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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인벤션 15번곡은 Peter Serkin의 연주이니 하단 굴드 15번 연주 동영상 참조하세요~^^*
Orlando Gibbons
1583 영국 옥스퍼드~ 1625. 6. 5 켄트 캔터베리.
영국 다성음악파의 마지막 위대한 작곡가. 대음악가 집안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이었다. 아버지 윌리엄 기번스(1540~95경)는 1567년 케임브리지 시 소속 악단의 일원으로 임명되었으며 4명의 아들들이 음악가로 성공하였다.
오를란도 기번스는 21세 때 왕실 예배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으며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1619년에는 '국왕을 위한 실내 버지널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고, 1622년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이듬해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고, 뒤에 그곳에서 제임스 1세의 장례식을 집전하기도 하였다. 찰스 1세가 프랑스에서 오는 그의 신부 안리에타 마리아를 맞으러 도버에 갔을 때 그 수행단원이었다.
4성부로 된 '작은' 앤섬과 마찬가지로 풀 앤섬(full anthem)은 그의 뛰어난 곡으로 꼽힌다. 1612년 출판된 〈5성부로 된 마드리갈과 모테토 Madrigals and Motetts of 5 parts〉는 주로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노랫말에 붙인 매우 정감있고 다사로운 가락이다. 당시의 다성음악 양식에 능통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이 작품집에는 걸작으로 인정받는 후기 마드리갈 양식의 많은 작품들이 있으며, 그 가운데 잘 알려진 곡은 〈은빛 백조 The Silver Swan〉와 〈우리의 인생이란 무엇인가 What is Our Life〉이다.
이보다 앞서 1610년경에 발표된 〈비올을 위한 3성부 환상곡 Fantasies in Three Parts compos'd for Viols〉은 영국에서 처음으로 동판 인쇄로 펴낸 악보라고 한다.
건반악기 연주자로도 명성이 높았고, 말년에 접어 들면서 영국 최고의 오르간·버지널 연주자로 손꼽혔다. 버지널 곡 중 몇 곡이 〈파서니아 Parthenia〉(1612경)에 실려 출판되었으며, 40개가 넘는 다른 곡들이 악보로 남아 있다.
그는 다성음악 양식에 의한 16세기 성악곡에서 동성음악 양식(화성적 음악양식)에 의한 기악곡으로바뀌던 시대의 사람이었지만, 이러한 변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난 세대의 성과를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Fantasia in D Jan Pieterszoon Sweelinck, 1562 ~ 1621
네덜란드의 오르간 연주자, 작곡가. J.S.바흐 이전 오르간 음악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얀 피에테르존 스웰링크는 1580년경에 암스테르담의 오우데 케르크(old church)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르간 연주자가 되어 일생 동안 봉사했다. 그는 네덜란드를 떠나본 적이 없으며, 로테르담과 안트웨르펜을 여행했을 뿐이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다성음악 전통에 따라 많은 성가와 세속 노래들을 작곡했지만 (샹송, 칸티오네스 사크라이, 시편에 붙인 음악 등) 주로 오르간 연주자와 건반음악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건반음악에는 코랄 변주곡, 토카타, 베네치아 오르간 악파의 영향을 보여주는 환상곡, 세속의 선율에 맞춘 변주곡이 있다.
그의 환상곡은 최초의 푸가곡 중의 하나이며 하나의 주제가 한 곡 안에서 확대, 축소될 뿐 아니라 리듬적으로 변화하고 또한 대주제(對主題)들과 결합된다. 세속 변주곡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유행하는 가락을 기초로 했으며 예를 들면 〈Mein junges Leben hat ein End〉를 주제로 한 변주곡 모음집이 있다.
영국의 작곡가 존 불과 피터 필립스가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그를 만났는데, 불의 〈스웰링크의 주제에 의한 환상곡 Fantasia on a Theme of Sweelinck〉은 건반의 한 대가가 다른 한 대가에게 바치는 곡이었다. 스웰링크의 연주 솜씨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제자로는 독일 작곡가 자무엘 샤이트와 하인리히 샤이데만이 있으며 샤이데만의 제자 J.A.라인켄은 스승의 연주 전통을 덴마크의 오르간 연주자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에게 물려주었다.
다음 세대의 뛰어난 많은 오르간 연주자들 중 특히 북부 독일의 연주자들 가운데 스웰링크의 제자들이 많았다. 헨델과 바흐도 이 북부 독일 오르간 악파의 영향을 받았다
1543-1623
영국의 마드리갈을 발전시켰으며 키보드 음악 양식을 향상시킨 버지널·오르간 음악 작품으로 유명하다. 출생과 초기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토머스 탤리스의 제자였으며, 1563년 2월 27일 링컨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된 것이 최초의 공식적인 직위였다.
1572년 런던에서 왕실예배당 관리인(gentleman)이 되어 탤리스와 함께 오르간 연주자로 있었다. 탤리스와 버드의 개인적·직업적인 친밀한 관계는 음악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초래했다.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그들에게 음악의 수입·인쇄·출판·판매 및 악보인쇄에 대한 독점권을 허용했는데 그해에 그들은 모테트집 〈Cantiones Sacrae〉를 간행하여 여왕에게 헌정했다. 이 책에는 24곡의 모테트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16곡은 탤리스가, 18곡은 버드가 작곡했다.
