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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언약궤
삼상 7:1-4
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삼상 7:1-4 / 그래서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내려와 법궤를 모셔 갔다. 그들은 온 도성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집에 법궤를 모셔 놓고, 그 집 주인인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을 성별하여 여호와의 법궤를 지키게 하였다. 2) [다시 구출되는 이스라엘 백성] 법궤가 기럇여아림으로 돌아와서 머문 날로부터 20년이 지났을 때에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비참한 처지에서 여호와를 생각하고 그분께로 돌아왔다. 3) 그러자 여호와를 찾아온 백성에게 사무엘이 올바른 회개를 가르쳐 주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여호와를 찾아 돌아올 작정이라면 남신이든 여신이든 그동안 섬기던 다른 나라의 우상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십시오.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고 그분만을 섬기시오! 그러면 여호와께서 분명히 여러분을 블레셋 족속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4)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 그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의 온갖 신상들을 가져다가 깊은 땅속에 묻어 버리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겼다.
여호와의 궤를 벧세메스에서 산 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온 족속들에게 전합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킴(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벧세메스 사람들의 요청으로 여호와의 궤를 아비나답의 집에 옮겨놓았습니다. 그후 다윗 시대까지 이 곳에 머뭅니다(삼하 6장 이하). 한편 아비나답의 집에 여호와의 궤를 모셔 놓은 이유는 그가 레위인이었기에 맡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훗날에 여호와의 궤를 옮길 때에도, 그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가 함께 하였습니다(삼하 6:3). 또한 본문에서 한 아들의 이름을 엘르아살이라고 하였는데 성경에서 엘르아살이라는 이름은 아론의 뒤를 이어서 대제사장이 된 아론의 셋째 아들의 이름과 같습니다. 아비나답이 엘르아살을 구별한 것은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출 28:3-41). 따라서 산 위의 안전한 곳, 레위인의 집에 여호와 궤를 두고 지켰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여호와를 위해서 여호와 궤를 지킨 것이 아니라 다시는 벧세메스같은 불상사(삼상 6:19)가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사모함(2) 기럇여아람에 여호와의 궤가 들어간 지 20년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제대로 여호와의 궤 앞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가나안 땅은 블레셋의 영향 아래 있었고, 여호와의 궤는 산 위에 멀리 있어서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 앞으로 나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여호와를 찾고, 사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사모하다’라는 말은 ‘큰 소리로 부르짖다, 울다’라는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서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전히 사사 시대 말기의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여호와의 법궤가 다윗에 의해 옮겨지는 것은 약 70년 후의 일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만을 섬기라(3-4) 드디어 사사이자, 선지자이며, 이스라엘 족속의 왕 같은 역할을 하게 될 사무엘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사무엘은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합당한 신앙의 3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돌아와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말합니다. 그리고 우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성도의 삶에서 하나님보다 더 앞서는 것은 안 됩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으로, 아스다롯은 성(性)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만을 ‘섬겨야’합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이것만이 이스라엘을, 그리고 오늘날의 성도들을 자유하게 합니다.
적 용 :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하여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날이 갈수록 인간들은 기술 문명의 우수성과 자기들이 만든 것들의 정확성을 자랑합니다. 매우 정확한 첨단 제품이 나왔다 해도 곧 그것보다 나은 정교한 제품이 생산되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손을 거친 어느 것도 제로(zero)의 오차를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제로에 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가 정해놓으신 법칙은 영구불변하며 태초에 약속하신 사랑은 그의 아들을 죽음에 내놓기까지 지키시는 무한한 사랑이란 신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신뢰도는 오차 제로(zero)입니다.
호크마 주석
=====7:1
기럇여아림...여호와의 궤를 옮겨 - '블레셋에서 돌아온 법궤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성막이 있는 실로(Shiloh)로 옮겨가지 아니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고려해 볼 수 있다. (1) 아벡 전투(4:9-11) 결과, 블레셋 족속에 의해 당시 실로까지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Ewald). (2) 실로 성소가 여호와께 더럽혀진 결과 법궤를 빼앗긴 것으로 간주하고, 당시 백성들이 법궤 보관 장소로 실로 성소를 기피하였기 때문이다(Keil). (3) 되도록이면 큰 성읍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에 법궤를 보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Hengstenberg). 한편 '기럇여아림'에 대해서는 6:21 주석을 참조하라.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 - 여기서 '아비나답'(Abinadab)은 레위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이 성읍이 레위인에게 할당된 성읍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봐야 할 까닭은 다옴과 같다. (1) 사사 시대에는 레위인들이 자신들의 성읍을 이탈하여 다른 지역에서 생활한 경우가 흔했으며(삿 17:12), (2) 후일 아비나답의 후손들이 언약궤를 옮기는 일에 공식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삼하 6: 3). 한편 '산에 사는'( , 바기아)이란 말은 직역하면 '산지에 있는'(in the hill, KJV) 또는 '산지 위에'(on the hill, NIV)란 뜻인데, 이는 곧 아비나답의 접이 기럇여아림 성읍의 교외 산지에 위치했었다는 사실을 암시 한다. 들여 놓고 - 아비나답의 집은 언약궤를 보관하기에 적당했던 것 같다. 그 까닭은 그의 집이 기럇여아림의 교외 고지에 위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아들 엘리아살 - '엘리아살'(Eleazzr)은 '하나님은 도우시는 자'란 뜻으로, 이 사람은 아론의 아들로서 아론의 뒤를 이어 차기 대제 사장이 된 엘르아살(Eleazzr, 출 6:23;민 20:25-28)과는 동명 이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름의 소유자는 위의 두 사람 이외에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이 레위 지파의 후예임을 은연중 시사한다. 거룩히 구별하여 - 이 말은 제사장을 임직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출 28:3, 41). 따라서 이러한 표현은 엘리아살이 혈통상 제사장 가문의 후예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당시의 특별한 상황은 제사장적 직분을 감당할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따라서 그가 비록 제사장 가문의 후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레위 지파였으므로 그곳 주민들은 그를 제사장으로 세운 듯하다. 한편 성경은 엘리아살이 어떤 권위에
Lange, Commentary on the Hdy Scripture).
