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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대축일 2007/6/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요한 16,12-15)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성호를 긋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시작합니다. 기도하기 전이나 음식을 먹기 전에 바치는 성호경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도 삼위일체를 고백하며 살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분 하느님으로 계신다는 뜻입니다. 굳이 이러한 표현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의 기록 때문입니다. 곧 성경에 하느님, 예수님, 성령께서 따로 등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고자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아버지와 하나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성령 강림 뒤에 비로소 예수님과 아버지께서 한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성령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몰랐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도 성령께서 도와주신 결과입니다. 삼위일체는 아버지 하느님을 깨닫는 열쇠입니다. 무한 엿보는 믿음의 창(窓)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16, 12~15 성령께서 하시는 일 깊고 심오한 사랑의 신비
신앙의 가르침 아타나시오 성인은 삼위일체 신앙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성부도 천주시오, 성자도 천주시오, 성령도 천주이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오, 성령도 아니며, 서로 다른 위격이로되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과 인간을 인격자로 전제하면서 인간의 인격성을 지능, 의지, 정서로 분류하여 성삼의 현존을 보다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인간에게도 완전한 인격성을 갖추기 위해 지능, 의지, 정서가 필요하다면 하느님에게서야 더욱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나의 신적 실체를 이루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그토록 집요하게 연구하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연구의 마지막 결론에 가서는 “삼위일체의 신비는 너무나 깊은 신의 내적 생명의 표현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신비의 내용이다”하며 두 손을 들어 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삼위일체의 신비를 쉽게 설명하려 하여도 결국은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신비인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을 어찌 다 알겠으며,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이신 하느님을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 같은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책상이 자신을 만든 목수를 알 수 없듯이, 인간 역시 자신을 만드신 하느님을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인 것이지요.
그렇기에 신앙은 애초에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창세기의 오묘한 우주의 탄생부터 신약의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까지 어찌 인간의 두뇌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 없이는 신앙이 시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알려주신 계시이기에 믿을 따름입니다. 때문에 예수님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 15)
우주에 가득 찬 삼위일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를 꼽으라면 개신교 신학자이든 가톨릭 신학자이든 독일의 저 유명한 예수회 사제 「칼 라너 (Karl Rahner 1904~1984)」신부를 꼽습니다. 이 분의 펜 끝에서 흘러나와 출판된 책은 4000 여 종에 달합니다. 또한 이 분의 신학을 다룬다는 제목이 달린 단행본과 정기 간행물이 700 여 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분에 대한 연구가 또 하나의 신학 학문이 되고 있습니다.
칼 라너 신부는 평생을 하느님께서 누구이신가에 대하여 신학 서적을 쓰시고 강단에서도 하느님에 관하여 가르치신 분이셨습니다.
이 위대한 신학자는 80회 생신인 1984년 3월 5일 오스트리아 인스부룩에서 친구, 제자들과 더불어 조촐한 생신잔치를 치르고 이튿날 병원에 입원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 끝내 나오지 못하시고 1984년 3월 30일에서 31일로 넘어가는 한 밤중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신부님을 마지막 떠나보내는 인스브룩 예수회 성당의 장례미사 중에는 위대한 신학자가 살아생전 가장 깊이 묵상하며 사랑했던 성경 말씀이 봉독되었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 9~10; 12)
그 위대한 신학자 역시 이 같은 성경 말씀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지금은 우리가 하느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하느님을 만나 뵈옵는다면, 그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이 나 또한 하느님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느님 삼위일체의 신비를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주는 놀라운 삼위일체의 신비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이 존재하려면 육체, 정신, 영혼의 삼위일체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모든 생명체에는 생혼(식물), 각혼(동물), 영혼(인간)이 존재하듯이 나무나 식물이 존재하려면 뿌리, 줄기, 잎이 있어야 하고, 식물이 살아가기 위하여도 수분, 공기, 태양이 있어야 하며, 가정에도 부(아버지), 모(어머니), 자녀들이 있어야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주는 삼위일체의 신비로 넘쳐 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가 조화를 이루며 엮어져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모든 우주의 첫 시작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와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이며 조화로움입니다.
