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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씨의 시조 11
진안이씨(鎭安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진안 이씨(鎭安李氏)의 시조(始組)는 이특룡(李特龍)으로 진안(鎭安)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진사(進士)에 올랐는데, 시정(時政)을 바로잡기 위해 여러 차례 상소(上疏)를 하여 조정의 미움을 받아 안화(安化)로 유배(流配)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안화(安化)에 정착(定着)하여 문호를 열고, 선조(先祖)의 전세거지(前世居地)인 진안(鎭安)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係)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특룡(特龍)의 손자 득림(得霖)이 조선(朝鮮)에서 직장(直長)을 역임했고, 득림(得霖)의 손자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승영(承榮), 참봉을 지낸 승복(承馥), 시정을 역임한 승빈(承彬)은 가문(家門)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안 이씨(鎭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682가구, 2,8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위이씨(振威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진위 이씨(振威李氏)의 시조(始組)는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지낸 이 방(李 方)이다. 방(方)의 5세손 자영(自英)은 고려조(高麗組)에서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냈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진위군(振威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진위(振威)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자영(自英)의 아들 중육(仲育)이 고려에서 태사(太師)를 역임했고, 손자 옹(邕)이 밀직사(密直使)를 지냈다.
조선조(朝鮮組)에 와서는 지(至)가 승지(承旨)를 지냈으며, 참군(參軍)을 지낸 종(鐘), 좌랑(佐郞)을 지낸 즙(檝) 등이 가문을 빛냈다.
그밖에 조선(朝鮮) 때 유면했던 의원(醫員) 경화(景華)는 일찌기 송시열(宋時烈)의 문화에서 길을 배워 생원(生員)이 되었고, (經史百家)에 정통하여 진위 이씨(振威李氏)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위 이씨(振威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976가구, 4,0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晋州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진주 이씨(晋州李氏)의 시조(始組)는 조선 초(朝鮮初)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이군자(李君梓)이다.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 : 경주 이씨의 시조)의 18세손인 군자(君梓)는 조선(朝鮮) 태조(太組)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왕(王)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성천(成川)으로 유배(流配)되어 그 곳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대제학(大提學)을 사임(辭任)하고 고향인 진주(晋州)로 내려가 있는 형 영자(永梓)를 생각하며 본관(本貫)을 진주(晋州)로 삼았다고 한다.
가문의 대표적인 후손으로는, 군자(君梓)의 아들 영실(英實)이 감찰(監察)을 역임했고, 증손(曾孫) 의동(儀東)은 통사랑(通仕郞)을 지냈다. 그 외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승부(承富)는 통사랑(通仕郞) 의동(儀東)의 아들이다.
치언(致彦)은 영조(英祖) 때 과거에 올라 도사(都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이씨(晋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926가구, 13,5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차성․기장이씨(車城․機張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차성(車城)은 기장(機張)의 옛 지명이다. 기장(機張)은 경상남도(慶尙南道) 양산군(梁山郡)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는 신라 전기의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 때 기장현으로 개명하여 동래군(東萊郡)에 속하게 하였다. 후에 양주(梁州), 또는 울주(蔚州)에 예속되기도 하였는데, 1599년(선조 32)에 다시 동래군에 예속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郡)으로 승격되어 동래부(東萊府)에 속해 있다가 후에 동래부가 폐지되고 동래군이 될 때 기장현도 기장면(機張面)이 되어 동래군에 예속되었다. 8․15해방 이후 부산시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동래군의 대부분이 부산시에 편입되었으나 기장면(機張面)은 양산군(梁山郡)에 편입되었 다.
차성․기장 이씨(車城․機張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신무조(新武朝)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에 오른 문의공(文義公) 사언(嗣彦)의 차남인, 이 위(李 渭)이다.
그는 신라 말에 공(功)을 세워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올랐고 차성군(車城郡)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위(渭)를 시조(始祖)로 하고 차성(車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위(渭)의 후곤 원주(元周)가 1417년(태종 17)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거쳐 이천 부사(利川府使)를 지냈으며, 원주의 아들 맹종(孟宗)은 단종(端宗) 때 통사랑(通仕郞)에 올랐다.