=====7:2
궤가...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 여기서 '이십 년 동안'은 다윗에 의하여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완전히 옮겨진 때까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궤를 빼앗겼던 아벡 전투(혹은 에벤에셀 전투)는 B.C. 1075년에 있었고,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간 때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통치를 시작한 직후인 적어도 B.C. 1003년 이후일 것이기 때문이다(Leon Wood). 따라서 여기의 '이십 년 동안'은 사무엘이 최초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회개를 촉구한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3절). 비록 하나님의 언약궤는 일찍이 이스라엘로 돌아왔지만(6:14), 20년이란 기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는 이스라엘이 블레셋 족속들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여전히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4 :10), 또한 언약궤는 비록 이스라엘 땅이긴 하지만 여전히 블레셋의 깊숙한 영향권 아래 있는 기럇여아림 땅에 보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6 :21). 이스아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 여기서 '사모하다'( , 나하)란 말은 본래 '크게 울다', '부르짖다'란 뜻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이 말은 흔히 신세를 몹시 한탄하거나 과거의 잘못을 깊게 뉘우쳐 크게 울면서 부르짖는 행위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렘 9:10;31 :15; 겔 32:18; 암 5:16; 미 2:4).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 활동을 이방 족속 블레셋에 의해 오랜 기간 동안 강제로 억제당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깃들어 있는 사무엘의 분투적인 노력과 활동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즉 일찍이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명망이 높았던(3 :19, 20) 사무엘이 이 오랜 시기 동안 잠자코 있었다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다. 비록 성경은 이 점에 대혜 침묵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러 일의 결과를 통해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 아벡 전투의 결과로 말미암은 실로 성소 파괴 이후, 아마도 사무엘은 성막을 놉(Nob)으로 이전하는 일에 깊이 관여 했을 것이다(21 : 1-9). (2) 대제사장 엘리와 그의 두 아들 사망이후, 사무엘은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지도자로서 사회 질서를 바로 잡고 타락된 제사 예식의 기강을 수립하는 일에 매진하였을 것이다. (3) 블레셋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무엘은 이스라엘 곳곳을 돌며 여호와 신앙을 고취시키고 죄의 회개를 부르짖는 등 신앙 각성 운동을 전개하였을 것이다
=====7:3
사무엘이...일러 가로되 - 여기서 드디어 사무엘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 한다. 비록 공식적이며 전면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사무엘의 신앙 부흥 운동이 그동안 계속 되어 왔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3 :19-21 ; 4 : 1).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적절한 때를 포착한 사무엘은 본격적이고도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때 사무엘의 나이는 32세 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사무엘은 아벡 전투(4 : 5-11)가 있었던 약 12살에 소명되었고(3:1-14), 활동 당시는 그 전투 직후 궤를 빼앗긴 때로부터 20년이 지난 시기이기 때문이다.
전심으로...돌아 오려거든 - 여기서 '돌아오다'( , 슈브)란 말은 '회복하다', '돌아가다', '전향하다', '회개하다'란 뜻으로서 곧 성경에서 이 단어는 죄에서 돌이켜 회개함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 된다(왕상 8 :33, 48; 대하 6:24; 느 1: 9; 렘 3:10). 한편 '전심으로'( - ,베콜레바브켐)는 '너의 마음 송두리채'란 뜻으로서, 이는 회개의 순수하고 진정한 성격을 강력히 암시해 주는 문구이다.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제하고 - 우상을 제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돌아와 여호와만을 섬기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출 20:3-6). 여기의 '이방 신'( , 엘로헤 하네카르)은 문자적으로는 '낯선 신들'(the strange gods, KJV)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4절의 언급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구체적으로는 '바알 신'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이 '바알'(Baal)은 '주'(主)라는 의미인데, 가나안 땅에서 이 바알 신은 원래 '엘(EL) 신'의 아들로 비와 풍년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의 신인 '못(Mot) 신'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후 7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의 누이이자 아내인 전쟁의 여신 '아낫'(Anat)이 그의 시체를 찾아 그를 다시 살렸다고 한다. 한편 '아스다롯'(Ashtaroth)은 예레미야서에서 '하늘의 여신'으로 언급되는 여신이다(렘 44:19). 이 여신은 가나안 사람들에 의하여 미(美) 와 유연성을 지닌 '성(性)의 여신'으로 간주되 었다. 그런데 그당시 바알 신과 아스다롯 신은 보통 가나안 사람들에 의하여 함께 모셔졌고,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상 신들에 대한 숭배 의식에는 위의 두 우상의 성격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필연적으로 성적 음란이 뒤따르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방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멀리 하도록 했다나 중요한 이유 외에 성적 음란을 조장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키기에 충분하였다(민 25:1, 2; 왕상 14: 24;15:12; 22:46). 이에 따라 성경에서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함께 묶어 이스라엘 백성이 절대로 금해야 할 숭배의 대상으로서 언급하였다(삿 2 :11 ;3 : 7; 왕하 23: 4). 너희 중에서 제하고 - '제하고'( , 하시루)는 '제껴두다', '뽑다', '떠나다'란 뜻의 '수르'( )에서 파생된 말로, 이 말은 구약 성경에서 특히 우상을 그 흔적까지도 없앤다는 뜻으로서 많이 사용된 단어이다(창 35: 2 ;수 24:14; 왕상 15:14 ;왕하 12: 3 ;대하
=====7:4
이에...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 본절은 사무엘이 선지자로서 백성들에 의하여 크게 신임되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3: 19-21; 4 :1). 사무엘의 회개 촉구에 순히 응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같은 행동은, 그들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자신들을 자유케 하는 지름길임을 체험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것은 그동안 힘써 노력해 온 사무엘의 신앙 각성 운동이 열매를 맺은 것이요, 또한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유일한 선택이었던 것이다(삿 3 :8, 9) 바알들과 아스다롯 - 3절 주석 참조.
< 설 교 >
미스바로 모이라
사무엘상 7:1-11 / 조영태목사
주변에서 근속 20년, 30년 한 회사에서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귀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성실하게 인내하며 달려가는 분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평생을 믿음으로 달려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말 귀해 보입니다. 들어보면 그 여정이 결코 만만치 않은 일들이 많았다고 하는 고백을 듣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지속한다는 것이 때로는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상대인 보이지 않는 마귀가 틈을 타고 있다가 넘어뜨리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풍성히 얻으려고 하는 것을 시기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던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는데 이미 심판받기로 정해진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사도바울은 엡 6:12에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악한 영들의 꾀임에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말세의 끝을 달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날마다 거룩함을 회복하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무시로 깨어서 기도하며 성령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로 무장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결단과 더불어 지속하기 어려운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우리가 또한 신앙으로 결단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랐다고 하는 그 순간에도 위기가 찾아오고 문제가 연속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몇 명과 변화산에 올라가셨다가 내려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사람들과 변론하면서 소란스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자 한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아이는 말 못하는 귀신이 들린 아이였는데 귀신이 그를 괴롭힐 때는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고 고통스러워 하면서 날마다 파리해 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에게 선생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데 안 계셔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달라고 했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 했습니다. 때로는 귀신을 제 아들을 죽이려고 불과 물에 던졌나이나 그러나 무엇을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처음에는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왔는데 예수님도 못만나고 제자들이 능히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자 예수님에 나왔을 때는 이미 믿음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책망하시면서 그 아버지의 믿음을 일깨워주시고 그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셨습니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믿음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결국은 성령으로 되어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 경내인 벧세메스로 들어왔습니다. 그 동네는 레위인들이 사는 동네였습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가 들어온 것에 대해서 기뻐하며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그 중에 호기심으로 궤를 들여다 본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70명의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어났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두려움과 슬픔가운데 궤를 자기들 중에 두기를 꺼려하고 기럇여아림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결국 법궤는 옛날 법궤가 위치에 있었던 실로에서 가까운 지역인 기럇여야림으로 결정되었으며 이들이 가지고 가서 그 중에서도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궤를 안치하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합니다. 이 부분이 6장 마지막 부분에서 7장 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아비나답에 집에 모셔둔 지 시간이 오래 지났습니다.
