 합리화보다는 진정한 행복이길 바랄 뿐이야. 이곳저곳에서 과대하게 ‘행복한 나’와 ‘자랑스러운 나’가 ‘포장된 나’로 넘쳐나는 건 그만큼 소통욕구나 결핍이 많다는 반증이 아닐까싶어. 나는 있는 그대로의 너와 두 손을 맞잡고 싶어. 혹시 이거야말로 ‘나는 바담풍해도 너는 바람풍해라’ 하는 건 아닐지, 네 손이나 먼저 내밀라고 지청구를 듣는 건 아닐지. 아무튼, 나, 너, 가릴 것 없이 우리 함께 ‘어깨동무 씨동무’ 노래하며 노닐면 어떨까. 알고 보면 나든 너든, 모두 나그네들인 걸. 풀도 나무도 ‘나도, 너도’를 외쳐. 나도-밤나무, 나도박달, 나도냉이, 나도댑싸리, 나도, 나도, 어휴, 많기도 해라. 이쪽에서 나도, 나도, 하고 외치니까 저쪽에서는 너도-밤나무, 너도-바람꽃, 너도-양지꽃이 손을 흔드네. 저들도 ‘나도, 너도’ 왕국에서 하나가 되고픈 겐가.
나비, 나풀나풀, 나불나불 날아다닌다고 나비라 했다지. 나는 어릴 때 나비가 되고 싶었어.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노래하며 내가 나비라도 된 양 어른들 앞에서 사뿐사뿐 춤추고 재롱 떨던 시절, 동네 들판이랑 앞동산엔 나비가 무척 많았어. 검은 바탕이나 푸른 바탕에 태극무늬가 그려진 나비가 제일 신기했어. 호랑나비나 노랑나비 뒤꽁무니도 쫓아다녔지. “나비 만지고 눈 비비면 눈 먼다”고 어머니는 말리셨지. “흰나비는 죽은 사람 영혼이 환생한 거야”라고도 하셨어.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말을 믿었어. 나비가 그리스어로 프시케(psyche)이고 마음이나 영혼에 비유된다는 건 나중에 커서야 알았어. 그리스 신화에서 프시케는 사랑의 신 에로스의 연인이었지. 그런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어. 모처럼 야외를 나간 날이었어. 숲속에 멋진 카페가 있더군. 전면이 통유리로 꾸며진 카페에선 고즈넉한 바깥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어. 무심히 망중한을 즐기는데 나비 한 마리가 눈길을 사로잡는 거야. 바로 눈앞 유리창에 날아와 부딪쳐 떨어지더니 다시 기어오르고, 또 다시 기어오르기를 거듭하더군. 마치 안으로 들어오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어. 에로스를 찾아 나선 프시케의 영혼이 저러했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어. 혹여 무리 속으로 진입하려 애쓰는 인간초상이 저 나비 같지 않을까. ‘나와 너와 우리’ 사이에도 저런 유리벽 하나쯤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닐까. 가까이 보이는 듯 닿을 듯하면서도, 끝내 닿을 수 없는 완고한 경계 같았어. 장자(莊子)는 ‘호접몽’에서 물화(物化)를 이야기했지만 유리벽은 인간의 숙명인지도 몰라. 나비는 길상(吉祥)이나 행복도 상징한다지? 갓난아기가 나비잠 자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행복해. 아, 또 있어. 재생과 부활. 그 곡선과 색채와 무늬는 아름답지만 알로 태어나 애벌레와 번데기를 거치는 나비의 속 삶은 숙연해. 그렇듯 치열하게 완전변태를 거쳐야 인생도 승화되는 게 아닌가 싶어. 우리 선조들은 나비문양을 여러 곳에 즐겨 썼어. 우리 집 문갑에서도 열쇠고리에서도 나비가 눈인사를 해. 오늘 외출할 땐 옷깃에 나비 브로치나 달아볼까.
날개, 나래라고도 하지. 나비의 힘은 날개에 있지. 그 작은 날갯짓이 나비효과도 일으켜. 나도 너도 서로 하나가 되긴 어렵지만 같은 게 있어. 날개가 없다는 것이지. 두 발로 서서 걷고 생각하는 인간,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여기지만 가끔 날개를 달고 싶어 해. 날개에는 피폐한 현실에서 탈주하고픈 욕망과 비상의 꿈이 서려있어. 그 못다 이룬 꿈을 여러 방식으로 펼쳐내지. ‘박제된 천재’ 이상(李箱)이 소설 <날개>를 썼듯이 말이야. 알라딘은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날아다니고, 슈퍼맨은 초능력으로 우주를 비행하지. 날개 저 너머엔 창공을 향한 그리움이 있어. 비행기, 행글라이딩, 패러글라이딩, 열기구는 그 소망의 부산물이야. 구름과 숨바꼭질하며 지상을 내려다보는 짜릿함을 만끽하는 게지. 날개를 단다는 건 승리를 뜻하기도 해. 승리의 여신 니케는 아름다운 날개를 한껏 뽐내. 신화에는 인간의지가 담겨 있지. 그러나 그 실현은 어려워. 사람들이 가진 건 이카로스의 날개와도 같거든. 태양을 향해 끝까지 날아오르려다 밀랍으로 만든 날개가 녹아 바다에 추락한 이카로스가 되고 말아.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理想)이란 늘 멀리 있기에 세상사엔 한계가 있어. ‘날면 기는 것이 능하지 못하다’는 속담도 있잖아. 마냥 행복의 날갯짓만 하고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이 들면 차츰 ‘날개 부러진 매’의 신세가 되기도 해. 그럼 이건 어떨까. ‘옷이 날개’라는데 나도 잠자리 날개 같은 옷 걸쳐 입고, 인기에 날개를 단 방탄소년단 공연장에라도 가서 함께 놀아보면 잠시나마 청춘의 날개를 달 수 있을까.