그외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낸 희원(希元)과 병조 참판(兵曹參判) 형원(亨元)이 유명했으며, 응벽(應璧)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을 세워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거쳐 선조(宣祖) 때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이르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차성․기장이씨(車城․機張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25가구, 5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창녕이씨(昌寧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창녕 이씨(昌寧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과거에 급제하고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낸 후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진 이정현(李正賢)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창녕(昌寧)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정현(正賢)으 아들 원간(元幹)이 교수(敎授)를 지냈고, 손자 구엽(九燁)은 우상시(右常侍)를 역임했다.
정현(正賢)의 증손(曾孫)인 문화공(文華公) 한직(漢直)은 벼슬이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귀춘(貴春)은 현감(縣監)을, 손자 연무(衍茂)는 절제사(節制使)를 지냈다.
그밖의 인물로는 부정(副正)을 역임한 국추(國樞)의 아들인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대임(大任)이 유명했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여러 곳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茂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으며, 뒤에 가선대부(嘉善大夫)․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학자(學者) 홍진(弘進)은 학문이 뛰어나, 향리(鄕里)에서 후진양성에 전념(專念)하여 문화에서 훌륭한 인재(人材)가 많이 배출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낸 운기(運基)와 함께 명망있는 창녕 이씨(昌寧李氏)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창녕 이씨(昌寧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965가구, 4,02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천안이씨(天安李氏)
천안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09가구 2,29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철성이씨(鐵城李氏)
철성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513가구 4,87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성본으로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청안이씨(淸安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청안 이씨(淸安李氏)의 시조(始祖)는 이학년(李鶴年)으로 고려 광종(光宗) 때 예부 상서(禮部常書)를 지냈고 청안군(淸安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청안(淸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학년(鶴年)의 후손(後孫) 한번(漢藩)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고 홍건적(紅巾賊)을 대파하여 청안군(淸安君)에 봉해졌으며, 아들 광경(光慶)은 조선(朝鮮)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낸 후 호남파(湖南派)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항상(恒相)은 아들 양길(陽吉)은 상장군(上將軍)으로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벽상일등공신(壁上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청안군(淸安君)에 봉해졌으며 영남파(嶺南派)의 중시조로 분파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안 이씨(淸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086가구, 12,80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이씨(淸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청주 이씨(淸州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太師)를 지낸 이능희(李能希)이다
능희(能希)의 10세손 계감(季瑊)은 낭성군(埌城君)에 봉해졌고, 13세손 애(薆)가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으로 상당부원군(上堂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청주(淸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능희(能希)의 아들 겸의(謙宜)도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에 올랐으며, 증손(曾孫) 중강(仲降)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또한 중강(仲降)의 손자 공승(公升)이 인종(仁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형부(刑部)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계장(桂長)도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명망높은 청주 이씨(淸州李氏)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도 가문이 번성하여 거이(居易)가 태조(太祖) 때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태종(太宗) 때에는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서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외에도 태조(太祖)의 부마(駙馬)로서 공신(功臣)이 된 애(薆)와, 태종(太宗) 때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에 올라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에 봉해진 백강(伯剛),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하성(夏成), 참판(參判)을 지낸 현송(顯孫)과 세양(世陽) 등은 청주 이씨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 이씨(淸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6,973가구, 28,9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해이씨(靑海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청해(靑海)는 중국 북서부에 있는 지명으로 북서쪽은 신강(新疆), 북쪽과 동쪽은 감숙(甘肅), 남동쪽은 사천(四川), 남서쪽은 티벳을 접하고 있다. 험준한 대고원 지대로, 황하․양자강 등에 발원을 이룬다.
청해 이씨(靑海李氏)의 시조(始祖)는 조선 객구에 공(功)을 세운 공신(功臣) 이지란(李之蘭)이다. 지란의 본 성명은 퉁두란(퉁豆蘭)으로서 아버지 아라부카(阿羅不花)는 여진(女眞)의 금패천호(金牌千戶)였다.
아버지에 이어 천호가 되었다가 원(元)나라 말기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많은 부하를 이끄로 귀하, 북청(北靑)에 거주하면서 이성계(李成桂) 휘하에 들어가 이씨(李氏) 성을 하사 받았으며, 이어 조선 개국공신 일등에 올라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다.