20년 동안 오래 있었습니다. 그동안 서서히 이스라엘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2절에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사모’한다는 말에는 ‘부르짖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여호와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쉬운성경
turned back to the Lord. NIV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게 된 것, 곧 부르짖게 된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거룩한 영으로 우리의 심령을 주님께로 향하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룩한 것을 사모하게 하는 마음, 거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거리끼는 마음을 갖는 것, 거룩하지 못했을 때 죄를 회개하는 마음 이 모두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심령을 살펴서 주름진 것을 펴주시고 점이 박힌 것은 빼주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연약해서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회개하지 못할 때에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해주십니다.
롬 8:26 /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이 시들시들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를 약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시려는 선하신 그 분의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이 시들시들하게 될 때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되는 때입니다. 그 때가 바로 기도의 타이밍, 회개의 타이밍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때에 계속해서 성령의 음성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시들시들하게 만드는 성령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어서 속 시원하게 하나님께 털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서 막힌 것이 없는 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막힌 것은 없는지 사람과의 관계에서 막힌 것은 없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 때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시편 51편은 대표적인 다윗의 회개의 시입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게 하고도 다윗은 바로 회개하지 못하고 강퍅한 마음으로 그대로 있었습니다. 곧 그의 심령은 시들시들해졌습니다. 회개해야 하는데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다윗은 영과 육은 날마다 메말라 갔습니다. 뼈가 말라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찾아오신 성령의 책망과 감동 앞에서 베개를 눈물로 적시면서 지은 시입니다.
그는 10-12절에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라고 자신의 심정을 쏟아냈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체험해 보았기 때문에 그분이 떠나시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상황인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7절 하나님께서 목말라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반석을 치게 하심으로 생수가 터져 나오듯이 우리 성도들도 성령께서 주시는 생수의 강물을 마셔야 살게 됩니다.
언약궤가 20년간 기럇여아림에 있는 동안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을 어루만지신 것입니다. 은혜의 때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회복과 종교개혁을 서서히 준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 속에 하나님께 돌아가고픈 열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기 시대에는 많은 사사들을 사용하셨는데 일시적인 회복과 승리였습니다. 계속되는 우상숭배와 하나님 앞에서의 불신앙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을 세우신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사사시대를 끊고 신앙회복과 종교개혁의 시대를 책임지는 사사겸 선지자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담대하게 외칩니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3절
사무엘은 세 가지 종교 개혁의 기치를 선포했습니다.
첫째,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 (고대 근동의 여신 아스다롯 - 풍요와 전쟁과도 연관된 신)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라 (이 단어는 돌이키다 제거하다 떠났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명령하면서 신명기 7: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고 말씀했는데 그 땅의 우상을 깨뜨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여호와께 자신을 맡기고 (위탁하고), 여호와께 자신을 바치고 라는 의미입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믿음을 탈피하여 확실히 그 분 앞에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셋째. 그만을 섬기라.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합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언제까지 머뭇머뭇 거리겠느냐?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을 섬기고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여호와를 섬기라고 하면서 신앙의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것은 없는지 놓으면 죽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놓아도 죽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 주기철 목사님 예화를 들면서 말씀드린 일사각오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 본문을 보아 이스라엘은 아직까지 블레셋의 압제의 영향력 아래에서 탈피하고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완전한 지배는 아니지만 시시때때로 공격의 위기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궤가 블레셋에 빼앗긴 7개월 동안 그 궤를 찾으려고도 하지 못했겠습니까?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자신들이 함께 섬겼던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만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종교 개혁에 성공한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의 기념비적 집회인 미스바 성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은 해발 780M의 고지이고 가나안 중앙지대로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중보기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고 신본주의적 통치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미스바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6절 /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물을 길어 부었다는 것은 회개를 통해 자신의 마음 전부를 하나님 앞에 전부 쏟아 낸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 종일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금식은 가장 모든 것을 내려놓는 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겸손해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백성들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복하고 그의 은혜를 누리고자 하는 절실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고백함으로 회개했습니다. 자신들이 여호와께 범죄한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동안 신앙의 흉내만 낸 것, 우상과 하나님을 적당히 섞어서 섬긴 것, 하나님을 전심으로 따르지는 않으면서 언약궤의 신비한 힘을 빌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 볼려고 했던 모든 불신앙을 회개한 것입니다.
7절 후반부에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는 말씀은 의미가 있습니다. 신정통치가 시작됐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통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때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력한 지도자인 사무엘의 지도하에 미스바에서 집회를 열고 있는 것은 블레셋 편에서 자신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여겨지는 부담스러운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초장에 힘으로 제압하여 이스라엘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편에서 볼 때는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렵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회복하는 중요한 집회 자리가 피흘리고 싸워야 하는 자리, 전쟁의 자리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패한 전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군대는 그 때에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력상으로 매우 우세했습니다. 그에 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집회장소에 있습니다. 무기를 가져왔거나 전투를 준비 했을리 만무합니다.
신앙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상황입니다. 이제 회개하고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했는데 블레셋이 쳐들어와서 죽게 되었구나. 이제 제대로 예수 믿고 하나님을 따르기도 했는데 어려움이 왔구나 문제가 겹쳤구나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다시 한 번 믿음의 편에 서야 합니다. 한 번 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끝까지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병거 앞에서 더 이상 언약궤의 신비스러운 힘을 의지하거나 요행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무엘의 중보의 기도를 의지합니다. 온전히 신앙적 힘으로 대처했습니다.
8절 /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지자를 신뢰한 장면을 보게 됩니다.
회개의 지점에서 적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 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승부수를 띄운 것입니다.
백성들의 요청을 받은 사무엘은 곧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여호와께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지척까지 몰려왔는데 하나님께서 그 군대 진영에 큰 우레를 발하심으로 그들을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삼하 22:14 /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며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심이여
아마도 군대의 질서가 무너지고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가서 블레셋을 추격하였고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역대하에도 나옵니다. 19장에서 여호사밧이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나라가 안정되고 만들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모압 암몬 세일산 사람들이 연합하여 여호사밧을 치러 올라옵니다. 이 때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람에게 영이 임하여 선포합니다.
역대하 20:15 /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크게 힘을 얻은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며 권면합니다.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20절
그리고 찬양대를 앞에 세우고 찬송하며 행진할 때 하나님께서 복병을 두어 연합군을 공격하게 하셨고 또 서로 간에 자중지란에 빠져 서로 공격하면서 이스라엘은 어부지리로 승리를 얻었습니다. 신앙의 결단과 순종이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 삶에 이러한 믿음의 결단을 통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주변에서 믿음만으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세상 방법도 좀 써야 한다고 합니다. 신앙만으로는 안된다고 할 때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흔들리지 마십시오. 좌우로 치우지지 말고 끝까지 신앙의 길에 서십시오.
