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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김행숙 작품론
개인의 사고방식이 낳은 단어들의 특별한 조합이, 시라고 얘기하고 싶다. 여기서 사고방식이란 어떤 현상을 이해하려는, 이해하고 싶어 하는, 또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모든 마음의 움직임을 아우르는 행동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시라는 장르 안에서 단어의 뜻이 다양하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시가 아니더라도 시적이라고 느껴지게 하는 것들에서는 단어 조합의 어떤 특별함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언어들은 우리의 언어와 어떻게 다름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이것은 저자가 현대시인론 수업을 들으면서 가지게 된 제일 큰 의문이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시하고는 다른 낯선 시를 보며 그러한 의문이 든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시를 접하다 보면 누구나 막연하게라도 가질 수 있고 시를 배운 사람이라면 여기서 “어떻게”라는 의문사에 더 조명해서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비유법이나 강조법처럼 형식적인 기법의 유무를 떠나서 나의 고유한 생각이나 감정들을 시 또는 시적인 것으로 거듭나게끔 하는 데 일조하는 힘은 따로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시인들만이 가진 “시의 도구”라는 얘기인데, 그건 대체 어떤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가진 와중에서 김행숙 시인을 고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언어가 보통의 언어와 시의 언어와의 경계에 대해 가장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며 동시에 “시의 도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골똘히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김행숙 시인 에 대해서는 1학기 때 현대시론 중간 과제를 하면서 한 편만 다루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시간을 통해서 시인의 언어란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었고 나름의 해석을 내리면서 작지 않은 감동을 느낀 적이 있다. 이번 학기 수업 시간에 이상을 다루면서 후반에 같이 언급되었는데 현대성이라는 기틀 위에서 바라보는 김행숙 시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이에 대해 알아본다면 내가 감동을 받은 이유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그녀를 주제로 선정했다.
이러한 시도는 시인을 이루는 한 요소를 파악하고 그것을 파헤침으로써 그 핵심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현대성을 토대로 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현대성을 이루는 요소란 무궁무진하게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김행숙 시인의 시집을 읽고 눈에 잡히는 단서부터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 요소들이 각각 작품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그것이 어떻게 시적인 힘을 가지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또 서두에도 제기한 것처럼 저자가 해결하고 싶은 시 전체에 관한 큰 의문에 대해서도 김행숙 시인을 통해 동시에 고민하려고 한다. 그래서 시인의 여러 작품을 다루고 전반적인 흐름을 살펴 큰 윤곽을 잡는 방향보다는 이미 주어진 키워드를 가지고 그것을 파고들며 더 깊은 이해와 성찰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될 것 같다. 시인의 작품론을 쓴다면 전자의 방식으로 쓰는 것이 올바른 것이겠지만 아직 문학사에 대한 미숙한 지식을 가지고 또 미숙하기에 남의 말을 베끼며 글을 쓰는 상황은 피하고 싶어, 개인의 느낌에 충실하면서도 시인의 본질을 확실하게 끄집어내려고 한다는 점, 그래서 다소 주관적인 견해가 많다는 점, 먼저 양해를 구하고 싶다.
현대성, 김행숙의 뿌리
앞서 말했듯이 수업 시간에 이상을 다루면서 김행숙 시인이 언급되고 현대성이라는 키워드가 그녀의 뿌리를 이룬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현대성에 대해
현대성이란 개인, 주체에 대한 완전한 믿음에 뿌리를 둔 신념, 가치를 말한다”
임명섭(2011:224)
이렇게 얘기를 한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언급하셨듯, 김행숙 시인 시 안에서는 화자가 미약하고 자아화하기 어려운 인물들에게 조명된 것이 이전 세대와 차별화된다고 볼 수 있다.
또 이장욱 시인의 해설에서
시적인 것, 시라는 형식, 시를 통해 전하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화자를 채용하는 서정시와 달리,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화자들은 시라는 형식 자체를 소외시킴으로써 시에 도달하는 것이다.
사춘기- 이장욱
라고 하는 것처럼 화자의 성격이 현대성의 요소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시에서 멀어지며 시를 얘기하는 모습이라는 말은 저자가 시집을 읽으면서 얻은 느낌을 대변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스스로 정의 내리는 말을 찾으려고 하는 데 우리는 “시에서 멀어지며 시를 얘기하기”란 어떤 것일까?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것은 화자의 성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요소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광경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시에서 멀어지며 시를 얘기하는 요소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낯설게 하기.
