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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7일 연중 제21주일
제1독서 : 이사 22,19-23
제2독서 : 로마 11,33-36
복 음 : 마태 16,13-20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교회의 반석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이 누구이냐고 물으십니다.
먼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이나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이 사람이 틀림없이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엘리야는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서,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그 길을 닦고 준비할 인물로서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있었습니다.(말라기 4:5)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를 준비할 인물로 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또한 엘리야와 더불어 메시아를 준비하기 위해 하느님이 다시 보내주실 예언자로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만 예언자 중의 한분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인물로 보았지만 바로 당신이 메시아,
즉 하느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그러면, “그대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언제나 제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베드로가 나서서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바로 핵심을 꿰뚫는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지금은 그냥 하나의 호칭이 되었지만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서 비롯된 가장 간단한 신앙 고백문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고백을 줄여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 고백을 베드로가 가장 먼저 한 것입니다.
이 고백을 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심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당신이 누구신지 이제 제자들이 알아본 것입니다.
제자들이 처음부터 이분이 바로 메시아라고 알아보고 따라온 것이 아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함께 생활했던 지난 3년을 회고하시며
아마도 깊은 안도의 숨을 쉬셨을 것입니다.
이제 당신이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의 이 세상에서의 시작이 될
교회의 터를 잡으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이제 안심하고 당신이 마셔야 할 잔을 마실,
다시 말해,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상에 죽으시러 가실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것을 제자들이 알고 있다면,
이제 당신이 죽으심으로서 모든 것이 끝장이 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을,
이제 당신을 믿고 따르는 교회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셨고
그래서 마음을 놓으시며 안도의 숨을 쉬셨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너는 베드로(바위라는 뜻)이다. 내가 너를 기초로 해서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교회의 주춧돌은 바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교회란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아, 즉 구세주의 희랍어)이시라는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같은 물음을 던지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우리도 마음 깊은 곳에서 고백을 드립시다.
“당신,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시며 나의 전부입니다.”
이 고백을 담은 졸시 하나 나눕니다.
베드로의 노래 III
그리스 신들의 전설이 소리 없이 들려오고
흰 대리석 카이사르의 동상이 서 있는
이방인의 도시 필립보의 카이사리아 언덕
이스라엘 역사의 물줄기가 흐르는 요르단 강 상류
나는 헤아려보네
그분이 이곳에 우리를 데려오신 뜻을
신들과 제왕들의 영화는 돌 조각으로 뒹굴고
풀잎이 황금색으로 눕는 곳
거기 예수께서 서서 우리들을 내려다보시며 물으셨다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대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누가 온전히 그분을 알아보았는가?
그분이 누구시며 무엇 하러 오셨는지를.
그러나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눈먼 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 듣고
벙어리, 말하는 것을.
물위를 걸으시고 파도를 잠재우시는 그분의 고요함을.
알 수 없는 힘에 휩싸여 나는 고백했네
당신은 생명의 근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는 기실 알지 못하였네 그분의 마음을.
“그대들은 나를 알고 있는가?
그대들에게 나의 일을 맡겨두고 떠날 수 있는가?”
그분이 그런 비장한 마음을 지니셨다는 것을
그 물음이 당신 죽음의 준비였다는 것을
나는 진정 알지 못하였다네.
바람이 불어오는 언덕에 서서
나는 보았다네 그분 얼굴을 스치는 빛을.
그분이 나의 이름을 바위라 불렀을 때
그분의 서늘한 눈을 바라보며 나는 알았네.
그분 사랑의 마음 풀잎을 바위로 바꾸시는 힘은 사랑인 것을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심리학자 밀턴 에릭슨은 훌륭한 정신치료법을 고안해내 많은 사람들의 추종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훌륭한 심리학자가 된 데에는 어렸을 때의 중요한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12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는데, 병을 앓기 시작하고 열 달 뒤에 의사가 그의 부모에게 하는 이런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드님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에 크게 슬퍼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일단 오늘 밤을 잘 넘기자. 그러면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안심하시겠지.’
그래서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잠을 자지 않으면서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에릭슨은 어머니에게 외쳤습니다.
“보세요. 저 아직 살아 있어요.”