갈라디아서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나중에 율법주의자들이 할례도 받아야 된다고 하고 절기도 지켜야 한다고 하니 그 가르침을 따르는 모습을 보고 바울이 통탄했던 것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성령으로 시작한 것으로 성령으로 마치지 못하고 육체로 마치려고 하는가? 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시작한 것을 반드시 성령으로 마치시기를 바랍니다.
문제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배의신목사 / 삼상 7:1-12, 행 16:6-10
** 들어가는 말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가지요? 인터넷 글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간지 30년이 된 LA에서 사시는 70세 되신 할머니 한 분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지난 세월이(한숨)… 밤에 잠자리에 들어 아침에 일어나 보니 30년이 지났더구먼.” 세월의 무상함을 표현한 말입니다. 시작부터 웬 세월타령인가 하면, 우리가 사는 짧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중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중한 생명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 90:9-12)
이 소중한 생명의 날들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매일 만나는 문제를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즉 문제의 핵심을 잘 찾아서 해결해야 삶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에 매여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찾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다가 인생에서 심각한 일이 생기고 나서야 허둥대면서 문제를 찾으려 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매 삶의 순간순간을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5: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그리고 48:17절에서는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시고 1:19-20절에서는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하여 문제를 바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사무엘상 본문말씀은 엘리 제사장의 시대가 끝나고 사무엘 선지자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시대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멀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침묵하셨습니다(삼상3:1). 엘리 제사장의 자녀들마저 하나님을 멸시하며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삼상2:12-17). 그 결과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통하여 전쟁으로 징계하셨고 하나님의 법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겼고, 한 날에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죽고 엘리 제사장마저 죽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간 블레셋은 법궤를 자신들의 신전에 두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우상들을 부수셨고 그 도시에는 큰 재앙을 일으키셨습니다. 아스돗, 가드, 에그론 등 법궤가 가는 곳마다 독한 종기의 재앙이 온 도시를 휩쓸었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돌려보냈습니다. 빼앗긴 법궤가 돌아오는 것을 본 벧세메스 사람들이 기뻐하며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경배했습니다. 하지만 만져서는 안 되는 법궤를 들여다 본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벧세메스 사람들에게도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결국 법궤는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기브아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기고 그 아들 아비나답을 구별하여 법궤를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법궤는 그 이후 20년 동안 찾는 사람도 없이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고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삶이 힘들어지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이때에 사무엘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에는 관심도 없었고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문제를 바로 알도록 했습니다. 그제야 이스라엘 자손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그 결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사도행전 본문말씀은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지로 아시아 지역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성령께서 길을 막으셔서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육로로도, 바다로도 길이 열리지를 않았습니다. 아시아 끝 지역인 드로아에 이르렀을 때에 밤에 환상이 보였습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을 부르면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했습니다. 이 환상을 보고는 즉시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길임을 깨닫고 아시아 쪽을 포기하고 유럽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결과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 두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의도는 ‘문제를 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유를 찾아야 하고, 길이 열리진 않는 이유를 바로 알아야 삶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됩니다.
※ 문제를 바로 보는 신앙의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한 여행객이 서아프리카 나미비아 사바나 초원을 여행할 때입니다. 안내인과 함께 여우를 추적하는데 갈림길이 나타났습니다. 그중 하나에는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고 다른 길에는 안내인이 천천히 여우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여우는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하는 듯 멈칫 거리더니 안내인이 오는 길로 달려들어 길을 뚫고 도망쳤습니다. 여우가 도망치고 나서 여행객은 안내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희한하게도 왜 빈 길을 두고 사람이 있는 길로 도망가죠?” 그러자 안내인이 웃으면서 설명했습니다.
“여우들은 아주 영리하거든요. 그들은 겉으로 평범해 보이는 길에는 반드시 함정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어려운 길을 뚫고 도망간 겁니다.”
한갓 미물인 여우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는 힘든 길이지만 보다 안전한 길을 선택하여 돌파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은 비록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필요를 채우시고 수고에 따르는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사야 30:20-21절을 봅시다.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스승”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을 의미하며 오늘에는 우리의 참 스승이신 주님이시고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13절에서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라고 하시며, 14:26절에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의 길은 하나님께서 보장하시고 친히 인도하시고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삶에서 길이 열리지 않고,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의 문제가 생겨있다는 표시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삶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사모했지만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서 무엇이 문제인지 찾지를 못했습니다. 사무엘상 본문 2절에서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모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고치라고 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여러분, 무엇을 우상이라고 합니까? 골로새서 3:5절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 됩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채워두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면 당연히 삶이 힘들고 길은 막히게 됩니다. 비록 추구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면 결과는 불통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뜻으로 아시아 쪽으로 가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길이었고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유럽 쪽으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21-23절에서 하신 말씀이 이런 뜻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늘 교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환상을 보자마자 즉시 하나님의 음성임을 깨닫고 순종했습니다. 아시아 방향으로 향할 때는 그토록 막히던 길이 유럽으로 방향을 정하자 순풍에 돛단 듯이 길이 열렸습니다. 거처할 집도 주셨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렸습니다. 사도행전 16:13-15절을 봅시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인도하시는 삶입니다. 이처럼 문제를 바로 보게 되면 길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중동의 시리아를 여행하던 한 가정이 강을 만났습니다. 다리가 없어서 차량이 갈 수 있는 그리 깊지 않은 곳으로 건너가야 했습니다. 마침 그곳에는 수백 마리의 양떼를 이끌고 강을 건너려는 목동이 있었습니다. 양들은 물을 싫어하기 때문에 양떼가 강을 건너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여행 중이던 가족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동에게 가까이 가서 말했습니다. “이 많은 양떼를 몰고 어떻게 강을 건너려고 합니까?” 하지만 목동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이치만 알면 간단합니다.” 더욱 궁금해진 가족은 목동이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목동은 겁먹은 눈으로 서있는 많은 양들 가운데서 귀여운 새끼 양 한 마리를 번쩍 들어 자신의 어깨에 둘러메는 것이었습니다. 새끼 양을 둘러멘 목동은 성큼성큼 강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순간, 새끼를 빼앗긴 어미 양이 \'매애, 매애\' 하며 울더니 목동을 따라서 강물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수백 마리의 양들이 일제히 물속으로 뛰어들어 강을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생명의 길도 이치를 알면 간단합니다. 그 이치는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에 소중한 생명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을 외면하고 계속 세상을 따라다니면 문제는 더욱 커지고 끝내는 모든 것을 다 잃게 됩니다. 이제는 망설이지 말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길이 열리고 삶이 열리고 생활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미스바 성회의 기적
삼상 7장 1~14절 / 김영수목사(늘찬양교회)
Ⅰ. 돌아온 하나님의 법궤
오늘 본문말씀은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즉 사사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왕국시대가 도래하는 전환기적 상황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형편이 좋지 못한 때였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함으로 번번이 이웃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블레셋의 침략을 수 차례 받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가장 소중하게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나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법궤는 7개월만에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고, 하나님을 마음 속 깊이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7장 2절 말씀에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년 동안을 오래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전쟁의 쓰라린 패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귀중한 신앙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안치하지 않고 20년이나 '기럇여아림'에 두면서 이들의 신앙은 점차 겉치레의 신앙으로 위선과 가식으로 둘러쳐진 형식위주의 신앙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심지어 이방신인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며 성전에서 남창과 여창을 두고 음란과 쾌락을 추구하는 정욕 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방 신들'은 생소한 신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신은 가리킵니다. 특히 가나안의 주신인 '바알'을 가리킵니다. 아울러 '아스다롯'은 풍요와 성(性)을 주관하는 여신으로, 난잡한 숭배 의식을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Ⅱ. 우상을 제거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선지자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영적 타락과 우상숭배라는 점을 간파하고 미스바에서 회개의 대각성 집회를 계획하게 됩니다. 성회의 목적은 지금까지 섬겨오던 이방의 가증스런 우상들을 모두 제거하는 일이요(3절), 즉 우상과 우상을 섬기는 각종도구와 우상과 관련된 모든 물건들을 찍어버리고 (왕하18:4) 불살라버려 흔적조차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하23:4-6) 이렇게 이 땅에 잔재되어있는 여러 우상을 청산하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이 급선무임을 가르쳤습니다.