지란(之蘭)의 아들 화영(和英)은 세종 초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에 이르렀고, 6대손 인기(麟奇)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이밖에 인기(麟奇)의 아들 중로(重老),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핵(翮)의 아들 유민(裕民),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수민(壽民) 등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해 이씨(靑海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484가구, 10,0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주이씨(忠州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충주 이씨(忠州李氏)의 시조(始祖)는 이 관(李 土寬)으로,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충주백(忠州伯)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은 충주(忠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석로(碩老)와 석구(碩耈), 부사(府使)를 지낸 석질(碩耋), 무과(武科)에 급제한 석기(碩耆)가 한 형제로서 모두 현달(顯達)하여 당대에 뛰어났다.
또한 무관(武官)으로서 용맹을 떨친 성태(成泰)가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고 오위장(五衛將)을 지낸 행로(行老)가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충주 이씨(忠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762가구, 3,21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칠성이씨(漆城李氏)
칠성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33가구 1,20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태안이씨(泰安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태안 이씨(泰安李氏)의 시조(始祖)는 중국 송(宋)나라 사람인 이 욱(李 煜)으로 925년(태조 8) 고려(高麗) 들어와 농서공(瀧西公)에 봉해졌으며, 그의 7세손인 기(奇)는 고려 광종(光宗) 때부터 태안(泰安)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 욱(煜)의 후손 천(蕆)이 태안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고 태안부원군(泰安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태안(泰安)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人物)로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한 회(薈)는 성품이 강직하여 사간(司諫)으로서 직언을 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검상(檢詳)으로 승려였던 청준(淸濬)이 그린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彊理圖)」를 증수(增修)하여 우리나라 지도에 혁신을 가져온「팔도도(八道圖)」를 그렸다.
조선 때 판서(判書)를 지낸 배일(培一)과 참판(參判)을 역임한 길장(吉長),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세익(世益) 등은 명문인 태안 이씨(泰安李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태안 이씨(泰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859가구, 3,4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산이씨(平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평산 이씨(平山李氏)의 원조(遠祖) 이부명(李敷明)은 중국 당(唐)나라 설인귀(薛仁貴)가 보낸 8세자 중의 한 사람으로 평산(平山)에 들어와 백성들에게 예법을 가르쳤고,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지냈다.
그러나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낸 후손 자용(子庸)에 이르기까지 세계(世系)가 불분명하므로 부명을 원조로, 자용을 일세조로 삼고 선조(先祖)가 정착 세거(定着世居)한 평산(平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자용(子庸)의 아들 빈(彬)은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냈고, 빈(彬)의 손자 천위(天緯)는 조선 때 우찬성(右贊成)을, 천경(天經)은 관찰사(觀察使)를 지내 가문을 빛냈다.
또한 판서(判書)를 역임한 천위(天緯)의 아들 지하(支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석곤(錫坤)과 돈령부사(敦寧府使)를 지낸 창식(昌植),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 계남(繼男) 등이 평산이씨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산 이씨(平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704가구, 2,92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창이씨(平昌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평창 이씨(平昌李氏)의 시조(始祖) 이 광(李 匡)은 고려(高麗) 명종(明宗 : 제19대 왕, 재위기간 : 1170~1197) 때 태사(太師)를 역임하고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에 올라 백오군(白烏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8세손 천기(天驥)가 고려 말에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역임한 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장단(長湍)으로 내려가 절의(節義)를 지켰으므로 태조(太祖:이성계)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평창군(平昌君)에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 광(李 匡)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평창(平昌)으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천기의 증손 영서(永瑞)가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생원(生員)으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이조(吏曹)와 예조(禮曹)의 정랑(正郞)을 거쳐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역임했다. 특히 영서는 글씨에 뛰어나서 강희안(姜希顔) 등과 함께 금은(金銀)으로 불경(佛經)을 쓰는데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아들 계남(季男)은 성종(成宗) 때 풍덕 군수(豊德郡守)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망을 떨쳤고, 그후 연산군(燕山君) 때 호․이조 판서(戶․吏曹判書)를 역임하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워 정국2등공신(靖國二等功臣)으로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레 일으켰다.