1577년 미들섹스에 있는 할링턴으로 옮겼으며 그후 15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일생 동안 신실한 가톨릭교도였던 그는 런던 밖에서의 은거생활을 더 좋아했던 듯하다. 반역행위에 연루된 몇몇 가톨릭교도들과의 긴밀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왕실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결코 의심받지 않았다.
1585년 탤리스가 죽고 그 다음해에 부인마저 죽는 일련의 슬픈 사건은 그로 하여금 일에 몰두하도록 했으며 다음 3년 동안 〈시편, 소네트, 슬픔과 경외의 노래 Psalms, Sonets, Songs of Sadnes, Pietie〉(1588), 〈만물의 노래 Songs of sundrie natures〉(1589), 2권의 〈Cantiones Sacrae〉(1589, 1591)라는 4권의 자신의 음악작품집을 출판했다.
그중 2권의 세속음악작품은 각각 대법관 크리스토퍼 해턴 경과 시종장이자 여왕의 첫째 조카인 헌스던 경에게 헌정되었고, 2권의 모테트곡집은 각각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후원자였으며 왕에 대한 충성심이 더할 나위 없었던 우스터 백작과 럼리 경이라는 저명한 가톨릭교도들에게 헌정되었다.
또한 1591년 그의 키보드 음악 필사본이 〈나의 네벨 부인 곡집〉 (에드워드 네빌 경의 부인인 라헬인 듯함)으로 출판되었으며 그밖의 그의 키보드 음악 작품들은 〈피츠윌리엄 버지널 책 Fitzwilliam Virginal Book〉에 수록되어 있다. 〈피츠윌리엄 버지널 책〉은 또다른 유명한 가톨릭교도인 프랜시스 트래전이 플리트 감옥에 있는 동안 복제했다.
1592년(또는 1593년) 가족과 함께 에식스 스톤던 매시로 이주해서 계속 그곳에서 살았다.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오르자 가톨릭교의 전망이 일시적이나마 밝아졌으므로 그는 다음 3권을 출판할 수 있었다. 3권의 미사곡집과 2권의 〈그라두알리아 Gradualia〉(1605, 1607)에서 그는 혼자서 통상미사곡(미사곡 중 변하지 않은 부분)과 주요한 축제의 고유미사곡(교회의 절기나 축제 때마다 바뀌는 미사곡)으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전례곡의 레퍼토리를 모두 소화해내고 있다.
이 2권의 〈그라두알리아〉는 제임스 1세가 즉위한 지 1년 만에 귀족이 된 인물들인 노샘프턴 백작과 그의 또다른 절친한 친구인 리틀 출신 피터 경이라는 2명의 유명한 가톨릭교도들에게 헌정되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또다른 출판물은 영국의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을 수록한 〈Psalmes, Songs and Sonnets〉(1611)이다.
Invention Bach
바흐의 인벤션"(Invention)"은 그 지고한 예술성으로 오늘날은 바흐 음악의 극치로 꼽히고 있지만 본래는 단순히 교육적인 목적으로 작곡 되었다. 바흐는 1723년 자필악보에서 "클라비어의 애호가, 특히 학습자들이 2성부로 명확하게 연주하는 기법을 배우고 더욱 숙달이 되면 3성부에 있어서도 올바른 연주를 할 수 있게 하며 그와 동시에 인벤치오(Inventio)를 터득하여 그것을 능란하게 전개할 뿐만 아니라 칸타빌레의 주법을 익혀 작곡의 예비지식을 얻는데 정확한 방법을 알려주는 입문서" 라고 인벤션에 관한 설명을 붙이고 있다.
전 30곡으로 되어있는 이 작품중에서 2성에 의한 15곡을 "인벤션"이라 부르고 3성으로 된 15곡의 인벤션을 특히 "신포니아(Sinfonia)"라고 부르고 있으나, 30곡을 통틀어 "인벤션"으로 통칭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신포니아란 특별한 형식의 악곡이라기 보다는 바로크 시대에 여러 기악곡에 흔히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인벤션이란 명칭은 바흐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라 자필원고에 쓰인 인벤치오 라는 말을 일반화시킨 것인데 "창의" 또는 "착상"이란 뜻.
바흐가 인벤션을 작곡한 것은 쾨텐시절이었는데 그 때 그는 10살이었던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의 학습용으로 쓰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 곡은 "빌헤름 프리데만을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이란 형태로 만들어 졌던 것인데 무려 62곡에 달하는 이 작품들을 다시 갈고 다듬어 마침내 30곡의 인벤션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곡은 당초에 교육적인 성격을 띠었던 탓으로 지금도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인벤션을 연습하게 되어 있지만 ,이 곡은 단순히 피아노의 초보적인 기법을 연마하기 위한 연습곡의 범주를 훨씬 넘어 건반악기를 위한 위대한 작품으로 그 오묘한 아름다움은 듣는 이에게 무한한 즐거움을 안겨주는 음악임은 말 할 필요도 없다.