지금 우리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크게 건축해놓고 너무나 빈자리가 많다는 것이 아닙니까? 하루빨리 부흥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전에 가득 차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경배하며 찬양해야할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부흥은 목사님에게만 위임해놓고 여러분들은 강 건너 불 보듯 전도는 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의 일에 바빠서 움직이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법궤 즉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돌보심과 축복하심이 여러분의 삶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여러분 속에 있는 우상을 제거해야만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명예입니까? 직분입니까? 물질입니까? 쾌락과 사치 여행입니까?
이래서는 절대로 교회가 부흥할 수가 없습니다.
2003년 한 해를 기회로 남겨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가 외친 미스바 회개운동, 영적 각성운동을 절실하게 실천할 때입니다. 더욱이 요사이 일어나는 식사사건과 송구영신예배의 대거 불참의 모습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전진해 나가야 하겠는가?를 가름케 합니다.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가 백성들이 이방 신을 섬기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므로 블레셋의 침공위기를 자주 당하는 시련 속에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가?를 미스바의 기적을 통하여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지도자로 부름 받은 사무엘은 본문 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신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근에 경험한 일련의 사태에 대한 처방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은 죄에 있었습니다.
실패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른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사무엘은 역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던 모든 잘못을 회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1. 전심으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회개해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온 회중을 미스바로 모이게 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의 말에 순종하여 다음 3가지 일을 행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물을 길어 붓고, 금식을 하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6절 말씀에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 하였나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기를 점검하고, 병사들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왔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통회 자복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모든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회개하는 자리에서 해결되는 것입니다.
회개란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했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괴롭혔던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복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한해동안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진실했습니까?
교회 안에서 조차 조그만 봉사의 직분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휘둘려했던 모습들이 아닙니까? 자기의 유익과 자기의 자랑만 세우기에 급급했던 우리의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어느 누구하나 진실로 성령 안에서 거듭난 영적 기도와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 노력과 모습이 없습니다. 세상 원칙과 똑 같은 모습이 우리의 모임 속에 흘러내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안에서 하나될 리가 없습니다.
아울러 주안에서 화목과 , 사랑이, 겸손히, 희생이, 드림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늘찬양교회라는 구호를 외치며 살았습니다.
베풀며 살았습니까?
바르게 신앙 생활했습니까?
맡은 사명 성실히 잘 감당했습니까?
그렇지 못했다면, 겸손히 우리의 잘못, 허물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다.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섬기십시다.
회개하는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참다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합니다.
즉, 어려움을 만나게 되자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레셋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무엘에게 이렇게 요청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8절)
어려움을 당한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힘이나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찾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변화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려움을 당한 순간 누구를 가장 먼저 찾습니까?
주의 종을 찾습니까?
교회를 찾습니까?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하십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모든 면에서 어려움을 맞고 있습니다.
밝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느냐? 아니면 퇴보하느냐? 기로에 서 있습니다.
흥하느냐? 망하느냐? 갈림길에서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고서,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우리들은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가정을 위해서 무엇보다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사무엘은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드렸습니다.
9절 말씀에 "사무엘이 젖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
여기 온전한 번제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희생 제사를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내가 죽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만이 깨닫는 승리의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계에서는 져야만 이깁니다.
죽어야만 삽니다.
희생해야 새 생명이 일어납니다.
드려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승리의 법칙은 나를 번제로 드리고, 내가 일단 죽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12:24-25)
번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가리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바로 온전한 번제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우리의 삶의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이 예배가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강권적인 기적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본문 10절 말씀에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을 따라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기적의 역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에게만 나타납니다.
예배 가운데 가장 큰 기적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서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해야 육적인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요한 3서 기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서 있을 때, 우리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이 될 때
우리들도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사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념하기 위해서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12절 말씀에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승리의 기쁨과 영광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들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영원히 지키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할 때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 처하더라도 감사 감격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도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는 지난 날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속에 깊이 되새기면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 볼 때 우리의 입에서도 에벤에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도와주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의 삶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
삼상 7장 1~12절 / 김양인목사
오늘 본문은 사사시대 말엽에 있었던 특별한 한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때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겼다가 되찾은 지 2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블레셋의 압제 아래서 고생하는 동안 이스라엘 자손은 겸비해져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의 권면을 받아들여서 모든 우상을 없애고 하나님만 섬겼습니다. 이에 사무엘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범민족적인 영적각성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이스라엘 온 지파를 베냐민 지파에 속한 미스바로 소집했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은 물을 길어 하나님 앞에 붓고 금식하면서 회개했습니다.
이때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과 전쟁을 하려고 미스바에 모인 줄로 알고는 선제공격을 해 왔습니다.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이스라엘 자손은 겁에 질려 사무엘에게 이르기를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부르짖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시니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이스라엘에게 패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스바에서 몰려 나가 벳갈 아래까지 추격하며 불레셋 군을 무찔렀습니다. 그 날, 사무엘은 이 승리를 기념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큰 돌을 세우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하고, 그 돌의 이름을 “에벤에셀” 곧 “도움의 돌”이라고 하였습니다.
