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인은 고인돌 자손
대한민국은 고인돌 공화국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특이한 나라이다. 고인돌은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숫자도 세계 고인돌의 약 1/3에 해당하는 6만 여개가 넘어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세계 인류의 공동문화유산으로 지정해달라고 UN산하 UNESCO에 신청을 했고 UN에서도 그 타당성이 인정되어 드디어 선정이 되기에 이르렀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제단의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주로 장사를 지냈던 장소로서 서민의 것은 아니고 부족장 정도가 고인돌 밑에 매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와 외국의 고인돌에서는 가끔 사람의 뼈와 부장품이 나오는데 남부 프랑스의 카르카송(Carcasonne)의 고인돌에서는 무려 3백 개체의 사람의 뼈가 묻혀 있었다고 한다.
고인돌은 모양에 따라 크게 나누어 북방식, 남방식, 개석식 등 3종류로 분류된다. 탁자 모양의 북방식 고인돌은 4개의 판석을 곧추 세워서 장방형의 돌방(石室)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돌을 뚜껑으로 올려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따라서 유해가 매장되는 돌방은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 남방식은 바둑판식이라고 부르는데, 지하에 돌방을 만들고 뚜껑돌과 돌방 사이에 3∼4개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있는 형식이다. 끝으로 개석식 고인돌은 뚜껑돌과 돌방 사이에 받침돌이 없다. 돌방이 지하에 있기 때문에 학자에 따라서는 남방식 고인돌에 포함시키기도 하지만 양자는 분포와 형식상 차이가 많아 구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 상고사의 최대의 관심사인 민족의 기원 문제를 가장 확실하게 밝힐 수 있는 유력한 증거물인 고인돌, 그간 학계에서는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해 갑론을박을 거듭해왔지만 상식선에서 보면 오히려 혼란만 야기 시키는 결과만 가져왔다.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해 북방일변도의 시각만을 갖는다던가, 초기 중국측 사료만을 신주단지처럼 신봉하는 풍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중국 사람들이 기록한 우리나라의 내용은 자기들과 접촉하고 있었던 지금의 서만주 지역 사람들, 주로 예(濊)와 맥(貊)족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중국측 기록에 먼저 나타났을 뿐이었는데, 이것을 마치 우리민족의 시작이 북방이었다는 식으로 확대해석 해서는 안된다.
그런 논리라면 당시 만주지역에만 사람이 살았고 한반도는 무인지경이었단 말이가? 아니다. 한반도에도 구석기, 신석기 시대가 있었고, 한반도는 만주지역보다 기후가 온난하고 땅이 비옥했던 관계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바로 그들의 후손이 오늘날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면, 전남 영암지역에서 발굴된 청동기 문화가 오히려 북쪽보다 더 이른 시기의 것이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시 중국 사람들은 한반도 남쪽이 자기네들과 너무나 많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을 몰라 그들의 이른 시기의 기록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우리민족의 시작이 북방의 예와 맥족에 의해 비롯되었다는 등의 비약된 논리는 재고되어야만 한다.
오히려 그들이 살았던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고인돌, 반달형 돌칼 등의 출처가 북방이 아닌 남방이기 때문이다. 건전한 상식선에서 판단하면 우리 민족의 기원을 찾는 것은 그리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한마디로 잘라 말해 우리의 조상들은 바로 고인돌을 만들고 그 밑에 묻혀 있는 사람들이다. 고인돌은 한반도에서 청동기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부족장 묘, 부족장의 묘가 6만 개가 넘는다면 고인돌 안에 묻힐 수 없었던 일반 부족원들의 숫자까지 합치면 엄청난 숫자이고, 거기다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어서 우리민족을 대표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2. 고인돌 위에 그린 고누판
세계의 각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인돌들은 제각각 독립적으로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인종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어떤 연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같은 청동기 시대의 축조물이란 점, 용도가 장사용이란 점, 그리고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직 북반부의 남서쪽 선상에서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인종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어떤 연결고리가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러나 짐작만으로는 부족하다. 확실한 고증을 위해서는 가시적(可視的)으로 분명한 증거가 있는가 추적을 한 다음 신화시대의 미스테리 고인돌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 한다.
저자는 우리나라 이외에 세 곳의 고인돌을 답사했는데 그때마다 불가사의한 경험을 했다. 먼저 베트남 호치민 시 부근의 고인돌이다. 호치민시에서도 자동차로 한나절을 가서 현장에 도착했는데 뜻밖에도 저자의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앗! 저게 뭘까?'
고인돌 뚜껑 돌에 그려놓은 그림, 그것은 오직 한국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문양이었다. 그 문양의 정체는 바로 고누판, 세계에서 오직 한국사람만이 즐기는 독특한 모양의 고누판이었다. 이 고누판은 신라 말기에 창건된 절인 원주의 거돈사(居頓寺) 경내의 작은 바위 위에도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반통일시대 이전, 어쩌면 청동기 시대 그 당시에도 고누가 민중의 놀이로 자리잡고 있었을 개연성이 있다. 저자 가 고인돌에 새겨 있는 고누판 그림을 바라보며 망연 해 하고 있는데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왜 그처럼 놀라는 거죠?'