바흐의 원보에는 템포나 강약 따위의 세세한 기호는 거의 적혀 있지 않고 지시한 장식음 중에는 바하 자신에의한 것인지 후에 다른 사람이 기록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은 점이 많이 있다. 그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있고 연주도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게 시도되고 있다.
바흐의 악보에는 이 같이 악상기호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고 있더라도 포르테나 피아노 같은 기본적인 것들만이(특히 합주곡) 있다. 그래서 연주자들은 곡을 표현함에 있어 많은 애로사항을 안게 된다. 이렇게 바흐가 세세한 악상기호를 붙이지 않은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고 불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특별히 악상을 지정하지 않더라도 연주 그 자체에서, 즉 곡의 흐름상 저절로 흘러 나오는데 구태여 그런 작업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연주상의 여러가지 난점이 드러나자 후세에 자기 나름대로 가장 올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하는 연주법에 입각해서 속도 기호 또는 장식음의 연주법 따위를 기입한 교정판이 수없이 나오게 되었고, 한 때는 체르니에의한 것이 가장 많이 연주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체르니의 해석이 비엔나의 고전주의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바흐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감이 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원전판으로 알려진 악보에 새로운 관심을 쏟고 있다.
원전판은 바하의 원보에 충실히 따르자는 의도로 편집된 것이므로 그 점에서는 상당한 가치와 의의를 지니고 있지만 현재와 같은 피아노로 연주하는데는 여전히 연주상의 많은 난점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바흐는 이 곡의 사용악기를 클라비코드로 생각하고 작곡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클라비코드를 포함한 건반악기는 상,하 2단의 건반을 가지고 있어 같은 음을 동시에 낼 수 있었습지만 지금의 피아노는 건반이 1단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불가능 한 것이다.
이러한 곡들로는 "프랑스 서곡", "이탈리아 협주곡", 그리고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있다. 여하간 바흐의 의도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곡을 바르게 이해하고 소화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므로 현대적 감각의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도록 정정된 악보를 사용하는 학습자들도 원전악보를 연주하거나 원전악보에 의한 연주를 들음으로써 바흐의 의도에 성실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바흐 / 2성 인벤션 15곡 전곡(2-part Invention, BWV772~786)
인벤션(Two-part Invention ) 흔히'인벤션이라고 영어식 발음으로 부르고 있으나, 바흐가 최종적으로 정리한 자필악보에는 인벤티오(Inventio)라고 씌어 있었다. 즉 독일어식으로 철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목은 그대로 적어 놓았다. 2성의 것을 '인벤티오'라 하고 3성의 것을 신포니아(Sinfonia)라고 하는 것은 바흐의 마지막 원고를 따른 것인데,일반적으로 '인벤션'이라는 이름으로 양쪽을 일괄해서 쓰는 것이 보통이다. 이 곡집을 국제적으로 이름이 나 있는 피아니스트가 리사이틀의 레퍼토리로 채택하는 일은 그히 적으며, 학습용이라고 생각해 두는 것이 이해가 잘 될것이다. 바흐의 클라비어곡을 단순히 정서를 생각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다소라도 폴리포닉한 이디옴이라든가 기법 등을 통하여 그것을 익히려 한다면 처음부터,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들으려 할 것 없이 먼저 이곡집을 착실히 쳐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폴리포닉한 악곡은 어쩌면 바흐를 연구하는 입문서 구실을 한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물론 클라비어집에 한정했을 경우이다. 바흐는 1723년의 마지막 원고인 자필 악보에서 다음과 같이 글을 쓰고 있다. '클라비어의 애호가, 특히 그 학습자가 2성부에서 정확하게 연주할 것을 배울 뿐 아니라 더욱 숙달한 다음에 3성부에서도 바르고 훌륭한 연주를 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훌륭한 인벤티오를 얻을 뿐 아니라 그것을 솜씨있게 전개하는 일, 특히 칸타빌레한 주법을 익히고 그와 더불어 작곡을 위한 예비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정확한 방법을 제시하는 입문서' 라고 이 글 속에 있는 인벤티오라고 하는 언어는 창의라든가, 그것이 그대로 곡명된 셈이다. 1720년 바흐가' 인벤션'을 작곡하기 시작했으므로, 그의 쾨텐시대(1717~1723)의 중간무렵에 해당되는데, 처음에는 당시 10세였던 장남을위한 교육용이 그 직접적인 목적이였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빌헬름 프리이데만을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 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62곡의 클라비어곡이수록되어 있고,'인벤션'의최초의 형태가 그 속에 출현한다. 다만 여기서는 인벤티오는 프레암불룸 (전주곡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었음)이라 되어 있고, 신포니아는 판타지아로 되어 있었다. 그후 1723년에 바흐는 이 곡들에 가필 하고 수정을 하여 현재와 같은 형태로 고쳐서 평성했고, 이와 동시에 곡명도 변경하여 스스로의 손으로 정서했던 것이다. 이것이'인벤션'의 최초의 원고이다. 바흐의 원고에는 템포나 뒤나믹의 기호가 하나도 전혀 있지 않고 지시되어 있는 꾸밈용 가운데는 바흐 자신에 의하여 표시한 것인지, 어느 다른 사람에 의하여 나중에 덧붙여졌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면한 점이 많다. 더욱이 그 주법에 있어서는 각인 각양의 해석에 의하여 다르고 연주상 상당히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후세의 사람들에게 의하여 교정을 본 갖가지의 판도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체르니 판이 오랜 동안 쓰여 오고 있었으나, 그의 교정이 비인 고전파적인 입장에서서 이루어졌다는 점에는 최근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원전판이라고 불리는 악보도 많으나, 그것은 바흐의 최종의 자필악보에 충실하려고 하는 의도 아래 출판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가치는 극히 높으나, 현재와 같은 피아노로 연주하려면 당연히 여기에 표현상의 문제가 나오기 때문에 일반 학습자가 갑자기 원전판과 대결 하기는 어려운 면이 없지 않다. 물론 교사측의 정확한 어드바이스가 필요하게 되는것이다. 곡의 양식으로 보아 전주곡 형태의 것과 푸가적인 것의 두 가지로 대별되는 30곡의'인벤션'은 하나의 주제를 기본으로 하여 갖가지로 전개하는 점에 기법상의 특수성이 있으며, 배우는 입장에서는 그 기법적 전개에 특히 유의하지 않으면 않된다. "인벤션'은 15곡으로 이루어진 2성부위 소곡이지만 각 곡 모두 정교한 구성을 보이면서 각각 다양성이 있으며, 한 곡마다 개성적인 빛을 발하고 있다.