너무나 기뻐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에릭슨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매일매일 병을 견뎌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뒤 장성한 에릭슨은 어렸을 때의 체험을 기억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극한 능력에 관한 의미 있는 저서를 많이 집필했고,
1990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에릭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의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바로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의 만족만을 추구합니다.
다른 이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 그러한 마음이 어쩌면 쉽게 포기하고
절망으로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매일매일 죄를 견뎌내기로 마음먹고 실천하다면 어떨까요?
분명히 죄의 유혹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어떠한 어려움도 별 것 아닌 것처럼 지나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의 한 분 등의 사람들의 말을 전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답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당신이 어떠한 분인지를 말씀과 행적으로
계속해서 보여주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주님을 흡족하게 하는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의 삶 한 가운데에서 계속해서 흐르는 주님의 사랑을 분명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가 있을까요?
단순히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로만은
기쁘게 해드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나의 이웃들에게 실천을 하고,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나 절망 없이 기쁘게 살아갈 때
진정으로 주님께 큰 만족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정답을 이야기한 뒤에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만큼 그는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고,
그분의 뜻에 맞게 살아갔기 때문에 큰 선물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나만의 만족이 아닌 주님께 큰 만족을 드릴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주님께로부터 영혼의 구원이라는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리스도를 알아가게 되는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우리와 함께 살기위해
이곳에 오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지혜를 주시듯
우리에게도
순간순간 지혜를 주시며
하느님을 향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생명은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우리 존재를
다시금 일깨워주십니다.
성스럽고 속된 것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매여 있는 노예가 아니라
누려야 할 당신의 자녀임을
보여주십니다.
자꾸만 흔들리는 우리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반석을 주셨습니다.
신앙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삶의 해답이
그리스도께 있음을 믿습니다.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주시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나의 그리스도
우리의 그리스도 이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신 담임 부제님들과 나가사키 성지순례 때 일입니다.
다른 모든 분들은 일본 입국 수속을 잘 마쳤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입국심사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권에 있는 이름이 수배자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사진, 여권, 비행기 티켓, 지문을 모두 확인했지만
한국에서 수배가자 아니라는 보증을 해야만 입국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신원을 확인해 주어서 무사히 입국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모두 걱정하면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물론 당사자는 가장 긴장했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저는 교구청에 있기 때문에 교구청의 여러 곳을 출입할 수 있는 열쇠가 있습니다.
요즘은 비밀번호와 카드가 있어 굳이 열쇠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원하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신청사에는 성직자 신분증이 있어야 출입할 수 있습니다.
사무실, 숙소, 예비 신학생들이 머무는 기숙사는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저를 나타내는 비밀번호와 아이디가 필요합니다.
비밀번호와 카드가 없으면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열쇠는 조직을 위해서도, 보안을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얼마 전 저는 남미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면서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성직자들이 섬기는 삶을 살지 않았고,
희생하는 삶을 살지 않았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병원에 있는 성직자만 교회에 있고, 다른 성직자들은 국외로 추방당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고, 지금은 다시금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사목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치 공소의 열쇠는 공소회장님이 가지고 있듯이,
아직까지는 본당의 열쇠를 성직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고, 신자들이 관리한다고 합니다.
저는 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열쇠는 책임이 있는 사람, 성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
부정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를 사목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목은 무엇일까요?
사목이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섬기러 오셨던 예수님처럼 신자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목이란 ‘서비스’입니다. 교회에는 일곱 가지 성사가 있습니다.
사제는 성사를 성실하게 집행하면서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고백성사, 성체성사, 병자성사는 신자들의 고민과 아픔을 치유해 주고, 영적인 양식을 드리는 성사입니다.
그 준비에 충실하고 그 집행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특히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들과 함께하였듯이
사목이란 모든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 고난을 겪기도 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기도 해야 하고, 박해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사목이란 장난이 아닙니다.
사목이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신앙 안에 있었지만 쉬고 있는 교우들에게 다시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큰 감동과 기쁨이 적은 신자들에게 왜 복음을 믿어야 하는지,
왜 복음을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제가 먼저 복음을 살아야 하고, 복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목이란?
본당의 재정, 조직, 건물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재정은 투명하게 하고, 그 예산은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많은 본당에서 예산이 적어서 문제가 되기보다는
많은 예산을 독단적으로 사용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당에는 많은 단체와 조직이 있습니다.