배광하 신부 <춘천교구 게쎄마니 피정의 집 원장>
‘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큰 힘입니다. 자기 자신을 잘 몰라서 제대로 알릴 수 없기도 하고, 알고 느끼는 바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서 안타까울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완전히 이해받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세상을 떠나실 날을 앞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실 말씀이 많으셨나 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16,12) 3년간 함께 살면서 보여주시고 때로는 따로 한적한 곳에서 가르쳐 주시기도 한 모든 것도 아직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가올 수난과 그 이후의 말씀들은 더욱 알아듣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과 몰라서 행하지 않는 것과는 마음가짐부터 다릅니다. 할 말을 다 하시지 않고 감당할 만큼만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어린 제자들을 염려하는 사랑을 느낍니다. 설사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어둠의 세력이 너무도 강해서 그것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어리기에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가르쳐 주시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뿌리내어 실천되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는 주님은 때를 기다리십니다. 어쩌면 인간인 우리가 예수께서 하신 모든 것을 알아듣고 기록하기에는 시간과 공간, 지적·영적 능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요한 21,25) 내 삶을 돌아봐도 그렇습니다. 나의 하루하루는 많은 일과 사건과 생각들로 엮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내가 보고 느낀 매일의 삶의 사연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기억나는 것들은 빙산의 한 조각도 되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기억나지 않는 내용은 ‘안 배웠어요!’라고 말하듯, 기억나지 않는 않는다고 해서 없었던 것은 아닐진대 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시간은 그들 삶의 역사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장 강렬한 부분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그 존재의 귀중함을 모르다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그 사랑을 깨닫듯,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14,9) 하신 말씀을 상기하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뒤에야 ‘그때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라고 한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때는 몰랐던 것들의 영적 의미를 글로 쓴다면 저도 요한 복음사가처럼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할 것’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 의미가 이 세상으로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큰 것 하나만 얻으면 다른 부수적인 것은 따라오기도 합니다. 곧 큰 것 하나만 깨달으면 다른 의미는 그에 준하여 알아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참선 수행을 하는 분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일단 크게 하나를 깨닫고 나면(대오각성) 다른 것들은 쉽게 깨달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제자들 또 우리가 대오각성해야 할 그 하나는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 하나를 깨달을 때 어린 제자들은 성숙해지고 스승님의 말씀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을 가르치고 깨우치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16,23)이며,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14,26) 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16,13)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진리’이십니다(14,6). 진리의 영과 진리는 하나이며, 그 진리는 당신을 보내신 분,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7,16) 나아가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16,15)고 하십니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서로 관통하는 듯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아버지와 늘 함께 있어도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큰아들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 하신 말씀은 실제로 손에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오늘도 새롭게 깨달아야 할 나의 과제입니다. 지금 내 손에 움켜진 것을 놓고 버려야만 받을 수 있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우주를 소유할 수 있음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라고 서슴없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거침없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14,9-10)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17,22; 10,30)라고 하십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머리글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1,1-2)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 ‘예수’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예수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고’(요한 14,18)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함께 계십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감당하면서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내 몫은 남아 있습니다. 곧 아직도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말씀이 참 많습니다. 이해하지 못하여 그렇고, 알지만 행하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나’라는 질그릇 속에 담아주신 성령의 보물(2코린 4,7 참조)을 통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하느님께서 ‘아버지’이심을 더 깊이 알아가야만 합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임마, 그냥 믿어!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예화들이 있습니다. “초는 우리 눈에 보이는 몸체가 있고, 불을 켜면 빛을 내고, 가까이 손을 대면 열도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어느 한가지만을 구별해서 초라고 말할 수 없는 복합체입니다. 태양은 불꽃과 빛, 그리고 열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 셋은 서로 각자 존재하고 고유한 역할을 하지만 하나의 태양을 이루고 있다. 세 변의 꼭지점이 하나의 삼각형을 이루듯 삼위일체이신 하느님도 성부·성자·성령께서 서로 고유하게 계시면서, 완전한 일치를 통해 한 하느님으로 존재하십니다. 사과는 하나인데 껍질, 과육, 씨앗이 분명히 다르고 각기 그 역할도 다르지만 분명히 사과입니다.” 어느 분이 이런 예화를 듣고 “삼위일체였길레 다행이지, 사위일체였다면 뭘로 설명할 수 있을까”하고 말했답니다.