No.1 in C major, BWV772 제1번 C장조 극히 명쾌한 곡. 전체는 3부분으로 나뉘는데, 그 제1부분은 7째 마디의 앞 부분까지이다. 여기는 딸림조(G장조)로 끝난다. 제2부분은 15째마디의 첫머리까지이며 이것은 병행조(a단조)로 끝난다. 그 이후부터 끝까지가 제3부분이다. 연주의 중요성은 각 동기들을 그 프레이징 속에서 잘 살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 곡은 단일 주제로써 전곡을 구성하고 있는 대표적인 악곡이다. No.2 in C minor, BWV773 제2번 c단조 이 곡집 가운데 단 하나의 카논이다. 오른손으로 시작하는 2마디에 걸친 주제를 옥타브 아래의 왼손에 모방된다. 2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그 제1부분은 10째마디까지. 제2부분은 11째 마디 왼손이 주제를 연주함으로써 시작된다. 제1부분과는 반대로 오른손이 왼손을 모방한다. 따라서 제1, 제2부분은 각각 10마디씩이고, 21-22마디는 경과부, 23째 마디에 한 번 더 오른손에 주제가 나타나고 코다를 형성한다. 기법적으로는 엄격한 옥타브의 카논으로서 조금도 빈틈이 없다. 또한 제1부분에서는 c단조로부터 Eb장조로, 제2부분에서는 g단조에서 주제가 재현된 다음에 Bb장조로, 각각 조성의 추이를 보인다. No.3 in D major, BWV774 제3번 D장조 이 곡은 2성의 제9번(f단조)과 제15번(b단조), 그리고 3성의 제9번(f단조)과 함께 바흐 자신에 의한 슬러가 지시되어 있다. 이 곡에서는 특히 꼼꼼하게 씌어져 있는데, 거의 현악기적인 이디엄을 느끼게 한다. 3부분으로 나뉘는데, 12째 마디의 머리 부분에서 딸림조(A장조)로서 제1부분이 끝나고, 42째 마디까지가 제2부분, 42째 마디 3박부터 주제의 재현으로써 제3부분이 시작되며, 52째 마디의 제2박부터 코다이다. No.4 in D minor, BWV775 제4번 d단조 곡 자체의 분위기로나 그 작법으로 보아 제3번과 유사함 점을 느끼게 한다. 18째 마디의 머리부터 병행조(F장조)로의 종지로서 제1부분이 끝나고 제2부분은 38째 마디의 머리에서 끝나는데 여기서는 a단조이다. 이하 제3부분은 g단조를 거쳐 원조로 되돌아간다. No.5 in Eb major, BWV776 제5번 Eb장조 매우 당당한 푸가이다. 전체는 2부분의 구성과 코다가 붙은 형태이다. 제1부분은 12째 마디에서 병행조(c단조)로 끝나고, 제2부분은 c단조에 의한 주제를 하성부에 내고, 이것을 상성부가 f단조로 받는다. 20째 마디부터 코다로 가는 경과부이고, 27째 마디에 으뜸조에 의한 주제를 재현하고 나서 코다로 들어간다. No.6 in E major, BWV777 제6번 E장조 '평균율'적인 조성의 순서를 취한다면 여기서는 당연히 eb단조여야 할 터이나 이 곡집이 학습자를 위한 초보적인 교본이라는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조표의 수가 많은 조성을 쓰지 않았던 그때까지의 습관을 따라서 할애한 것이라 생각된다. 제1부분은 20째 마디에서 딸림조(B장조)로 끝나고 반복한다. 제2부분은 다소 전개부적이며 B장조로 시작한다. 병행조(g#단조)를 거쳐 43째 마디부터는 제3부분이 된다. 제3부분은 제시, 전개, 재현과 같이 고전 소나타의 형식에 근사성을 보인다. 인벤션 중에서는 색다른 특징이 있으며 유니크하다고 하겠다. No.7 in E minor, BWV778 제7번 e단조 전주곡과 같은 맛이 나는 곡이다. 전체는 매우 자유롭게 씌어졌는데, 그렇더라도 3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제1부분은 7째마디 처음까지인데, 병행조로 끝나고 제2부분은 14째마디까지이며, 중간에 딸림조로 지향한다. 이하는 제3부분인데, 으뜸조로 되돌아오지만 이 곡의 첫머리처럼 똑같은 주제를 내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2마디는 코다이다. 