얼굴이 가무잡잡한 작은 체구의 베트남 안내인은 저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제는 저자가 오히려 안내인에게 질문을 할 차례,'당신은 저 그림이 뭣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몰라요'
'한국사람들이 즐겨 노는 고누판이란 거요'
'그래요?'
이제는 오히려 그 베트남 사람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저자에게 의혹스럽게 묻는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한국 사람의 것이 여기에 와 있는 걸까요? 그것도 아주 오래된 옛날 옛적의 고인돌 위에...'
'나도 그것을 몰라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요'
현지인들도 모르는 저 고누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베트남은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후대에 중국의 영향권에 속해버린 나라이니 그 이전의 역사를 알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화답이나 하듯 한국의 옛날 옛적의 주춧돌 위에도 베트남 것과 똑같은 모양의 고누판이 그려져 있는 것일까? 신화시대에 살았던 고인돌의 주인공들은 먼 훗날 자기네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한국과 베트남 두 지역에 그들의 지문을
남겨 놓았던 것일까?
3. 제주도 오누이 장사 전설
두 번째로 태국 우돈타니의 고인돌을 답사했을 때는 더욱 놀라운 일이 저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이름은 커녕 전설 한 가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태국의 고인돌은 이름도 있었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전설도 있었다. 장소는 태국 우돈타니 반푸, 금방 유령이라도 나올 듯한 유현한 분위기의 장소에 고인돌 두개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었는데, 한쪽은 아름다운 공주 우사의 무덤이고 맞은편의 것은 그녀의 남편이자 씩씩한 왕자였던 바로스가 묻힌 곳이라고 했다.
고인돌 아랫마을에서 산다는 굵은 테 안경의 태국노인은 행동거지가 비쩍 마른 체구만큼이나 차분해서 옛날 신화를 제법 분위기를 잡으며 설명을 했다.
'옛날 옛적에 이곳에는 조그만 왕국이 있었답니다.'
그 왕국에서 우사라는 어여쁜 공주가 살았다고 했다. 어느날 우사는 심심한 나머지 시녀들을 대동하고 메콩강가로 나가 꽃배를 만들어 띄웠는데, 이 꽃배는 이름을 바로스라고 하는 씩씩하고 잘 생긴 젊은 왕자가 살고 있는 메콩강 하류로 흘러갔다.
굵은 안경테의 태국 노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바로스 왕자는 메콩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마침 떠내려오는 꽃배를 보고는 무릎을 쳤다. '옳지, 이 강 상류 어딘가에 사람이 살고 있구나!'
바로스 왕자는 용감했으므로 몇날 며칠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간 끝에 우사 공주의 왕국을 찾아냈던 것이다. 옛날 이야기가 으레 그러하듯 이 공주와 왕자는 마치 서로를 기다렸다는 듯이 첫눈에 정이 나서 사랑에 빠져들고 ... 그러나 우사 공주의 아버지는 바로스 왕자가 낯선 사람이라고 해서 청혼을 거절했다. 열이 받친 왕자는 몇 번씩이나 간청했지만 왕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우사 공주의 아버지는 바로스 왕자와 내기를 해서 승패를 가리기로 했다. 그들의 내기는 성쌓기. 하룻저녁 안에 성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아침이 올 때까지 일을 끝마치지 못하면 죽임을 당하기로 한 사생결단의 대결이었다. 이때 저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경솔하게도 그만 말 참견을 해버렸다.
'등불 때문에 공주의 아버지가 죽는 것 아뇨?'
이제는 오히려 태국 노인이 놀라 둥그레진 눈으로 저자를 바라본다.
'그… 그걸 어떻게 아시죠?'
'바로 이것은 한국의 이야기요.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섬에는 '오누이 장사' 전설이라는 내용으로 이와같은 이야기가 지금도 남아 있단 말이오'
'그래요? 어떻게 그런 일이…'
태국 노인은 기가 막히는지 먼 허공을 응시했지만 그 노인인들 그 까닭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아무튼 태국 노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 날밤 바로스 왕자는 등불을 켜고 산에 올라가 왕이 성을 쌓고 있는 장소를 향해 비치고, 왕은 그 등불을 샛별로 착각해서 곧 아침이 올 것인데 성을 절반도 완성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그만 자살해버린다. 그 후 우사 공주와 바로스 왕자는 결혼을 하고, 이 왕국을 통치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단다.
제주도의 오누이 장사 전설 천하에 당할 자가 없는 오빠보다 누이동생의 힘이 더 세자, 어머니는 아들 자식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딸자식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어머니는 오누이에게 하룻밤 동안 성을 쌓는 시합을 시키고 (지는 쪽은 죽음을 당하기로 하고) 계획된 순서에 따라 결국 산에 올라가 등불을 비친다.