세칭 <국조명장(國朝名將)>으로 불리웠던 계동(季仝 : 계남의 아우)은 연산군 때 고부사(告訃使)로 명(明)나라를 다녀와 왕명(王命)으로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서북제번기(西北諸蕃記)」와「서북지도(西北地圖)」를 찬진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광(光)은 1495년(연산
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이 르렀고 학문(學問)과 글씨에 뛰어나서 <관동천재(關東天才)>로 일컬어졌으나 23세로 요절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정조(正祖) 때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역임했던 동욱(東郁)의 아들 승훈(承薰)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천주교 영세신자가 되어 교세(敎勢) 확장에 공헌했고, 정규(正奎)는 을미사변을 계기로 스승 류인석(柳麟錫)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일본군(日本軍)과 항쟁하고 항일운동 기록인 「종의록(從義錄)」과 「북정일기(北征日記)」를 저술하여, 독립운동에 신명(身命)을 바쳤던 병식(炳植)․현근(炫瑾) 등과 함께 평창 이씨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창 이씨(平昌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3,531가구, 55,48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택이씨(平澤李氏)
평택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55가구 1,09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동이씨(河東李氏)
하동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33가구 1,05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빈이씨(河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하빈 이씨(河濱李氏)의 시조(始祖) 이 거(李 琚)는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하빈군(河濱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하빈(河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人物)로 거(琚)의 아들 정 견(挺 堅)이 상서(尙書)를 지냈으며, 거 의 손자 경(瓊)은 고려 때 좌정언(左正言)을 지냈고 조선이 개국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벼승을 버리고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여 두문동 72인의 한 사람으로 당대에 뛰어났다.
그후 경(瓊)의 5세손인 예(芮)가 판서(判書)를 역임하면서부터 다시 관직에 오르기 시작 했고, 침(沉)이 판관(判官)을 역임하여 훌륭한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그밖에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현계(賢啓)가 이름을 날렸고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한 상룡(相龍)과 문명(文名)으로 이름을 날린 조헌(祖憲) 등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하빈 이씨(河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125가구, 12,6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성이씨(鶴城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학성 이씨(鶴城李氏)는 조선(朝鮮) 때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공(功)을 세워 절충장군용기위사상호군(折衝將軍龍騎衛司上護軍)에 올랐고 이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와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역임한 이 예(李 藝)를 시조(始祖)로 한다. 후손들은 시조(始祖)의 발상지(發祥地)인 학성(鶴城)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예(藝)의 손자 직겸(直謙)은 군자감 판사(軍資監判事)를, 직유(直柔)는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을, 직강(直剛)은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를 역임하여 훌륭한 가문을 빛냈다.
겸수(謙受)는 나라에 공(功)이 있어 원종훈삼등공신(原從勳三等功臣)에 책록(冊錄)되었으며 남강사(南岡祠)에 제향(祭享)되었다. 현 담(玄聃)은 문장(文章)과 학행(學行)으로 당대에 뛰어났으며, 양오(養吾)는 학자(學者)로 명성을 날리고 반계집(磻溪集)을 남겨 학성 이씨(鶴城李氏)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학성 이씨(鶴城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4,625가구, 18,86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산이씨(韓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한산 이씨(韓山李氏)의 시조(始祖) 이윤경(李允卿)은 한산(韓山) 지방에 토착세거(土着世居)해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고려 중엽에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을 역임했고, 5대(代)에 걸쳐 호장적을 세습하여 오면서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芝峴里) 건지산(乾至山) 밑에 있는 시조 윤경(允卿)의 묘(墓)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명당으로 알려졌으며, 본래 한산군의 동헌(東軒)이 있던 곳이었는데 관가의 현감이 앉는 널판지가 지기(地氣) 때문에 자꾸 썩어가는 것을 눈여겨 보고 지혈(地穴)이 바로 그 자리임을 익혀 두었다가 묘를 썼다고 한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의 6세손 곡(穀)이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문장(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스승인 이세현(李齊賢)과 함께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增修) 했으며, 충렬(忠烈)․충선(忠宣)․충숙(忠肅) 3대왕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한 후 백이정(白頤正)․우 탁(禹 倬) 등과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大家)로 손꼽혔다.
