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제의와 결핍의 구조
― 김정식 「굿」의 프로이트적·라캉적 대비 읽기
김정식의 시 「굿」은 한국적 샤머니즘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단순한 민속 재현이나 주술적 세계관에 머물지 않는다. 이 작품은 현대 주체가 고통을 인식하고 처리하는 방식을 고대의 의례 형식 속에 배치함으로써, 무의식의 작동 구조를 드러내는 심층적 텍스트로 기능한다. 특히 이 시는 프로이트와 라캉이라는 두 정신분석 이론의 관점에서 읽힐 때, ‘치유 가능한 고통’과 ‘구조적으로 잔존하는 결핍’이라는 상반된 결론을 동시에 산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굿」은 치료 서사의 구조를 비교적 충실히 따른다. 시의 도입부를 장악하는 천둥과 비바람, 번개와 같은 자연의 폭력은 억압된 무의식이 감각적 형태로 돌출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폭발은 원인을 설명하지 않으며, 논리적 질서를 무너뜨린 채 사건으로만 도래한다는 점에서 신경증적 증상의 발생과 닮아 있다. 무의식은 언제나 말보다 먼저 몸과 세계를 흔든다. 이때 자연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내면의 상태가 외화된 장으로 기능한다.
‘갇힌 대나무의 빈 몸’은 프로이트가 정식화한 히스테리적 육체의 은유로 읽힌다. 이 육체는 능동적 주체라기보다 무의식이 메시지를 전송하기 위해 빌려 쓰는 매개체다. 속이 비어 있다는 형상은 결핍이라기보다 수용 가능성에 가깝다. 무당의 몸이 신의 언어를 전달하듯, 이 빈 몸은 말해지지 못한 기억과 감정을 진동으로 표출한다. 프로이트에게 육체적 증상은 억압된 기억의 대체물이자 번역물이며, 「굿」 속 육체 역시 그러한 번역의 현장으로 존재한다.
만신의 칼춤은 해석의 순간을 상징한다. 프로이트에게 해석은 부드러운 이해가 아니라, 환상을 지탱하던 방어기제를 절단하는 폭력적 행위다. 칼은 죽음의 도구가 아니라, 반복을 가능하게 했던 허구적 안정성을 끊어내는 수단이다. 특히 “원한의 시간은 잘리며”라는 구절에서 원한이 감정이 아닌 시간의 문제로 제시된 점은, 고통이 단일 사건이 아니라 반복 구조라는 프로이트의 관점을 분명히 반영한다. 굿은 감정을 위로하는 행위가 아니라, 시간의 귀환을 중단시키는 장치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꽃님’은 억압된 유년기의 상처받은 자아에 해당한다. 꽃님은 설명되지 않고 호출될 뿐이며, 이는 무의식적 기억의 특성을 따르고 있다. 꽃님이 업혀 떠난다는 것은 그 기억이 말소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현재의 증상에서 분리되어, 더 이상 삶을 지배하지 않게 되는 상태를 뜻한다. 이는 분석이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위치를 재조정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적 치료의 결말과 정확히 포개진다. 시의 후반부를 감싸는 연기와 소리는 승화의 양상이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지만, 시와 의례라는 미적·상징적 형식으로 전환된다.
반면 라캉의 시각에서 이 시는 전혀 다른 결론으로 나아간다. 라캉에게 고통은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는 구조적 결핍이다. 시 초반의 자연 이미지들은 억압의 붕괴라기보다는 상상계의 과잉으로 읽힌다. 감각과 이미지가 폭주할수록 주체는 오히려 희미해지며, 이는 상징적 질서가 아직 개입하지 못한 상태를 보여준다. 여기서 혼란은 치료 이전의 상태가 아니라, 주체가 본래 놓여 있는 조건 자체다.
‘빈 몸’ 역시 라캉에게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는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애초에 충만이 불가능한 결손의 자리다. 대나무의 공허는 신이 들어오기 위한 빈자리가 아니라, 누구도 완전히 들어올 수 없는 균열이다. 이 몸은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항상 결여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구조적 표식이다. 만신의 칼춤 역시 해석이라기보다는 기표의 개입으로 이해된다. 기표는 세계를 질서화하는 동시에 주체를 분열시키며, 이 분열은 회복되지 않는다.
라캉적 독해에서 ‘원한의 시간’은 잘릴 수 없다. 그것은 상징화되지 못한 실재의 잔여이며, 어떤 의례나 해석으로도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 굿은 원한을 해소하는 장치가 아니라, 실재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반복적으로 설정하는 행위에 가깝다. 이때 ‘꽃님’은 대상 a로 기능한다. 꽃님은 사라지지 않고, 업힌 채 이동할 뿐이다. 그것은 욕망의 원인이자 결핍의 핵으로 남아, 주체의 삶을 끝없이 작동시킨다.
시의 마지막에서 천공으로 날아가는 장면 역시 라캉에게는 초월이 아니다. 이는 실재를 잠시 스쳐본 환상적 순간이며, 곧 다시 상징계로 돌아오게 된다. 연기는 의미의 미끄러짐을 보여주며, 시는 의도적으로 닫히지 않는다. 결핍은 남고, 주체는 그 결핍을 중심으로 계속 말하고 욕망한다.
결국 「굿」은 프로이트의 치료 서사를 빌려 라캉의 구조이론을 드러내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이 시는 해원과 정화의 의례를 수행하는 듯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완결되지 않는 결핍과 지속되는 욕망의 구조가 남아 있다. 김정식의 「굿」은 샤머니즘이라는 고대의 형식을 통해, 현대 주체가 여전히 고통을 완전히 치유할 수 없으며 다만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조직할 뿐임을 조용히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