첫 번째 순서는 단어의 변주다. 이는 저자가 가진 기존 이미지를 얘기하는 데 1학기 현대시론 과제를 참고하려고 한다. 다음은 김행숙 시인의 “타일”을 보고 쓴 문장이다.
"결국 시인은 어떻게 시를 탄생시켰을까? 현실과 비현실이 섞인 상황은 우리에게 익숙하게 또는 낯설게 다가왔고, 시인은 너가 사는 현실이 정말 현실 같냐며 떠보고 있다. (...) 비현실적이고 싶었던 순간은 “잠기다”는 단어로 대체돼 그것이 가진 포괄성으로 독자에게 현실과 비현실을 가르게 한다. 그렇게 결국은 언어를 훼손시키고 있던 나 자신을 깨닫게 한다. 이것이 김행숙 시인이 언어를 가지고 노는 법이자 독자를 맥이는 방법인 것 같다."
위에서 저자는 김행숙 시인이 독자에게 언어를 훼손시키게 만들고 그것이 그녀가 언어를 가지고 노는 법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여러 뜻을 가진 하나의 단어는 이야기라는 흐름 속에 놓였을 때 독자에게 각 해석을 요하게 되고 맥락에 맞게 뜻을 구별하는 것은 한국어를 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일 중 하나이며, 동시에 이 과정에서 단어는 독자의 해석에 의해 뜻이 제한되어 간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맥락으로 읽어야 되는 이야기의 속성으로 인해 단어는 보통의 언어에서 시의 언어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존의 “이야기”라는 논리의 틀에서 단어를 건드려 조금의 균열을 낸 ‘낯설게 하기’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낯설게 하기’라면 이상 또한 오감도를 통해 그것을 선보이고 현대성을 이끈 바 있는데 김행숙 시인을 통해 낯설게 하는 것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보는 작품에서는 더 어떤 ‘낯설게 하기’가 있는지 보려고 한다.
위화감은 어디서 오는가.
“타일”이 단어의 변주를 보여주었다면 두 번째는 단어의 바꿔치기가 낳는 낯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변주는 연마다 달라지는 정황 속에서 단어의 뜻이 변해가는 것이고 바꿔치기는 결국 마지막 연에선 단어의 의미를 시작과 다르게 만들어 놓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김행숙 시인의 시들 안에서 종종 보이는 기법인데, 예시로 “가위 지나가다,”를 들 수 있다.
이 시는 단어도 단어지만 사실 구조가 더 시적인 거듭남에 더 힘을 실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구조를 활용함으로써 보통의 언어가 시의 언어가 되는 순간을 가장 도드라지게 표현한 것도 이 시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시를 참고하면서 그의 특징을 살피려고 한다.
가위 지나가다,
정원사가 하는 일은 나무를 고깔 쓴 모양으로 道 닦게 하는 일이다. 음전한 생각과 말씨를 가르치고 싶다. 身體髮膚를 생긴 대로 보존하여 미칠 것은 미쳐라.
가위를 쥐고 있으면 뽑힌 나무처럼 수술대에 드러누운 사내가 보인다. 약간만 손보면 돼. 앞으로는 잘 봉하구 살라구.
머리채 잡힌 아버지에게 끌려간 숙자는 약 먹고 주사 맞고 산다. 오빠 내 뱃속에 가위가....
내 배를 탔던 놈은 죽었,,,,, 피를 봤..... 찢어지는 웃음
정원사는 가위를 들고 道 닦는다. 조용히, 조용히, 나무는 그래도 삐죽, 잎을 내민다.
사춘기
하나씩 천천히 살펴보자면 사실 1연에서는 가위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정원사가 나무를 가꾸는 묘사를 통해 가위의 모습을 자연스레 연상할 수 있으며, 아직은 전개 전의 단계라는 것 또한 짐작할 수 있다.