곡의 아들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야은(冶隱) 길 재(吉 再)와 더불어 여말(麗末)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던 목은(牧隱) 색(穡)은 익재(益齋 : 이제현)의 고제로 14세때 성균시 십운과(成均試十韻科)에 합격하고 1351년(공민왕 2) 등과(登科)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등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공양왕(恭讓王) 때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는 격동기에 풍운이 격심한 일생을 살면서 다섯 차례나 유배(流配)를 당했던 목은은 뛰어난 학문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하여 후세에 명망을 떨쳤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목은을 불렀더니 목은은 태조를 신하의 예로 대하지 않고 옛날처럼 서로 읍만 하였고, 태조는 자리에서 내려와 손님의 예로써 대접하였다. 잠시 후 시강관(侍講官)이 열지어 들어오므로 태조가 왕좌에 올라앉자 목은은 벌떡 일어서면서 말하기를 “나는
앉을 곳이 없다”고 하자 태조가 “원컨대, 가르침을 받들겠으니 덕이 적고 우매하다고 해서 버리지 마오”하였다. 목은은 “망국의 대부(大夫)는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못하오. 다만 마땅히 나의 다 죽게 된 해골을 가져다가 고산(故山)에 묻을 뿐이요”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색(穡)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종덕(種德)과 차남 종학(種學)도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벼슬을 마다하고 두 마음을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모두 매를 맞아 죽었다. 두 아들을 잃은 목은이 여주(驪州)에 물러가 살았는데, 하루는 그의 옛 제자가 찾아와 뵙자고 하자 아무말도 않고 앞장서서 깊은 골짜기 인적이 없는 곳에 가서 큰소리로 종일토록 통곡하고는 함께 나오면서 말하기를 “오늘에야 조금 내가슴이 시원하다”고 했다.
목은은 이태조(李太祖)와 태종(太宗)과의 친분이 있어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초대되어 궁안에 드나들었으나, 고려의 충신으로 대절(大節)을 이루었다.
인정이 어찌 물(物)의 무정함과 같으랴(人情那似物無情),
근래에는 닥치는 일마다 점점 더 불평이네(觸境年來漸不平).
우연히 동쪽 울타리를 향함에 부끄러움이 낯에 가득 차니(偶向東籬滿面),
꽃은 진국화(眞菊花)요 사람은 거짓 도연명(陶淵明)이다(眞黃花對僞淵明).
하는 그의 시(詩)에는 슬픈 마음이 담겨 있다.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의하면 고려 말에 길 재(吉 再)가 목은에게 거취(去就)를 물었을 때 대꾸하기를 “마땅히 각자가 자기의 뜻을 행할 것이다. 나 같은 무리는 대신이기 때문에 나라와 더불어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 해야 하니 물러갈 수 없거니와 그대는 물러갈만 하다”고 말하고, 길 재가 돌아갈 때 인사하러 들르자, <나는 기러기 한 마리 하늘 높이 떠 있다(飛鴻一箇在冥冥)>는 시(詩)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종덕(種德)의 아들 맹균(孟畇)은 세종(世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세업(世業)을 이어받아 글씨와 시문(詩文)으로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부인이 질투하고 사나운데다 아들이 없어 가화(家禍)로 불우했다.
그가 아들이 없음을 슬퍼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사람이 생긴 때로부터 아비 자식대를 전해와 이 몸까지 이르렀네(自從人道起於寅父子祖傳到此身), 내 무슨 죄로 하늘이 돕지 않아 아비 소리 못들은 채 귀 밑에 흰털만 새로워라(我罪伊何天不吊未爲人父鬢絲新)>
색(穡)의 증손이며 계주(季疇)의 아들이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개(塏)이다. 1436년(세종 18) 문과에 급제했던 개(塏)는 시문(詩文)이 절묘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저작랑(箸作郞)으로「명황계감(明皇戒鑑)」편찬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도 참여했으나 세조(世祖)가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직제학(直提學)으로 성상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일찍이 단가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로 매서운 절개를 나타내었던 개는 몸이 여위고 약하여 옷을 이기지 못할 것같이 보였는데, 엄한 형벌에도 얼굴 빛이 변하지 않으니 보는 자가 모두 감탄하였다고「추강집(秋江集)」에 전한다.