첫번째로, 이스라엘 자손이 에벤에셀의 돌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불신앙을 회개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블레셋 사람들의 압제를 받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동안 선민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해 내셨고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가나안 족속들을 본받아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말년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전쟁터에 나갔으나 패하여 무려 3만 명이 죽고 언약궤마저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않으면서 언약궤만 메고 나간다고 전쟁에서 이길 리가 만무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엘리 제사장은 98세로서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전 문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언약궤를 전장에 내 보낸 일로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그 날 오후에, 한 백성이 전장에서 도망쳐 와서 엘리에게 이렇게 고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엘리는 언약궤를 뺴앗겼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 그만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처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전쟁에서 패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겼고, 영도자인 엘리 제사장과 그의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비해 두셨던 사무엘을 지도자로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보살피게 하셨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빼앗아간 블레셋 사람들을 심한 종기로 치셨습니다. 이에 혼이 난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언약궤를 기얏여아림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 놓고는 이십년 동안이나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이는 선민이 하나님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언약궤는 곧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다니, 이 같은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인들은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지 몰라도 성도들은 하나님을 떠나면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라야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하) 하신대로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의 영적 생명이 고갈되고 마귀에게 노략질 당하여 결국 망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혹 보면, 하나님을 섬기다가 중도에서 그만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을 하다 보니 바쁘다고 하거나 직장일이 바빠서 교회 나올 수 없다고 핑계를 댑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보았자 잘되는 일도 없기 때문에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건강하게 살고, 물질적인 축복을 받고, 만사형통하게 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현실적인 번영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면 믿음의 기초가 잘못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영혼의 구원, 영생을 얻기 위함입니다. 부언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 믿습니다. 이처럼 믿는 목적이 올발라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은 안개와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이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찾으시면 “지금은 바빠서 못가겠습니다”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가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을 버리고 세상길로 가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방임하지 않으시고 사랑의 매를 때리십니다. 히브리서 12장에 이르기를 “7)…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따라 살아도 아무 가책도 없고 징계도 없고, 마냥 만사형통하다면 그 사람은 애당초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을 저버리고 살면 그 심령이 고통스럽습니다. 영혼에 기근이 임합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성공한 것 같아도 그의 영적 실상은 병들고 피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몸은 건강해도 그의 영혼은 광야처럼 황폐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므로 그 심령이 평안할리 만무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영혼의 곤고함으로 인해 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징계하셔서 어긋난 길로 가는 신자들을 깨우쳐 주십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면서 항복하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막대기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자손을 징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압제와 착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징계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은 자기들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2절에 보니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고 했습니다. 비록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났을지라도 징계를 통해서 자기의 죄와 허물을 깨닫게 되었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본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로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그러자 그들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통하여 우리는 참된 회개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회개는 잘못을 깨닫고 가책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회개를 위한 시작에 불과하지 진정한 회개는 아닙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고나서 곧장 후회했습니다. 예수님을 넘겨준 대가로 받은 돈을 도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갖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았다”고 했습니다. 유다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나무에 목매어 죽은 것은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한 결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사람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자기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신 처분을 바라봅니다. 그런 점에서, 가룟 유다의 자살은 그의 불신앙과 교만을 드러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새벽닭이 울었을 때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이 같은 행동을 회개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면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사랑을 고백하였으며, 다시금 사명을 새롭게 하여 끝까지 헌신하다가 순교한 것을 볼 때 그의 통곡이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참된 회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제 금년도 한 달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연말을 앞두고 한 해를 돌아보면서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우상을 섬긴 적은 없는지요. 가나안 족속들이 섬겼던 바알이나 아스다롯은 다 다산(多産)과 풍요(豊饒)의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도 번영과 풍요를 누릴 목적으로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힘써 추구하는 것이 번영과 풍요입니다. 이 사회의 가장 유력한 가치는 경제적인 번영입니다. 사람들은 황금 곧 돈을 사랑하며 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황금이 곧 현대판 바알이고 아스다롯 인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가난하게 살 이유는 없습니다. 정당한 방법이라면 부하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형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학 2:8)고 하셨습니다. 우상은 우리에게 복을 내려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수완이 있어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복도 내리시고 화도 내리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의심과 불신앙을 내어 버리고 또 현대판 우상 숭배인 황금만능주의와 탐심을 버리고 오직 창조주시며 구원주이신 하나님만 섬김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에벤에셀의 돌을 세우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 자손이 에벤에셀의 돌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모여 기도함으로 영적 부흥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지파를 미스바로 모은 것은 영적인 부흥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난날의 불신앙과 우상 숭배의 죄악을 회개했습니다. 물을 길어 하나님 앞에 붓고 금식하며 기도한 것은 ‘하나님 앞에 그들의 마음을 물처럼 쏟아 붓는다.’는 뜻입니다. 한번 쏟아진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듯이, 우리의 온 마음을 다 주님 앞에 쏟아놓고 그 앞에 굴복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처럼 모여서 회개하며 신앙에 부흥의 불을 붙였습니다.
우리의 냉랭한 심령이 뜨거워지고 하나님 섬기는 데 열심을 내려면 영적 부흥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스라엘 온 지파가 미스바에 모였듯이 성도들은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모이는 것은 오락을 위한 것이 아니고 무슨 교양강좌를 듣기 위함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의 일을 위해 헌신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모이는 데 열심 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는 성도들 가운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모이기에 힘쓰는 사람치고 은혜 받지 못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선데이 신자로 만족하지 말고 모이는데 힘쓰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간혹 보면, 교회에 너무 자주 모인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에 관한 성경의 증언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로 47절에 보니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를 힘썼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힘쓸 때 우리 심령에 부흥이 일어납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고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 영혼은 하나님께로 가장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시간은 기쁘고 은혜로운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로 우리의 기도가 힘겨운 노동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기도할 경우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실 때 이마에 흐르는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어찌나 애쓰고 힘쓰면서 기도하셨던지 모세 혈관이 터져서 피가 땀에 섞여 나왔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식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기력이 쇠약 해 집니다. 배고픔은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참고 기도하는 것이니 금식 기도는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또 회개할 때에도 금식하는데 이는 자신의 죄를 통분히 여기는 심정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금식하면서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하고 회개했습니다.