2연으로 넘어가자 “가위를 쥐고 있으면 뽑힌 나무처럼 수술대에 드러누운 사내가 보인다.” 이 구절을 시작으로 정원의 개념하고는 동떨어진 수술대라는 단어가 보이면서 시상은 갑자기 기묘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수술대에서 수술 받는 사내, 뱃속의 가위를 외치는 여자 등, 거기엔 결코 편하지만은 않은 사연으로 수술대에 누운 자들을 볼 수 있다. “잘 봉하구 살라구.”에서 사내는 중상을 입어 이전에 꿰매놨던 데가 터져 버린 것을, “내 배를 탔던 놈은 죽었...”에서는 여자가 원하지 않은 출산이나 낙태를 하는 모습까지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3연은 이전 연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르는 듯이 시작의 장면으로 되돌려 놓는다. 주변에 있던 수술대와 간호사와 의사들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어느샌가 태연하게 나무를 가꾸는 정원사의 모습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은 이제 180도 달라졌다. 그가 쥐는 가위는 정원사의 가위일까, 의사가 쥐는 가위일까? 그것은 치유의 가위인가, 아니면 상해(傷害)의 가위인가? 여러 질문을 거치면 우리는 “정원사란 대체 무얼 하는 사람인가?”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물음 앞에서도 말문이 막혀버릴 때 우리는 이 시가 “낯설게 하기”의 구현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시에서 바꿔치기가 일어나는 단어는 “정원사”이기도 하고 “가위”이기도 한다고 본다. 2연을 지나가기만 했는데도 손에 쥐던 물건이 아예 다른 물건으로 뒤바뀐 것에서 느끼는 감각은 놀라움이 아닌 위화감이다. 손수건을 한 번 적시면 형태는 똑같아도 전혀 다른 성질이 되는 것처럼 가위라는 물건의 모습은 바꾸지 않은 채 그 쓰임의 양면성을 갖고 우리 인식에 덧칠을 하러 드는 힘은 앞뒤 맥락에 균열을 자아낸다. 김행숙 시인의 “갑자기 훅 들어오는” 성격은 이러한 곳에서 비롯되는 위화감을 동반한 자극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구성 자체의 정교함
다음은 똑같이 3단 구성이면서도 구성 자체에 더 중점을 두고 보고 싶은 작품이다. 구성의 힘만으로 어떤 시적인 느낌을 줄 수 있는지 아는 데 참고 할 수 있다.
문은 안에서 잠근다
후려갈기듯이 그가 문을 닫았다고 생각했을 때, 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문은 反撥하여 조금 열린 채 떨리고 있었다 그가 부르르 떨고 있는가? 오래 참으셨군, 나는 빈정거렸지만
나는 바닥을 드리낸 채 그의 침대에서 너무 오래 기생했다 두께 없는 얄팍한 사랑을 원고지 구기듯이 했네 나는 썼지만
구겨진 그를 펴서 다시 읽고 싶지 않았네 나는
썼지만 그는 때때로 아, 벌어져 있었네 그의 침대에서
나를 핥고 지나가는 문장들을 나는 너무 쉽게 받아들였네 그가 없는 그의 침대에서
나는 뜨거워지지, 그러니 그가 없는 그의 침대에서 참을 수 없었네 오래 참으셨군.
나는 빈정거렸지만 내가 나쁘지 않은가
문을 닫았다고 그는 믿지만 문의 反動은 그의 행위에서 비롯하니, 이것이 내가 얻은 교훈의 전부다.
이제 내 낙서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다시 바람이 나침반인가? 문이 자꾸 펄럭이니 문 밖의 풍경은 빠르게 늘어났다가 줄어들고 늘어.... 나는
중얼거린다, 문은 안에서 잠근다.
사춘기
1연에서는 화자와 그와의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구절은 “그가 부르르 떨고 있는가?” 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후려갈기듯이” 닫은 문은 화자와 그와의 갈등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사물인데, 그 “떨림”에서 그의 분노를 도려내 보여주는 것은 은유를 생성하는데 덕분에 2연은 이 떨림의 이미지를 타고 바로 회상에 들어갈 수 있다. 만약에 이 구절이 없었다면 그만한 몰입감을 느낄까, 생각하면 그 대답은 노에 가깝다. 객관적 상관물을 이용한 표현이 그와 화자의 싸움 자체를 연상시키는 1차적인 발판이었다면 “그가 부르르 떨고 있는가?”의 은유는 그의 분노 자체를, 한 대상을 겨냥하여 그것을 돋보기로 바라볼 2차적인 발판이 된다는 것이다.
2연에서는 화자와 그와의 지난 시간이 회상된다. 여기서 이장욱 시인은 이러한 해석을 내놓는다.