템포는 다소 빠르고 매우 활기에 찬 전주곡(어쩌면 프레암불룸)처럼 되어 있다. No.8 in F major, BWV779 제8번 F장조 활기가 넘치며 밝고 생생한 느낌의 곡이다. 학습자들이 즐겨 치는 매우 인상적인 곡이다. 카논적인 인상이 짙게 풍기는 것은 음형의 모방에서 느끼는 때문이다. 제1부분은 12째마디의 앞까지인데 딸림조(C장조)로 그치고, 제2부분은 26째마디까지이며 이하는 제3부분이다. 제3부분은 4-11째 마디의 으뜸조의 단순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민첩하고 경쾌한 리듬이 되도록 칠 것. No.9 in F minor, BWV780 제9번 f단조 일종의 2중 푸가라고 간주해도 좋은 곡이다. 형식적으로는 2부분으로 나뉘는데, 제1부분은 17째 마디에서 딸림조(c단조)로 종지한다. 이하는 제2부분인데, 29째 마디에서는 주제를 재현한다. 이 곡에도 부분적으로는 슬러가 붙여져 있다. 비극적인 성격이지만 장중하게 그리고 전곡을 통해 다이내믹한 표현이 바람직하다. No.10 in G major, BWV781 제10곡 G장조 9/8박자로 템포는 빠르다. 곡의 느낌으로나 다른 점에서 제8번과 유사하다. 음형적인 주제 구성은 지그풍이다. 제1부분은 11째 마디까지이며, 14째 마디에 주제는 왼손에 딸림조(D장조)로 나타나는데 여기서부터 제2부분이다. 마지막 6마디는 코다이다. 제2부분의 긴 트릴러는 이 활기있는 곡을 더욱 흥취있게 해 준다. 매우 활기 있는 연주가 요청된다. No.11 in G minor, BWV782 제11곡 g단조 이 곡도 제5, 제9번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2중 푸가라고 보아 틀림이 없다. 딸림음(E)으로부터 상행 음계형으로 시작하는 주제는 반음계적인 대위부를 수반하는데, 이 저성부의 움직임은 인상깊게 연주하여야 한다. 10째 마디가 제1부분이고 제2부분은 11째 마디부터이다. 따라서 이 곡은 전체적으로 2부분으로 구성되었다. No.12 in A major, BWV783 제12번 A장조 항상 2개의 주제가 결합되어 전개해 나가는 일종의 2중 푸가의 수법을 쓴 곡이므로 제5, 제9, 제11번과 마찬가지로 매우 화려하게 연주하여야 한다. 8째 마디까지 제1부분이고 9째 마디부터 제2부분으로 들어가는데, 18째 마디의 하성부에 으뜸조의 재현이 나타나는 곳부터는 코다이다. No.13 in A minor, BWV784 제13번 a단조 인벤션 중에서는 가장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있는 곡인데, 전주곡 풍의 느낌을 지닌다. 전체가 거의 분산화음으로 되어 기법적으로 단순하지만 극히 간결한 곡이다. 따스함마저 느끼게 하는 이 곡은 2부분으로 나뉜다. 제1부분은 13째 마디에서 그치고 나머지 제2부분은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스트레타도 있으므로 다소 긴장감을 주도록 활기 넘치게 연주해야 한다. No.14 in Bb major, BWV785 제14번 Bb장조 전주곡풍의 곡, 첫머리의 주제 동기에 의하여 전체가 구성된다. 맨 처음에 아래 성부가 첫 박을 치고 있기 때문에 오른손은 16분음표의 쉼표 후에 나오는데 유의할 것. 이 후에는 첫째 마디 3박째의 리듬형이 주가되어 있다. No.15 in B minor, BWV786 제15번 b단조 마지막 2곡, 즉 bb단조와 B장조가 생략되어 있다. 그 이유는 제6번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꾸밈음을 가진 주제는 다소 멜랑코릭한 기분이 나게 연주함이 좋다. 중세적인 고풍한 맛이 나도록. 역시 2부분으로 나뉘는데, 제1부분은 12째 마디에서 병행조(D장조)로 종지하고 이하는 제2부분이다. 18째 마디부터는 코다로 들어간다. ....펌....
