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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세메스 인들이 당한 재앙
삼상 6:17-21
17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18 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놓은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21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삼상 6:17-21 / 그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무시하고 잘못 다룸으로써 여호와께 지은 죄를 씻기 위하여 금으로 종기 모양의 예물 다섯 개를 만들어 주께 보냈는데, 자기들이 다스리는 다섯 도성 아스돗과 가사와 아스글론과 가드와 에그론을 위한 것이었다. 18) 그들은 또 블레셋의 제사장들이 제안하였던 것보다 더 많은 쥐를 금으로 만들어 보냈는데, 블레셋의 다섯 왕들이 다스리던 모든 지역의 요새화된 도성뿐만 아니라 시골의 작은 마을들을 위해서도 그 숫자대로 각각 한 마리씩 금쥐를 만들어 속죄예물로 보냈기 때문이다. 벧세메스의 주민들이 법궤를 모셔 놓고 제물을 바쳤던 그 큰 바윗돌은 오늘날까지도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남아 있어 그때의 옛일을 증거해 주고 있다. 19) [기럇여아림으로 가는 법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법궤를 보고 기뻐하며 뛰어가 맞이할 때에 ㄱ) 여고니아의 아들들은 이렇게 하지 않고 방관만 하였다. 이렇게 몇 사람이 여호와의 법궤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벧세메스 주민들 가운데서 70명을 쳐죽이는 중한 벌을 내리셨다. 여호와께서 무서운 형벌을 내리셨기 때문에 백성이 아주 슬퍼하였다. (ㄱ. 70인역에 따라 내용을 보충하였다) 20) 그래서 살아 남은 벧세메스 사람들이 모여 `도대체 누가 그토록 거룩하신 하나님 곁에서 가까이 지내며 살아 남을 수 있겠는가? 법궤를 이제 여기서 다른 곳으로 보내야 되겠는데 어디로 보내면 좋단 말인가?' 하고 탄식하였다. 21) 결국 그들은 기럇여아림으로 심부름꾼들을 보내 `블레셋 족속이 여호와의 법궤를 되돌려 보냈습니다. 내려와 법궤를 가져가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내면서 속건제물을 함께 드렸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기쁨으로 맞고 제사했지만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다가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 희생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궤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드린 속건제물(17-18)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 금송아지와 금쥐는 블레셋 전체 성읍과 주민을 의미하는 것임을 다시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곧 블레셋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굴복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속건제물을 드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당하고 있었던 재앙을 면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습니다. 여호수아의 밭에 있던 돌이 ‘오늘까지’, 곧 사무엘서가 기록된 당시까지 있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당한 재앙(19)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할 당시에 여호와의 궤를 만지거나 들어다보지 말라고 경고하였으며, 누구든지 그 경고를 무시하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민 4:15, 17-20). 이는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는 것은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침해하는 것으로 율법으로 금지하였습니다. 지성소에만 보관하여 대제사장만 1년에 한 번 들어가서 볼 수 있었기에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호기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벧세메스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20-21)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자 슬피 울며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탄식을 하였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아직도 정확히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말씀을 무시한 채, 거룩한 하나님의 궤를 구경거리 삼는 경솔함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처럼 여호와의 궤만 옮기면 되는 줄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령을 보내어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블레셋 사람들이 가져온 여호와의 궤를 옮겨가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적 용 : 당신은 오늘 블레셋인들의 속건제물과 벧세메스인들의 죽음을 통하여 어떤 신앙적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까?
여호와의 궤가 이동하면서 침묵하던 하나님이 먼저 블레셋에게 그리고 이제 레위인들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스스로 그의 위엄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보는 금지된 영역에 대한 경솔한 호기심의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블레셋에서의 소문을 분명 들었을 것인데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힘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제 멈추고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에서 할 수 있는 힘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6:17
아스돗 - '진'(陳)이란 뜻으로 가사 북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블레셋의 주요 교통 관문이다. 신약 시대에는 '아소도'란 명칭으로 불리웠다(행 8:40). 5: 1 주석 참조. 가사 - 이곳은 예루살렘 남서쪽 약 80km지점, 지중해 해안으로부터는 약 5km지점, 아스글론으로 부터는 남쪽으로 약 20km지점에 위치했다. 당시 이 도시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남서쪽으로는 애굽으로, 북쪽으로는 수리아 , 메소포타미아로 통하는 군사, 무역용 도로가 이 도시를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도시는 군대 및 대상(隊商)들이 취거나 물을 공급받았던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었다(Mare). 아스글론 - 이곳은 아스돗과 가사의 중간에 위치한 지중해변의 비옥한 도시이다. 가드 - 아스돗 동쪽 약 20km지점에 위치한 블레셋의 주요 도시로, 오늘날 '텔 엘 사피'(Tell el-Sahfi)로 추정된다. 5 : 8 ; 수 11 :22;13: 3 주석 참조. 에그론 - 지증해 연안에서 동쪽으로 약 14km, 아스돗 북동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블레셋의 주요 다섯 성읍 중 하나이다. 수 13: 3 주석 참조.