"어떤 시들에서 그녀의 여자들과 남자들은 통화 불능이다. 페미니즘 같은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지점에서, 그들은 불화한다. 어쩔 수 없이 여자들은 남자들을 끊임없이 밀어낸다. 문은 남자들이 닫고 나가지만, 정작 그 문을 잠그는 것은 여자들이다. 여성적 수동성은 가장 깊은 곳에서 능동적이다.
이러한 해석에서도 알 수 있듯이 2연은 주변에 지극히 무관심한 화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보통의 언어가 시의 언어가 되는 것이 여기서는 화자의 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구성적인 면은 눈에도 보이듯 길고 행갈이도 잦은 문장은 1연보다 속도를 가해 보다 거센 호흡으로 읽힌다.
그리고 3연은 “그는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서두로 다시, 시의 속도를 한 번 조절한다. 그리고 여전히 화자는 문의 펄럭임을 보고 있지만 그 풍경은 1연의 풍경과는 분명히 다른 풍경이란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저자가 이 시를 읽고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수영할 때 물속에 잠겼다, 다시 올라왔다, 하는 행위이다. 1연의 발판을 토대로 2연에서는 “가위 지나가다,” 에 비해 시작부터 마치 숨을 들이마시고 수면 아래로 들어가는 듯한 몰입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고 복잡한 행갈이는 오히려 물속의 고요함을 표현하는 것으로도 느낄 수 있다. 3연에 넘어가자, 행간은 마치 수면(水面)의 경계선처럼, 질문을 갖고 독자를 수면 위로 끌어당기기도 한다.
김행숙 시인의 구성에서 만들어지는 낯섦이란 것은 반수면半水面 상태에서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행숙 시인이 이상의 계보이면서도 그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앞서 살펴본 위화감에 있다고 보는데, 이는 보통의 언어와 시의 언어의 경계를 자유로히 오가는 능력이다. 여기서 물에 비유한 것은 다름이 아닌 물의 속성이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행숙 시인의 말이 이상처럼 특이하고 기이하지 않듯 물 또한 우리 인간에게는 해롭지 않고 말한다면 잠수까지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준다. 그러나 우리는 여름의 수영장에서 바닥의 모양이 일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듯 그곳에는 확실히 물 위하고의 차이는 존재한다. 현실과 비슷하나 어딘가 일그러진 부분에 김행숙 시인은 돋보기를 갖다 댄다. 돋보여진 사물은 그때 처음으로 시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악어는 사냥할 때 물속에 잠긴 채로 물 위와 아래를 동시에 관찰하며 먹잇감을 효율적으로 잡는 독특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들어본 적이 있다. 이상이 지상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속 매우 깊숙한 데서 사는 심해생물 같은 존재라면 김행숙 시인은 강가에서 먹이를 노리는 악어가 아닐까는 생각이 든다. 조용하게 잠복하고 있다가 천천히 다가가며 먹이를 한 번에 잡는 모습은 독자를 대하는 그녀의 시를 나타내는 것 같다.
시란 언어의 한계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시는 “오전 5시를 보다”라는 시다. 김행숙 시인이 언어를 갖고 노는 방법과 독자를 대하는 방법을 알 수 있는 시다.
오전 5시를 보다 / 김행숙
오전 5시의 거리는 놀랍네 오전 5시의 빛은 푸르네
오전 5시의 나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아니네
오전 5시의 거리를 나는 입김을 섞으며 다니는 사람이 아니네
오전 5시의 거리는 놀랍네 뛰어가던 남자가 종이 뭉치를 떨어뜨리고
밟고 간 사람은 없었네 흩어진 종이를 줍던 남자의 동작이 느려지네 아무도 쫒아오지 않았네
오전 5시에 남자가 우네 오전 5시의 빛은 푸르네
오전 5시에 거리의 가로등은 아직 꺼지지 않았네 오전 5시에 나는 신문을 보는 사람이 아니네
오전 5시에 나는 베란다에서 잠옷을 펄럭거리는 사람이 아니네
오전 5시의 거리에서 남자는 쭈그리고 앉아 우는 사람이 아니네 오전 5 시의 거리는 놀랍네
오전 5시의 빛은 푸르네 오전 5시의 거리에 남자가 남긴 몇 장의 종이에서 아직 구겨진 것은 없네
- 시집 사춘기
이 시에서의 특징은 바로 오전 5시의 풍경을 “아니다”라는 부정의 말로 묘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이외의 것을 지칭하는 가능성 또한 열어주는 말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단어로써 예시를 들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단어인데, 수업 시간에도 언급이 있었듯이 이 단어는 사실 감성적인 단어가 아니라 논리적인 단어이다. 백석의 “북방에서”에서 화자는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고 하는데, 그가 정말 자신의 없음을 얘기하고 싶다면 그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부재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없다는 말은 이미지의 연상을 칼로 딱 내려치는 것과 같은 무심한 표현이다. 없는 것 이외의 것을 지칭하기엔 시의 의도가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부정 또는 부재의 말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서 쓰기엔 섣부른 표현이다.