조직과 단체가 발전하고 촉진되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봉사할 사람들을 선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듯이,
사제들은 봉사자들과 함께 본당을 운영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영광과 승리와 명예를 보았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허물을 없애주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할 메시아로 보았는지 모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로부터 선별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권한과 능력도 있지만 그에 따른 책임과 희생도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골고타 없는 하느님 나라도 없었습니다.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은 또한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많은 성인들은 바로 십자가 열쇠로 하느님께로 갈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지운다면 고마워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천국으로 가는 열쇠를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 열쇠를 이웃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 마음에 몇 개의 십자가 열쇠가 있는지요?
아니면 타락과 욕심의 열쇠만 가득한 것은 아닌지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연중 21 주일입니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장마의 극성스런 비도 지나갔습니다.
가을의 길목입니다. 결실이 영글어 갈 때입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무엇이 영글어가고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살아계시며, 생명을 살리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로마 11,36)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행동하는가?
그분을 통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가?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는가?
만약, 오늘 나의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지 못하고
그분을 통하여 행해지지 않고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지 않고 있다면,
대체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통하여,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를 바라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생각하느냐?”(마태 16,13)라는 질문으로 시작 됩니다.
‘카이사리아 필리티’는 분봉왕 헤로데 필리피가 로마 황제를 기념하여 건설한 곳으로 로마화 된 계획도시였습니다.
그래서 황제숭배가 팽배했고, 시민들을 ‘황제는 신입니다’라고 서로 인사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만약 구세주로 고백한다면 황제를 거부하는 것으로 로마에 반기를 드는 것에 해당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장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질문은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의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라는 고백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임과 동시에, 황제를 거스르는 대답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분명하게 드러내줍니다.
곧 성부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요,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것은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느님과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비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 신비는 베드로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밝혀주신 계시였습니다.
곧 베드로는 성부께 지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다”(마태 16,17)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밝혀주신 이 계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곧 교회는 바로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며, 베드로에게 권한을 부여하십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놀라운 신비, 곧 교회의 신비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 계시의 신앙 위에 세워질 뿐만 아니라,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가 주어지고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이 부여됩니다.
이는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교회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됩니다.
곧 교회 안에는 사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하늘이 땅에서 열린 것입니다. 곧 우리는 하늘을 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매인 것을 푸는 일은 하늘에 가서 하는 일이 아니라, 땅에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땅에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때 하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이 이미 땅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사랑의 행위 안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열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형제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 바로 지금 용서해야 할입니다.
오늘, 용서의 축제일이 되기 바랍니다. 아멘.
그리스도의 눈을 받은 이들
전삼용 요셉 신부
아주 먼 옛날, 앞을 못 보는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눈으로 세상을 볼 수만 있다면...’
이것이 그 소경의 소원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 소경의 집에 부엉이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소경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난 아저씨의 소문을 듣고 아저씨를 도우려고 찾아왔어요.
나는 밤에만 활동하니까 낮에는 눈이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낮 동안에는 내 눈을 빌려 드릴게요. 그러나 밤에는 꼭 돌려주셔야 돼요.”
다음날 아침 소경이 깨어보니 세상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눈을 빌려준 부엉이에게 한없이 고마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부엉이와 생활을 하며 낮에는 소경이, 밤에는 부엉이가 눈을 달고 먹이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며칠이 지나자 소경의 마음에 은근히 욕심이 생겼습니다.
‘부엉이와 눈을 함께 쓰는 바보가 어디 있담.’
그리고는 소경은 부엉이가 잠든 낮에 먼 곳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밤하늘의 별을 보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눈이 희미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소경은 다시 더듬거리며 부엉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나를 버리고 가셨어요. 난 밤에 먹이를 찾지 못해서 굶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 눈도 기운을 잃은 거예요.”
이 말을 마치고 부엉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소경은 한없이 후회하며 엉엉 울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눈뜬장님’이란 말이 있습니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있거나 지나치게 어떤 것에 집착하게 될 때
본질을 왜곡시켜 보거나 아예 보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너무 정신이 없으면 아기를 업고도 하루 종일 찾아 헤맨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다 눈뜬장님이었습니다.