=====6:18
본절은 사본(寫本) 전수 과정상 약간의 문제가 내포된 구절이라 볼 수 있다. 즉 맛소라 사본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본절 중 '웨에드'( , '그리고~에 이르기까지')를 '웨에드'( , '그리고 증거')로, '아벧'( , '슬픔', '통곡')을 '에벤'( , '돌')으로 고쳐 읽어야 한다(Keil & Delitzsch, F.R. Fay, R. Payne Smith). 그렇게 볼 때 본절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된다. "드린 바 금쥐는 모든 견고한성읍과 시골 동리 곧 다섯 방백에게 속한 사람의 모든 성읍의 수효대로였더라. 그리고 여호와의 궤를 놓은 큰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서 오늘까지 증거가 되니라"(And the number of the gold rats was according to the number of Philistine towns belonging to the five rulers-the fortified towns with their country villages, The large rock, on which they set the ark of the Lord, is a witness to this day in the field of Joshua of Beth Shemesh, NIV). 견고한 성읍 - 높은 성벽이 둘러쳐 있고 문과 빗장이 있었던 요새화된 성읍을 가리킨다(신 3:5). 시골 동리 - 이것은 '견고한 성읍'과는 반대 개념으로서, 저지대에 위치하였고 성곽을 갖추지 못한 작은 마을을 가리킨다(겔 38:11;슥 2:4). 그 돌은...오늘까지 있더라 - 성경에서 '돌'은 특별히 기억해야 할 가치가 있는 사건들을 세월이 흐른 후에도 생생히 일깨우게 할 증표로서 종종 언급되곤 한다(창 31 :52; 수 4: 5;24:27). 따라서 여기의 '큰 돌' 역시 빼앗겼던 언약궤를 다시 되찾은 기념비적 사건을 후일에 되새기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였다. 한편 '오늘까지'는 본서를 기록할 그 당시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6:19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보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범하는 일이기 때문에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민 4:5, 6, 15-20). 그럼에도 불 구하고 벧세메스 사람들이 그것의 내부를 들여다 본 것은 사악한 세속적 호기심 때문이었으며, 그 같은 호기심은 결국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결과였다(갈 6:7).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궤를 전리품 취급한 블레셋을 정벌하셨듯이(5:1, 2), 그 궤를 단순히 세속적 구경거리로 삼은 벧세메스 사람들도 엄히 정벌하신 것이다. (오만)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 여기서 '오만'이라는 숫자는 필사자의 실수에서 기인한 듯하다. 즉 숫자 표기를 종종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내는 고대의 숫자 표기 방식에 따라 '칠십명'( , 쉬베임 이쉬)을 달리 설명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오만'이라는 말이 삽입된 것 같다. 어쩌면 '아인'( , 70)을 '눈'( , 50,000)으로 잘못 보았을지도 모른다(Kennicott). 아무튼 후일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의 인구가 최고로 번성했을 때에도 7만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여기의 '오만 칠십 인'은 그냥 '칠십 인'으로 봄이 타당하다(Keil, Smith, Fay). 이런 점에서 유대의 역사가 요세 푸스의 기록도 '칠십 인'으로 말하고 있다(Antiquities, vi, 1, 4). 그리고 히브리 여러 사본들에서도 '오만'이란 숫자는 빠져 있다.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 하나님의 징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벧세메스 사람 '칠십 인'은 한 가정의 가장(家長) 등 중요한 위치에 있던 인물들이었을 것이므로, 그 두려운 사건은 각 지역 주민들에게 큰 충격이 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징계를 통해 모든 사람들은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여호와의 거룩성'을 깊이 깨달아야만 했다.
=====6:20
누가 능히 서리요 - 여기서 '서리요'( , 아마드)는 원래 '서다', '머물다', '시다' 등의 의미이다. 특별히 이 단어는 성경에서 '존경하는 자세로 어떤 특별한 대상 앞에 서있는 것', 곧 '경배' 혹은 '숭배'의 의미로 사용된다(왕상 1:2;17: 1;18:15;왕하 3:14;렘 40:10). 따라서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말은 감히 받들어 모실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성과 인간의 철저한 부패성을 시인하는 말임에 틔림없다. 그를...뉘게로 가시게 할꼬 - 법궤를 경솔히 돌여다 본 범죄의 대가로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징계를 받은 벧세메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전과 같은 징계가 또 내려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 궤를 다른 지역으로 보내려 했다. 따라서 이것은 벧세메스 사람들이 자신들이 징계를 당한 분명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에게 언약궤와 관련하여 미신적 신앙이 다분히 있었음을 보여준다(4:3;5: 8)
=====6:21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어 - 여기의 '기럇여아림'(Kirjath-jearim)은 '숲의 성읍'이란 뜻으로서 오늘날의 위치는 '쿠르엣 엘 에납'(Kuryet el Enab)으로 추정된다(Robinson). 당시 이 성읍은 벧세메스 북동쪽 약 145km, 예루살렘 북서쪽 약 13km지점에 위치하였다. 그러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다른 성읍들을 제치고 하필 이면 왜 기럇여아림으로 언약궤를 보내려 했을까? 그것은 그 당시 기럇여아림의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를 살펴봄으로써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당시 기럇여아림이나 벧세메스는 모두 블레셋의 정치적 영향전 아래 놓여 있었다(Blenkinsopp). 이 사실은 위의 두 성읍과 인근한 르바임 골짜기를 후에 다윗이 블레셋 족속들로부터 회복시켰다는 성경의 언급을 통해서 분명해진다(삼하 5 :18-25). 즉 다윗이 르바임 골짜기를 완전히 수복시키기 전까지 위의 두 성읍은 당시 르바임 골짜기를 점령하고 있었던 블레셋 사람들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 때문에 블레셋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벧세메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마찬가지로 블레셋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던 기럇여아림으로 언약궤를 보내려 했던 것이다. 너희는 내려와서 - 여기서 '내려와서'라는 말은 벧세메스(Beth-Shemesh)가 해발 약 305m, 그리고 기럇여아림(Kirjath-jearim)이 해발 약 762m라는 점에서, 문자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설 교 >
진정한 충성
사무엘상 6:1-16
<바이올린의 예술>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20세기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추억하는 기록 영화입니다. 미국의 공영방송인, PBS에서 “The Art of Violin” 이라는Title로서 한번씩 방송합니다.
(A documentary showcasing the unique talent of the 20th century’s greatest violinists.)