목은의 현손(玄孫)으로 홍귀달(洪貴達)과 함께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바로 잡으려고 대담한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당했던 예견(禮堅)은 만년에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력했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문학과 절행(節行)으로 당세에 소문났었다.
연산군(燕山君) 때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던 자(耔:예견의 아들)는 감찰(監察)을 지내고 천추사(天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이조 좌랑(吏曹左郞)에 올랐으나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다.
희대의 간신 김안로(金安老)는 동서지간이면서도 항상 자(耔)를 해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함창(咸昌)에 성묘하러 왔다가 용궁(龍宮)에 있는 자(耔)의 집에 일부러 들러 친선을 빙자하여 염탐을 하고자 하였다 이것을 알아차린 자(耔)는 괴화탕(槐花湯 : 홰나무의 꽃을 다린 물)으로 얼굴을 씻어 늙어 보이게 하고 이불을 둘러 쓴 채 김안로를 맞았다. 안로는 손을 잡고 은근히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하고 나가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음애(蔭崖 : 자의 아호)는 이제 고만이다. 염려할 게 없다”고 하였다.
그후 자(字)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다시 벼슬에 올라 교리(校理)와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우봉 현령(牛峰縣令)을 거쳐 수원통판(水原通判)을 지냈던 치(穉)의 아들 지함(之函)은 흙벽돌을 찍어 축대를 쌓았고 그 위에 정자(亭子)를 짓고 살았으므로 토정선생(土亭先生)으로 더욱 유명했다. 복서(卜筮)․지리(地理)․음양(陰陽)에 능통했던 토정(土亭)은 선조(先祖) 때 탁행(卓行)으로 포천 현감(抱川縣監)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사직,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밤에 책 읽을 때 켤 등기름 살 돈이 없어 처자들이 낮에 산에 가서 관솔을 떠어 올 지경으로 청빈하게 살았다.
그밖에 한산 이씨를 빛낸 인물로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지번(之蕃 : 지함의 형)의 아들로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던 산해(山海)와 호성2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에 추봉된 산보(山甫 : 지무의 아들)가 유명했으며, 산회의 아들 경전(慶全)은 광해군(光海君) 때 좌참찬(左參贊)을 지낸 후 한평부원군(韓平府院君)에 진봉되어 인조(仁祖) 때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던 현영(顯英)과 함께 명망을 떨쳤다.
한편 <고집통 긴수염의 재상>으로 불리웠던 기조(基祚:현영의 아들)는 효종(孝宗) 때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올랐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광주 쌍령(雙嶺)에서 선두에 나가 싸우다가 장렬하게 순절한 의배(義培)는 영의정(嶺議政) 추증되었다.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취병(聚兵)하여 전장에 나가면서 집사람으로 하여금 백주(白紬)로 형전과 청금(靑錦)띠를 만들게 하여 두르고 떠났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전장에 죽어 씩은 시체더미 속에서 식별하기 좋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결심하고 전쟁에 임했다.
한말에 와서는 일본(日本)의 침략정책에 항거하다가 아들과 함께 살해당한 남규(南珪)와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으로 민비(閔妃)와 함께 살해된 경직(耕稙)이 유명했고, 근대한국의 정신적인 지주로 일컬어진 월남(月南) 상재(商在)는 서재필(徐載弼)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조국의 자주독립 위한 구국운동에 신명(身命)을 바쳐 학문과 충절(忠節)으 전통가문인 한산 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8,471가구, 119,1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성이씨(漢城李氏)
한성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10가구 1,34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양이씨(漢陽李氏)
한양은 양주의 속현이다. 한양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37가구 1,09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함안이씨(咸安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함안 이씨(咸安李氏)의 시조(始祖) 이 상(李 尙)은 위위시주부동정(衛위寺主簿同正)을 지낸 원조(遠祖) 원서(元敍)의 후손으로 고려 때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오르고 파산군(巴山君)에 봉해졌다.
