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행복한 날, 행복한 아침입니다. 새 날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주를 좇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7절 상반절을 보면 다윗이 그일라에 온 사실을 누군가가 사울 왕에게 알린 사실이 나옵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사울에게 고한 것이 그일라 거민들 중에서 사울을 지지하는 사람의 개인적 소행인지 아니면, 그일라 사람들 전체의 의사를 누가 대신 전달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1절에 비추어 볼 때 후자의 가능성이 더욱 큽니다. 즉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사울에게 고함으로써 다윗이 베푼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자기도 어려운 처지에서 목숨을 걸고 그일라 사람들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었건만 그일라 사람들은 오히려 다윗을 위기로 몰아 넣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일라 사람들의 처사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사실 그일라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윗이 무죄하다는 것과 그가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그들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다윗이 참으로 의롭고 왕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다윗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그를 밀고하여 위기에 빠지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일라 사람들이 사울의 보복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사울은 다윗을 도와준 아히멜렉이 있는 놉의 제사장들을 학살하였습니다 (22장). 그일라 사람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사울에 의해 보복을 당해 멸절되는 것을 피하고자 다윗을 사울에게 밀고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일라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자,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다윗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명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한 나머지, 의를 따르는 대신에 불의의 길을 택하고 만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그들의 선택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은 그들의 행위는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악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이 세상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일이, 신앙 세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주님을 배신합니다. 그들은 육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세상의 핍박으로 인한 고난을 피하기 위하여, 세상의 즐거움을 위하여 생명의 주를 배반합니다. 그들도 주께서 자기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에는 감격하였을 것이나, 자기를 부인하지 못함으로 끝내는 주를 배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주를 따를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마 16:24)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결코 주를 따를 수 없습니다.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사람만이 주를 따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주를 따르도록 얌전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세상은 주를 따르려는 사람에게 언제나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박해하고 세상적으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게 합니다. 계시록을 보면 마지막 때에 사단의 하수인인 적그리스도가 짐승의 표를 이마에 받지 않은 사람은 매매를 할 수 없게 한다고 하였습니다(계 13:17),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는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주를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를 따른다는 것은 생각이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자기 부인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주를 끝까지 따르는 자에게는 다윗을 따른 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영원한 영광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택하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겠습니까, 자기의 일시적인 유익을 쫓아 세상을 따르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각자 기도드리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