21세기의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들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연주자마다 곡 해석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고, 다르게 연주한다고 해설가는 이야기합니다. 같은 작곡가의 음악을 연주하더라도,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연주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귀에는 뭐가 다른지 구분이 되지 아니합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있습니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 가운데 한 사람인 Ivry Gitlis 가 있습니다. 이분은 UNESCO Goodwill 대사로서도 활동한 분인데, 이분이 나와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어떤 곡을 연주하는 방법이 하나 밖에 없다면, 그것은 그 음악에 대한 모욕이다. 그 음악의 품질이 워낙 저질이기 때문에, 연주하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고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음악의 위대함은 다양성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교회에도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사역자들이 있고, 교회를 다스리고 치리하는 장로, 교회의 재정을 담당하고, 구제와 봉사의 직분을 담당하는 집사, 기도하는 직분인 권사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찬양으로, 식당 봉사, 빌딩 관리, 주일학교 교사 등 많은 사람들이, 많은 분야에서 열심히 주님을 위하여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매우 다른 은사와 다양한 직분이 있지만, 그러나 공통적인 사명이 있다. 그것은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칭찬할 때도 업적, achievements, 혹은 결과가 아니라, 신실함, 충성된 삶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충성된 종”으로 살기 위하여 살아야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진정한 충성된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하겠습니다.
1.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 하는것이 진정한 충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으로 블레셋 사람에게 법궤를빼앗겼는데, 그 빼앗긴 법궤를 다시 찾게 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법궤는 구약의 가장 거룩하고, 가장 능력있는 기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를 높여주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소중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성전이나, 성전의 기구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된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성도들이 법궤나, 성전 건물 그 자체를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결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법궤라는 상자나 혹은 성전이라는 건물 자체에 어떤 신비한 신적인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물건들이 무슨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느끼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도록 하셨습니다.
육신의 눈에는 성전이 보이고, 눈에는 법궤가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들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잘못 사용하였습니다.
성전의 법궤가 마치 무슨 마술적 능력이 있는 것처럼, 이것을 가지고 나가서 싸우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법궤를 가지고 나서 열심히 싸웠음에도 불구히고, 크게 패배하였고, 법궤는 빼앗겼고, 대제사장 엘리의 가문은 멸망했습니다. 철저하게 망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이 법궤가 가는 곳마다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던 다곤 신상이 박살이 났고, 하나님의 법궤가 가는 마을마다 그 마을 사람들에게는 독종이 생겼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저들은 견딜 수가 없어서, 이 법궤를 이 마을로 저 마을로 옮겨 다니다가, 마지막에 에그론이라는 마을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에그론 사람들은 이 법궤가 자기들 마을로 올겨 오는 것 자체를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이 법궤는 블레셋 땅에 일곱 달을 머물게 됩니다. 이제 블레셋 사람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회의를 합니다. 법궤가 이곳에 있으면 더 큰 재앙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자고 결정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는 것은 당연한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려보내는지 그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을 자기들의 신을 섬기는 블레셋의 제사장에게 물어 보았더니, 반드시 속건제를 드리고 또 선물을 보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자기들의 우상, 다곤 신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처럼, 선물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다곤 신을 섬길 때 하듯이, 하나님도 선물을 좋아하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금을 좋아하는 것처럼, 금으로 만든 선물을 드리면 하나님의 진노가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틀렸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충성입니다. 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자기들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이것이 틀렸습니다.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에서도, 제사의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심령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겸손한 마음이며, 정직하고, 신실한 생활입니다. 아무리 많은 소,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물을 바쳐도, 그 마음이 하나님께 정직하지 못하면, 그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신실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사람들이 금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합니다. 자기들을 괴롭힌 그 독종 모양과 같은 금독종 다섯과 곡식을 다 먹어 버리니는 쥐의 모양과 같은 금쥐 다섯을 만들어서 법궤와 같이 보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자기들 땅에 독종이나 쥐가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입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Humanism, 인본주의 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섬길 때에, 열심도 필요하고, 많은 충성도 있어야 하지만, 그러나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섬겨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모래위에 쌓는 집과 같습니다.
오래전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전 석유상이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석기시대가 돌이 없어서 끝난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종이가 많이 있지만 종이 신문인 워싱턴포스트가 아마존 CEO에게 넘어갔습니다. 1990년대 전자제품의 왕으로 군림했던 일본의 소니가 몰락했습니다. 전자제품을 만드는 재료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Cellular Phone의 No. 1, 최강이었던 핀란드 노키아가 몰락했습니다. 얼마 전 Microsoft가 노키아를 72억불에 인수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세계 Cellular Phone 시장은 삼성, 애플, MS+노키아, 구글+모토로라의 4강 체제가 되어서 앞으로 더욱 뜨겁게 경쟁을 벌릴 것으로 사람들은 예상합니다. 물론 지금 애플과 삼성이 최고의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미국 경영 컨설턴트 짐 콜린스는 저서 <How the mighty fall?>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에서 한때 위대 했지만 그러나 몰락한 기업의 특징들을 설명합니다.
1) 성공에 대하여 자만심으로 가득찬 단계; 2) 욕심으로 인하여 원칙 없이, 사업 확장을 확장하는 단게; 3) 위험과 위기의 경고를 무시하는 단계; 4) 회생과 구원을 위하여 무분별하게 노력하는 단계; 5) 유명무실해지거나 사라지는 단계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유명한 기업이라도 한순간 자만하거나, 방심해서 추락한 사례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사역의 성공과 실패는 이러한 요소들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공과 실패, 번영과 몰락은 오직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하며,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살아 나가고 있는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우리들이 되어야합니다.
2. 진정으로 충성된 삶은 우리에게 아픔, 희생, 손해가, 인간적인 모든 감정을 극복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본문은 블레셋이 법궤를 이스라엘 경내, 벧세메스로 보내는 사건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먼저 수레에다 법궤를 싣고, 소 두 마리로 하여금 이 수레를 끌게 합니다. 그 소는 암소 2 마리이며, 지금 송아지를 낳아서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암소 두 마리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소를 모는 사람이 없습니다. 소를 모는 사람이 없이, 수레에다가 법궤를 실어 놓고, 멍에를 메게 하고 그리고는 이스라엘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특히 소는 한번 다녔던 길은 잘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보지 않은 길은 사람이 몰아주어야 합니다. 만약 모는 사람이 없으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소는 벧세메스로 가지 아니할 확률이 99.99%입니다. 소를 모는 사람이 없고 한 번도 벧세메스로 가보지 아니하였고 그리고 송아지가 집에 있으니까 송아지를 생각해서 집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벧세메스의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갔다고 합니다.“Then the cows went straight up toward Beth Shemesh, keeping on the road and lowing all the way;
도로 중앙에서 정확하게 벧세메스를 향하여 갔습니다. 헤매지 아니했습니다. 흔히 우리가 drive하면서, 잘 아는 길도 때로는 lost 하며, 헤매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암소들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곧장 갔다고 합니다. “they did not turn to the right or to the left.”
