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500만 원 대가리(채무)를 잡혀 후배 건달에게 쪽을 타는 꿈을 꾸고 일어났어요. 차렷 자세로 고름을 받는데 아무리 꿈이라지만 염병, 쪽팔려서 죽을 지경입니다. 17살에 이 바닥에 들어서서 45년 동안 단 한 번도 쪽을 타본 적이 없는데, 63세 정초에 이런 꿈을 꾼 것을 어찌 해몽해야 할까요? 프로이트의 이론 대로라면 곪았던 사건이 무의식 가운데 내재해 있다가 지금 나타난 것입니다. 염병, 죽더라도 덤비고 죽어야지 가오 상하게 후배에게 존대를 하다니 나도 뒤질 때가 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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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이후 6.25-중동전쟁-월남 전쟁-이란/이라크-러/우 전쟁 등 크고 작은 각종 내전까지 <자아와 타자>의 충돌을 직간접적으로 지겹게 보았습니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전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Why? "여자의 후손 VS 뱀"의 대립 때문일까요? 깡패 트럼프가 베네수엘라에 공습을 했다는 속보를 듣고서, 깜짝 놀라 들여다보니 9개월 동안 준비한 <빈 라덴 체포 작전>을 재현했더라고요. 결국 점령군 행세가 맞습니다. 미군이 현재 조국의 우방이지만 8.15 때도 6.25 때도 점령군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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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만 본다면 이재명 정부의 <중국 외교>를 지지합니다. 마두로 없는 베네수엘라를 로드리게스 부통령이 권한 대행을 하고 있는 가운데 로드리게스 부통령은 내각 회의에서 "우리의 유일한 대통령은 마두로"라고 말했고 그는 이어 트럼프 대통령의 '베네수엘라 운영' 발언에 대해서도 "베네수엘라는 그 어떤 나라의 식민지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했고 이후 80세 트럼프는 "그는 아마도 마두로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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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문맥을 보면 비상 내각 회의를 주재한 이후 상황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로드리게스는 베네수엘라가 미국의 개입 대상이 될 마지막 국가가 아닐 수 있다는 뜻도 시사했다는군요. 트럼프가 "그린란드는 러시아와 중국 선박들에 둘러싸여 있다"며 "그린란드는 방어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라고 했다니 다음은 타깃은 그린란드일까요? 이번 마두로 무력 체포 작전으로 경호원과 민간인 등 최소 80명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정은아 보고 있니!
2.
본문:창 3:14-24
하나님의 심판 선언(14-19)
a. 뱀;14-15
(a) 영원한 패배:14
(b) 첫 약속:15
b. 여자:16
c. 남자:17-19
(a) 형벌의 원인과 결과:17
(b) 형벌의 내용:18
(c) 죽음, 노고로부터의 해방:19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지어줌(20)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 1(21)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 2(22-24)
a. 인간의 상태:22
b.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하심: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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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벌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붕괴 선언’이다.
2. 에덴 추방은 파기가 아니라 보존을 위함이다.
3. “네가 어디 있느냐”는 심문이 아니라 해석이다.
4. 구속사는 ‘형벌의 한가운데’에서 시작된다.
5. 가죽 옷(구속사의 물질적 시작)
6. 생명나무 차단(구원의 지연이자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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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세, 한 번도 쪽을 타본 적 없는 내가, 꿈에서 후배에게 고개를 숙였는가? 물론 프로이트식 해석은 가능합니다. 억눌린 기억, 곪은 사건, 무의식의 귀환. 그러나 성경적·신학적 질문은 조금 다릅니다. 이 꿈은 죄책의 귀환이 아니라, ‘힘의 질서가 뒤집힌 세계’에 이미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는 아닐까? 창세기 3장 이후의 세계는 더 이상 “가오를 지키면 지켜지는 세계”가 아닙니다. 아무리 델타포스라도 말입니다. 아담 이후의 인간은 항상 빚진 존재, 항상 땅에 매인 존재, 항상 고개를 들 수 없는 조건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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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의 ‘4500만 원 채무’는 도덕적 실패라기보다 존재론적 부채에 가깝습니다. 아담에게도, 가인에게도, 노아에게도 갚을 수 없는 빚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힘으로 다시 에덴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존재는 제거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없애지 않고, 무너진 방식 그대로 살아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잔인함일까, 아니면 구속의 전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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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추방은 실패의 판결인가, 아니면 보호 조치인가? 하나님은 인간을 장소에서 몰아내셨지 관계에서 끊지 않으셨습니다. 에덴은 닫혔지만, 역사는 열렸습니다. 이 점에서 에덴 추방은 계약 파기가 아니라 보존을 위한 단절입니다. 죄인이 생명나무를 먹고 영생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타락의 영구화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위치 질문이 아니라 존재 해석의 질문입니다. 지금 네가 서 있는 자리는 힘의 자리인가, 책임의 자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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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숨은 것은 나 때문인가, 아니면 네가 감당할 수 없는 너 자신 때문인가? 꿈에서 후배에게 존대하는 장면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무의식의 질문일 수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대립은 즉각적 승리의 약속이 아닙니다. 이 약속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구원은 단번에 회복되지 않고, 시간 속 투쟁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역사에는 6.25-중동 전쟁-베네수엘라 등등 점령과 해방이 반복됩니다. 결국 창 3:15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증거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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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은 처음부터 관념이 아니라 몸의 역사입니다. 인간은 숨기고, 하나님은 덮으십니다. 이 순서가 뒤집히지 않는 것이 복음의 최소 조건이 아닐까. 내 꿈은 내가 끝났다’는 신호인가,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부르심인가? 인간은 더 이상 에덴의 방식으로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폐기된 존재도 아닙니다. 어쩌면 쪽을 타는 꿈은 자존의 붕괴가 아니라, 내 힘으로 버티던 방식의 종료일 수 있습니다. 구속은 가오를 세운 자에게 오지 않고, 더 이상 가오로는 살 수 없음을 아는 자에게서 시작됩니다. “아담아! 지금, 너는 어디에 있느냐?”
2026.1.6.tue. 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