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속에서 들리는 주님의 음성
[마태복음 14:22-33]
요즘 날이 많이 뜨거워졌죠?
이런 날이면 대학교 때
한강에 윈드서핑을 하러 갔던 일이 생각납니다.
작은 서핑보드에 올라타 세일을 조정하여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스포츠입니다.
처음엔 균형을 잡는 게 어려워서
자꾸 물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고생하고 있던 제 곁으로
같이 간 여자친구가 휙하고 지나갔어요.
윈드서핑을 처음 타는데 정말 잘 했습니다.
저는 여자친구에게 멋진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아쉽게 그러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자친구가 탄 요트가
점점 하류 쪽으로 내려갔어요.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얼른 쫓아갔습니다.
있는 힘, 없는 힘 다해서
여자친구의 요트 가까이 갔습니다.
수영을 전혀 모르지만 일단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여자친구의 요트를 잡았습니다.
다행히 큰 문제 없이 육지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그날 이후 여자친구의 곁을 든든히 지켜주는
남자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다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네요.
바람과 관련된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도 등장하죠.
제자들이 만난 바람은
제가 한강에서 경험한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광풍이었어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앞선 본문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뭔가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이 먹은 사건이죠.
이 일 후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이걸 다 아셨어요.
그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게 하십니다.
그리곤 예수님은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셨죠.
제자들은 배를 타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거죠.
오늘 본문은 ‘수 리’라고 나온 말씀이
요한복음에 보면 ‘십여 리’라고 나옵니다.
대략 5~6km 정도라고 봅니다.
여기서 수원역까지 직선 거리가
6.5km정도 나옵니다.
그만큼 먼 거리를 노를 저여서 갔습니다.
제아무리 발성이 좋은 사람이라도
육지까지 말을 전달할 수 없는 거리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떠났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이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바람은 무서운 바람이 됩니다.
그들은 이 바람과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평생 뱃사람을 살아온 베드로와 요한도
감히 이길 수 없는 그런 풍랑에 모두가 지쳐갔어요.
제가 이 부분을 묵상하며 질문이 생겼습니다.
지금 누가 가라고 했나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고 했어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요.
순종했는데 이게 뭡니까?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데
문제가 생길 때가 있어요.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가 있어요.
예배를 드리러 가려고 준비하는데
갑자기 아이가 아픕니다.
그러면 고민하죠.
'이거 하나님 뜻인가?
오늘은 그냥 쉬라는 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렸어요.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해고를 당해요.
사업이 부도가 납니다.
그러면 고민해요.
‘내가 드린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나?’
오늘 본문에 제자들이 딱 그랬어요.
그런 상황 속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유..유령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즉시 이렇게 말씀하시죠.
우리 함께 본문 27절을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4: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시간 예배에도 우리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시죠.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어요?
저라면
“와! 진짜 잘 됐다! 이제 끝났다!”
“예수님 어서 오셔서 저희 배에 물 좀 퍼주세요.”
이랬을 것 같아요.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가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예수님이면 저로 명하여
바다 위로 오라 하십시오.”
지금 배에 물이 차서 다 죽게 생겼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럿이서 배를 붙잡고 있기도 버거운데
예수님께 가겠다뇨?
저는 여기에 엄청난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풍랑을 만났을 때
뭐라고 기도합니까?
진짜 예수님이 내 인생의 풍랑을
잠잠케 하실 분이라고 믿고 기도합니까?
아니면 지금 내 배에 차고 있는
물이나 좀 퍼달라고 하진 않습니까?
베드로의 질문과 걸음에는
믿음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저에게 5억이 필요하다고 하면
주기 어렵겠지만,
500원이 필요하다고 하면
언제든 줄 수 있습니다.
사실 7살 아이가
5억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는
500원이 없다고 힘들어 하고
근심하며 걱정합니다.
이게 우리 모습이죠.
그걸 보시는 주님은 500원은 물론이고
5억도 넉넉히 주시는 분입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베드로가 어부 출신이라고 해도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버틸 순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꽤 오랜 시간 파도와 싸웠거든요.
이런 상황 속에서 주님께 간다는 것은
망망대해에 발은 내딛는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는 인류 최초로
바다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 갑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바다에 빠집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의 시선이 바람을 향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4:30a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베드로는 바람을 보았고
바람은 두려움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바다라는 현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왜 우리가 두려워하나요?
왜 두려움에 사로 잡히는 건가요?
현실을 보기 때문입니다.
바람이라는 현실을 보기 때문입니다.