이것은 하나님이 이 소를 벧세메스로 인도하고 계심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법궤를 반드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기 위하여 짐승까지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처음길이라고, 경험이 없다고 너무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을 광야 40년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소들은 법궤를 싣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에 곧게, 바르게, 일관성있게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르게 순종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암소가 벧세메스로 향하여 가면서 울면서 갔습니다. 왜요? 가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역이기에 가야합니다. 그러나 눈물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왜? 새끼가 뒤에 있으니까요. 새끼를 떼어 놓고 가기 때문에, 저들이 울면서 갔습니다. 젖 먹는 새끼를 버려두고, 벧세메스로 간다는것이 소들의 아픔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는 구레네 시몬이 생각이 납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지기는 졌는데, 왜 자기가 십자가를 지는지 모르고 졌습니다. 억지로 졌습니다. 그러나 뒤에 생각합니다. “내가 이 십자가를 너무나 잘 졌다.”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넘치는 복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구레네 시몬의 아들인 루포에게 문안 하였고, 그의 어머니를 바울이 나의 어머니라 할 정도로 온 가정이 믿음 생활을 잘 했습니다. 루포의 어머니는 곧 구레네 시몬의 부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억제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의 가정에 큰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지는 순간에는 이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내가 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어쩌면, “참 오늘 재수 없는 날이네” 라고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 십자가는 자기의 인생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때로는 모험적인 일도 해야 되고, 힘든 일도 해야 됩니다. 어떻게 시작했던지 중요한 것은 끝까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께 봉사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많은 괴로움 속에서 울면서 할 수도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피곤한 가운데 할 수 있습니다. 화가 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 127:5-6 /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우리는 인간적인 정이나, 인간적인 욕심이나, 인간적인 어떤 것을 다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주님을 섬겨야합니다. 인간적인 정을 극복하고 주님께 충성해야합니다.
3. 진정으로 충성된 삶은 끝까지 하나님께 희생합니다.
13-14 /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이 암소들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무사히 안전하게 벧세메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법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굉장히 기뻐합니다. 그리고 크게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많은 고통과 희생과 수고를 하여, 법궤를 실은 수레를 메고 온 그 소들이 죽어서 번제물이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죽게 됩니다. 이 소들은 희생 제물로 죽고, 마지막에는 법궤만 남습니다.
그런데 이 소의 입장을 보세요. 그렇게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이곳까지 왔는데, 상급은 주지 아니하고, 죽음으로 제물이 됩니다. 이 소들은 끝까지, 깨끗하게 충성했습니다. 이들의 헌신과 충성은 깨끗하게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요새말로 하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어쩌면 이 소는 공로상, 표창장, 감사패를 받아야 하는데 상은커녕 죽었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고, 수고하고 그리고 죽었습니다. 오직 법궤만 남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험에 드는 이유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아니하는 섭섭함 때문입니다. 명목은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show off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참으로 성숙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나가는 일입니다.
마 6장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구제를 통하여 주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6:1-4 /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지금은 천국 가셨지만 시각 장애인으로서 백악관 보좌관까지 된 강영우 박사의 인생고백입니다. 이 분은 중학교 다닐 때에 사고로 그만 실명하였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한국에서 연세대학을 졸업하고 도미해서, 피츠버그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1976년 Ph.D.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시각장애자 박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유엔 세계위원회에서 부의장으로 지냈고, 나중에 루즈벨트 재단의 고문으로 지내면서, 일생 동안 7억명에 해당하는 그 많은 장애인 복지를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이 분의 고백에 의하면, “앞을 보지 못하지만 장애는 축복일 수 있다.”, “장애를 참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다.”, “단순히 장애를 참고 한 맺힌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장애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고저 하시는 뜻을 깨달아야 한다.” 강박사님 부인이 어릴때 부터 자기들의 아이들에게 꼭 자기 전에 성경을 읽어 주었다고 합니다. 늘 그랬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아이들 방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가 성경을 읽어주려고 하니, 아이가 눈을 번쩍 뜨더니, “아버지는 성경을 볼 수 없쟎아.” 아버지는 “걱정마라. 그리고 불을 껐습니다.” “아니 이 깜깜한 데서 어떻게?” 아버지는 점자 성경을 앞에다 놓고 손가락으로 훑어가면서 성경을 유창하게 읽었습니다. 아이가 깜짝 놀라서 “아버지는 전기불도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성경을 잘 보나?” 아버지가 말합니다. “사람은 밝은 데서 보는 것보다 어두운 데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단다.” “눈을 뜨고 보는 것 보다, 눈을 감고 보는 세계가 더 넓다.” 아이들이 이 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때로가 형통한 날보다 어려운 날에 영적인 진리를 더욱 잘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 더욱 많이 기도하고, 고난 속에서 더욱 순수하게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끝까지 희생할 때에 진정한 충성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1) 항상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나가며; 2) 인간적인 모든 감정을 극복하고 섬겨야합니다; 3) 그리고 끝까지 희생하면서 깨끗하게 섬겨야합니다.
이렇게 진정으로 이러한 충성된 삶을 살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인생에, 가정에 우리 교회에 은혜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
이선영목사(덴버연합감리교회) / 삼상 6:19-7:4
1. 사무엘상 네번째 설교입니다. 오늘은 <기럇여아림 사람들>을 설교하려 합니다.
<기럇여아림>이란 “숲속의 성읍” 이란 뜻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겨 가라는 벧세메사 사람들의 말을 듣고, 군말없이 언약궤를 그들 성읍으로 가져온 사람들입니다.