또한 기도는 영적인 싸움이기도 합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인 잠에 빠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은 깨어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육신이 약하여 졸며 잤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대제사장들이 보낸 무리가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다 도망하였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패배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심령에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면 그 무엇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심령 부흥을 이룬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이룩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우리의 보호자와 인도자가 되어 주십니다. 본문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철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철을 다루는 기술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는 사울 왕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데 칼을 가진 사람은 사울 왕과 요나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더구나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은 기도하기 위해 왔으므로 전혀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철로 만든 창칼보다 더 강한 무기가 있었으니 곧 기도의 무기였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부르짖어 기도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큰 우레에 놀라서 도주하는 적들을 뒤쫓아 가면서 무찌르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모이기에 힘쓰고 기도생활에 열심을 내어 영적 부흥을 이룸으로 에벤에셀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이스라엘 자손이 에벤에셀의 돌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온전한 헌신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보고를 받은 블레셋 방백들은 군대를 거느리고 물밀 듯이 쳐들어왔습니다. 이를 본 이스라엘 자손은 두려워하여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가까이 오자 하나님께서 큰 우뢰를 발하셔서 그들을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도주하는 블레셋 사람들을 뒤쫓아 가면서 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으로 온전한 번제를 드린 것은 이스라엘 자손 모두가 하나님께 헌신하였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 것은 많은 제물을 바쳤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저는 성도님들께서 각 부서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기쁨으로 봉사하는 것을 볼 때 제 마음도 기쁩니다. 이는, 성도님들께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사가 없는 봉사는 가인의 제사와 같아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인 관습에 따라서 꼬박꼬박 성전에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1,12)고 하셨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의 헌신을 잘 아실 것입니다. 마리아가 순전한 나드 향유를 옥합채로 깨뜨려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온 방에 가득했습니다. 그 방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자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그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 년 치 품삯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 액수와 같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향유를 아낌없이 주님께 부어드렸습니다. 이를 본 가룟 유다는 화를 내며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했습니다. 언뜻 보면, 가룟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매우 동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요한은 말하기를 “가룟 유다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신 것은 그가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자들은 마음만 먹는다면 삼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그보다 더 비싼 향유도 얼마든지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헌신이 아름답고 귀한 이유는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억지가 아니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바쳤다는 데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의 처녀들은 결혼 준비물로 향유를 준비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소중한 것을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바쳤을 뿐 아니라 여자에게 자존심의 상징인 머리털을 풀어서 주님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과연 어떠한 헌신을 주님께 드렸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핑계 삼았던 가룟 유다처럼 무슨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워서 주님께 헌신하기를 게을리 한 적은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헌신에 비할 때 우리가 바치는 것이 아무리 크다고 한들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라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스라엘 자손이 블레셋을 물리치고 미스바와 센 사이에 에벤에셀의 돌을 세웠듯이, 여러분의 인생길 곳곳에 에벤에셀의 돌이 세워지기 바랍니다. 이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 모든 의심과 불신앙을 버리고 전심으로 하나님만 섬기십시오. 모이기에 힘쓰시고 기도에 힘쓰심으로 영적 부흥을 이루십시오. 하나님께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한 헌신을 드리십시오. 지금까지 성도님들의 삶을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과 대적을 물리쳐주시고. 인생의 어려운 고비 마다 승리와 감사의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우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전심으로 나아가라
삼상 7장 1~4절 / 배 혁목사(안토니오교회)
오늘날, 세계는 240여 개의 나라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나라 중에서 자신의 나라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중화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러시아, 캐나다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넓은 영토를 가졌기 때문에 대국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서방의 많은 선진국이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중국인의 사고속에서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긴다고 합니다.
중국이 큰 대륙을 가지고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상을 가진데 반해, 작은 나라이면서 그러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입니다. 세계지도에서 이스라엘의 지도를 보게 되면 나라이름인, ISRAEL 을 쓰기에도 좁아 보이는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세계의 중심이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많은 민족들이 있지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해주셨다는 선민사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상의 중심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중심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이고, 성전의 중심은 지성소이고, 지성소의 중심은 언약궤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바로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고, 이것이 이스라엘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세계 중심의 나라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짓도록 하셨던 성막과 함께 지어진 상자입니다.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겉은 금으로 씌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하나님의 법이 쓰여진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고,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언약궤가 그토록 중요한 것은, 그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막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다면 다른 성물이나 건축물들은 큰 의미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있음으로 해서 다른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여호와의 언약궤를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빼앗깁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에 참여했는데 이기지도 못하고 그 귀한 언약궤를 빼앗긴 것입니다.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커다란 비극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 가지고 있었던 언약궤에 대한 믿음이, 언약궤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믿음이 흔들리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를 빼앗기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깨닫고 바로 잡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를 알고서 이스라엘이 블레셋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바로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전심으로 나아가는 구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말씀을 통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우리가 언약궤를 빼앗긴 사건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은 언약궤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나타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역사상 이스라엘을 힘들게 만들었던 민족들 중에 하나가 블레셋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과의 전쟁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미 무기에서도 차이가 났습니다. 이스라엘은 구리와 주석으로 만든 합금인 청동을 가지고 무기를 만들었는데, 블레셋 사람들은 청동보다 훨씬 튼튼하고 강한 철로 만든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무기의 차이를 가지고 전쟁이 치르려 하니 불리했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기기 전에 치렀던 전쟁에서도 역시나 무기가 강한 블레셋이 우세했습니다. 그래서 일차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졌습니다. 이 전쟁으로 사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도 대책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장로들이 모여 앞으로 어떻게 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의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우리가 언약궤를 실로에서 가지고 와서 우리 중에 있게 하면 원수들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그렇게 했습니다.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전쟁터로 옮겨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할 때에 언약궤를 전쟁터에 옮김으로, 당연히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언약궤를 본 이스라엘 군사들은 사기가 충천해서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얼마나 소리가 크던지 땅이 울렸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함성을 들은 블레셋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언약궤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더욱 낙심이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말합니다. “우리에게 화로다. 애굽을 재앙으로 치신 신이 이르렀으니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랴”하면서 낙망을 했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 “어찌 히브리 사람들의 종이 될 수 있겠느냐? 대장부같이 싸우자”고 격려하며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모두가 예상한 것과 정반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크게 패해서 삼만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리고 전사한 삼만명 중에는 그 당시 영적인 지도자인 엘리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제사장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약궤는 패배와 사망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이를 경험했었습니다. 언약궤를 가지고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들어갈 때에 물이 가득 흐르고 있는 요단강이 그들의 앞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강물에 첫발을 내 디뎠을 때에 요단강 물이 갈라지고 그 사이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들어갈 때에 그 앞 길을 가로막는 막강한 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리고성이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그 성을 무너뜨릴 수도 없었고, 그 성안에 있는 여리고성 사람들과 대면해서 제대로 싸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언약궤를 앞에 세우고 7일 동안 여리고성을 돌 때에 그 성이 무너져 내리고 큰 승리를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언약궤를 메고 진중에 들어갔을 때에는 어떠한 능력과 변화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전쟁에서 철저하게 폐하였고 언약궤를 빼앗겼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패 한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약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으로 착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 자체가 능력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통해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들이 소유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강한 블레셋을 이길만한 히든 카드로 언약궤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곧 하나님은 없어도 하나님의 능력은 언약궤를 통해서 소유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옮겨다니는 대로 그 역할을 잘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언약궤를 소유함에 있지 않습니다. 언약궤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언약궤는 사실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언약궤는 마치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소유하는데는 성공했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데는 실패했습니다.
사무엘상 3:1절에 보면, 그 당시의 영적인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던 상태가 이스라엘의 상태였고,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중대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언약궤는 있는데 정작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상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곳입니다. 교회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 있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사라진 교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언약궤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원수를 물리친 여리고성의 경험과 약속의 땅을 가로 막은 요단강을 가르는 능력은 상실한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언약궤를 소유함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믿음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외형적 교회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교회 안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나며 성도들은 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약궤만 소유하고, 하나님과 함께 함을 잃어 버린 교회와 성도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사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블레셋과의 첫번째 전쟁에서의 패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각성의 때였습니다.
일차 전쟁에서 패한 후 장로들이 모일 때에 궁금해 했던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전쟁에 패배한 원인을 제대로 알고서 그 중심을 바로 잡을 때였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나은 무기나 전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언약궤의 등장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번째의 패배를 통해서, 제대로 된 질문을 했지만 어리석은 답을 가지고 행동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했고, 그 다음 전쟁에서 승리할 하나님의 개입과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약궤를 메고 전쟁터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무기가 약하거나 언약궤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가 그 가운데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게 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먼저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마음이 예전과 같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 돌아오는데 전심으로 돌아올 것을 말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가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에는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섬기면서 살았는데, 가나안에 들어오면서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마음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중에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던 이유 중에 하나가 그들이 섬기는 다른 이방의 신들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광야생활 중에는 하나님만 보였는데,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살다가 보니까 가나안에 있던 우상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곧 세상의 우상에게도 그 마음이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고도, 바알이나 아스다롯도 자신들을 복 되게 할 것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전심을 드리지 못하고, 다른 우상들과 같이 그 마음을 나누어서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위상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바알과 아스다롯과 같은 우상과 같은 선상에서 취급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어도 언약궤만 가지고 가면 승리가 있을 것이라는 우상을 대하는 태도로 언약궤를 취급했던 것입니다.