놀이, 공연도 놀이의 하나지. 인간이 여타 동물과 구별되는 건 놀이하는 인간, 즉 호모 루덴스적 본성이야. 놀이적 상상력은 예술의 원천이 되기도 해. 놀이는 너와 나를 하나로 이끌어. 아이들은 놀면서 크지. 내가 어릴 때는 공깃돌이나 고무줄을 갖고 놀았어.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할 때면 짓궂은 사내 녀석들이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면서 약을 올리기도 했지.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흥얼흥얼 노래하며 손등에 흙이나 모래를 얹고 토닥토닥 다지면서 놀거나, 땅따먹기나 사방치기도 하면서 흙 마당에서 놀았지. 그때그때 눈에 띄는 자연물이 모두 장난감이었어. 요즘 아이들은 인형이나 스마트폰과 놀거나, 레고로 집 짓고, 정해진 놀이터에서 많이 놀지. 며칠 전엔 아파트 앞 놀이터 벤치에 한참동안 앉아있었어. 아이들 노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재미있던지 말이야. 왁자지껄한 아이들 틈에서 네댓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여뽀~옹, 나 여기 있쩌요옹~”하며 큰소리로 어른 흉내를 내니까, 또래 남자 아이가 “우웅, 그래~앵? 알았쩌엉~”하고 대답을 주고받으며 서로 잡고 잡히면서 미끄럼틀 주위를 뛰어다니는 거야. 내 어릴 적, 배고팠던 시절에는 뒤꼍에서 조가비 나물 뜯어 반찬 만든다고 돌로 콩콩 찧으면서 모래로 밥 짓고 집 지으며 각시놀이했는데 격세지감이 느껴지더군. 거슬러보면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풍류정신으로 놀이의 멋을 즐겼지. 설 명절엔 동네 마당에서 남자어른들이 큰 멍석을 깔고 시끌벅적 떠들고 웃으며 윷판을 벌였어. 여자들은 마당 한쪽에서 널뛰기를 했지. 정월 대보름엔 연날리기나 쥐불놀이로 새해의 안녕을 기원했고 꽃피는 춘삼월엔 여인들이 두견화 따서 전 부치며 화전놀이를 했어. 오월 단오절이면 창포 끓인 물에 머리감고 그네뛰기도 했지. 팔월 한 가위엔 만월을 우러르며 달처럼 둥글게 손잡고 강강술래도 했어. 놀이에는 춤이나 노래가 어울리지. ‘풍년가’는 사철에 따른 놀이를 노래에 담았어. “지화 좋다 얼씨구나 좀도 좋냐 명년 춘삼월에 화류놀이를 가자” 더덩실, ‘하사월에 관등놀이, 오뉴월에 탁족놀이, 구시월에 단풍놀이, 동지섣달에 설경놀이’ 가자며 흥을 돋워. 노동의 고단함 같은 건 ‘방아타령’이나 ‘베틀가’로 풀어내고, “건드렁 건드렁 건드렁거리고 놀아보자”고 ‘건드렁 타령’ 부르며 삶의 시름을 달래지. 뭐니 뭐니 해도 유희요(遊戲謠) 중에 ‘국문뒤풀이’는 예지가 빛나. 구전민요라서 지역 따라 곡명도 가사도 조금씩 다르지만 교육기능을 겸한 말놀이 노래라는 점은 같아. ‘가나다라’부터 ‘카타파하’까지 말을 이어가며 우리말 자모도 배울 겸, 인생애환을 노래에 녹여 즐기는 거야. 앎의 목적에 즐김을 보태는 것이지. 공자님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했던가. ‘너와 나’ 세상사 비록 고달플지라도 더러는 나비처럼 너울너울 날갯짓이라도 하면서 놀이정신과 즐김의 미학 찾아 신명과 조화의 흥취에 취해보면 어떠리. 지화자, ‘국문뒤풀이’ 장단에 맞춰 ‘니은’과 어우러지는 몇 소절 추리며 놀아 볼까나. 얼~쑤.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 잊었구나 기역니은디귿리을 기역자로 집을 짓고 지긋지긋이 사쟀더니 가갸거겨 가이없는 이내몸이 그지없이도 되었구나 고교구규 고생하든 우리낭군 구간하기가 짝이 없구나 나냐너녀 나귀 등에 솔질을 하여 송금안장을 지어놓고 팔도강산 유람을 할까 노뇨누뉴 노세 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은 못 노리로다~.
― ‘국문뒤풀이’노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