블레셋은 하나님의 언약궤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다곤신상이 부서졌고, 독한 종기로 고생하였고, 심지어 에그론 사람들은 언약궤가 자기들 성읍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전쟁에서 힘써 빼앗은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냅니다. 언약궤를 돌려보낼 때의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삼상 6:7,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소에게 멍에를 메우면, 목이 아파서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소에게 멍에를 메우고 수레를 끌게 하였습니다.
젖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게 하였고, 송아지는 떼어서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어미 소는 송아지 생각에 수레를 제대로 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최악의 방법을 동원하여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다곤 신상이 깨어진 것처럼 언약궤가 부서지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마리의 어미 소는 아주 신중하게 수레를 끌었습니다.
삼상 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우리도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는 믿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윽고 언약궤가 벧세메스에 도착하였습니다.
2.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몹시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언약궤를 보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어떤 성경은 오만 칠십명이 죽었다고 기록하였고, 또 다른 성경은 그 성읍에 오만 칠십명이나 살지 않았다는 입장에서 오만 명을 뺀 것 같습니다.
어쨋든 벧세메스 사람들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더 이상 언약궤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언약궤를 가져가라 하였습니다.
물론 기럇여아림 사람들도 언약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언약궤로 인하여 벧세메스 사람들이 재앙을 당했다는 소문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언약궤는 뜨거운 감자와 같았습니다. 좋은 것은 맞지만, 그게 너무 뜨거워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으로 기럇여아림에 또 재앙이 임하면 어찌합니까?
기럇여아림 사람들도 에그론 사람들처럼 언약궤가 자기 성읍으로 들어오는 것을 반대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군말 없이, 순순히 그곳에 가서 언약궤를 옮겨 왔습니다.
3. 성경은 기럇여아림 사람에 대하여 아주 단순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다가,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시켜 언약궤를 지키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삼상7:1절,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여기에도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잊지 말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과 구별하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거룩한 것이 구별된 것이고, 구별된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과 뒤죽박죽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하나님 물건을 신중하게 다룬 것입니다.
20년 동안 그곳에 있었습니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삼상 7:2절,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공동번역에서는 “이십 년의 세월이 지난 후 이스라엘 족속은 모두 여호와께로 마음을 돌렸다” 번역하였습니다. 사모하였다는 말이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점점 참된 신앙을 회복한 것입니다. 이제 언약궤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4. 세 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기럇여아림 사람들의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옮겨가라는 말에, 어떤 이유도 없이, 즉시 벧세메스로 가서 언약궤를 옮겨왔습니다.
둘째,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엘리아살은 20년 동안 언약궤를 지키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셋째, 20년 동안 기럇여아림에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즉 어떤 재앙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점점 더 하나님께로 마음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5. 기럇여아림 사람들의 바람직한 신앙의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2차 전쟁 때에 언약궤로 승리를 얻고자 했던 사람들처럼, 그런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언약궤를 통하여 어떤 이득을 얻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대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물건이기에 신중하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당하였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두었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잘못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단도리를 하였습니다.
성경학자 메튜 헨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언약궤가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냄새를 발하였는데, 기럇여아림 사람들의 손에 있음으로,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를 발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물건이 기럇여아림 사람들의 손에 있음으로 평안의 향기, 은혜의 향기, 생명을 구원하는 향기가 난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과 기럇여아림 사람들을 대조하게 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를 기쁨으로 맞이했다가 나중에는 슬픔으로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언약궤로 인하여 성읍 전체가 평안하였습니다. 이전보다 더 경건한 모습이었습니다. 처음에도 좋았고, 과정도 신중했고, 나중도 보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일로 모두가 평안하고, 감사하고, 더욱 만족스럽기를 축복합니다.
6. 둘째로,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은 20년 동안 헌신하였습니다. 왜 하필이면 아비나답의 집에다 언약궤를 두었을까요?
말씀을 보면, 그는 레위인도 아니고, 제사장의 집안 사람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아비나답의 집이 산에 있었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언약궤를 좀 더 높은 곳에 두고자 하는 마음이지 않을까요?
아비나답은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집에 하나님의 물건을 두는 것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당시에 레위인도 있고, 제사장도 있었겠지만, 일반 성도의 집에 언약궤를 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거룩한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라 하였습니다. 아비나답은 자기 아들 엘리아살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키게 하였습니다.
우선 언약궤를 두는 장소를 깨끗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눈비가 오면 젖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 사람이나 쉽게 고개 내밀고 들여다 보지 않게 하였을 것입니다.
산짐승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단도리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아살이 밤낮없이 그곳을 지켰을 것입니다.
20년의 세월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엘리아살이 20살부터 그 일을 시작하였다면 나이 40까지 그 일을 한 것입니다. 누군가 한 사람의 헌신이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누가 대신 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믿음이기를 축복합니다.
7. 셋째로, 그렇게 20년이 지났고, 이스라엘 온 족속이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공동번역은 “하나님을 사모하였다”를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렸다”고 하였고, KJV에서는 “하나님을 향해 애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모하다는 용어인 “나하” 는, 사모하다는 뜻도 있고, 사모함으로 애절하게 소리내어 우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였다는 말씀이 주는 의미가 상당합니다.
(1) 언약궤를 바라보던 신앙이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2) 지난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언약궤를 바라보았던 잘못을 통회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 20년 세월이 지나고보니, 언약궤만 바라보았지, 막상 하나님을 찾지 않았음을 애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지요.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영이 새살처럼 돋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은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게 될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8. 그러나 그런 마음도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오늘 말씀 다음에는 사무엘이 등장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다른 국가처럼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왕을 요구합니다.
사무엘이 몹시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상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과 세상적인 권세와 능력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어찌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떻게하면 인간의 욕망을 채울 수 있을까요? 살수록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는 인생을 어찌 달랠 수 있을까요?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도다”라 하였습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9. 정답은 아니지만, 제가 최근에 작게나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이번에 손녀가 두 주간 다녀갔습니다. 못생겼지만 참 이뻤습니다. 두 주간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목요일은 제가 테니스를 하는 날인데, 테니스도 하지 않고 손녀랑 지냈습니다. 모두들 그렇게 손녀에 빠져 있다가 손녀가 가면 어찌하려느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제도 새벽기도 마치고 아침 시간에 손녀를 보내고 얼마나 더 보고 싶으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좀 부족하다, 아쉽다 정도로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두 주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안아주었습니다.