Glenn Gould
확실히 그의 음악 - 정확히는 바흐의 음악 - 에는 살아 숨쉬는 듯 한 생명력이 있었고 일반인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기괴함과 참신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골드베르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에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도, '평균율'이 주는 지루함을 의식할 수 없게 한 것도 바로 굴드였다. 그는 연주회장과 결별함으로서 청중 앞에 서는데에 사용될 노력을 절약했으며 남아도는 열정 전부를 레코드 제작에 투자하였다. 굴드는 우리가 좋지 않은 의미로 흔히 이야기하는 '짜집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연주의 좋은 부분만을 샘플링하여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조적 행위'라는 것이 '짜집기'에 대한 그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청중에 대한 거부감과 편집, 합성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음악'에의 매료, 굴드를 대표하는 이 두 가지만으로도 그를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음악가 (musician), 혹은 연주자 (performer)라고 부를 수 없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굴드의 다소 유별난 연주방식과 음악 해석은 음악을 배운 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이 보인다. 굴드는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1932년 9월 25일에 음악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그 (Edvard Grieg)는 굴드 외고조부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굴드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바이얼리니스트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오르간과 피아노를 연주했다. 많은 전기에서 굴드의 어머니를 '피아니스트'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연주회를 가지는 음악가는 아니었다. 다만 그의 어머니는 굴드가 10살이 될 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굴드가 세 살 되던 해 그는 악보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섯 살 때 그는 작곡을 시작했고,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조그마한 작품을 연주했다. 여섯 살 때에 굴드는 요제프 호프만의 마지막 토론토 연주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이 연주회는 소년 굴드에게 깊고 중요한 인상을 남겼다고 전한다. 캐나다의 저명한 작가인 로버트 풀포드 (Robert Fulford)는 굴드의 이웃집에 살던 아홉 살 때에 그를 만났다 (당시 굴드 역시 아홉살이었다). 그는 " 어린아이인데도 글렌은 고독했다. 왜냐하면 그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 미친듯이 연습했다. 그에게는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음악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것은 완전한, 무조건적인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10살이 되던 해에 굴드는 토론토의 로얄 콘서바토리에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노 교사는 알베르토 게레로(Alberto Guerrero)였다. 굴드는 또한 프레데릭 실베스터에게 오르간을, 레오 스미스에게 음악이론을 배웠다. 그는 12살 때 인 1944년, 음악원을 수료하고 키바니스 음악페스티벌의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였다. 1945년에는 로얄 콘서바토리의 독주자 종합시험을 통과하여 완전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수준에 도달했음을 인정받게된다. 굴드가 14살 되던 1946년 그는 음악이론시험에 합격하고 최고성적으로 졸업장을 수여받았으며 알베르토 게레로에게 1952년까지 계속해서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당시 10대의 굴드에게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은 아루투르 슈나벨 - 굴드는 "피아노는 슈나벨에게 있어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베토벤에 대한 접근이었다" 라고 평했다 - 과 로잘린 투렉의 바흐 녹음 그리고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였다고 전한다. 1946년 그는 로얄 코서바토리에서 베토벤의 4번 협주곡을 연주하여 독주자로 데뷔한다. 이 연주에 대해서 굴드는 그 자신이 슈나벨의 녹음을 2년이 넘도록 소유하면서 듣고 있었고 그 음반의 모든 뉘앙스를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연주하는 데에 다소 각오가 필요했다고 기록해 두었다. 다음 해에 굴드는 같은 협주곡을 토론토 심퍼니와 연주하였고 어떤 비평가는 "그는 교수들 사이에서 한 명의 어린아이였지만 그들과 토론을 할 수 있을 만큼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굴드의 공식적인 첫 번째의 리사이틀은 1947년에 스카를랏티, 베토벤, 쇼팽 그리고 리스트로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졌다. 마침내 1955년 1월 11일 저녁 굴드는 뉴욕 데뷔연주를 가졌다 (굴드는 뉴욕을 'Debutow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음 날 CBS와의 녹음계약을 맺었다. 굴드의 첫번째 녹음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1955년 6월에 CBS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이 때에 뉴욕에 나타난 굴드의 기괴한 모습은 이미 유명한 일화가 되어 버렸지만 여기에 간단히 소개한다.