그후 문헌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으므로 후손들은 선조(先祖)들의 세거지(世居地)인 함안(咸安)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상(尙)의 아들 청(淸)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원(源)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으며, 이 두 형제파가 함안 이씨(咸安李氏)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고려 구국의 명장(名將) 방실(芳實)은 당시 국가를 혼란시킨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여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에 봉해지고 추밀원부사가 되었으며, 하안 이씨를 명문(名門)의 위치에 올려놓는데 중심적 역할을 한 미(美)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관(名官)으로 이름이 났고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5부자 6급제(五父子六及第)」집안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큰아들인 인형(仁亨)은 당대의 석학 김종직(金宗直)과는 사돈지간으로,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에 항거하였으며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신(功臣)이 되었던 세응(世應)은 사간(司諫)이 되어, 당시 권세를 부리던 류자광(柳子光)을 탄핵하여 귀양을 보낼 정도로 기개가 당당하였으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영(翎)은 인형(仁亨)의 셋째 아들로 스승 조광조(趙光組)를 구하려다 화(禍)를 당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세응(世應)의 아들 임(霖)과 임진왜란(壬辰倭亂문)때 의병장으로 공(功)을 세운 달(達)․응성(應星)․왕(旺)이 대표적이며, 굉(翃)은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으로 이름을 날려 명문인 함안 이씨를 더욱 빛낸 인물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안 이씨(咸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7,792가구, 31,9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양이씨(咸陽李氏)
함양이씨 시조는 호군(護軍) 이홍(李洪)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37가구 1,85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함평이씨(咸平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고려 광종(光宗) 때 신호위 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내고 함풍군(咸豊君)에 봉해진 이 언(李 彦)을 시조(始祖)로 한다.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언(彦)의 10대손인 종생(從生 : 극명의 아들)이 세조(世祖) 대의 무장으로서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한 공(功)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오르고 각 도(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는데 함평 이씨(咸平李氏)의 뛰어난 인물은 대부분 그의 후손이다.
문신(文臣)으로는 우윤(右尹) 관(瓘)의 아들로 선조(宣祖)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효원(效元), 동지(冬至) 겸 성절사(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함릉부원군(咸陵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한 해(澥), 선조 때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낸 춘원(春元), 효종(孝宗) 때 대사헌(大司憲)과 예조 판서를 지낸 지익(之翼), 인조 때 황해도 관찰사 배원(培元) 등이 명망높은 충절(忠節)의 가문을 빛냈다.
무장(武將)으로는 통제사(統制使)를 지낸 원(沅), 영조 때 훈련대장(訓鍊大將)․병조 판서․분무공신(奮武功臣)을 역임한 삼(森), 정조 때 어영대장(御營大將)․도총관을 지낸 창운(昌運) 등이 훌륭한 함평 이씨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4,776가구, 103,6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풍이씨(咸豊李氏)
함풍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025가구 6,41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합천이씨(陜川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합천 이씨(陜川李氏)의 시조(始祖) 이 개(李 開)는 서라벌(徐羅伐) 6부 촌장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으로 고려(高麗) 개국 초에 가수 호장(嘉樹戶長)을 지냈고 강양(江陽 : 지금의 합천)으로 이거(移居)하여 합천 이씨(陜川李氏)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
그후 세계(世系)를 계승해 오면서 가세가 번창하여 전객령공파(典客令公派)․병사공파(兵使公派) 등 크게 11파(派)로 갈라져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공조참판(工曹參判) 윤검(允儉)의 아들로 이조 정랑(吏曹政郞)을 지낸 희민(希閔)․검열(檢閱)과 대교(待敎)를 거쳐 수찬(修撰)을 역임한 희중(希曾)․학문(學問)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던 희안(希顔)의 3형제를 들 수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합천 이씨(陜川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3,951가구, 98,59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주이씨(海州李氏)
해주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06가구 2,06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홍성이씨(洪城李氏)
홍성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76가구 1,16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홍주이씨(咸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홍주 이씨(洪州李氏)의 시조(始祖) 이유성(李維城)은 고려(高麗)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한(翰)의 아들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오르고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9세손인 기종(起宗)이 내시연경궁제학(內侍延慶宮提學)을 지내고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홍주(洪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유성(維城)의 아들 천소(倩笑)가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손자 권(鬈)도 평장사(平章事)를, 증손(曾孫) 응송(應松)은 판추밀원사(板樞密院事)를 역임하는 등 3대(代)에 걸쳐 벼슬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연수(延壽)는 응송(應松)의 아들로 판리부사(判吏部事)를 거쳐 수태보주국(守太保柱國)을 역임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으며, 연수의 아들 지청(之靑)도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조선(朝鮮)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서(舒)는 공민왕(恭愍王) 6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우헌납(右獻納)에 임명되었으나 친상(親喪)으로 취임하지 않고, 뒤에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이성계(李成桂)를 옹립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안평군(安平君)에 봉해졌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명망높은 홍주 이씨(洪州李氏) 가문을 빛냈다.