기타를 치며 함께 노래를 불렀고, 젖먹이는 시간이면 제 애미를 밀쳐내고 제가 젖을 먹였습니다. 심지어 저녁이면 제가 목욕을 시켰습니다. 마음을 다 쏱았습니다.
근데, 그렇게 많이 아쉽지가 않습니다. 아쉬움과 부족함은 채워지지 않아서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면, 오히려 그 마음에 흡족함이 있습니다.
마음을 줄 만큼 주고, 쏟을 만큼 쏟으니, 아쉬움도 사라지고, 부족함도 채워지는 것이었습니다.
10. 다윗이 이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워주셔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그 마음이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 마음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흡족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 채우고자 하면, 그것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만을 더욱 자극할 뿐입니다.
욕망의 길 위에는, 나보다 더 잘 뛰는 놈이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 나쁜 놈이 있는 것입니다. 그 끝은 더 나쁜 놈에게 먹히게 마련입니다.
인생은 욕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흡족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내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충만함으로 만족하고 흡족한 것입니다.
11. 기럇여아림 사람들의 신앙의 자세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언약궤로 인하여, 처음에도 좋았고, 과정도 경건하였고, 결과도 흡족하였습니다.
아비나답과 엘리아살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거룩하였고, 구별되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언약궤를 지켰습니다.
20년 동안 아무런 일이 없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궤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할 때,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흡족한 것입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과 같은 믿음이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삼상6:17-21 / 박광석목사
법궤를 포획한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정복한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신도 포획했다는 승리감에 도취했다. 그러나 법궤로 인해 염병이 생기고 사람들이 죽어가자 법궤의 저주라고 판단하고 이스라엘로 다시 돌려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럼에도 정말 법궤로 인한 징벌인지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끌지 않는 소 두 마리의 수레에 태워 법궤를 벧세메스로 보낸다. 그 수레가 벧세메스로 곧장 가면 법궤의 저주가 맞고 혹 다른 어느 쪽 길이라도 가게 되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기로 한 것이었다. 벧세메스로 갈 확률은 희박했다. 두 소가 함께 사이좋게 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새끼들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갈 수 있는지,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는데 과연 곧장 갈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을 고려해보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모든 장애요인이 있음에도 소들을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로 향한 것이다. 인간의 온갖 방법도 이용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의 저주라는 것을 확인한다 해도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는다. 단지 놀라고 두려워할 뿐이다. 하나님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더욱 굳건하게 믿느냐 하는 것이다.
잠깐 멈추고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의 저주에 대해 얼마나 혼이 났는가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법궤 신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속건제물로 금 독종을 드렸는데, 그들은 법궤 옆에 금으로 만든 악한 종기 모양을 만들어 놓아 법궤 신에게 그것을 바치면서 진노를 풀어달라고 빌었다. 아스돗, 가사,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이곳은 그들의 대표 성읍들이다.)을 위해 각각 다섯 개를 만들어 제물로 바치고, 금 쥐를 만들어 그 외 다른 지역의 성읍들과 마을들을 위해 바쳤다. 수레에 법궤를 싣고 그 옆에 그것들을 둔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점점 멀어지는 소가 끄는 수레를 바라보고 과연 벧세메스로 향할 것인지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고 수레가 벧세메스로 향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기뻐했다. 반면 벧세메스 사람들은 밀을 추수하다가 소가 끄는 임자 없는 수레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위에 법궤가 있는 것을 보고 환호를 올리며 기뻐했다. 벧세메스라는 마을은 블레셋과 이스라엘 국경 부근에 있는 마을로 법궤가 블레셋 땅에서 일으킨 재앙을 이미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진노의 근원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을 벌하는 법궤가 가까이 오는 것을 기뻐했다. 수레는 여호수아라는 사람의 밭 큰 돌 앞에 멈추어 섰다. 사람들은 하던 일들을 그만두고 수레 앞으로 모여들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얼마나 황홀경에 빠져 기뻐했겠는가!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업신여기고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것으로 여기고 불안에 떨었을 것이다. 블레셋이 쳐들어온다면 벧세메스가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제 법궤가 다른 곳이 아닌 자신들의 마을에 도착했으니 마치 자신들이 블레셋에게 항복을 받은 기분이었고, 하나님이 그 마을을 가장 먼저 축복한 것으로 보았다. 레위지파 사람들은 법궤와 금덩어리가 담긴 상자들을 수레에서 내려 바위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수레를 해체해 그 나무를 가지고 번제단을 만들고 암소들을 잡아 번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축제가 벌어진 것이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 자신들이 가진 것들을 내놓아 제사를 드렸다.
그 마을이 생긴 이래 이렇게 기뻐해 본 적이 있을까?