어느 주일학교 교리시간 이었습니다. 그날 수업은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였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열심히 설명하시는 베테랑 선생님께 한 학생이 용감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성부는 창조주이시고, 성자는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성령은 우리를 이끄시는 영’이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왜 하나라고 하시는 거예요?” 선생님은 학생의 질문에 전혀 당황하는 기색없이 대답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개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는 거야. 그래서 셋이 아니라 하나란다.”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학생의 머리는 더욱 더 복잡해졌습니다. 셋이 하나가 된다는 선생님의 교리를 학생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과 한참 동안 목소리를 높여가며 다투었습니다. 결국 그날의 수업은 선생님의 이 말씀 한 방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임마, 그냥 믿어!”(오늘 미사의 감사송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이 말이 정답일겁니다) 삼위일체는 알려진 신비이지, 감추어진 비밀이 아닙니다. 우리의 한계 때문에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이 신앙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한 분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사랑하셨기에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또 그 아들이 떠나간 뒤에는 당신 자녀들과 함께 하신다는 표징으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그냥 단순하게 믿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으로, 때로는 이해할 수도, 알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고 함께 해주십니다.(광주교구 조정훈 신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어느 사업가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당신께 천년이라는 시간은 대략 어느 정도의 시간입니까?" "한 1분 정도." "그렇다면 100억원의 돈은 어느 정도의 돈인가요?"" "1원 정도나 될까?" 하느님의 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업가는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그렇다면 제발 저에게 1원만 내려 주십시오." 그러자 하느님께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셨습니다. "좋다. 1분만 기다리거라."
"여러분, 여러분들이 나를 부를 때 뭐라고 부르나요?" "신부님이요." "이 요셉 신부님이요." 그런데 그 중 한 아이가 소리를 지릅니다. "이기양이요."
제가 원하는 답이 단번에 다 나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이 저를 부를 때는 "신부님"하고 부르지만 여러 신부님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요셉 신부님"하고 부르고, 동사무소나 사회에서는 "이기양씨"하고 부릅니다. 이렇게 다르게 불린다고 제가 세 사람입니까? 아니지요. 드러나는 곳에 따라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뿐입니다. 저는 한 사람이지만 호칭은 이렇게 다양합니다. 한 분이시면서 삼위를 지니신 하느님이라는 말도 이렇게 이해해보면 쉬울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성부이신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를 찾아가 전합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
이 말을 들은 마리아가 깜짝 놀라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하고 반문하자 천사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고 대답합니다. 인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탄생 과정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결실을 이루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도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은 그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
그렇습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모든 성사도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시며, 또 세 위가 사랑으로 일치되어 계시듯 하느님을 믿는 우리 또한 사랑으로 일치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의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 관계는 사랑보다는 재물이나 능력, 외모에 치우치는 경향이 농후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물질이나 외형에 집착하게 되면 진실과 신의로 다져진 인격적 관계는 무너지고 불신과 이기심으로 얼룩진 고독의 시대를 맞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면서 과연 나는 이웃과의 관계를 진실한 사랑으로 맺어가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하겠습니다.
- 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오금동 및 오륜동본당 주임)
신앙 생활의 원동력 - 하느님 사랑의 신비
한 달 피정 중 성모님에 대한 특별한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성모님의 아름다운 자태와 따뜻한 손길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느끼는 것처럼 생생하게 경험한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그 체험을 지도신부님과 나누던 중 강론시간에 이야기해볼 수 있느냐는 부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강론중에는 너무도 힘겹게 이야기 했고, 온전히 그 느낌을 전달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書不盡言(서부진언), 言不盡意(언부진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글이란 하고 싶은 말을 다 나타내지 못하고, 말이란 원래의 생각을 모두 나타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성모님에 대한 특별한 체험을 온전히 말로써 표현을 할 수 없었듯이 하느님의 신비 역시 인간의 언어와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사랑)이 인간의 역사 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되지만, 그것이 왜곡되고 잘못 받아들여지는 현상을 접할 때, 그 한계는 분명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 신비 안에 내포된 기우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날이지만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고, 믿음으로서만 받아들이게 됩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몸을 이룬다.”라는 뜻입니다. 솔직히 이 말뜻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이신 하느님인데, 또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있다는 것. 그런데 그 세분이 또 한 분이라는 것.