무관(武官)으로서 명성을 떨친 희건(希建)은 이괄(李适)의 난 때 공(功)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홍양군(洪陽君)에 봉해 졌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용골산성(龍骨山城) 전투에서 분전 끝에 전사하였으며 후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어 명문인 홍주 이씨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홍주 이씨
(洪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866가구, 11,43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산이씨(花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화산 이씨(花山李氏)의 시조(始祖) 이용상(李龍祥)은 안남왕국(安南王國) 교지군왕(交趾郡王) 이공온(李公蘊)의 7세손이며, 안남왕(安南王) 이천조(李天祚)의 둘째 아들로 전한다.「화산이씨 정사세보(花山李氏丁巳世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이용상(李龍祥)은 1226년(송나라 보경 2, 고려 고종 13) 변란을 피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 동래(東來)하여 함해도 옹진(甕津) 화산(花山)에 정착하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고려(高麗) 고종(高宗)은 이를 가상(嘉尙)히 여겨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그 지역의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였다. 옹진에 정착한 용상은 북면 봉소리(北面鳳所里) 동쪽 원추형 산위에 쌓은 화산성(花山城)에 올라가 <망국단(望國壇)>을 만들고 고국을 그리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용상(龍祥)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화산(花山)으로 삼게 되었으며, 용상의 아들 형제 중 맏아들 간(幹)이 고려조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도첨의 좌정승(都僉議左政承)과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역임했고, 차남 일청(一淸)은 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지내고 안동 내성면 토곡리에 정착하여 후손들이 그 곳에 많이 살고 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용상의 6세손 맹운(孟芸)이 공민왕(恭愍王) 때 호조 전서(戶曹典書)를 역임한 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해주(海州) 원통리(圓通里)에 은거(隱居)하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으며, 이태조(李太祖)가 세 차례에 걸쳐 한성판윤(漢城判尹)의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한편 효행(孝行)으로도 명망을 떨쳤던 맹운은 슬하에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장남인 덕종(德從)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재령 군수(載寧郡守)를 역임했고, 차남 대종(大從)은 송화 현감(松禾縣監)과 벽동 군수(碧潼郡守)를 지낸 후 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에 이르렀다.
그외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던 수복(壽福 : 승지 즙의 아들)이 호조 좌랑(戶曹佐郞)과 황해 도사(黃海都事)를 지내고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전횡을 과감하게 탄핵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인(嶙)이 평난원종공신(平難原從功臣)에 책록되고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어,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낸 운(運),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회백(懷白)․창룡(昌龍) 등과 함게 화산 이씨(花山李氏)의 명맥(命脈)을 이루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화산 이씨(花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58가구, 1,1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평이씨(和平李氏)
화평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63가구 1,49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흥양이씨(興陽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흥양 이씨(興陽李氏)의 시조(始祖)는 국자생원(國子生員) 이언림(李彦林)이다. 그는 고려 의종(毅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와 공부 상서(工部尙書)를 거쳐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를 지낸 후, 흥양(興陽)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흥양(興陽)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언림(彦林)의 증손 원방(元邦)이 동정(同正)을 역임했고, 7세손 길(吉)이 문과에 올라 봉상대부(奉常大夫)를 거쳐 통례문 부사(通禮門副使)에 이르러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졌다.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서원(舒原)은 언림의 8세손이며, 서원의 아들 균(均)이 문과에 올라 벼슬이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렀다.
그외 전(㙉)이 주자학(朱子學)에 능통하여 학명(學名)을 떨쳤으며, 준(峻)은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예조 정랑(禮曹正郞)․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수차 의병(義兵)을 일으켜 나라에 공(功)을 세웠다.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를 지낸 원경(元卿)은 첨정(僉正) 대록(大祿)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흥양 이씨(興陽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450가구, 13,82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각성씨의 시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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