요즘 해가 뜨겁게 내리쬐니까
나무가 더 초록색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렇게 풍성하고
푸른 여름 나무보다 겨울나무가 참 좋습니다.
겨울 나무는 잎사귀가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굉장히 앙상해 보이죠.
어떨 때는
‘저 나무 이번 겨울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있어요.
그런데 신기합니다.
봄이 되면 앙상했던 나무마다
초록빛 잎사귀를 냅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여름이 되면
울창한 숲을 이루죠.
그 안에서는 매미들이
‘매애앰’하고 소리를 내죠.
새들도 그 나무 그늘에
지친 몸을 쉬었다 갑니다.
이런 나무가 되기까지
추운 겨울을 견뎌냅니다.
잎사귀 없어서 죽은 것 같은 나무도
생명력을 안고 있었던 거죠.
뿌리가 살아 있으면 추운 겨울에도 죽지 않아요.
영적인 것도 똑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세상이 거센 풍파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까?
가정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
고통 중에 계십니까?
내 힘으로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고난의 바람이 불어와 눈물 흘리고 계시나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 뿌리만 잘 내리면 됩니다.
뿌리가 견고하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바람부는 세상이 아닌
평화의 왕되신 예수님만 바라보길 축복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믿음이 작은 자가 있으면 큰 자가 있겠죠.
어떤 자가 큰 자입니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죽음이 올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반면 믿음이 작은 자는 어떤 자입니까?
의심하는 자에요.
의심의 결과는 현실에 빠지는 겁니다.
그 결과 염려하고 불안하고 좌절하는 거죠.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번주 가정예배가 떠올랐습니다.
주중에 아이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렸어요.
원래 제가 아이들에게 전해주려고 했던 건
사도행전 말씀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큰 아들이 책을 건네주는 겁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어요>였어요.
성경 이야기 책인데 그걸 읽어달라는 거였죠.
잠깐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묻는데
읽어줘야겠다는 감동이 왔어요.
특별히 제 말을 붙이지 않고
그냥 적혀 있는대로 읽어갔어요.
그런데 책을 읽다가 한 부분에서
목이 매여왔습니다.
나사로가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이
곧장 가지 않으시는 겁니다.
한시가 급한데 왜 안 가셨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그 답이 있어요.
요한복음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나사로를 정말 사랑하셨어요.
그렇지만 그가 죽어가는 이 사건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늦게 가셨어요.
그리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눈물이 났어요.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시는 구나.
나사로 입장에서 보면 아파서 죽어갈 때
예수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습니까?
빨리 오셔야 하는데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어요.
부활의 기적을 통해
주님만 영광 받으시는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죠.
예수님이 빨리 가셔서 고쳤다면
‘어쩌다 그렇게 됐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걸 보여주시고 했어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도,
예수님의 말씀 한 번에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 지는 것도,
예수님이 늦게 오셨기에
더 믿을 수 있는 사건 아닙니까?
어쩌다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고,
모두 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거예요.
제자들의 모든 힘을 빼시고 주님이 일하십니다.
<주가 일하시네>란 찬양의 가사에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빈들에서 걸을 때
그때가 하나님의 때
내 힘으로 안 될 때 내 모든 걸 드릴 때
내가 고백해 여호와 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주님은 오늘도 풍파 속에 싸우고 있는
우리를 향해 오십니다.
내 힘으로 아무리 했는데도 안 된다며
포기하고 있는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지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나니 안심하라!”
청소년 사역자로 잘 알려진
홍민기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 분은 대형 교회 담임로
4년간 사역을 하셨어요.
처음엔 사람들이 칭찬하더랍니다.
"목사님 설교 너무 좋아요."
그러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잘 해주던 사람들이
모두 떠났습니다.
그게 더 상처가 되었다고 해요.
기도하러 기도원에 갔습니다.
기도가 안나왔답니다.
그냥 내려왔다고 해요.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습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또 갔는데
다음 말씀이 눈에 들어오더랍니다.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당연히 홍목사님은 이 본문으로
설교할만큼 익숙했던 구절이었죠.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때는 부족함이 많았다고 합니다.
돈이 있어도 부족한 것 같고,
명예가 있어도 부족한 것 같았었죠.
그런데 모든 것을 잃고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목자란 그 사실 자체만으로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에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세요.
안심하고 주님과 함께
담대히 나아가시길 축원합니다.
마지막 말씀을 읽고 마칩니다.
요한일서 5:4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풍랑이 불어와도 우리는
주님의 길을 가야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고
풍랑 한 가운데로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이 오라하시면
주님이 책임져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해할 순 없지만 가장 완벽하신 주님을 믿고
노를 저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