그러나 이 시는 다르다. 계속되는 없다는 말은 오히려 부재가 아닌 사물의 존재를 독자들 머릿속에서 불러온다. “오전 5시의 나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아니며, “오전 5시의 거리를 나는 입김을 섞으며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면 대체 무엇인지 따지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여기서 쓰이는 부정의 말은 그 자체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닌 제목대로, “오전 5시를 보”기 위한 수단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시가 단순한 묘사를 하는 것에서 벗어나 시적인 면모를 가질 수 있게 된 발단은 언어의 한계에 있다. 부정의 뜻이 쓰였는데도 그 행위들이 오전 5시에 하는 행위인 것처럼 인식하게 되는 것은 아닌 것 이외의 불특정다수보다 뜻이 제한된 단어들을 가지고 상황을 이해하는 우리의 본능 때문이다. 계속 불특정다수를 던지는 화자와 거기서 아이러니하게도 특정된 것을 보는 독자. 언어의 한계로 시를 만들고 그 안에서 독자에게 도전장을 내밀게 하는 것은 우리의 한계를 들춰내려는 그녀의 전략이다. 우리는 그렇게 김행숙 시인에 의해서 시의 언 어를 온몸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김행숙 시인이란.
지금까지 우리는 김행숙 시인의 현대성을 타고 내려가서 시에서 멀어지며 시를 얘기하기란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현대시인론 수업을 들으면서 현대의 시들이 시인의 도구에 의해 어떻게 시로써 거듭나는지, 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김행숙 시인이 보여주는 보통의 언어와 시의 언어의 경계에 조명해서 이들을 살펴보았다. 김행숙 시인이 보여주는 시들은 “시에서 멀어지며 시를 얘기하는” 시들이다. 그곳에는 단어의 변주에서 비롯하여 단어의 바꿔치기, 3단 구성, 언어의 한계를 보여주는 등 각기 도구가 큰 몫을 다하고 있다. 이전 세대의 서정적인 화자의 방식에서 벗어나 언어의 면에서, 언어를 다루는 우리의 모습마저도 고려하는 깊은 통찰력은 우리의 본능 깊숙한 데에서 낯선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낯선 감각은 때때로 위화감으로, 감탄으로, 더 나아가서는 경외로움으로 우리에게 자리 잡는다.
좋은 성찰은 항상 창작의 시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시에 대한 저자의 큰 의문 즉 형식적인 기법의 유무를 떠나 시가 되는 힘이 무엇인지는 김행숙 시인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시를 살펴보면서 내가 썼을 때와의 차이는 무엇일까는 질문에서 시작해 내가 만약에 시를 쓴다면 어떤 부분을 모방해야 할까, 생각하면서 든 생각은 같은 시의 도구들을 가진다고 해서 같은 시를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기본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표현법이라 한들 그것을 공식화해 버리는 시점에서, 도구화해 버리는 시점에서 언어 자체의 효력은 형식이라는 틀보다 못 한 것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따라잡을려야 따라잡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김행숙 시인에게 붙일 수 있는 수식어 중에서 가장 와닿는 것은 “언어로 자극할 수 없는 부분을 언어로 자극하려고 드는 시인”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본다.
이수명 시인의 <횡단>이라는 시론집에는 “시는 언어의 불가능이 무엇인지를 똑바로 가르쳐주는 것이다. 하지만 절망의 언어들로 시인들은 시를 쓴다.”고 얘기한다. 김행숙 시인도 그러하다.
그녀는 언어라는 소통의 도구를 거꾸로 들었으나 그것은 우리의 본능까지도 끄집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그녀의 언어는 오늘도 거꾸로 들린 채 우리를 두드리러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