하나님의 법궤가 그 마을에 당도한 것이다. 보통 때 같으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블레셋 경계에 있는 마을이니까. 그런데 이런 일도 생긴 것이다. 너무나 흥분한 탓일까? 법궤를 본 사람들이 신기해서일까? 사람들은 법궤 안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려고 모여들었다. 순간 그 안을 들여다본 사람들은 죽어나기 시작했다. 70명이 순식간에 죽었다. 축제가 통곡하는 장례장으로 바뀌었다. 기쁨이 두려움과 혼란으로 바뀌어버렸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애곡하며 말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누가 감히 서겠는가?” 법궤 앞에 서는 사람은 블레셋 사람이든, 이스라엘 사람이든 다 재앙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 법궤를 누구에게 보내야 하겠는가?” 그들은 슬픔과 두려움과 함께 방도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는 다가설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원래 법궤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그 앞에 연기 가운데 어렴풋이 보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잊었을까? 아니면 신앙이 떨어져 법궤를 다루는 교육이 전수되지 않아(이것은 전쟁에 법궤를 가지고 나간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잘 알지 못했던 것일까? 그들은 하나님의 법도를 벗어난 행동을 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이렇게 좋아서 들여다보는 것도 심판하시는 분이신가? 하나님이 좋아서 그렇게 한 것이기도 한데. 그렇다. 하나님은 구경거리가 되지 않으신다. 섬김의 대상이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은 매우 까다로운 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블레셋은 하나님의 법궤를 함부로 가져갔고, 그것을 신당에 두었다. 그래서 그들은 저주를 받았다. 이스라엘의 벧세메스 사람들은 반가워서 법궤를 들여다보다가 저주를 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살폈어야 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하나님은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저주하시는 하나님으로만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야 한 것은 내가 좋아한다고 하나님이 나를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놓고 뉘우치는 것보다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놓고 쟁론했고, 결국 가능한 한 멀리하고자 한 것이다. 답은 회개하고 바로 모셔야 하는 것이다. 그랬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복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기럇여아림으로 사람들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이 와서 법궤를 가져가라고 한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법궤는 기쁨이나 신기한 물건이 아니라 위험한 물건이 되었고 가까이하거나 만지기도 싫어진 것이다. 왜 기럇여아림인가? 거기에 대해 설명이 없어 추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곳이 산 위에 있다는 것과 실로와의 사이에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두 가지를 추정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그들이 산 위에 있으니까 하나님의 법궤는 하늘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을 했을 수 있고, 또 하나는 그들에게 실로(원래 있던 곳)으로 갖다놓으라고 시킨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벧세메스 사람에게는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손쉬운 상대였던 것 같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당시 이스라엘은 엘리 제사장이 지도자였고, 그는 이런 것에 대해 자기 아들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아들들이 배우지 않으려 했기에 포기해버렸는지도 모른다. 법궤 사건은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과 사람들이 법궤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를 몰랐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가?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섬기거나 호기심으로 다룬다면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실망할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둬야 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편이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축복할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신앙은 누구라도 하나님을 바로 모시면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섬김의 대상이지 내 기분대로 다룰 대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성경을 봐야 하는 것도 이 맥락과 같이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무시한다면 우리 마음대로 하나님을 대할 것이다. 이것은 잘하면 축복으로 갈 수도 있지만 벧세메스 사람들처럼 경솔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도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동시에 하나님은 거룩이시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다
삼상 6:17-21
◆ 블레셋 사람들의 속건제물(17-18)
(17)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린 속건제물은 다섯 도시를 위해 금독종 다섯이고, 그 외에 각 성읍과 시골의 마을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읍의 숫자대로 만든 금쥐였다. 이것들이 속건제물로 적당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그들에게 내린 저주를 푸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야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의 밭에 있는 큰 돌 위에 하나님의 궤를 올려놓았었는데, 이 돌이 성경을 기록하는 그날까지 있었다고 증언한다. 대략 기원전 1000년쯤 될 것이다. 적어도 성경을 처음 읽은 사람들은 그 돌이 자기들과 함께 있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매우 생생하고도 정확한 책이다. 세상의 어떤 역사책이나, 어떤 기록으로도 성경의 진실성을 판단할 순 없다. 오히려 모든 역사책은 성경으로 그 진위가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 인간의 잘못된 호기심(19-20)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들여다보았다. 이것은 율법을 크게 어긴 것이었다. 언약궤는 레위 지파조차도 함부로 만질 수 없으며, 오직 제사장만이 만질 수 있었고, 레위 지파는 운반만 할 뿐이었다. (민 4:15)
언약궤 덮개를 누가 열었는지 모르겠으나 벧세메스 사람들이 들여다본 관계로 무려 70명이나 죽었다. 히브리 사본에는 오만 칠십 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아무리 봐도 ‘오만’은 필사자가 실수로 잘못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당시에는 한 마을의 인구 수가 이천 명 이상이 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언약궤를 열어보자마자 죽었을 텐데, 오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동시에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대인들이 사용한 숫자 표기 방식은 히브리어 알파벳을 이용하였는데, 아마도 오만과 칠십이 매우 비슷하게 생겨서 필사자가 잘못 베낀 것으로 추측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아무리 상식적으로 잘못된 숫자일지라도 후대의 사람들이 임의로 고치지 않고 그대로 베꼈다는 것이다. 그 필사 정신 때문에 오늘날 성경이 원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를 기뻐하며 맞이했다. 그리고 번제와 화목제까지 드렸다. 그들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이 언약궤를 들여다보았다는 이유로 들여다본 자들을 모두 죽이셨다. 하나님과 친밀하다는 것을 무례를 범해도 상관없다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과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선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손상시키면 안 된다.
언약궤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솔로몬이 성전을 건립하여 언약궤를 들여놓을 때, 그 언약궤 안에는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왕상 8:8,9)
벧세메스 사람들은 왜 언약궤를 들여다보았을까?
아마도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궁금해도 봐서는 안 될 것은 보지 말아야 했다. 그게 신앙이다. 율법을 어겨가면서까지 궁금함을 해소하려고 하면 안 된다. 어떤 호기심은 치명적이다. 아담과 하와도 한 번의 호기심 때문에 영원히 생명을 잃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무려 칠십 명이나 동시에 죽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탓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상황에 있었다면, 과연 우리는 그것을 들여다보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인간의 호기심은 동전의 양면처럼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가지고 있다. 호기심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핵심 원동력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호기심 때문에 인생을 망친 사람도 꽤 많다. 호기심에 성인 동영상을 보았다가 정신병에 걸린 남자 중학생을 본 적도 있다.
어리석은 호기심은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 생명을 잃게 된다. 호기심 때문에 단번에 목숨을 잃지는 않더라도, 호기심 때문에 서서히 목숨을 잃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계속 일어나고 있다.
유튜브를 보면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그것을 따라가다가는 어느덧 영적으로 무기력한 존재가 된다. 연예인의 일상에 대한 기사, 각종 음모론, 헛된 지식 등 각종 기사가 사람의 정신을 사로잡는다. 성경 읽기에는 단 5분도 투자하기를 싫어하면서 인터넷에서 쓸데없는 기사를 읽는 데는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부으니 그가 어떻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겠는가?
