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wMe_aSSb1BI
“저는 미국 버지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8년 전에 돌아가셨고 아들도 최근에 자살을 했습니다. 30대였던 아들은 왼쪽 눈이 나빠진 상태였고 오른쪽 눈까지 나빠지는 중이었습니다. 의사에게 더 이상 치료할 방법이 없고 결국 시력을 잃게 될 거라는 말을 듣고 결국 자살을 했어요. 자살은 아들에게 정해진 운명이었을까요? 아들을 위해 49재는 지냈는데 이 아이를 위해 제가 어떤 기도를 더 해야 할까요? 그리고 불교에서는 자살을 죄로 여기나요?”
“불교에서는 첫째, 살인과 자살을 동일하게 봅니다. 남을 죽이든 자기를 죽이든 죽였다는 점에서 동일한 거예요. 그런데 남을 죽인 사람은 처벌을 하지만, 자기를 죽인 사람은 처벌할 대상이 없어졌기 때문에 처벌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남을 죽인 사람은 처벌을 하니까 나쁜 줄 알지만 자기를 죽인 사람은 처벌을 안 하니 나쁘지 않은 줄 압니다. 사실은 똑같습니다. 자기 목숨을 끊은 사람이나 남의 목숨을 끊은 사람이나 동일합니다.
두 번째, 살인과 자살은 ‘동의 여부’에 차이가 있습니다. 남의 목숨을 끊을 때는 상대가 동의하지 않았지만, 내 목숨을 끊을 때는 내가 동의해서 한 거잖아요. 내가 동의했기 때문에 그걸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사람은 자신의 육신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있습니다.
질문자는 워싱턴 D.C 가까이에 사니까 요즘 백악관 의사당 앞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알죠? ‘낙태권을 인정할 거냐, 안 할 거냐’라는 문제를 두고 대립하고 있잖아요. 원래 미국 사회는 낙태권을 인정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대법원에 보수적인 판사가 더 많아졌고, 그들이 낙태권을 없애겠다고 하자 여론이 찬반으로 나뉘어 팽팽하게 엇갈리고 있어요. 낙태권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아이를 가진 여성을 중심으로 문제를 봅니다. 자기 몸은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에요. 반면 낙태권 폐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아이를 중심으로 봐요. 태아를 죽이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으니 자기 아이라도 자기가 죽일 권리는 없다는 거예요. 이렇게 서로 다른 주장이 상충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엄마가 자기 아이를 때리고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었어요. 지금은 다 죄잖아요. 이제 부모라도 자기 아이를 때릴 권리는 없습니다. 태아와 산모의 권리 사이에서 산모의 자기 결정권을 우선시하는 나라는 낙태를 허용하고, 태아의 생명권을 우선시하는 나라는 낙태권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사이에서 중간으로 나온 제도가 낙태가 허용되는 기간을 두는 겁니다. 나라마다 16주, 20주, 24주 등 이런 기준은 조금씩 달라요. 이 기간 안에는 여성의 권리, 자기 결정권을 더 중심에 놓고 이 기간이 지나면 태아의 생명권을 더 중심에 놓는 겁니다. 이런 기준은 어떻게 정해졌을까요? 24주가 지난 태아는 인큐베이터에 넣고 키우면 살아날 수 있으므로 생명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생명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이 결정권을 존중해서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나이가 들어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남은 생을 고통스럽게 사느니 존엄하게 삶을 마치고 싶다고 하면 안락사가 허용됩니다. 호주에서는 허용을 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주에 백 살 넘은 분이 스위스에 가서 안락사를 했습니다. 생명의 자기 결정권을 어느 정도 허용할 거냐는 아직 사회적으로 논쟁 중이에요.
질문자의 자녀처럼 눈이 안 보이게 됐다는 현실에 실망해서 생명을 끊는 건 자살할 만한 권리에 안 들어갑니다. 눈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잖습니까? 화가 나서 남을 죽이거나 화가 나서 자기를 죽이거나, 실망해서 남을 죽이거나 실망해서 자기를 죽이거나 하는 것은 자기 결정권의 범위를 벗어나는 거예요. 그러니 자살은 죄라고 볼 수 있지만, 어쨌든 누구나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자살은 자녀 스스로 결정한 일입니다. 아들은 눈이 안 보이는 삶을 사느니 스스로 생을 마감하겠다고 결정한 거예요. 부모로서 너무 가슴 아프겠지만 아들의 선택을 수용해 주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엄마 마음에는 안 들지만 네가 내린 결정이라면 엄마는 늘 너를 믿고 지지한다.'