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신비더라도, 그 안에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서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시는가를 드러내는 신비,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의 자녀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몇 가지 것들”이라는 칼럼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그대로 표현된 글이었습니다. 그 글에서는 물질적인 상속도 중요하지만, 자녀들의 인생을 밝혀 줄 정신적인 자산을 일찍부터 상속해 주는 것이 부모로서의 도리라고 쓰여 있습니다. 정신적인 자산이 몇 가지로 열거 되어 있지만, 미루어 생각하면 부모의 사랑을 깨닫고 이어받아 자신을 사랑하고 모든 이들을 사랑으로 대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물질 만능주의 사회에 동화됨 없이 완전한 인간됨의 근본인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의 모습을 지녀야 할 것을 당부해 주는 것이 부모로서의 도리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계시(사랑)가 계속해서 제자들 안에 남게 됨을 협조자 성령에 관한 언급으로 나타내십니다. 협조자 성령은 아버지의 계시(사랑)를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이어나갈 수 있도록 깨우침을 주십니다. 지금도 그 깨우침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신비에 내포된 사랑의 신비를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삶으로 증거 되어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지하철 선행녀, 빵집 선행녀, 목도리 선행녀를 기억하실겁니다. 그들이 왜 그토록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까요? 그것은 포장됨 없는 진실된 사랑이 그 행동에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그들이 해 주었기에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라는 후회스러운 마음이 관심으로 드러났음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움직임 없는 상태, 생명력이 없는 사랑이 아닌 행동하고 전달되는 상태일 때 온전히 그 사랑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습을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계신 것과 같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무런 조건 없는 헌신과 애덕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이웃과 나누는 모습을 찾아갈 때, 온전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재탄생 될 수 있습니다. 매순간 사랑의 증거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김주현 베드로 신부 | 연평도 성당 주임
<축복>
오늘 오전 10시 저희 집에서는 참으로 경사스런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8명의 아이들이 하느님 자녀로 새로이 태어났습니다. 더욱 가슴 흐뭇한 일은 그중 몇 명의 아이들은 저희와 함께 한 평생 같이 살고 싶어(수도자가 되어)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준비를 위한 1박 2일 피정을 마치고 온 아이들이 제게 와서 자랑스럽게 사도신경이나 십계명등 주요기도문들을 보란 듯이 줄줄이 외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기가 막힌" 사연들을 가슴 깊이 간직한 아이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또는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오게 되었지만, 이제 나름대로 상처를 추스르고 다시 서려는 아이들이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세례 미사에 오셨다가 얼떨결에 대부를 서게 된 한 형제님은 아이와 맺게 된 우연한 인연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으로 생각한다며 기뻐하셨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이 밤낮으로 고민하는 한 가지 문제는 어떡하면 저희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착한 시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나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제 나름대로 생각할 때 아이에게는 아이를 사랑하는 세 사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세 사람과의 긴밀한 관계가 아이를 성장시키고 하느님께로 인도한다고 봅니다. 그 세 사람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삼위 관계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은 똑 같이 아이를 사랑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사람이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바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관대한 사랑입니다. 많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때로 엄격한 듯 하지만 그 엄격함 역시 자녀가 굳건하고 의지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는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난 엄격함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성부의 역할이 바로 이런 역할입니다. 자녀들의 인격형성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따뜻하고 포근하며 부드러운 사랑, 작은 것도 소홀히 넘기지 않는 섬세한 배려를 하시는 분이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삶에 지쳐 흔들릴 때마다 찾아가 안기고 싶은 사람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성령의 사랑이 이러하십니다. 마치 미풍과도 같은 감미로운 사랑을 베푸시며, 우리 각자의 어려운 처지를 일일이 다 헤아리시는 분, 우리의 고통을 극진한 사랑으로 어루만져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아이들의 영육간에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 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가 있는데, 바로 친구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도 돌아서면 또 다시 만나서 어울리고 싶은 친구, 아무에게도 말 못할 이야기들도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는 일생을 살아가는 데 보물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런 친구 같은 존재가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 똑같은 키, 똑같은 조건이 되신 분, 우리의 친구가 되신 분이 바로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슬픔을 자기 등에 짊어지고 가시는 친구 중에 친구가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이렇게 성삼위께서는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친구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를 똑같이 사랑하시지만 그 방법이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세분은 서로 온전히 같은 마음-우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우리를 구원하려는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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