- 6월의 뉴욕에 나타난 굴드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없다면서 식수로 사용할 두 개의 물병을 지니고 5개의 약병과, 그 유명한 의자까지 가지고 왔던 것이다.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연주할 때 몸의 각도에 따라 자유자재 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 굴드는 두 손을 20분간 더운 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손을 닦아 냈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도취된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CBS의 녹음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 결국 이 때 제작된 음반은 레코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반 중의 하나가 되었고 발매 당시에도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굴드를 국제적으로 유명한 연주자로 만들게 된다. 1957년에 굴드는 러시아 (당시 소련)에서 2주간 연주하는 것을 시작으로 처음으로 유럽순회연주를 가졌다. 그는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소련에서 연주한 최초의 캐나다인이자 북미인이었으며, 청중과 비평가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이 연주를 해내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유럽순회동안 굴드는 베토벤의 3번 협주곡을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연주하였으며 두 사람은 이후 서로의 예술에 대해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고 한다. 1960년에 굴드는 레너드 번스타인, 뉴욕 필과 함께 미국 텔레비젼에 처음으로 출연했다. 그는 캐나다의 TV에서 이미 유명인물이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캐나다의 TV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출연하였다. 그런데 굴드는 1964년 4월 10일 LA에서 피아니스트로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다. 공식연주회에서 이토록 빨리 은퇴한 것은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이 그의 많은 다른 관심사들을 실현하는데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굴드는 그 자신의 본업이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는 작가로서의 활동, 방송활동, 작곡, 지휘, 그리고 기술적인 갖가지 시도들에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과 똑 같은 열정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1981년에 굴드는 재녹음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26년전에 녹음했던 장소에서 골드베르크변주곡을 두 번째로 녹음했다. 굴드는 변주들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고 보다 큰 전체 속에서 하나의 리드미컬한 파동, 화성, 그리고 근원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개체들로 해석함으로 이전의 녹음과는 전혀 다른 두 가지의 해석을 남겼다. 굴드는 기술 (테크닉이 아니라 테크놀로지라는 의미에서)이 만들어주는 가능성을 언제나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첫 번째의 녹음이후 25년간 이루어진 녹음 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굴드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재녹음하도록 결심하게 하는 데에 중요한 동기를 부여했다고 생각된다. 그의 데뷔 레코딩 곡이기도 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신녹음은 그의 마지막 녹음이 된다. 굴드는 이듬해 1982년 10월 4일 토론토에서 51세의 이른 나이에 뇌졸증으로 사망한다. - 이상 굴드의 생애의 일부는 SONY의 글렌 굴드 공식 홈페이지 (http://www.glenngould.com/)에서 수정, 번역한 것입니다.
앞에서도 굴드가 만들어내는 음악의 몇 가지 특징을 이야기했었지만 그 강렬한 개성 못지 않은 중요한 특징으로 음악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빼놓을 수 없다. 유럽에서 활동한 음악가와는 달리 미국 대륙에서 활동한 덕분에 비교적 풍부한 영상자료가 남겨져있어 피아노를 연주할 때의 기괴한 표정과 허밍, 고무로 만든 놀라운 의자, 호로비츠 못지 않게 '불량한' 연주자세 등을 비교적 생생히 관찰할 수 있는데, 이러한 모든 특이점은 그의 음악에의 몰입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대의 음악가들이 무대 위에서 취하는 제스츄어를 모두 쇼맨쉽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굴드의 연주자세는 청중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바흐 음악에 대한 집중력이라는 의미에서 굴드는 바흐 전문가인 칼 리히터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 독일적인 전통을 이어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이다. 굴드는 바흐의 음악에 잠재하는 본질을 확실히 이끌어 내면서 지금까지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했을 정도로 자유롭게 바흐를 연주했다. 그는 현대 피아노를 사용하였고, 주법도 바흐시대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굴드가 만들어내는 자유로움은 그 자체가 바흐의 연주에 가장 중요한 것이면서 우리가 그 동안 잃어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악보를 있는 그대로 소리로 만들어내는 행위의 무미건조함을 굴드는 의표를 찌르는 연주를 통해 새삼 느끼게 해 주었던 것이다. 바흐가 그의 곡을 작곡하는 도중에 도취되었음에 분명한, 약동하는 생명력을 굴드는 극히 현대적인 형태로 다시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굴드의 음반을 들어보면 깃털처럼 가벼운 터치와 호로비츠를 연상시키는 영롱한 트릴, 때때로 어이없이 빠르거나 혹은 느린 템포, 지나칠 정도의 논-레가토 주법을 자주 접할 수 있지만 결코 큰 음량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와 협연한 지휘자들은 굴드의 음량이 비교적 작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바흐 시대 악기의 작고 변화가 없는 소리를 염두에 두고 연주를 했던 것 같다. 굴드는 오래된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수리하여 사용하였는데, 이 피아노는 매우 가벼운 건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종종 굴드의 음반에서 들을 수 있는 엄청난 스피드는 아마도 이 피아노의 특성인 듯 하다. 굴드가 만드는 소리는 과격한 해석과는 반대로 매우 섬세한 것이었는데 그가 만들어 내기를 원했던 음색의 미묘한 차이, 주법의 극적인 변화는 연주회장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직 레코드만을 통해 - 눈의 미세한 결정을 현미경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듯이 - 그는 자신의 말을 다할 수 있었다. 결국 레코드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굴드의 음색은 매우 예쁘다. 호로비츠의 스카를랏티 소나타를 들어봐도 이와 유사한 예쁜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소니의 SBM기술이 한 몫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훨씬 이전에 발매된 CBS의 오리지널 음반을 들어 봐도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굴드의 깔끔하고 예쁜 음색은 여전하다. 아마도 굴드는 녹음과정에서 피아노 소리의 의도적인 수정을 가했던 것 같다. 이것은 현대 피아노가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기술적인 (음악외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한 굴드의 '창의력'의 산물이다. 