행복이란 것이 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는 것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모든 것들이 오히려 우리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것들이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참 행복의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눈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태어날 때부터 눈을 가지지 못했던 소경에게
진흙으로 눈을 만들어 넣어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씻은 뒤 새로운 눈이 생겨 제대로 보게 된 이 사건을
교부들은 우리 개인의 세례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영적인 눈으로 태어나는 것이 세례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눈을 주셨기 때문이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눈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보인다고 하는 이가 참으로 장님이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려고 하는 이만이 올바로 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그 눈이 그리스도의 것이었음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죽으셔야 한다는 말을 하셨을 때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분을 나무랍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넣어주신 영적인 눈은 다시 교만해지고 죄를 지으면 잃게 됩니다.
다시 세상의 영화가 최고라고 보게 되고 십자가가 저주받는 것이라 믿게 됩니다.
벳사이다에서 눈을 띄워주시고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죄를 지으면 그 눈을 다시 잃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눈을 잃지 않으려면
오늘 예화에서처럼 그 눈을 주신 분에게 돌려드려 영양분을 얻게 해야 합니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죽게 되면 나에게 넣어주신 눈도 죽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뜻이 아닌 내 뜻을 따르는 것이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또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그 눈을 다시 에너지를 얻기 위해 그 주인에게 돌려주는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여 우리는 매번 우리 힘으로 살려고 하다가 또 다시 장님이 되어버립니다.
다시 이 세상 삶에 집착하게 됩니다.
넓은 집을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해서 평생을 고생하지만
그것을 얻고 느끼는 행복이 한 달 이상 가지 않습니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행복임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단 한 명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합니다.
그 사람을 따라가기만 하면 장님일지라도 길을 잃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월호가 많은 사람을 태운 채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바로 사태를 파악하고 탈출을 지시만 했어도 모두가 살 수 있었음에도,
한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승객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 배의 선장을 기억합니다.
그 선장은 나와서 젖은 돈을 말리는데 바빴습니다.
소경을 우두머리로 삼고 그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안전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겐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닌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만약 해적 선장이 이끄는 배에 탄다면 그 선장이 이끄는 대로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배에서 아무리 착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배에 탔으면 해적입니다.
교회 또한 한 명의 선장을 두고 같은 배에 탄 공동운명체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며 거기에서 절대 장님이 될 수 없는
그래서 오류가 없는 선장을 지정해주지 않으셨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본성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제대로 알아볼 눈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저 예언자 중 한 명으로밖에는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자들보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에게는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있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만이 올바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올바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이 베드로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즉, “네가 나를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은 네가 그럴 수 있는 눈일 가져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 눈을 넣어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눈으로는 절대 하느님의 본성을 알아볼 수 없고
오직 주님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그분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베드로에게 그 볼 수 있는 눈을 주셨다는 것을 보시고는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교회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특별히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는 완성된 교회는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로의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명이라도 올바로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어떻게 하느님 나라로 교회를 이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이 세우신 교회 안에는 하느님께서 볼 수 있는 눈을 주셔서
올바로 볼 수 있는 한 명의 목자를 세우심으로써 길을 잃거나 분열되지 않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교회라는 배가 난파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지켜보는 선장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베드로가 죽는다고 교회 안에 더 이상 볼 수 있는 선장이 없게 된다면
예수님께서 올바로 교회를 세우셨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베드로가 죽어도 하느님께서 볼 수 있는 눈을 계속 넣어주시는 교회의 수장이 있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들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됩니다.
하느님은 믿을 교리와 같은 영적인 눈이 필요할 때에
하느님은 특별한 은총으로 교황의 결정에 오류가 없도록 섭리하십니다.
교황님을 우리의 선장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그분이 키를 돌리면 그 방향으로 같이 갈 수 있어야만
교회라는 한 배에 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은 교황님뿐입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수장이 누구인지를 구별하고
그 수장이 이끄는 대로만 쫓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동안 참 행복한 시간을 지냈었습니다.
우리 교회를 이끌도록 우리 목자, 우리 선장으로 뽑아주시고
올바로 볼 수 있는 눈을 넣어주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를 어루만지고 위로하시고 희망을 주시고 떠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그분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감동하였습니다.
그분이 비록 교리에 대해 말씀하실 때 오류가 없게 하실지라도
하느님께로부터 최고의 은총을 받고 있는 분이십니다.
해적선에 탔다면 누구나 해적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황님이 이끄시는 배에 탔다면 내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구원받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