이렇게 관점을 가지면 어떻겠나 싶습니다.”
“49재가 끝나면 아들은 다른 곳으로 가나요? 제가 아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나요?”
“아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엄마는 너의 결정을 존중한다. 엄마는 너무 가슴 아프지만 너를 믿기 때문에 네가 내린 결정을 무조건 지지한다. 내생에는 그런 병 없이 잘 살아라.’
이렇게 아들을 보내 주는 게 지금 질문자가 할 일입니다. 계속 붙잡고 있을 게 아니라 떠나보내 줘야 해요.
“아들은 원래 그렇게 될 운명이었을까요?”
“죽은 사람이 천국에 갔을까, 다음 생에 태어날까? 이런 문제는 믿음의 영역이에요. 사실의 영역이 아닙니다. 즉문즉설은 사실을 다루는 담마, 법을 이야기하는 자리예요. 저는 사실이 아닌 믿음에 해당되는 문제는 ‘각자 알아서 믿으세요’라고 합니다. 즉문즉설은 그저 위로해 주고 쓰다듬어 주는 시간이 아닙니다. 즉문즉설은 '사실은 어떠한가?'라는 관점에서 대화를 하는 시간이에요.
아이를 정말 사랑한다면 아이의 결정을 존중해야 합니다. 가슴 아파하고 있을 게 아니라 오히려 ‘그래, 네가 내린 결정이니 엄마는 지지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비록 내 마음에 안 들지만 엄마로서 자녀를 정말 믿는다면 ‘그래도 엄마는 네 결정을 존중한다’ 이렇게 할 수만 있어도 괴로움은 끝납니다. 질문자가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끝이 안 나는 거예요. 기독교 신자라면 ‘천국에 가서 잘 살아라’ 하면 되고, 윤회를 믿는다면 '다음 생에는 건강하게 태어나서 잘 살아라' 이렇게 하면 돼요. 그러나 즉문즉설은 종교로서 불교를 얘기하는 자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에 대해 얘기하는 자리입니다.
'그래, 엄마는 가슴 아프지만 네가 내린 결정이고 너를 믿으니까 너의 결정을 존중한다'
이 관점만 바로 잡히면 더 이상 이 문제에 집착할 바가 없어집니다.
자녀를 잃은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스님이 ‘49재 지냈으니 아들은 극락에 잘 가셨습니다.’ 이렇게 한마디만 얘기해주면 될 것을 왜 그런 말을 안 해주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어요. 저에게 와서 종교적 대답을 요청하면 그렇게 해 줄 수도 있지만 즉문즉설은 위로하는 자리도 아니고, 종교적인 얘기를 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극락을 믿는 사람들은 49재를 지내고 극락에 갔다고 하면 그렇게 믿겠지만 기독교인이 이 얘기를 들으면 동의하기 어렵잖아요. 여기서 사실은 엄마 입장에서는 자녀의 죽음이 가슴 아프지만 자녀가 그 결정을 스스로 내렸다는 겁니다. 사실을 깨달으면 ‘어떤 결정을 내렸든 엄마는 너의 결정을 존중한다. 나는 너무 가슴이 아프지만 네가 내린 결정이니까 받아들일게’ 이렇게 해야 떠나보낼 수 있어요. 이렇게 진실을 깨닫게 되면 번뇌나 집착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영상으로 대화하는 게 쉬운 게 아니네요. 스님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조금 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영상이 아니라도 목소리나 글을 통해서라도요.”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화상회의에 들어오는 게 많이 힘들죠. 온라인 방식은 지역을 초월해서 만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연세 드신 분들이 소외되는 문제가 있어요. 화상회의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너무 어렵죠. 나중에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미국에 한 번 갈 테니 그때 만나서 얘기합시다.”
“꼭 연락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이제 아들 생각은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만약 죽은 아들이 어디선가 엄마를 볼 수 있다면 아직까지 아들 걱정만 하고 사는 엄마를 보고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아들도 엄마가 다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사는 걸 원할 거예요. 그 일은 지나갔습니다. 다 지나갔으니 이제 자기 삶에 좀 더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일은 지나갔다..
엄마가 얼마나 마음이 힘드실까..... 조금이라도 위로받으셨길.. ㅠㅠ
위로가 된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