어떤 결혼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아내를 아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도 아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 남자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심을 원하셨습니다. 다른 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그 마음이 빼앗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이방신들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할 때에 하나님께 전심을 드릴 수 있고,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전심을 원하십니다.
전심을 드리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제거하는 일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돈도 믿고, 세상 사람들도 좀 믿고, 세상의 풍습들도 좀 믿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도 믿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심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우상들과 함께 우리의 마음을 나누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전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전심인지, 반심인지, 아니면 마음이 전혀 없는지를 누구보다 확실하게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다른 것에 빼앗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떨 때는 예배를 드릴 때에도 우리가 전심을 드리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몸은 와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빼앗겨 있을 때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보다는 세상적인 방법을 더욱 의지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언약궤만 매고 다니는 격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신명기 6: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전심으로, 전 성품을 다해, 전 힘을 다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언약궤만 들고 다니는 삶이 아니라, 전심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전심을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심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독생자, 자신보다 더 귀하다고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사랑함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전심으로 사람들을 찾아오셨고, 전심으로 사랑해 주셔서 저와 여러분이 구원함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이 언약궤를 가지고 다니는 것에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외형적인 교회 안에 머물러 있고, 외형적인 신앙생활을 반복한다고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에 그 능력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빼앗겼던 마음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전심으로 나아가고 섬길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섬김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삼상 7:1-4 / 박정환목사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상의 시대적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사사시대를 다루고 있는 성경은 ‘사사기’와 ‘룻기’입니다.
사사시대는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만큼 영적인 암흑기였습니다(3:1).
(삼상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연전연패하였습니다.
(삼상 4장)에 그들은 첫 번째 전쟁에서 패전한 후 하나님의 언약궤(법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나갔습니다.
(삼상 4:2)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삼상 4:4)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지만, 오히려 더 군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삼상 4:10)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여러분, 왜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는데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을까요?
그들은 형식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도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해서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삼상 4: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엘리 제사장은 아들 둘이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뒤로 넘어저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삼상 4:17)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삼상 4: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가 임신아여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를 낳다 죽어가면서 네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자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갔다는 뜻입니다.
(삼상 4:19)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삼상 4:20) 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삼상 4: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삼상 4: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절대로 다른 자에게 빼앗길 수 없는 하나님께서는 (5,6장)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궤가 기럇여아림에 돌아온 지 20년 후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압제 가운데 지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삼상 7: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사모하니라”는 말은 히브리어 “나하”(נָהָה)라는 말로 “크게 울다, 부르짖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의 잘못을 깊게 뉘우치며 크게 울면서 부르짖었다는 뜻입니다.
[킹제임스흠정역](삼상 7:2) 그 궤가 기럇여아림에 거하되 그 기간이 길어 이십 년이 되었으므로 이스라엘의 온 집이 {주}를 구하며 애곡하니라.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여호와께로 돌아오려거든” 몇 가지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간략하게 세 가지로 말씀을 증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전심으로 돌아오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 55:7)을 보시면
(사 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또 (슥 1:3)에는
(슥 1:3)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온 족속에게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이라고 했습니다.
(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여호와께로 돌아오려거든 먼저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마음을 다하여”
[킹제임스흠정역](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온 집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마음을 다해 {주}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가운데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예비하여 {주}께로 향하게 하며 그분만 섬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라, 하니
이병규목사님은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먼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올 것을 권고하였다.
돌아올 때에는 전심 전력을 다하여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힘쓰되 마음을 붙잡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이키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번개와 같이 빠르므로 기도로 길들이고 붙잡아서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면 점점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뒤숭숭한 마음으로는 은혜를 받지 못한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전심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돌이키려고 애를 쓰고 과거에 잘못한 것을 회개하여야 은혜가 풍성하다.
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하나님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십니다.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전심으로 여오와께 돌아가는”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라.
여호와께로 돌아오려면 둘째,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사무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우상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20년 동안 우상을 많이 섬겼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전심을 다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출 23:24)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출 23:24) 너는 그들의 신을 경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깨뜨리며 그들의 주상을 부수고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본문에는 “바알과 아스다롯”이 나옵니다.
(삼상 7: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바알은 남성 신이며, 아스다롯은 여성 신이라고 합니다(우상도 남성, 여성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은 아이를 잘 낳게 해주고, 풍요를 준다고 믿는 우상입니다.
다산과 농사의 풍요, 사업이 잘되게 해준다고 믿는 우상입니다.
문제는 하나님만 섬겨야 할 이스라엘백성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길 때,
그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자체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기 시작하면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병규목사님은
요즈음은 돈이 우상이 되었고, 남편과 자식이 우상이 되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귀히 여겨서 하나님 말씀을 제쳐놓고 좇아가는 것이 곧 우상이다.
또 성경 말씀을 어기고 세상의 것을 취하고, 세상을 따라가고, 신앙을 떠나서 세상의 것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우상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기의 마음대로 이방 신을 섬기며 살아 왔지만 성공한 것이 없고 실패만 당하였다.
말씀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는 자는 가는 곳마다 고통이요 환난이다.
성도가 양심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은 그 속에 우상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허락되지 않고 양심이 편하지 않은데도 우상을 따라가면 심령이 죽는다.
우상 중에 가장 큰 우상이“자기”이다. 자기를 위하기 때문에 믿음을 팔아먹고, 자기의 명예와 영광과 유익을 구하느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 버리며,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앉아서 왕 노릇 하다가 망하는 사람이 많다.
누구나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인 줄 알아야 하며 자랑할 것은 자기 약한 것밖에 없는 줄 알아야 한다(고후 12:9-10).
고 하셨습니다.
(창 35장)을 보시면 야곱도 벧엘로 돌아오려 할 때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사람들에게“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했습니다.
(창 35: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들 마음속에도 우상이 많이 있는 줄 알고
내 속의 우상을 다 제거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여호와께로 돌아오려면 세 번째,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겨야”합니다.
(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제 모든 우상을 버리고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해야”합니다.
사람은 마음이 어디를 향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사 29:13)의 말씀을 보시면
이사야 시대의 영적인 죄와 타락을 말씀하시면서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고 하셨습니다.
(사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그만을 섬기라”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만 섬길 때 우리의 마음이 다른 데로 향하지 않게 됩니다.
(수 24:14,15)을 보시기 바랍니다.
(수 24: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우상)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했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예배당에 모일 수 없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얼마든지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할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겼다가,
다시 하나님의 언약궤가 돌아온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삽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모든 우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거나,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