누이동생은 등불이 아침을 알리는 샛별로 착각하고 메콩강변의 왕처럼 자결한다는 줄거리이다. 아버지를 죽게한 우사 공주는 딸을 죽게 한 제주도의 비정의 어머니로, 경쟁에서 이긴 바로스 왕자는 누이를 죽이고 천하장사가 된 오빠로 역할이 달라졌을 뿐이다. 하룻밤에 성을 쌓는 내기, 등불로 상대방이 샛별로 착각하도록 만드는 술수 등이 어쩌면 그리도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았을까. 또 고인돌이 있는 반푸 유적지에서는 우리나라의 신석기 후대의 것과 유사한 채색토기(채색토기)가 대량 출토되고 있었다.
인도 아샘지역의 고인돌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고인돌(옆에 당간지주가 서 있다)
4. 고인돌의 주인공들은 벼농사를 지었다
다음은 인접해 있는 운남성 고인돌에서 나온 특이하게 생긴 반달형 돌칼. 이것도 우리나라 고인돌 출토품과 똑같은 것이다. 같은 종류의 부장품이 나온다는 것, 이것도 고인돌의 주인공들이 비록 지역은 다르지만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연관성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특히 당시는 교통이 발달되지 못했던 시기라 문화의 전파는 그 문화를 가진 인간의 이동에 의해서만 가능했으므로 사람과 문화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남쪽에 서 벼 종자를 가져다 농사를 짓고, 고인돌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들인 것이다. (한반도 충북 청원 소호리에서 출토된 볍씨는 1만5천년전의 것으로 밝혀진바 있는데, 이것을 근거로 하더라도 한반도에서 발생한 고인돌문화가 중국 운남성으로 까지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까페 삼 태 극 주)
인도의 아삼 지방이나 데칸 고원주변 고인돌에서도 저자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정부나 후원단체의 보조 없이 개인의 비용으로 조사 작업을 계속하는 데는 경제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인도 대륙보다 더 서쪽에 있는 소아시아와 유럽지역의 고인돌은 조사하지 못했다. 그렇다 해도 저자의 성과는 만만챦은 것이었다.
베트남, 중국 운남성, 태국, 인도의 아삼과 대칸고원 주변의 고인돌을 조사한 결과 비록 지역이 다르다 해도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말이다. 고인돌 위에 우리의 것과 똑같은 모양의 고누판이 그려져 있었고, 제주도 오누이 장사 전설이 있는가 하면 아삼지역 고인돌 부근에서는 우리의 것과 닮은 당간지주와 솟대가 발견되고, 인도 남부 고인돌 지역에서 살고 있는 드라비다 족은 이 지구상에서 우리의 것과 가장 유사한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기본어법만 11개가 같고, 기본 어휘는 세계 어느 언어보다 우리말과 가장 닮아서 1천 개 이상이 발견된다. 또 지중해 지역은 비록 우리나라와 지정학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기본 어휘 중에서도 기본 어휘인 '불'과 우리의 수사 '하나' '둘' '셋'이 그쪽의 것과 같과 일치했으며 노래의 기본 틀이 유사하고 인간의 정서도 크게 틀리지 않았다.
고인돌을 답사하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한국인만이 고인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외국인들도 고인돌을 자기네들 민족의 기원과 연관 시켜 끔직이도 소중스럽게 생각한다는 사실이었다. 다음은 저자가 인도의 아삼 지역을 방문 했을 때의 일화이다.
5. 인도인의 고향은 한반도
저자가 인도 메갈라야주 박물관장에게 고인돌을 찾으로 왔다고 말하니까 박물관장은 대뜸 정색을 했다.
'고인돌을 찾으러 인도까지 왔다구요? 왜요?'
'한국인의 조상들이 거쳐갔던 장소를 확인하고 싶었소'
'뭐…, 뭐라구요?'
나이가 60이 넘어 백발이 성성했으나 높은 학식에 인품이 중후하게 생긴 그 박물관장은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방금 한국인 조상들이 인도에서 왔다고 그랬소?'
그쯤에서 저자는 공연히 게면쩍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가 찾으러 왔다는 거죠'
인도 박물관장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우리 인도 사람들은…'
'??…'
'지금까지 조상이 한국에서 왔다고 생각해 왔는데요'
저자는 인도 박물관장의 말을 듣고 펄쩍 놀랐다. 혹시나 잘못들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저자는 다시 한 번 확인을 했다.
'방금 무슨 말씀을 했지요?'
'인도 사람의 고향은 한국'
그러니까 한국과 인도 두 나라에 고인돌이 있는데 청동기 시대에 축조된 한국의 고인돌이 철기시대의 것인 인도의 고인돌 보다 윗대의 것이니 박물관장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인도의 박물관장 말대로 청동기 시대 한반도에서 살았던 사람들 일부가 인도 대륙으로 이동해가서 고인돌을 만들고 그 안에 묻혔을까?
아무튼 해외에 나가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외국 사람이 한국을 자기네들의 먼 옛날 고향으로 생각해주는 것이 결코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
첫댓글 충북 소호리에서 발견된 세계최초의 볍씨===> 에서.. 소호리가 아니고. 소로리 입니다.. 제가 청주사람이라.. 오창 호수공원가면서 보는데(청주에도 호수공원이 있답니다~^^) 청원군 오창면 소로리 입니다..
일산에도 호수공원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