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포에니 전쟁에 패한 뒤, 카르타고는 망국으로 직행하는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카르타고의 국고 세입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기만 했다.
일부는 부주의한 재정 관리로 인해 새나간 것이었지만,
최대의 문제는 아다림(카르타고 원로원)이니,
104인회(법관회)니, 심지어 수페트(카르타고 집정관)이니 할 것 없이 대귀족들이
그들의 직책에 따른 당연한 보너스나 퇴직금이라도 된다는 양 국고에서 한탕씩 하고 간다는 것이었다.
로마에 50년간 갚기로 한 배상금이 1만 탈렌트에 달했지만
1년에 2백 탈렌트도 채 마련 못해 허덕이는 일이 매년 반복되었고
전쟁배상금? 우린 그런거 몰?루,
나라에 돈이 없으면 평민들 세율을 올리면 되지라는
기적의 해결책이 아다림 귀족들에게서 제시되면서
카르타고의 소농민들과 중소 상공업자들은,
로마군보다도 무서운 중과세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기원전 196년,
더 이상 바알 신과 아버지 앞에서 했던 로마 타도의 맹세는 이젠 현실적으로 지킬 수 없게 되었지만
적어도 조국을 망국의 위기에서 구한다는 마지막 사명이라도 다하고자,
한니발이 은퇴했던 시골 농장에서 카르타고로 돌아오면서 마지막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참전 용사들의 입소문을 통해 - 비록 자마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몇몇에 불과할지라도 -
한니발이 일개 병사에 불과했던 그들을 얼마나 공정하고 선하게 대했는지 들은 카르타고 민중들은,
한니발을 새로운 수페트, 즉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수페트로 취임한 한니발이 가장 먼저 내린 명령은,
재무관이 그에게 직접 와서 카르타고의 현 재정 상황을 낱낱이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재무관은 소환 명령을 대놓고 무시했다.
그는 반 한니발파의 일원이었고, 곧 막강한 104인회의 일원으로 승진할 예정이었기에
사람을 단단히 잘못 보고,
천하의 한니발인들 이 정도 빽을 가진 내게 어쩔 수 있겠느냐고 똥배짱을 부렸던 것이다.
한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고, 무박 4일 행군으로 늪지대를 통과하고,
칸나이에서 8만 로마군을 상대해봤던 백전노장이자
신임 집정관 입장에선 기도 안 차는 일이었다.
한니발은 당장 재무관을 체포해 민회에 넘기면서,
104인회의 귀족들이 그동안 얼마나 위압적으로 굴면서 법률과 집정관들을 무시해 왔는지 규탄했다.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한니발은 104인회 카르텔을 혁파하기 위한 새 개혁 법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으니
이제부터 104인회로 선출된 법관의 임기는 1년으로 제한하며,
2년 연속 연임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서 한니발은 평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만큼이나,
귀족들의 치를 떠는 원한을 사게 되었다.
어쨌든 개혁의 첫 번째 걸림돌을 일단 치워낸 한니발은,
육상과 해상으로 운송된 화물에 관세를 매겨 나오는 세입,
이 세입이 쓰이는 용도, 정부의 일반적인 지출에 필요한 금액들을 몸소 확인하고
이로서 귀족들이 그동안 국고에서 대체 얼마나 해쳐먹었던 건지 파악했다.
귀족들의 어설픈 장부 장난질 따위는,
십수년간 이탈리아에서 원정군 수만 명을 제대로 된 보급도 없이 현지조달만으로
책임지고 먹여 살리느라, 회계 스탯 만렙을 저절로 찍게 된 신임 집정관의 매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민회를 소집한 한니발은, 그 동안 징수하지 못해온 세금을 모두 징수하는 것만으로도
카르타고의 국고는 시민들에게 추가과세 없이도,
로마인들에게 배상금을 납부하고도 남을 만큼 채워질 것이라 보고했고
곧 이 예측을 현실화시켰다.
(갚는데 50년은 걸릴거라 예상되어 카르타고의 족쇄가 될거라 생각했던 1만달란트의 배상금을 단 10년만에 갚았다)
중과세의 공포에서 해방된 상공업이 전에 없이 활기를 되찾아,
곧 카르타고는 다시금 지중해에서 가장 북적이는 항구가 되었다.
하지만 부패와 공금횡령으로 오랜 세월 살아왔던
심지어 나라의 존망이 걸린 2차 포에니 전쟁 중에도
흥청망청 살아왔던 아다림의 귀족들은 불만이 엄청났다.
호의조차 아닌 범죄가 계속됐다고 그게 권리인 줄 아는 이 작자들은,
부정부패로 해쳐먹었던 돈을 한니발이 환수한 것을
마치 한니발이 그들의 정당한 개인 재산을 강도질한 것처럼 여겨 어마어마한 분노를 품었다.
훗날의 로마 원로원이 개혁을 시도하는 호민관들에게 했던 것처럼 빠따나 칼침으로 "문제 해결"하기에는
한니발이 너무나 거물인데다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카르타고 귀족들은 그들만큼이나 한니발을 증오하는 이들
한니발에게 할아버지, 아버지, 형을 잃었던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힘
즉 외세의 힘을 빌려, 한니발을 축출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실제로 로마 원로원에도, 불구대천의 원수 -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한니발 때문에 가족친지를 잃었던 이들도 수두룩했다
그런 한니발이 전후에 십자가에 매달리지도,
쇠사슬에 묶여 개선식에 끌려나오지도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의원이 한가득이었다.
로마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그가 존경하는 패장을 변호하고자 애썼지만,
그의 영향력은 약해지고 있었고
한니발이 안티오코스와 결탁했다고 "믿고 싶어하는"의원들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안티오코스와 결탁하여 로마를 침공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한니발을 체포, 처벌하라는 로마 원로원의 요구가 도착하자
카르타고 원로원의 반 한니발파 귀족들은 더없이 기뻐하며
즉시 한니발을 범법자이자 원로원의 적으로 선포했지만
눈치빠른 한니발은 이미 카르타고 시를 떠난 상태였다.
그러자 절호의 기회를 놓친 그의 정적들은,
대신에 그가 살던 카르타고 시내의 작은 집을 불사르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이제는 남쪽 시골의 농장에 묻혀,
한때 전설적이었다는 동네 애꾸 할아버지로 살아갈 길조차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한니발은
레바논 해안에 있는 모든 페니키아 민족의 어머니 도시,
티레로 가는 페니키아 무역선 한 척에 몸을 실어야 했다.
- "하이켈하임 로마사",
이종인 역 "리비우스 로마사",
필립 프리먼 저 "한니발 : 로마의 가장 위대한 적수" 에서
그리고 한니발 사후 30여년후
카르타고는 로마의 침공(3차 포에니 전쟁)으로 멸망하게 된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철저히 파괴하고 약탈했으며
카르타고 시민 모두를 노예로 끌고 갔고
아예 땅에는 소금을 뿌려 땅 자체를 죽여버려
다시는 카르타고가 일어설수 없게 짖밟아 버렸다
첫댓글 그래서 중동 가서 안티오코스한테
' 이건 질 수가 없는데요? ㅋㅋ '
....지들 기득권만 살면 나라가 타국의 속국이 되도 상관없는 새끼들은 이런 역사를 알려줘도 "와이 낫?" 이지랄 하겟죠...ㅂㅅ들
ㅠㅠ
ㅠㅠ
속국이 되면 국가 경영 책임은 종주국이 떠맡으니까 오히려 이익추구에만 전념할 수 있어서 그 쪽을 더 선호하기도 했다는 견해가 있더군요.-_-;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82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