아담과 하와가 호기심으로 목숨을 잃었듯이 오늘날에도 성도는 각종 호기심으로 사람의 생명력을 잃고 있다.
그러므로 살려면, 호기심을 대적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오늘날 성도 신앙생활의 키워드는 ‘절제’다. 오만가지 헛된 세상 것들이 우리 마음을 헤집고 복잡하게 하며 우리 속의 평안을 빼앗아 가고 있다.
주님, 저를 이런 쓸데없는 호기심과 헛된 지식에서 건져주십시오.
◆ 벧세메스 사람들의 실수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 안을 들여다본 것은 큰 실수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실수는 언약궤를 떠나보낸 것이었다. 그들의 잘못으로 수십 명이 죽임을 당했다면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아야 했다. 그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제대로 모셨다면, 큰 복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해석과 결론을 내리고, 언약궤를 떠나보내는 것으로 결정했다. 당장의 안락한 삶을 위해서 영원한 복을 등지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경우가 오늘날에도 비일비재하다. 오랫동안 미신에 찌들었던 어떤 할머니는 우리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기로 한 후 불면증과 악몽을 꾸기 시작하자, 곧바로 믿음을 버리고 다시 옛 미신의 생활로 돌아갔다. 언덕 하나만 넘으면 파라다이스가 있었는데, 언덕에 있는 가시덤불을 헤쳐나가기가 너무 무서워서 다시 유황 가스가 있는 화산 터로 돌아간 셈이었다. 이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면, 큰 평화와 복을 체험했을 텐데...너무도 아쉬웠다. 그후에 아무리 권면해도 돌아오지 않았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으로 보냈다. 그들은 왜 애초의 언약궤가 있었던 실로로 보내지 않고 기럇여아림으로 보냈을까?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기럇여아림은 벧세메스의 북동쪽에 있는 곳으로서 벧세메스보다 예루살렘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에서 무려 20년이나 있게 되었다.(삼상 7:2)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은 무엇인가?
쓸데없는 호기심을 거절하자.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하나님을 등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오히려 더욱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려 해야 할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다윗처럼 내 삶의 원칙을 가지고, 단호하게 결심하지 않으면 영적 생활도 흐지부지된다. 충동대로 대충 살다가는 곧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영적인 도움을 요청할 때, 그것은 오로지 성도들만이 도울 수 있는 영역인데도 전혀 도울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고는 비참함을 느낄 것이다.
다윗은 단호하게 결심하고 난 후에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 (시 131:2)
엄마의 젖을 먹고 만족해하며 품에 평온하게 누워있는 아이를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영이 이런 만족과 평온을 누려본 적이 있는가?
시편 131편은 겨우 3절밖에 되지 않으니 통째로 외우기 좋다. 다윗이 경험했던 이 평안, 하나님 안에서 경험한 만족을 체험하고 싶지 않은가? 단호하게 결심하자.
주님, 쓸데없는 호기심을 버리겠습니다.
감당치 못할 것과 헛된 일에 힘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절제의 능력과 거절할 수 있는 단호함을 허락해 주십시오.
주님 안에서의 평화, 기쁨, 만족을 누리며 살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거룩성
삼상 6:17-21
✨ 우리가 잊고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으로만 기억하곤 합니다. 물론 이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요일 4:8). 그러나 이와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하나님의 속성이 있으니, 바로 '거룩하심'입니다. 성경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사 6:3)라고 노래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강조합니다.
사무엘상 6장 17-21절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영광, 이방이 감당치 못한다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께 속건제로 드린 금 종기는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삼상 6:17)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로 인해 재앙을 당한 후, 금으로 만든 종기와 쥐 형상을 속건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재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하나님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이런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이 장면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블레셋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을 인정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다곤 신상이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삼상 5:3-4). 그들은 자신들의 신보다 더 강하고 거룩한 존재를 만났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치며,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꿇을 것이요"(빌 2:10)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보편적이며 피할 수 없는 실재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점점 잊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존재 정도로만 여기거나,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도구처럼 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의 경험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그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만이 아니라, 거룩하시고 경외받으셔야 할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 감춰진 죄는 없다, 범한 자는 벌을 받는다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본 벧세메스 사람들을 치사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큰 재앙을 내리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삼상 6:19)
언약궤가 돌아왔을 때, 벧세메스 사람들은 너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가 언약궤를 들여다보았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셔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언약궤는 지성소에 보관되어야 했고,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레 16:2-34). 일반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대부분의 제사장들도 언약궤를 직접 볼 수 없었습니다. 언약궤를 옮길 때도 반드시 덮개로 가려야 했습니다(민 4:5-6).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들여다본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호기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거룩한 경계를 넘어섰고, 그 결과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힘을 가진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와 불순종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거룩하니 나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는 어떤 죄도 숨길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게 되리라"(히 4:13)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동, 생각, 의도를 다 아십니다.
🙇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 거룩한 백성만이 감당한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삼상 6:20)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한 벧세메스 사람들은 질문했습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설 수 있을까요?
그들은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으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거기서 언약궤는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언약궤를 지키게 했습니다(삼상 7:1).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궤, 즉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기 위해서는 특별한 준비와 거룩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특별한 정결 의식을 거쳤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제사장 옷을 입었고, 제사를 드리기 전에 물로 씻었습니다(출 30:17-21).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합당하게 나아가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여기서 복음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고, 그분의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고 말합니다.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이제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사무엘상 6장 17-21절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의 자세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1.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외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이시지만, 동시에 거룩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그 결과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3.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는 이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4. 거룩한 삶을 추구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거룩하게 되었지만, 일상에서도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너희가 거룩하니 나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 말씀의 적용: 거룩함을 실천하는 삶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이 말씀을 우리의 일상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1.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기: 예배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살아갑시다.
2. 매일의 삶에서 거룩함 추구하기: 우리의 행동, 말, 생각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자문해봅시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우리의 선택을 평가해봅시다.
3.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기: 벧세메스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보시는지 보여줍니다.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4.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기: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히 12:28-29)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두려운 개념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히 그분께 나아가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이 은혜를 기억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