아직까지 굴드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서슴없이 컴퓨터를 이용한 음향과 트랙의 합성에 몰두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단순히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을 완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누군가가 들어주는 것은 굴드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인도에 혼자 남겨져서 평생을 거기에서 살게 되었다 할지라도 굴드는 아무 거리낌없이 새로운 음악의 창조에 골몰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굴드의 바흐가 기적적으로 훌륭한 연주들임에 비해 모차르트나 베토벤, 브람스 등의 연주에는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바흐의 연주에서는 충분히 허용되고 새로움을 줄 수 있었던 자유로운 발상들이 그 이후의 음악에서는 그다지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베토벤 당시와 현재의 악기 자체의 차이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바흐 이후의 작곡가들은 분명히 '피아노'라는 악기를 위해 음악을 만들었고, 따라서 표현의 폭 어느 정도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굴드의 '전위'는 바흐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23번 소나타를 들어보면 바흐 때와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해석은 분명히 참신한 것으로 거부감이 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1악장의 듣는 이를 초초하게 만들만큼 느린 템포에서 기존에 듣지 못했던 새로운 감상 포인트를 많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바흐 때와 같은 음향상의 매력은 아무래도 훨씬 뒤쳐져 있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소나타들에서는 어느 정도 참신한 사운드를 들을 수 있었지만 베토벤 이후에는 해석상의 참신함만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굴드가 오르간이나 쳄발로를 연주한 음반을 들어보면 그다지 정통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작곡 당시의 악기를 사용하는데 굳이 기괴한 해석을 도입할 필요가 없었다고 느낀 것일까? 굴드는 본질적으로 청중을 싫어했다. 그는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청중일수록 연주자에 대해 가학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그러한 적의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연주회장을 기피하였으며 청중의 비판적인 의견이 자신의 창조적인 음악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사실 굴드의 이런 생각은 연주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음악에 대해 인터넷 공간에서나마 이래저래 평가하고 때로는 공격까지 하는 필자의 입장에선 마음에 걸리는 점이다. 연주자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음악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라 해도 결코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는 견해도 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받아들이는 쪽의 입장일 뿐, 연주자는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 한 것이기 때문이다. 굴드가 기계적인 편집과 조작을 즐겼다고는 하지만 그 행위에 일말의 사심이 없었다는 점, 순수하게 음악을 즐기기 위한 행위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직 '선구자'로서의 굴드에 대한 평가를 다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김태우
파격의 바흐...글렌 굴드 (Glenn Gould 1932.2.9 ~ 1982.10.4) 글렌 굴드는 1932년 9월 25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플로렌스도 한때 직업 연주자를 꿈꾸었을 만큼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지닌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글렌 굴드의 외가쪽 먼 친척 중 작곡가 그리그(Grieg)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글렌 굴드는 간신히 걸음마를 옮겨놓을 무렵인 3살 때 어머니에게 첫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이후 그가 10살이 될 때까지 어린 굴드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유일한 스승이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글렌 굴드는 5살 때 단순한 곡들을 연주했고, 즉흥적으로 곡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등 뛰어난 천재성을 보였다고 한다. 10살이 되던 해에 굴드는 토론토의 로얄 콘서바토리에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노 교사는 알베르토 게레로(Alberto Guerrero)였다. 굴드는 또한 프레데릭 실베스터에게 오르간을, 레오 스미스에게 음악이론을 배웠다. 그는 12살 때 인 1944년, 음악원을 수료하고 키바니스 음악페스티벌의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였다. 1945년에는 로얄 콘서바토리의 독주자 종합시험을 통과하여 완전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수준에 도달했음을 인정받게된다. 굴드가 14살 되던 1946년 그는 음악이론시험에 합격하고 최고성적으로 졸업장을 수여받았으며 알베르토 게레로에게 1952년까지 계속해서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글렌 굴드(Glenn Gould)는 늘 자신의 스타인웨이(Steinway & Sons)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녔다. 굴드의 이 거대하고도 미묘한 콘서트용 피아노는 배와 자동차, 비행기에 실려 주인과 함께 세계의 수많은 공연장을 누볐다. 굴드의 연주여행에는 이 스타인웨이 외에도 별도로 고용된 당대 최고의 조율사가 따라다니곤 했다. 콘서트 전날 밤이 되면, 피아노의 물리적인 속성을 빠짐없이 알고 있던 굴드와 그의 조율사는 스타인웨이를 완전히 분해했다 다시 조립하기도 했다. 굴드는 음의 높낮이를 정확하게 조율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연주방식과 연주할 작품에 맞추어 피아노의 기계적인 성격들마저 조율해버리곤 했다. 콘서트 직전에 이르면 굴드는 손가락의 마디마디까지 조율하기 위해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갔고, 손의 관절들이 충분히 유연해졌을 때를 기다려 자신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허락했다. 글렌 굴드는 비교적 손쉽게 유럽에서의 성공을 이끌어낸 사람이었지만, 그가 처음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냈을 때만 하더라도 대중의 환호와 달리 일부 비평가들은 "미친 놈의 연주"라고 혹평을 가했다. 그만큼 그의 연주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굴드는 유럽적 전통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그의 음악을 시작했고, 자신만의 템포와 해석방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갔다. 그는 일찌감치 자신의 연주 활동을 시작했으므로 다른 연주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학습기간을 보냈고, 그 기간에도 유럽이 아니라 캐나다에서 음악 수업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자유롭게 해석할 여지가 남아있지 않다고 여긴 작곡가의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고, 바흐에 대한 그의 해석 방식이 과연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 자신만의 확실한 해석으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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